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 In the after 2
-본편 완결 이후의 이야기
-상상과 날조주의
[우삼총] In the after 2
W.B - 츠쿠리
“죽여버리겠다, ‘검성’!!!!”
아카이누가 보기 드물게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가볍게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 공격을 유려하게 피했다. 근접전으로는 검사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어둠어둠 열매를 인식한 것일까. 아카이누는 가까이 다가오는 대신 마그마에 패기를 입혀 연사했다. 하여간 성가셔. 에이미는 혀를 찼다.
전투에서 가장 큰 패착의 요인 중 하나는 이성을 잃는 것이다. 때문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이성을 잃는다고 한들 뇌리의 한구석은 늘 차갑고 서늘한 온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카이누나 에이미는 본능적인 전투센스만큼은 타고난 셈이었다. 이성을 잃어도 허투루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해야 적을 더 빨리 쓰러트릴 수 있을지를 순식간에 계산해 실행하니까.
이것이 그들만의 이성을 잃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도발한 목적은 달성했네.’
에이미는 히죽 웃었다. 벚꽃공주의 발언으로 아카이누를 비롯해 해군병력의 관심이 에이미에게 집중되었다. 끓어오르는 적의가 온 몸을 떨리게 했다. 증오의 시선을 받는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벚꽃공주를 위했는지 알려주는 증거이기에 기쁘기도 했다. 그 증거로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에이스만 집요하게 노리던 아카이누가 저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보이는 상냥한 성격이니 해군에서 꽤나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하긴 화도 스르륵 녹는 미모긴 했지. 에이미는 행여 자신의 생존이 알려질세라 옷을 뒤집어쓰고 얌전히 사탕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는 친구를 생각하며 웃었다.
“이런, 부하를 꽤나 아꼈나보네. ‘벚꽃공주’가 알면 참 좋아하겠어. 아, 죽었으니 모르려나? 그럼 이명도 바꿔야 하는 거 아냐? ‘벚꽃귀신’이라던가. 죽은 사람한테 ‘공주’라는 이명은 사치잖아?”
게다가 걔는 공주보다는 귀신을 더 좋아할 거 같은데. 에이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對) 아카이누 용 도발스킬을 사용했다. 에이스가 무사히 전열을 정비하려면 시선을 더욱 더 잡아둬야 했다. 과연 도발은 성공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감히 보이 소장님을 농락하다니!!”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마라, ‘검성’!”
에이미는 열매의 능력을 사용해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을 거침없이 내팽개쳤다. 다른 한손으로는 패기를 두른 히호시로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아카이누를 상대했다.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가 안구를 쑤시는 느낌이었다.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먹어두었던 진통제는 눈의 고통만큼은 가져가주지 않았다.
한 쪽 눈만 뜨니 시야가 좁아져서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성가셨다. 그러나 미호크와의 대련이 있었기에 그나마 수월했다. 미호크와의 대련은 모든 오감을 담금질해 날카롭게 벼려내는 과정이었다. 애초에 미호크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시각이 아닌 움직임의 흐름과 기세만으로 예측해야 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깨달아야만 검의 경지를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난 패륜을 저지르고 살 팔자인가. 아버지에게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친구에게 저지르는 패륜이라니.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에이미는 검을 고쳐 쥐었다.
아직도 친구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은 이 손 안에, 가슴 안에 남아있다. 차라리 티치를 죽였을 때 들었던 혐오감은 양반이었다. 아마 이 죄는 아마 평생 지워질 수 없는 상처로 남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좀먹어나가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에이미는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다시 이 세계에서 친구들을 만난 후 매일같이 사과했고 매일같이 울었다. 저쪽 세상에서 노후까지 지내고 온 보이는 더욱 더 상냥해져서 어린아이를 다독이듯이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줬다.
‘정 미안하면 축의금이라도 두둑이 주던가.’
무뚝뚝하지만 상냥한 그 말에 자신이 얼마나 구원 받았던가. 용서한다는 말에 죄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에이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죄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할 것도 없다. 그걸 깨닫게 해준 것은 보이였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그 잘난 왼팔을 베고 목숨을 거둬가고 싶지만 난 친구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는 주의라서.”
아주 큰 빚을 진 친구가, 넌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거든. 에이미는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 내 눈의 대가로 최소한 사경 정도는 헤매줘야겠어.”
꽤 저렴한 대가 아냐? 에이미는 멀쩡한 한 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렸다. 그러나 손속만큼은 자비를 두지 않았다. 에이미는 아카이누의 공격을 유려하게 피한 후 빈틈을 노려 아카이누의 목을 잡아챘다. 악마의 열매 능력이 무효화 된다. 아카이누가 눈을 크게 떴다. 데자뷰처럼 익숙한 기억이 뇌리를 맴돌았다. 에이미는 망설임 없이 히호시를 아카이누의 옆구리에 쑤셔 넣었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신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간신히 치명적인 급소를 피할 정도의, 그러나 한동안 사경을 헤맬 상처였다.
“다음에는 부디 벚나무 아래에서 만나길 빌게.”
그러니 에이스 말고 나를 찾아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에이미를 노려보던 아카이누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저 멀리서 흰 수염의 함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 ◈ ◈
“너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리 무모한 거냐!”
“으아! 저는 지금 환자에요, 이조우!”
살려줘요! 패기를 담아 거침없이 휘두르는 주먹에 백기를 들었으나 이조우는 아랑곳 않고 에이미에게 강력한 꿀밤을 먹였다.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뇌가 쪼개질 것 같은 아릿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에이미는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마르코와 삿치를 비롯해 치료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형제들은 하나같이 냉랭한 시선으로 무시했다.
“이조우의 말이 맞아요이! 그리고 너는 어쩌자고 아카이누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흰 수염 해적단 은퇴하겠다던 녀석은 어디루 갔어요이! 이제 아카이누가 집요하게 너를 노릴 것인디 대체 우쩌자고!”
마르코가 분노를 쏟아냈다. 그의 표정에는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섣불리 나간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해 질책이 일렁이고 있었다. 돌아오니 배는 만신창이에 연기가 자욱했고 사방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은 화상에 지져진 상처를 힘겹게 가리고 있는 에이미였다.
에이미가 아니었다면 정상결전의 악몽이 되풀이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오롯이 고마움만을 표현하기에는 저질러진 일이 너무 컸다. 검성인 청년은 목숨 같은 한 쪽 눈을 잃고 아카이누의 분노를 샀다. 마르코는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죽음의 위기를 겪는다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에이미는 죽어서도 결코 변하는 일이 없었다.
여전히 무모하고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하여간 겁 없는 꼬마 같으니! 역시 그 때 배에 태우는 게 아니었는데! 마르코가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음, 저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카이누를 도발한 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거예요. 아카이누는 한동안 병상에서 움직이지 못할 거고 에이스를 죽이려는데 가장 앞장서는 그가 없다면 작전도 와해되겠죠.”
“에이스를 노리지 않더라도 널 노릴 거 아녀요이! 무려 아카이누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으니 해군함대가 널 치기 위해 올 것이여요이!”
“아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죠. 다행히 제가 미호크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모르니까 이전처럼 틀어박혀 지낼게요. 어두우르가나 섬은 위치도 멀고 알려져 있지 않으니 몸을 피하기에는 괜찮을 거예요.”
“에이미.....!”
붕대를 둘둘 감은 에이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고마움, 죄책감이 뒤범벅된 표정은 어딘가 익숙하다. 에이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에이스 씨. 비단 에이스 씨가 아니었더라도 난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섰을 거예요. 형제들을 잃은 슬픔에 비한다면 내 한 쪽 눈 정도야 싸게 먹힌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말고 웃어요. 난 에이스 씨 웃는 얼굴이 좋더라.”
에이스가 힘겹게 웃었다. 애써 웃는 일그러진 미소였으나 현재 상황에서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적어도 한 달은 여기서 경과를 봐야한다. 넌 환자야. 아무리 지금은 건강해졌다고 해도 의사 하나 없는 그 섬에 널 보낼 생각은 없어.”
네가 자발적으로 뒈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이조우가 차트를 넘기며 스산하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조우에게는 꼼짝도 못했기 때문에 에이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에야 마취에 가까운 진통제를 먹었기에 고통이 덜하지만 화상은 곪아서 덧나기 쉽다. 통각을 두 배는 잘 느끼게 된 이후로 아픈 건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완치되기 전까지는 이조우에게 꼬박꼬박 진료를 받는 것이 나으리라.
“헐.”
그 때 에이미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왜, 왜 그래 에이미? 어디 아파?”
형제들의 다급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이미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급변해 마르코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요, 요이잇?!”
“마르코, 아니 마르코 형님! 저 일 년만 흰 수염 해적단에 머물러도 될까요!”
“엥? 여긴 네 집이니까 나야 상관은 없지만 대체 왜 그러는거요이?!”
에이미가 꽥하고 비명을 질렀다.
“눈을 다친 걸 알면 미호크가 절 죽일 거예요!”
에이미가 죽은 후 트라우마가 생긴 건지 유독 에이미의 상처에 예민한 기색을 드러내던 미호크다. 그래서인지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법한 자잘한 상처도 반드시 소독하고 약을 꼬박꼬박 바르라며 살벌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흰 수염 해적단에 다녀온다던 에이미가 느닷없이 눈을 잃은 채 돌아온다면?
그 날이야말로 에이미의 짧은 인생에 있어 제 2의 사망기일이 될지도 몰랐다.
“농사짓겠다는 네 꿈은 어쩌고요이!”
“어차피 저 농사에 소질 없어서 농사보다 지나가던 해적선 삥 뜯고 살았어요!”
해적으로서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에이미가 구슬프게 제 처지를 털어놓았다. 에이미의 부주의함은 성실하고 꼼꼼한 농사에 영 맞지 않았다. 손만 댔다 하면 무섭게 시들어버리는 농작물에 미호크가 한숨을 내쉴 정도니 말을 다한 셈이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해적으로 성장한 에이미를 형제들이 복잡한 심경을 담아 바라보았다.
“이래서 자란 환경이 중요하다고들 하나봐.”
삿치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형제들은 동의의 뜻을 밝히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차례대로 진료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발버둥 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매의 눈은 에이미를 아꼈다. 에이미가 느닷없이 잠적한다면 매의 눈이 가장 먼저 들릴 곳은 보나마나 흰 수염 해적단이다. 그렇다면 들통 나는 것도 시간문제일터. 차라리 빨리 이실직고 하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지마는 그건 어디까지나 목숨의 당사자인 에이미가 결정할 사항이었다.
“으허어엉!! 나 어떡해!! 죽을거야, 죽을거라고!!”
“지, 진정해! 에이미!”
“진정제! 진정제 가져와!”
아카이누를 상대할 때조차 주눅 들지 않던 에이미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진료실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형제들은 조용히 에이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