[프랑켄슈타인/앙리] 하얀 세계
[프랑켄슈타인/앙리] 하얀 세계
W.B - 츠쿠리
새하얀 세계가 끝없이 이어진 공간에서 유일하게 색이 입혀진 청년은 홀로 고요히 부유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동 없이 누워있는 청년은 멀리서 보면 하얀 세계의 일부로 착각할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 아니 인류의 모든 문명이 소멸된 적막함 속에서 마침내 청년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러나 눈을 떴음에도 흐릿한 눈동자에 하얀 빛이 새겨지기까지는 그가 부유했던 시간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마침내 초점 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돋아나자 그제서야 청년은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던 청년은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이 전쟁터가 아닌 낯선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멍하니 중얼거리며 눈을 껌뻑이던 청년은 새하얀 공간을 오롯하게 눈에 담았다. 하늘도, 땅도 모두 새하얀 백색. 너무 하얀 나머지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자신이 땅을 제대로 딛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어서 방심했다가는 밑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런 미지의 공간에서 청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뭘 해야 하나.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청년은 정말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의 뜻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은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세상은 늘 청년의 편이 아니었고 배신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홀로 싸우는 것도 어느덧 지쳐버렸다. 청년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오겠지.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면서 청년은 타박타박, 길도 없는 공간을 걸었다.
한참동안 걷던 청년은 무언가 울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공기조차 없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적막함 속에서 누군가의 소리를 잘못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년은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울음소리를 향해 다가갔다. 서서히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저 멀리서 엉엉 울고있는 아이가 보였다.
얘야, 왜 우니.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간 청년이 물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서럽게 울던 아이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듯 잔뜩 움츠러들었다. 청년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아무런 뜻도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밝혔다. 그제야 아이가 안심한 듯 울먹거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서러움을 토해냈다.
길을 잃었어요.
이런, 그것 참 우연이구나. 나도 길을 잃었는데.
아저씨도, 길을 몰라요? 그럼 전 어떻게 하죠?
아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자 청년은 당황해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본디 그는 아이와 별로 친하지 않아서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청년은 아이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울지마렴.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어떤 이야기요?
한 소년의 이야기. 언제나 용감해지고 싶어 했지. 이야기 해줄까?
네!
아이는 어느덧 호기심이 동했는지 울음을 그치고 발갛게 물든 얼굴로 청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외로움이 한결 가셨기 때문일까. 청년은 빨간 토끼 눈을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이리와. 같이 앉자.
아이와 나란히 하얀 세계에 걸터 앉은 청년은 아이를 몇 번 토닥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천천히 이야기가 입에서 읊조려졌다.
한 소년이 있었네
그저 나약했던 소년
굳고 강함을 동경해
스스로 이겨내려 했지
하지만 세상은 소년을 배신했지
소년은 깨달았어
자신은 패자란걸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행복할까
소년은 고민했고
어느새 커버렸지
강해지고 싶었지만
무책임한 육신일 뿐
인간은 왜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걸까
청년의 이야기가 잠시 멈추자 새하얀 세상에 다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끝없이 펼쳐진 백색을 보며 이야기하던 터라 미처 아이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청년은 그제야 아이가 우는 것도 잊은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 열정적인 시선에 멋쩍어진 청년이 살풋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기가 재미없었니?
아뇨! 그런데 아저씨가 그 나약했던 소년이에요?
청년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청년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눈이 슬퍼보여서요….
그랬나? 그런데 말야, 이제는 괜찮아. 방금 기억이 났거든.
무엇이요?
청년은 대답대신 따스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야기 하느라 멈춰있던 손을 다시 아이의 머리에 올려놓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던 아이는 서서히 적응이 되었는지 청년의 손에 볼을 부비적거렸다. 청년은 쿡쿡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기억이 났어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자라서 청년이 된 소년은
한 명의 친구를 만났지
친구는 상처를 가졌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
계속 노력했지
자신의 꿈을 위해서
너무나 찬란해서
마치 신과 같았지
청년은 매료됬어
그저 상처 속에 살던
청년은 더 이상 없어
눈을 감고 청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여기 있어요? 그 친구 곁에 있어야죠.
하하, 그러게. 그런데 아저씨가 여기 없으면 그 친구가 여기 와야 했거든.
그래도…, 그 친구가 아저씨를 찾고 있지 않을까요?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아이의 모습에 청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주면 고맙겠지만 그러면 안 돼. 내 친구는 이제 다른 곳으로 나아가야 한단다. 그 친구는 내가 없어도 잘 해낼 거야.
그럼 아저씨는요?
나? 나는…, 그냥 여기에 계속 있는 거지. 길은 잃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여기서 친구가 꿈꾸는 걸 같이 느낄 수만 있다면 괜찮아, 난 행복해.
그렇게 청년과 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던 새하얀 공간에 갑자기 가느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간이 균열에 맞춰 서서히 떨기 시작했다. 몸을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란 청년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 또한 겁에 질렸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청년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균열은 점점 퍼져나가 하얀 세상을 뒤덮었다. 하얀 세상에 그어진 가느다란 금은 금방 땅으로 꺼져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줄곧 청년의 품에 파묻혀 떨던 아이가 갑자기 품에서 빠져나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저씨, 아저씨! 들려요?
뭐가?
저 틈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목소리? 청년은 어느새 품에서 벗어나 균열의 바로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순식간에 휙휙 변하는 게 과연 아이답다고 해야할까. 두려움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는지 아이가 균열의 바로 옆에서 귀를 대고 있었다. 피식 웃던 청년은 동화되어버린 건지 아이와 마찬가지로 균열의 틈새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말대로 틈에서 어떤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청년은 몸을 굳혔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신을 저주하고, 축복을 바라고, 누군가를 다시 살리길 원하는 간절한 남자의 목소리가 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으로 모자라 하얀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적막함과 고요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목소리에서 울려퍼지는 진동으로 마치 메아리처럼 공간을 뒤덮었다. 그리고 청년은 그 광경을 흐릿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청년을 옭아맸으나 이내 스스로 힘을 잃어 떨어져 나갔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얀 공간의 마지막 의지였다. 청년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신의 섭리대로 죽어 육신을 잃은 몸이었다.
그러나 밀려오는 그리움에 청년은 목에 막혀버려 나오지 못한 울음을 삼켰다. 차마 나오지 못한 희미한 신음소리가 입 안에서 퍼져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모든 슬픔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런 청년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아이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저씨, 저 목소리가 아저씨 친구 맞죠? 아저씨를 찾고 있는 거 같아요. 빨리 가세요!
…아저씨는 갈 수 없어.
왜요? 저기가 아저씨 길을 잃었다면서요. 저기가 아저씨의 길이에요!
아니, 저건 내 길이 아니란다.
청년은 무릎을 꿇고 아이를 마주보았다. 아이가 당황했는지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청년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애써 가라앉히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저건, 너의 길이야.
나의 길이요? 하지만 아저씨를 찾는 거 같은데! 가면 미움 받을 거에요.
그렇지만 아저씨는 갈 수가 없어. 아니 못 가. 그러니까 네가 대신 가주렴. 너도 길을 잃었다고 했지? 저 길이 너의 길이 되어줄 거란다.
날 미워하면 어쩌죠?
걱정이 잔뜩 담겨 찡그려진 미간을 청년은 손으로 눌러 꾹꾹 폈다. 그리고 아이의 이마를 쓸며 미소지었다.
너같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누가 미워하겠니. 가서 내 안부나 전해주렴. 내 걱정 말고 너의 인생을 살라고, 그렇게 말해줄 수 있겠니?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는 이윽고 결심했는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균열을 향해 다가갔다. 목소리는 이제 절규와 고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함소리에 아이가 다시 움츠러들자 청년은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이게 뭐에요?
이건 축복이란다. 내가 너의 행복을 바라고, 축복할거야. 부디 행복하기를.
아저씨, 혼자서 외롭지 않겠어요?
외롭겠지. 하지만 괜찮아.
같은 꿈을 꾸는 것만으로, 행복하니까요?
…그래.
나도 아저씨의 행복을 늘 빌게요. 그리고 아저씨의 친구에게 아저씨 안부 꼭 전해줄게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맹세하던 아이는 마지막으로 청년의 손을 꼭 잡고는 균열을 향해 뛰어갔다. 그렇게 뛰어가던 아이는 균열로 뛰어들기 직전,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이제까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큰 목소리로 물었다.
맞다,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
아이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부신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앙리 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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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작.
앙리의 사후세계를 모티브로 써봤습니다.
사실 저도 쓰면서 제가 뭘 쓰고 있는 거지, 싶긴 했는데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과연 아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앙리는 아이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지만 정작 빅터에게 앙리가 아닌 크리처는 ㅠㅠㅠㅠㅠ...(이하생략
앙리의 이야기는 크리처의 호수 씬에서 많이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