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유비른] 나비효과
*50화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설정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조유비+제갈유비+유비른
[레히삼/유비른] 나비효과
W.B - 츠쿠리
시작은 그저 아이의 천진난만한 한마디였다.
"나 유비 아저…, 아니아니 유비 사범님이랑 결혼할래!"
그러나 누구에게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장난으로 들릴지언정 조조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무술을 배우고 싶어하던 초선이 도원관이라는 무술 도장에 다닌지 두 달. 그 두 달 사이에 늘 '조조 아저씨가 최고!'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초선에게 변화가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초선아, 분명 저번에 같이 인형사러 갔을 때는 조조 아저씨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조조는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날 결혼식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이성적으로는 그저 어린아이가 말하는 한 때의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조는 심적인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왜…? 왜 유비 사범님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조조는 초선이 무서워할까봐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위로 추켜세우며 물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초선이가 말한 도원관 '유비 사범님'은 조조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초선이를 도원관에 등록하기 위해 갔을 때 첫 날부터 아는 체를 하며 밥을 대접한 이상한 남자. 그 후로 초선이를 바래다주고, 마중갈 때마다 항상 초선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
"음, 일단 유비 사범님은 착해!"
초선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뒤로 유비에 대한 칭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유비 사범님은 잘생겼어! 유비 사범님은 요리도 잘 해! 유비 사범님은 인기도 많아! 유비 사범님은 상냥해!…, 그 뒤로도 계속된 칭찬은 조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조용히 분노를 표출할 때쯤에야 끝이 났다. 조조가 재차 물었다.
"초선아, 유비 사범님이 그렇게 좋아?"
"응! 초선이는 유비 사범님이 정말 좋아!"
퍽. 초선이 쏜 화살이 정확히 과녁에 날아가 꽂혔다. 다만 그 과녁의 주인이 조조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지막 확인 사살까지 마친 조조의 안광이 초선 몰래 시퍼렇게 빛났다. 좋다! 얼마나 좋은 녀석인지 어디 관찰해주겠어. 왕윤 선배의 딸을 되먹지 않은 사범이 가르치게 둘 수는 없으니. 현직 경찰로서 조조가 갖는 범인에 대한 집착과 관찰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조조는 그 날, 다시 되찾은 그의 경찰 뱃지를 걸고 도원관의 숟가락 갯수마저 알아내겠노라고 굳은 다짐을 했다.
물론 현직 경찰인 조조는 수사과정에 개입된 사심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쿨한 남자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조조는 자신의 결심을 몹시 착잡한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초선의 '유비 사범님과 결혼할래!' 라는 약속은 이미 한 달 전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또래 남자아이로 대상이 옮겨간지 오래였다.-물론 조조는 초선을 마중나갈 때 마다 그 남자아이를 예의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조조는 유비를 관찰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도원관 숟가락 갯수가 몇 개인지 정도는 진작에 파악이 끝났는데도 그랬다. 왜? 왜 멈출 수 없을까? 질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지만 조조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유비는 조조에게 있어 껄끄러운 상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분명 처음 보는 건데 유비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을 본 것마냥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놓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유비를 볼 때마다 조조는 정체불명의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때로는 죄책감이기도 했고, 미안함이기도 했고, 고마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조조는 화들짝 놀라 옆에 딱 달라붙어 조잘거리는 유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몸을 멀찍히 떨어뜨리고 나면, 유비는 금방 그의 눈동자에 울망울망한 서운함을 그득 담곤 했기에 조조는 다시 쭈뼛거리며 유비의 옆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유비의 울망거리는 눈동자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확실히 사범님과는 친해지는 것보다 멀어지는 것이 더 어렵군.'
정확히 말하자면 유비는 마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사실 처음 유비를 만난 두 달 동안은 정체불명의 껄끄러움 때문에 초선이의 등하교를 제외하고는 말을 나누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초선의 선언 아닌 선언을 듣고 난 뒤로는 껄끄러움의 정체도 알아낼 겸,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도 나눠볼 겸 해서 굳이 다가오는 것을 쳐내지 않았다. 그랬더니 글쎄 이 꼴이 났다. 조조는 제 한심스러움에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글쎄 우리 형님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요!' 문득 도원관에서 유비의 일을 도와 사범을 하는 장비라는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초선이를 데리고 두 번째 도원관을 방문했을 때 소개 받은 사범이었다. 아무리봐도 액면가로 따지면 장비가 형인데 그는 제법 변죽 좋게 껄껄 웃으며 유비를 형님, 형님 하고 잘도 불러댔다.
여튼 장비의 말대로 유비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올곧았고, 상냥했으며 정의로웠다. 일 년 전의 조조였다면 색안경을 끼고 그의 지나친 상냥함을 죄치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유비의 상냥함은 그저 곧게 응시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래, 마치 과거의 왕윤 선배가 보였던 강함 속에 담긴 상냥함처럼.
'그리고 그만하면 얼굴도 괜찮지.'
조조의 생각은 어느덧 유비의 구석구석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비는 사범이라는 지위치고 얼굴은 꽤나 앳되었다. 나이가 갓 스물을 넘었으니 그럴만도 했지만 그런 것 치고도 꽤나 어려보이는 얼굴이었다. 몸은 꽤나 다부진 편에 속했지만 늘 도복에 단정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유비를 보면 가장 먼저 눈을 보게 된다. 맑고 순수하고 어떤 악도 담겨져 있지 않은 진심어린 눈. 때문에 조조는 어느 순간부터 초선을 유비에게 믿고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저번에도 갑자기 출동해서 연락도 못하고 늦게 도착했는데 아무런 불평 없이 초선이에게 저녁도 먹이고 내가 올 때까지 맡아서 놀아주었고.'
아무리 초선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고용했다지만 늘 초선을 집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초선이 도원관에 다니고부터는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마치 가족처럼, 친구처럼 대해주는 도원관 식구들 덕분에 초선이도 도원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며 밝게 웃는 횟수가 많아졌고, 조조 역시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다. 요새는 정신차려보면 도원관 식탁에 앉아서 수저를 놓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니 눈을 뗄 수가 없는 건가."
…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조조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가 유비에게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비단 껄끄러움이라고 칭하기에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마음에, 걸렸는데…?
"누구십니까?"
그러던 조조의 생각이 갑자기 뚝 끊겼다. 웬 방해꾼이지. 조조는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본능적으로 몰려오는 불쾌함에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어쩐지 처음 보는데도 낯이 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옷에 녹색 장식이 달려있는 특이한 옷. 그러나 곱상하게 생겨서 그런지 옷보다는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여유롭게 웃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니꼬웠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인상이 유독, 어쩐지…,
'재수없군.'
재수가 없었다.
◈ ◈ ◈
제갈량은 요새 하루에 한 번은 꼭 뒷목을 부여잡았다. 드림배틀이 끝나면 주군 때문에 뒷목 부여잡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차라리 옛날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 때는 적어도 주군이 눈 앞에서 사고를 쳤으니까!
제갈량은 당기는 뒷목을 애써 무시하며 새하얀 손을 뻗어 오늘 주군이 빈 소원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곧 눈 앞에 밝게 웃으며 소원을 비는 주군, 유비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 소원은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오늘은 밝고 씩씩한 목소리네요, 주군.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제갈량은 잡히지 않는 유비의 뺨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이건 언제라도 변함이 없는 유비의 소원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유비는 늘 한결같이 모두의 행복을 소원으로 빌었다.
정말 바보같고, 미련한 사람이라니까. 하지만 그래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제갈량은 그저 묵묵히 유비의 소원을 지켜보았다.
[음, 오늘은 미축이 처음으로 발차기에 성공했어. 미축이 안 그런 척해도 엄청 기뻐하더라고. 내일도 미축이 발차기에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손찬은 적벽대학에 잘 다니고 있어. 무술경영하는데 소질이 있는지 즐겁게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 공손찬이 늘 그렇게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 또…,]
모두를 행복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고 나면 유비는 꼬박꼬박 편지를 쓰듯이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제갈량에게 알리고 그들의 행복을 빌곤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유비의 목소리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제갈량에게 수면의 유혹을 선사할 정도로 달콤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갈량은 잠깐 잊고 있었다.
[손책은 요새 건강하게 잘 지내는 모양이야. 다시 쓰러질까봐 걱정했는데 건강이 완전 회복됐대! 권이랑 자주 와서 나랑 무술연습도 하고 있어. 가끔 상향이도 오는데 기억을 다 잃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어색했거든. 그치만 금방 옛날처럼 친해졌어!]
잘됐지? 헤헤! 하고 웃는 유비를 보며 제갈량은 다시금 뒷목이 당겼다. 수면의 유혹이고 뭐고 달아난지 오래였다. 신선에게, 그리고 신선을 뛰어넘어 옥쇄의 관리자가 된 제갈량에게 혈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지금쯤 고혈압으로 쓰려졌을 것이다. 다들 드림배틀이 끝나면 안 만나려고 안달인데 왜 주군은 만나려고 안달이십니까! 제발 좀 생산적인 사람을 만나세요!
그러나 그런 제갈량의 절규가 무색하게 유비의 소원은 끝이 없었다.
[아, 그리고 오늘 조조랑 초선이랑 같이 밥을 먹었어! 처음에는 날 피하는 것 같았는데 요새는 친해져서 기뻐! 앞으로도 밥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요새는 조조가 행복해보여서 다행이야! 늘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조조는 소원 같은 거 안 빌 거 같으니까 내가 대신 빌어줘야지!]
조조는 그나마 생산적인 사람이라고 할 만 했으나 제갈량의 속은 오히려 더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바보 같은 주군 같으니! 조조의 행복을 빌긴 왜 빈답니까! 그렇게 당해놓고도 앙금 같은 건 죄다 잊어버렸는지 속 좋게 웃는 유비의 모습에 제갈량은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차라리 손책과 어울리는 것이 백배는 나았다.
현재 옥쇄는 사람들의 작은 꿈들을 모아 지탱하고 있기에 바라는 꿈이 많을수록 옥쇄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비가 바라는 수많은 꿈들은 옥쇄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유비의 꿈과 제갈량의 능력이 합쳐져 이미 개량된 옥쇄를 안정화시키고도 꿈 에너지가 남아돌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꿈 에너지나 제갈량의 능력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이제 슬슬 정신력이 닳는 것을 느꼈다. 인간계에 있을 때 유비의 친화력이 과하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그 때는 제갈량이 늘 유비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현재 유비가 곁에 없는 지금, 그가 어떻게 지내고, 무엇을 먹고,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나하나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제갈량, 잘 지내고 있지? 그곳에서 행복한거지? 제갈량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제갈량이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유비의 마지막은 늘 제갈량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묘한 만족감을 느끼던 제갈량이 손을 뻗어 화면 속 유비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마치 제갈량이 만지는 것을 알고 있는 것 마냥, 유비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보고 싶어, 제갈량.]
"……."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제갈량은 화면 속 주군의 뺨을 어루만졌다. 씩씩하게 울음을 참고 있지만 어쩐지 제갈량은 이미 눈물 흘리는 유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주군이 이정도면 많이 참으신 것이 맞지요. 제갈량은 쓰게 웃으며 옥쇄의 개량판 설계도를 꺼내들었다.
제갈량은 그가 옥쇄의 관리자가 된 날부터, 옥쇄의 새로운 개량판을 고안하고 있었다.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제갈량은 주군과 떨어져서 잠자코 옥쇄만 관리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옥쇄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천재인 제갈량에게 몹시 쉬운 일이었다. 거기다 시험기간을 거쳐 옥쇄가 이미 몹시 안정적인 상태라는 것도 증명이 끝났다.
새로운 개량판은 바로 옥쇄의 관리자가 옥쇄 곁에 없거나, 옥쇄가 굳이 선계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애초에 관리자가 항상 옥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 커다란 옥쇄 안에서 멍청하게 관리만 하고 있을 거라면 대체 관리자의 의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세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한들,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제갈량은 이미 그러한 선례를 드림배틀을 통해 경험했다. 마더컴퓨터가 조금만 더 자율적이었다면 장각과 사마의의 타락을 눈치챌 수 있었을 터다.
제갈량은 좀 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옥쇄의 시스템을 원했다. 혹시나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바꾼 후, 관리자가 타락해 옥쇄 시스템을 악용할 경우를 대비하여 금제를 걸어놓는 것은 물론이고, 관리자가 옥쇄 곁에 있지 않더라도 타인이 옥쇄를 악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비 시스템도 철저히 구상했다. 사실 이번 개량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옥쇄의 간소화였다. 애초에 그 무식하게 큰 크기라니. 인간들은 벌써 손 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던데. 제갈량을 혀를 차며 빨간 선을 죽죽 그었다. 제갈량은 자신이 몇 천개의 선례를 깨부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무심히 옥쇄 개량에 몰두했다.
물론 제갈량은 사실 이 모든 옥쇄 개량의 중심에는 주군의 곁에서 날파리들을 쫓아버리겠다는 신선의 사심이 담겨 있다는 것쯤은 가뿐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의 꿈을 보며 홧병 나기 직전, 마침내 옥쇄 개량에 성공했다.
◈ ◈ ◈
모든 날들이 좋았다.
유비는 방금 전 모두와 도원관에 둘러앉아 함께 본 영화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햇살은 따뜻하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살랑살랑 들어온 바람을 만끽하며 오호대장군과 제갈량, 공손찬, 미축과 함께 대여점에서 빌려온 영화를 보았다. 마트에서 사온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먹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만끽했더랬다.
유비는 빨래를 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갈량이 도원관으로 돌아온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날들이 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사실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유비가 빨래를 널다말고 뒤를 힐끔 보았다. 제갈량이 소파에 앉아 스마트 패드를 두드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갈량의 주위로 도원관 도복을 입은 오호대장군들이 둘러 앉아 뭔가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어쩐지 드림배틀을 했을 때와 겹쳐보였다.
일주일 전, 오호대장군과 같이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도원관 대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새하얀 옷과 초록색 장식이 어쩐지 익숙했다. 사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성심성의껏 소원을 빌긴 했지만 제갈량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그저 그렇게 이별을 받아들여야하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유비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사를 함께한 가족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든 것이 제갈량이었다.
제갈량! 제갈량 맞지? 유비는 장바구니마저 잊고 얼른 달려가 제갈량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엉엉 울어버렸다. 울보이건 여전하시네요, 주군. 부드러운 목소리는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이 담겨져 있었다. 어느새 저만치 있던 오호대장군들도 달려와 얼싸안고 재회를 만끽했다. 어쩐지 떨어지는 눈물 사이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조조의 얼굴이 보인 것 같았지만 유비는 어디론가 가버릴까봐 허둥지둥 제갈량을 도원관 안으로 이끌기에 바빴다.
그리고 도원관에서 제갈량에게 옥쇄의 개량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옥쇄를 개량하여 간소화시켰기에 굳이 선계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서든지 옥쇄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요점이었다. 그럼 이제 예전처럼 도원관에서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거야? 제갈량 대단해! 유비의 말에 제갈량은 여유롭게 부채를 부치며 답했다. 당연하죠. 저는 선계 최고이자 천재였던 신선이니까요. 이 정도는 거뜬하죠. 제갈량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제갈량은 도원관에 머물게 되었다. 공손찬에게는 공손찬이 잠깐 떠나있는 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고, 가족같이 지낸 사람이라고 설명해두었다. 이미 오호대장군도 그렇게 설명하며 도원관의 식구로 맞이했던 터라 공손찬은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식구가 이렇게 늘었냐며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제갈량이 도원관 운영 비전을 제시하며 운영 코칭을 시작하자 금세 화가 사그라들어 유비에게 이제까지 최고로 쓸모있는 일을 했다며 추켜세웠다.
뭐야, 그럼 이제까지 내가 쓸모 없었단 말야? 유비가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차피 공손찬과 제갈량을 이길 리 만무했으므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빠르게 체념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공손찬이 아니었다.
"유비. 잠깐 할 말이 있는데."
그래, 정말 문제는 공손찬이 아니었다. 어느새 불쑥 나타난 조조가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제갈량을 흘끗거리는 조조의 표정이 초조해보였다. 시간이 되자 초선을 마중나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유비가 빨래를 널던 손을 멈추고 막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주군. 잠깐 저 좀 보시죠."
"어?"
"긴히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 물론 저희 둘만요."
유난히 둘을 강조하는 건 착각일까. 유비는 갈등에 휩싸였다. 공손찬도 괜찮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괜찮은데 왜 이 둘은 이렇게 사이가 나쁜 거야! 유비가 내적인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이 조조와 제갈량은 물 밑에서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꼬리를 내릴텐데 하필 상대는 신선이라는 자각이 있었을 때조차 제멋대로 일을 추진시키던 조조였다.
홱! 서로 눈싸움을 계속하던 조조와 제갈량이 유비를 돌아보았다. 네가 눈치껏 선택하라는 무언의 신호가 유비를 덮쳤다. 어,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비! 밖에 너 손님이라고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살았다! 유비는 공손찬의 부름에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얼른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런 유비의 모습을 본 제갈량과 조조의 눈빛은 한층 더 흉흉해졌다. 조조가 가뜩이나 무뚝뚝한 표정을 한껏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제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요."
"아, 그랬습니까? 순서를 따지기에는 너무 급한 일이라서요. 가족의 일을 외부인에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입으로 내뱉는 건 똥이라는 장비의 평가답게 제갈량은 눈빛과 표정만으로 '가족도 아니면서 얼쩡거리지말고 얼른 꺼져라' 라는 뜻을 200% 전달시켰다. 우르릉 쾅쾅. 맑은 하늘에 번개가 내리치고 돌풍이 불었다. 오호라, 통재라. 불과 기름이 만났으니 서로 섞일 리가 만무하겠구나. 말없이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황충이 혀를 끌끌 차며 안전한 도주를 택했다.
그 때였다. 열린 창문 틈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유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유장 형 맞지? 우와, 드디어 왔구나! 나 형 엄청 기다렸잖아!"
"하하, 너가 보고 싶어서 왔어. 여기 근처에 정착하려고. 그동안 잘 지냈지?"
조조와 제갈량은 신경전을 멈추고 매서운 눈초리로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거센 폭풍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있었다.
그야말로 파란(波瀾)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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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유비+이대로 제갈량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심을 담아서.
이제 제갈량+조조+동생을 지키려는 유장의 사투가 벌어집니다.
이 세상은 정그리야! 먹고 먹히는 정그을!(핏, 유장
+) 조조는 도원관 식탁에 수저를 놓으면서 숟가락 갯수를 파악했습니다.
+) 초선이는 이제 유비 사범님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오호대장군은 도원관 사범 일을 하면서 각자 무엇이 하고 싶은지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