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연인/왕소해수/현대] IF
[달의연인/왕소해수/현대] IF
W.B 츠쿠리
01
애달프고 또 애달프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기억 속에 담긴 수년 간의 감정이 하진을 괴롭게 했다. 어찌 이걸 잊었나, 어떻게 당신을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나. 그리움, 괴로움, 자책감, 슬픔. 이 모든 감정이 뒤엉켜 제멋대로 날뛰었다. 하진은 차마 눈 앞에 놓여있는 광종의 어진을 오롯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이 어진에 담긴 의미를 읽지 못했으나 하진은, 아니 해수만큼은 그 의미를 읽었다. 남들 눈에는 한낱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녀만큼은 그림 속에 담겨진 광종이 아닌 소(昭)의 외로움을 읽었다.
당신을 혼자 둬서 미안해.
죽기 직전까지 그녀와 소의 사이에는 깊은 오해의 골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해수로서 기력을 다해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고 기다리던 소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해수는 소가 행복하길 바랐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버려지는 것은 두려웠지만 차라리 자신을 잊어서 소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러길 바랐다. 천 년의 시간이 흘렀더라도, 해수가 고하진으로 돌아왔더라도 소는 단 한 명뿐인 그녀의 진실된 정인이자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진의 눈 앞에 자리한 것은 황제로 남겨진 광종의 모습이었다. 그림 한 자락에 담긴 소의 외로움과 고독함은 하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아차려주지 않을 것이다. 투둑.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진은 밀려오는 죄책감에 오열했다.
그 외로운 궁에서 어찌 그리 사셨나요.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어찌 그리 미련하시고, 바보같으십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분이세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선연하다. 출궁하고 나서 해수는 항상 소를 그리며 살았다. 얼마나 되뇌이고 되뇌었으면 마치 눈 앞에 소가 있는 것처럼 환상을 보곤 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서면 키가 커서 늘 올려다 보곤 했어. 가만히 있다가도 손을 잡으려고 뻗으면 먼저 알아차리고 먼저 잡아주었지. 손은 커다랗고 검을 쓰는 사람답게 마디마다 뼈가 툭 튀어나오고 굳은 살이 박혀있었어….
그를 그리워했던 세월이 너무 컸던 탓일까. 하진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녀는 소의 모습을 눈 앞에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제 고하진은 평생 이 죄책감과 그리움을 안고 그를 그리며 살아가야할 것이다. 소와 나누었던 사랑은 깊고 깊어서 그녀에게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그 구멍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소밖에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도 끝없이 새어나오는 하진의 감정을 희석시키진 못했다.
"…저기, 괜찮아요?"
그 때 누군가 하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하진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걱정에 하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되찾은 기억과 감정에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울었던 탓인지 괜찮냐는 말을 들었음에도 쉽사리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하진의 몸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불쑥. 갑자기 낯선 손이 손수건을 들이밀었다. 하진이 반응을 하지 않고 울고 있음에도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진은 묵묵한 위로가 고마워서 조심스레 손수건을 들고 눈가를 닦았다. 손수건에 화장이 묻어나왔다. 엉망진창으로 울었으니 아마 화장도 엉망으로 망가졌을 것이다. 하진은 부끄러움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손수건에 대한 감사인사는 해야했다. 하진은 제발 자신의 몰골이 조금이나마 멀쩡하길 빌면서 고개를 들었다.
"…어?"
그러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감사 인사가 아닌 일말의 놀라움이었다. 눈 앞에는 어딘가 낯설면서도 낯익은 앳된 얼굴이 있었다. 그녀가 아는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순간 그녀는 눈 앞의 어린 청년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읽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듯 했다. 청년의 날카로운 눈매가 그녀를 탐색하듯이 집요하게 훑었다. 마주친 눈과 눈이 얽혀들어갔다. 하진은 그 눈에서 천 년 전의 시간을 보았다.
"……수야."
그의 입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진은 오롯한 소의 모습을 잡아냈다. 동시에 천년 전, 그리도 지독히 소를 사랑했던 그만의 수로 돌아갔다.
"여전히, 예쁘네."
해수였던 26살의 고하진이 왕소였던 19살의 이소운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02
늘 마음 속에 그리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억은 소운을 조롱하고 약올렸다. 흑단같은 검은 머리카락, 사르르 접히는 눈매, 붉고 고운 입술. 여인은 소운이 늘 그리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연기처럼 흐릿하게 소운의 주변을 맴돌았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소운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소운은 자신이 어떤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꿈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여인의 자취에 소운은 늘 애를 태웠다. 우습게도 어린 나이임에도 소운은 본능적으로 그 여인을 갈망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흔적을 쫓고 또 쫓았음에도 그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누구보다도 화가 나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소운은 그저 끝없이 샘솟는 그리움에 허덕일 뿐이었다. 여인에 대한 그 어떤 미움도, 원망도 들지 않았다. 결국 소운은 그저 그 여인이 나타나길 그래서 이 지독한 갈증을 해결해주길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주 어릴 적부터 기약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이소운이 왕소(王昭)로서 전생을 자각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지루한 역사 시간, 고려 왕조에 관한 수업을 듣던 중 소운은 가슴에 울렁이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미약한 두드림이었다. 그러나 이내 미약한 두드림은 폭포처럼 밀려 들어오는 기억과 감정의 촉매가 되었다. 순식간에 머리 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기억을 따라 곳곳에 숨어 있던 감정들도 튀어나와 소운을 괴롭혔다.
아픔, 슬픔, 고통, 외로움. 눈물로 가득찼던 어둑하고 질척한 기억 속 유년시절은 이내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한 여인을 향한 감정은 시시각각 새롭고 애틋한 것으로 채워졌다. 기쁨, 설렘, 애정 그리고…, 사랑. 잠시 천 년 전 광종이었던 왕소로 되돌아간 소운은 그제서야 비로소 여인의 선명한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아아, 해수(解樹)야! 나의 수야!
어찌 너를 잊었을까. 어찌 그토록 그리던 네 얼굴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을까. 전생을 자각한 순간, 시리도록 애달팠던 얼굴이 눈 앞을 뒤덮었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받아들인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지만 소운은 자각없이 그만의 여인을, 그만의 단 하나뿐이었던 황후를 그리워했다.
이소운이 왕소로 자각하던 바로 그 날, 지독한 열병이 소리소문 없이 소운을 덮쳤다. 그 열병의 정체를 하는 것은 오직 소운 뿐이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한 부모님을 보며 소운은 웃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에서 자각한, 그만의 정인을 향한 첫 열병이었다.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그 날 이후, 소운의 얼굴에는 희미한 흉터 자국이 생겼다. 이마와 눈, 콧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곳에 생긴 자국은 소운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소운은 손을 들어 자국을 매만졌다. 다행히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흔적이었지만 과거, 오랜 세월동안 흉터와 동고동락해온 소에게는 선명하리만치 잘 보였다. 그러나 이전처럼 흉터가 밉고, 원망스럽지 않았다. 흉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것은 다름 아닌 수였다. 무엇보다 밉고 원망스러웠던 흉터 덕분에 소는 수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수는 그에게 늑대개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가르쳐주었다. 소는 마치 아이가 어미를 따르듯 첫 정을 수에게 주었다. 그에게 수는 세상이자 세계였다.
너는 고려의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지몽이 그랬었지.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소는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죽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저 수가 어디 있는 끝까지 찾아가서 만나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소는 일생동안 그의 세상이었던 그녀를 찾아 헤맸다. 오직 수만이 알아주었던 왕소로서의 인생은 그녀가 사라지자 고독하고 외로운 폐허로 남았다. 그나마 소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긴 그와의 흔적, 설이 때문이었다. 이것을 수가 미리 알고 제게 안배를 한 것일까. 딸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제 아이에게서 수의 흔적을 읽을 때, 소는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이 또한 정인을 향한 근본적인 그리움을 해소시켜주진 못했다. 소는 평생을 그의 세상을 찾아 헤맸다. 헤매고 헤매다, 마침내 죽음의 문턱이 다가왔을 때에서야 소는 비로소 지몽의 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너와 나의 세계가 같지 않아서 널 찾지 못한 거라면…, 내가 널 찾아가겠다. 나의 수야.
소는 한 여인에 대한 마음을 가슴에 깊숙히 담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치 그 때의 다짐을 이루기 위한 것처럼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이소운으로 다시 태어났다.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소운은 오히려 이 흉터가 수를 잊지 않기 위한 증표 같아서 반갑기만 했다. 되찾은 기억과 더불어 남겨진 흉터 자국은 그가 가지고 있는 전생의 기억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너와 같은 세계에 당도했다.
소운은 해수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벅찼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 소운은 잃어버린 그의 세상을 찾아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짓이었지만 수의 세계에 당도했으니 틀림없이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란 이유 모를 강한 확신이 들었다.
수야, 나의 수야.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어느새 소운에게는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혹여나 그녀를 무심코 지나칠까봐 그래서 다시 찾은 그의 세상을 눈치채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던 탓이다.
그러나 이런 소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는 그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해수가 왕욱의 처, 해씨부인의 친척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운이 혹여나 전생의 인연이 닿을까 싶은 마음에 족보를 뒤지고 일가친척들의 사진을 집요하게 대조하다시피 했지만 수의 흔적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덧없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운이 열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날도 소운은 성의없이 신문을 휙휙 넘기고 있었다. 혹여 무슨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신문을 뒤적거리는 게 일상이 된 지 여러해 째. 평소 신문 한 자락 펼치지 않던 소운이었기에 처음에는 의아스럽게 여기던 부모님도 이제는 그냥 기특하게 여기시는 눈치였다. 그러고보니 이번 생에는 부모님 복은 있는 편이로군.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신문을 훑던 소운의 시선이 우연히 한 기사에서 멈췄다. 고려문화와 풍속에 대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개글이었다.
고려라, 소운은 무심코 천년 전 왕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려는 왕소에게 아픈 기억이었다.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행복해지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행복해지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는 수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애틋했다.
마침 집 근처이기도 하고, 한 번 가볼까.
혹시 네가 이 기사를 보고 나처럼 찾아올 지도 모른다. 소운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만남이 제게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너를 만났다.
소운은 학교가 끝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겨 전시관으로 향했다. 규모가 작은데다가 평일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운은 여러개로 나뉜 전시관을 이동하며 천천히 그림과 소개글을 훑어보았다. 고려는 남겨진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라 대부분 추측으로 끝나는 설명이 많았다. 이건 틀렸네, 저것도 틀렸어. 소운은 익숙한 풍속과 문화를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틀린 설명들을 속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심심함을 달랠 작은 놀이를 발견한 셈이었다.
그 때였다. 이전까지의 전시를 둘러보고 고려시대 풍속화첩이라고 쓰여있는 다른 곳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소운의 눈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여인은 제게도 슬픔이 전염될 정도로 구슬피 울고 있었다. 소운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여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여인이 있는 곳은 바로 광종의 어진 앞이었다.
"…저기, 괜찮아요?"
소운은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여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울컥, 목이 매어왔다.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소운은 저도 모르게 품을 뒤적여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울고있는 여인에게로 손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여인이 조심스레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훌쩍. 여인이 울음을 멈추기 위해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소운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슬픔을 가까스로 억누른듯한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
여인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단같은 검은 머리카락, 사르르 접히는 눈매, 붉고 고운 입술. 소운은 여인에게서 천 년 전의 시간을 읽었다. 그의 정인은, 그만의 해수는, 울면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이슬이 맺히고, 주위를 발갛게 물들이곤 했다.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 소운은 더욱 환하게 웃어보였다.
"……수야."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소운은 그녀에게서 오롯한 연인의 모습을 잡아냈다. 이 곳에 있는 사람은 천년 전, 그녀를 지독히 사랑했던 그녀만의 왕소였으며 소를 지독히 사랑했던 그만의 해수였다.
"여전히, 예쁘네."
왕소였던 19살의 이소운이 해수였던 26살의 고하진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03
딩동댕동.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소운은 가방을 챙겨들고 곧장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마 그를 방해하는 사람만 없었다면 한달음에 교문까지 도달했을 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방해꾼이 있었다. 빠른 속도로 교문을 향해 달려나가던 소운은 누군가 뒷목을 잡아채려는 기척을 느끼고 잽싸게 피했다.
"아오! 그걸 또 피하냐?"
손의 주인인 은현이 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은현은 소운의 6년지기 친구로 중학교 때 같은 반이 된 이후 인연을 맺었다. 집도 가깝고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입학한 터라 자주 붙어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은현이 달갑지 않았다. 소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평소같으면 교문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녀석 때문에 벌써 2분을 흘려보냈다. 소운이 인사만 건넨 채 떠나려고 하자 은현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은현을 보는 소운의 눈빛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야, 그래도 내 용건은 들어보고 가야되는 거 아니냐?"
"…용건이 뭔데."
"이따가 우리 학교 옆의 한성공고랑 축구 한 판 붙어서 아이스크림 내기 하기로 했거든. 너도 할 거지?"
"아니, 나 안 할 건데."
"하하, 그럴 줄 알았… 뭐? 안한다고? 아니 왜?"
은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운은 운동을 잘했다. 운동에 관련된 내기를 하면 소운이 있는 팀이 무조건 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검도를 배웠다고 했던가. 그러나 은현이 보기에 소운의 운동신경은 천부적이었다. 민첩하고 힘도 좋은 소운은 운동내기에 있어 빠지지 않는 존재였다.
"안돼! 너 없으면 우리 팀이 진단 말야! 한성공고 놈들이 저번에 지고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너도 알면서!"
"그러면 미리 말해줬어야지. 나 오늘 약속 있단 말야."
"미리 말할 틈을 줬어야지! 어제도, 그저께도 말할 틈도 없이 교문으로 홀랑 튀어버린 주제에!"
그러고보니 그랬었지. 은현의 삿대질에 소운은 멋쩍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수 아니, 하진을 재회한지 한달 째. 그 날 이후로 소운은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꼬박꼬박 하진의 회사로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조금이라도 하진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진이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내보이면 자제라도 할텐데 애틋하고 그리운 건 하진도 마찬가지였는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
"실은 나, 연… 아니 여자친구가 생겼어."
무심코 연인이라고 말할 뻔 하다가 고등학생이 사용하기에 너무 조숙한 단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황급히 여자친구로 고쳤다. 부모님에게도 아직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소운은 나름대로 소중한 친구라고 수줍은 고백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은현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헐."
도저히 못믿겠다는 은현의 반응에 소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반응이 그러냐."
"아니 넌 나랑 같이 모태솔로로 살 줄 알았는데 여자친구가 생겼다니까 그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야! 그걸 누가 믿어!"
은현이 어이 없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코웃음을 쳤다. 소운이 말한 좋아하는 사람에 얽힌 사연이란 다음과 같았다. 중학교 때, 소운은 같은 학교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또래 남학생에 비해 조숙하고, 문무를 겸비한 소운이 인기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주변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소운은 뭔가 무뚝뚝하면서 어른스러운 기색이 풍겨 쉽사리 다가가기가 어렵다는 평이었다. 때문에 소운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한 여자는 그 아이가 처음이었다.
'널 좋아해, 소운아.'
'…미안.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네 고백을 받아주기 어려울 것 같아.'
고백의 현장에는 본의아니게 은현도 있었다. 그러나 은현은 소운에게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소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더 놀라워했다. 평소 그런 말을 전혀 꺼내지 않았던 소운이었기에 의외였다. 그러나 그런 은현과 대조적으로, 고백한 여자아이의 낯빛은 창백하게 물들었다.
'내, 내가 널 더 좋아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날 좋아해주면 안될까?'
그러나 용기를 쥐어짜낸 또 한 번의 고백은 단호하게 틀어막혔다. 그리고 씩 웃으며 대답하는 소운의 말을 들은 은현의 말문도 틀어막혔다.
'미안. 천년 전부터 은애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건 힘들 것 같아.'
천년 전, 은애. 누가 봐도 쉽게 나올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막힘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소운의 말을 듣고 은현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것은 신종 고백 거절 방법인가 아니면 내 친구가 중2병인건가. 평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소운이기에 충격은 더 컸다. 남들이 다 겪는 중2병을 제 친구만큼은 겪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은현이었다. 그리고 고백한 여자아이 또한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던 건지 고백을 거절당한 충격 대신 경악에 서린 얼굴을 했다.
그렇게 소운의 봄날은 끝났다. 그리고 학교에는 소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과 더불어 소운이 알고보니 중2병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렇게 아주 오래 전, 은현은 모태솔로의 세계에 들어온 친구를 남몰래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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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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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왜 못 믿어?"
소운이 의아스럽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가끔 묘하게 초연한 소운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뭐, 여튼 난 오늘 축구 못 하니까 그렇게 아는 거다. 당분간은 학교 끝나고 아무 것도 안 할거니까 혹시 내가 필요한 약속 있으면 잡지 말고. 그럼 내일 보자!"
은현이 멍하니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 소운이 일방적인 통보를 날렸다. 그리고 은현이 붙잡을세라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평소의 소운답지 않게 다급해보여서 은현은 조금 우습다고 생각해버렸다. 여자친구 조금 기다리게 하면 누가 죽기라도 하나? 결혼하면 잡혀 살겠군, 잡혀 살겠어. 은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살짝 엿본 친구의 새로운 일면이 흥미진진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은현은 가끔 소운에게서 이유 모를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묘하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랄까. 소운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친구는 어쩐지 좀 더 인간다워보였다.
"아차, 여자친구가 그 때 천 년 전부터 기다리던 사람이냐고 물어볼 걸."
은현은 제 짧은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나지막히 탄식했다. 그러나 이내 작은 호기심을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기로 하며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어느새 소운이 없는 축구 내기를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04
"미안해요! 일이 늦게 끝나서… 많이 기다렸어요?"
"괜찮아. 나도 금방 도착했으니까."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하진을 보며 소운은 엷게 미소지었다. 해수 아니, 하진과 재회하고 한 달이 흘렀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불안해서, 조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서, 각자의 일과가 끝나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기다려주곤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소운은 하진의 손을 잡고 인근의 카페로 들어갔다. 슬슬 초가을의 날씨로 접어들면서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전생의 해수는 당찼지만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 때의 기억 탓인지 소운은 하진의 건강에 유독 예민했다.
메뉴를 주문하고 카페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일상의 흘러가는 사건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현재이기도 했고 때로는 과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운과 하진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굴레에 사로잡혀 서로를 오해하고 원망했던 것은 전생만으로 충분했다. 재회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후 가장 먼저 정리한 것도 바로 전생의 이야기였다.
하진은 자신이 물에 빠져 해수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고백했다. 왕소를 만났을 때는 해수의 몸에 들어간 직후였고 역사를 잘 알지 못해 단편적인 단서만 가지고 그를 곡해하고 오해했노라고 사과를 건넸다. 욱에게 연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진정으로 제게 사랑을 주었던 왕소를 죽기 직전까지 진심으로 은애했노라고, 당신을 기다렸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소운 또한 사과를 건넸다. 수의 필체가 자신과 같았기에 이를 염려한 정이 봉투를 바꿔치기 했고 이를 오해한 자신이 서신을 읽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뒤늦게 수의 임종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를 잠시나마 원망했으나 단 한순간도 버린 적이 없었으며 평생동안 그녀를 은애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해수가 죽고 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지몽의 이야기, 정의 이야기, 욱의 이야기, 원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단 하나뿐인 딸인 설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었다.
하진은 궁 밖에서 행복하게 자랐다는 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울고 웃었다. 소와 해수의 단 하나뿐인 결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아이에 대한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소에게 잔인한 짓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출궁했고, 정과 혼인했다. 죽기 직전까지 줄곧 눈에 밟히던 아이였다. 황제의 핏줄로서 어미 없이 궁 밖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행여 저처럼 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늘 걱정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는 하진을 토닥이며 소운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과거의 오해로 상처주고, 상처받지 말자. 너와 나는 그 때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했어. 그것만 기억하자. 우리는 이제야 다른 세계, 다른 시간에서 만났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말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 네가 바라던 세계에서 드디어 우리 둘이 만난 거야.'
과거에 대한 오해도, 미련도 모두 떨쳐냈다. 과거 또한 그들의 삶이었지만 소운은 앞으로 사랑하게 될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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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생의 대한 모든 이야기를 훌훌 털어낸 후에서야 하진과 소운은 평범하게, 그야말로 연인들처럼 마음껏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었다.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그저 서로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소운은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였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었다. 코코아에 둥둥 떠 있는 마시멜로처럼 소운의 기분 또한 하늘 위를 둥둥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평소 학교 끝나고 바로 오면 시간이 남아서 늘 기다리시곤 했는데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아아, 친구가 잠시 붙잡아서."
"네? 소운님에게 친구도 있었어요?"
눈을 떙그랗게 뜬 하진의 모습에 소운은 투덜거렸다.
"내가 뭐 친구도 없는 사람인줄 아냐."
"친구 없는 거 맞지 않아요? 예전에도 백아님이랑 은 황자님을 빼면 놀아주는 사람도 없었으면서."
"대신 네가 나랑 놀아줬으니까 됐지, 뭘. 그리고 그게 언제적 이야기야. 지금은 친구들도 있고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소운의 투정의 하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것 봐라? 전혀 믿지 않는다는 하진의 표정에 심술이 난 소운이 트집을 잡았다.
"그러고보니 왜 나를 소운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존대도 하지 마. 나이도 나보다 많으면서."
"그렇지만 익숙해져서 저도 모르게 입에 붙어버렸는 걸요? 그리고 옛날에는 이름보다 황자님이라던가, 폐하라던가 호칭을 많이 불러서 이름 부르는 게 익숙하지가 않다구요."
"그래도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런 걸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 왔는데 그렇게 부르면 여기 온 의미가 없잖아."
"헤에, 그러면 소운님 아니, 소운이도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야겠네? 존댓말도 쓰고?"
"…뭐?"
아차, 제 무덤을 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진이 짓궂게 웃으며 누나라고 부를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어허!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건방지구나, 소운아. 어서 제대로 누나라고 불러야지?"
"…너 자꾸 그럴래?"
"어머, 지금 너라고 한거야? 세상에 눈빛도 삐딱한 게 어쩜 내가 아는 사람을 똑 닮았네."
소운은 얼굴을 구겼다. 하진과 재회하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 나이 차이였다. 그래 뭐 나이 차이 정도야 예전에도 그랬으니 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건 왜 하진이 자신보다 연상이며 자신은 왜 미성년자냐는 점이었다.
"너 자꾸 그러면 키스한다?"
"와, 이제는 허락도 안 맡고 하시려구요? 그리고 제가 성인될 때까지는 일체의 스킨쉽 모두 금지라고 말씀 드렸을텐데요? 누누이 말하지만 전 법을 지키면서 살고 싶거든요. 교복 입은 미성년자랑 스킨십 하다가 은팔찌 차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구요."
"할 거 다 한 사이에 이제와서 뭔 법이야 법은!"
"아 그러니까 누가 늦게 태어나라고 그랬냐구요! 나도 안타까워 죽겠는데!"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하진에게 카페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하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칫하다간 정말 아청법에 걸려 잡혀가게 생겼다. 한편 하진에게서 원망이 절절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소운은 뒤늦게나마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는 것은 언제나 소운 쪽이었다.
"여튼, 수능이나 치고 오세요. 우리 소운 어린이."
울컥. 소운은 빨리 새해가 되서 이 치욕을 갚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인만 되면 껴안고 절대 안 놔줄테다! 음흉한 복수를 계획하면서 소운은 말없이 코코아를 들이켰다 그토록 달콤했던 코코아에서도 어쩐지 쌉싸름하게 서러운 맛이 났다.
04
"혼인하고 싶다."
늦게까지 공부하던 새벽녘, 잠시 쉬려고 하진에게서 온 카톡을 보고 있던 소운이 저도 모르게 본심을 밖으로 꺼냈다. 최근 그는 하진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만 뜨면 하진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고, 그녀가 제 옆에서 자는 환상을 보고, 아침을 같이 먹는 꿈을 꾼다. 예전에는 그나마 같은 궁에 있었기에 얼굴을 훔쳐볼 수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저녁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그녀와 카톡하고, 전화하는 것 외에는 마땅히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다.
거기다 뒤늦게서야 소운이 수능을 봐야 할 수험생이라는 것을 인지한 하진이 수능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얼굴 보는 걸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통보한 덕분에 그는 꼼짝없이 하진 결핍증에 시달려야 했다.
진작 혼인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소운이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전생에서 소와 해수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신분과 풍습, 정치적 입장 차로 끝내 법적인 혼인 절차를 밟지 못했다. 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소와 해수의 관계를 알면 무얼 한단 말인가. 아무런 첩지도 없이 왕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삶인지 소는 알고 있었다. 살얼음판 같은 황궁에서 조금만 빗겨나도 해수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해수를 지켜주지 못해 정에게 떠나보내고, 자신의 딸인 설이조차 곁에 둘 수 없었다. 해수와 혼인하지 못한 것은 졸곧 소에게, 소운에게 가슴의 한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그런데 기껏 아무런 눈치도 안보고 혼인할 수 있다 싶었더니 이제는 나이가 걸림돌이군…."
소운은 머리를 쥐어싸맸다. 혼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지. 이런 걸 보면 또 고려시대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제 몫을 할 수 있게 되면 성인으로 쳐주었고 남자의 경우 15세부터 혼인을 약조하거나 혼례식을 올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만약 지금 혼인하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선언한다면 아무리 어화둥둥 길러주신 부모님이라도 잔소리 몇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후에 바로 혼인을 할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몇 개월 후, 소운이 성인이 된다고 해도 고작 대학생이다. 하진과 함께 살려면 집도 필요하고 가구도 필요하고 그 외 다달이 생활비도 필요하다. 하진 혼자 번다고 해서 감당이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역시 황자 신분이 좋긴 좋았구나."
황자인 시절에는 애정에 굶주렸지만 돈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수에게 장신구를 선물하고, 머물 곳을 마련해주는 것쯤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보다 얻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이번 생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소운은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하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소운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이후로는 나이 답지 않게 노련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어 어떤 직업을 가지던 원만하게 적응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소운은 그다지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하진을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다. 저 때문에 이미 온갖 모진 고초는 다 겪은 사람이었기에 이번 삶에서는 행복한 기억만 남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운은 광종으로 살아보면서 가장 높은 자리야말로 추하고 더러운 음모의 온상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대건 높은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때문에 소운은 그저 평범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신분, 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아침을 먹고, 휴일에는 마음껏 소풍도 가고. 평범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으로 향하는 첫 걸음일 것이다. 소운은 하진과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하진을 닮은 어여쁜 딸아이와 저를 닮은 씩씩한 남자아이를 자식으로 두고 평범한 가족처럼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미성년자부터 탈출해야겠지만."
소운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펜과 공책을 들었다. 이제는 다시 모범적인 청소년으로 돌아가 맡은 바 공부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And, Happy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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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길고긴 소해의 여정이 끝났네요.
개인적으로 달연 드라마 엔딩도 마음에 들지만 역시 뒤덮는 짠내를 없애기 위해서는 달달한 현대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해수+멍뭉미왕소의 조합을 보고 엇 현대에서 연상연하 커플도 괜찮겠는데?! 싶어서 지른 게 바로 이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노답
사실 소의 현대 이름을 짓는 게 많이 힘들었어요. 뭔가 소 자를 넣고 싶은데 의외로 소가 들어가는 이름 중에서 괜찮은 남자 이름을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이소운이라는...고려시대의 황자였으니까 현대에는 조선시대 왕조의 성인 오얏 리를 선사해주었습니다.
사실 이 뒤에도 결혼하는 소해라던가 군대가는 소를 열심히 챙기는 하진 이야기도 있는데 쓰자니 이미 제 머리속에서는 혼인까지 한 아이들이라서 살짝쿵 빼버렸습니다. 현대에서 알아서 쿵짝쿵짝 잘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호 소해 호닌해!!!!!!!(아무말
그리고 사교성없는 소운의 첫 친구 은현이는 10째 은황자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ㅠ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황자가 은이였는데 나름 친구로 만나면 분위기 메이커에 유쾌한 아이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싶어요 ㅠㅠ
아마 이 글을 끝으로 사랑했던 소해는 제 마음 속에 깊이 넣어두지 않을까 싶습니다. 규태가 현대짤을 풀어주지 않는 이상말이죠 ㅋㅋㅋㅋㅋㅋ 이만 후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망상의 집합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해 호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