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스일/아이스파] Please fall in love (1)
[혐스일/아이스파] Please fall in love (1)
W.B - 츠쿠리
01
곰곰이 생각에 잠긴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팬담을 사랑에 빠지게 하자.
02
정상결전이 끝나고 마린포드의 병실에 입원해있던 스팬담이 퇴원했다. 그리고 스팬담이 에니에스 로비로 돌아오기 무섭게 나는 그의 집무실에 꼬박꼬박 출석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물론 스팬담이 순순히 들여보내줬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재건 공사도 다른 업체에 맡기겠다며 다시는 보지 말자던 매정한 친구에게 그런 감동적인 재회 장면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무슨 일을 했냐고? 워터세븐의 ‘시장’과 갈레라 컴퍼니의 ‘사장’으로서 당연한 권력행사를 좀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세계정부와 에니에스 로비의 장관 앞으로 수백 장의 항의 문서를 보낸 게 전부다.
재건공사가 70% 이상 마무리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공사를 물린다고? 엄머, 어림도 없는 소리.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건 능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근성과 노력, 끈기까지 뒷받침 되어줘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스버그’는 자수성가계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제일의 조선 회사인 갈레라의 수치 아니겠어? 거기다가 세계정부가 모처럼 선 입금까지 해줬는데 그럴 수는 없지. 이쪽도 아쿠아 라구나 때문에 워터세븐에 들어가는 비용이 한 푼이라도 아쉬운 처지였다.
수백 장의 항의 문서를 보내자 세계 정부 쪽에서는 질렸는지 장관과 알아서 합의를 보라는 답이 날아왔다. 세계 정부치고 근성 없네. 그럼 장관은 얼마나 버티나 볼까? 세계 정부에 보낼 몫을 장관 쪽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꼬박 한 달이 흘러서야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스팬담과 마주볼 수 있었다.
“너, 내가 한 말 코로 들었냐?”
다시 만난 스팬담은 확실히 여위어 있었다. 마린포드의 병실에서 봤을 때 보다는 나아보였지만 그래봤자 시체에서 죽기 직전의 몰골로 바뀐 것뿐이다. 여전히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걱정해봤자 저 상태에서 들리지도 않겠지. 일부러 태연하게 귓구멍을 쑤시며 대답했다.
“엄머, 제대로 잘 들었어.”
“그런데 시발, 니가 왜 여기 와!”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감정이 격해졌는지 욕설이 흘러나왔다. 보좌관을 미리 물려놔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장관님 혈압 올렸다고 재판에 회부됐을지도 몰라.
“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네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스팬담. 난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처신 잘 하고 살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거 때문에 괜히 날 밀어낼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그 때랑 지금이랑은 달라. 게다가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랑 같이 있으면 너도 위험해진다고!”
“엄머, 그럼 내가 그냥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친구 된다고 한 줄 알았어? 일단 친구 됐으면 물리기 없거든? 너 없으면 대체 술 누구랑 마시라는 거야. 친구 물릴 거면 술친구 하나 구해주고 물리던가. 아, 넌 나 말고 소개해 줄 친구도 없지? 그럼 더 안 되겠다.”
“아이스버그.”
스팬담이 엄한 목소리로 불렀으나 못들은 척 했다. 스팬담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에 약했다. 부하 직원 한 명의 목숨까지 신경 쓰는 그가 친구인 나를 함부로 쫓아낼 리는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도 안주고 쫓아낼 셈이야?”
태연하게 의자에 앉으며 묻자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있던 보좌관을 호출해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너 때문에 십 년은 더 늙었어.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스팬담이 툴툴거렸다. 이걸 어쩌나, 난 곧 십 년은 더 늙을 말을 너에게 건넬 예정인데.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스팬담이 서류를 넘기며 무심히 답했다.
“뭔데?”
“나랑 연애하자, 스팬담.”
“뭐?”
스팬담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잘못 들었나? 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던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얼굴 일그러뜨리니까 정말 십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이 미친놈아!”
농담 따먹기 하려고 찾아왔냐! 스팬담이 뒷목을 잡으며 옆에 있던 펜을 집어던졌다. 그의 고함소리와 함께 차도 못 마시고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차를 들고 온 터포키가 문 앞에 서서 당황스러운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엄머, 역시 처음부터는 무리였나.
터포키에게 태연하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집무실로부터 멀어졌다. 집무실이 있는 복도에는 여전히 스팬담의 고함과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애초에 처음부터 잘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전진을 위한 빠른 후퇴를 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퇴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03
곰곰이 생각에 잠긴 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팬담을 사랑에 빠지게 하자.
정상결전이 끝난 이후로 내 삶은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눈앞에 놓인 서류가 산더미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신문만 들여다봤다. 자고 일어나면 네 사망 소식이 들려올까봐 무서워서 날밤도 여러 번 샜다. 온종일 네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꾸었다. 네가 덜컥 죽어버리는 꿈이었다. 꿈속의 너는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죽을 위기가 다가오면 금세 죽음에 굴복해 네 목숨을 넘겨줬다. 사신의 낫이 희번득거리며 네 등 뒤에서 빛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넌 정말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는 거구나.
잔인하게도, 남겨진 사람은 네가 그토록 살기를 바라는데 정작 본인은 삶에 대해 시큰둥했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보였다.
사실 정상결전 이전이었다면 그런 너를 내버려두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상결전에서 피투성이가 된 너의 모습을 본 순간, 부디 살아있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정작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너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삶을 놓아버리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네가 살기를 바랐다.
스팬담, 마린포드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네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워터세븐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알까?
나는 내내 생각했어.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 대체 무엇을 쥐어줘야 살고 싶다고 생각할까?
내 경우에는 세계정부에 대한 복수심과 톰 씨의 유지를 이어나가겠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어주었어.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거티 프람도 내 절망을 일으켜 세운 사람 중 한 명이었지.
하지만 너는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거잖아?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어.
널 사랑에 빠지게 하자고.
04
에니에스 로비에서 쫓겨난 이후 다시 스팬담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스팬담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엄머, 그런 표정이라니 실례네. 집무실 구석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자 보좌관인 터포키가 차를 따라주었다.
“그래, 이번 용건은 뭐야?”
저번처럼 장난치면 진짜 죽여 버린다. 저번 일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스팬담이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런, 역시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보네.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농담도 아니었고 오늘도 지난번과 똑같은 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장난 아니었어, 스팬담. 나, 정말로 너에게 연애하자고 한 거야.”
스팬담의 얼굴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에는 이미 시발이라고 대문짝만한 욕설이 써져 있었다.
“너, 내가 친구하지 말자고 해서 삐졌냐? 그래서 이래?”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달라는 스팬담의 말을 못들은 척 흘렸다.
“아닌데. 너야말로 나랑 애인하면 다시 친구가 없어져서 그래? 그럼 나랑 친구도 하고 애인도 하는 거지. 신세대 같고 좋지 않아?”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신세대 같은 소리 하네.”
스팬담이 신랄하게 일갈했다. 그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필사적이었다. 피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스팬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너는 내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말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스팬담. 너 정상결전 때 정말 죽을 뻔 했잖아. 그렇게 되고 나서야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어. 진심으로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널 사랑해.”
반은 맞고 반은 진실이다. 네가 소중하고, 죽지 않길 바라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감정이지 연인으로서의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게 족쇄를 채워둘 수가 없잖아? 게다가 나중에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스팬담과는 반대로,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렇게라도 네가 살길 바랐다.
05
사실 처음에는 괜찮은 여자라도 소개시켜줄 생각이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고백할 생각을 했겠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에 빠지는 네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이 세계를 책이라고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그거야 말로 소설 같은 전개였다.
보통 로맨스 소설은 아무도 믿지 않는 고독한 늑대 같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한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 끝에 잘 먹고 잘 사는 결말로 끝나지 않던가. 문제는 이 장르는 아무리 봐도 로맨스 소설은 아니었다. 스팬담이 고독한 늑대 같은 사람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비 맞고 버려진 강아지쯤 되겠지.
사업가라면 눈앞에 놓인 확률을 보고 정확히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여자에게 스팬담이 사랑에 빠질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빠르게 바꿨다.
운명적인 만남 대신, 친구와의 로맨스로 장르를 바꿔보기로.
마침 스팬담의 인생에는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다. 아이스버그라고, 소꿉친구는 아니었고 여자는 더더욱 아닌데다가 약간의 악연까지 얽혀있었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친구인데다가 절대 죽지 않길 바라는 대상이고, 심지어 성격 좋고 능력조차 좋은 친구다. 이거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쯤 되면 참신한 로맨스물 하나 정도는 나쁘지 않잖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우정에 기인한 감정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동정심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동정심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사실 나야말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른다. 스팬담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닌데.
하지만 당장 네가 죽는다고 상상하면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나는 가급적이면 네가 평범한 죽음을 맞길 바랐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호호백발인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서 편안하게 잠드는 것이었다. 정상결전 같은 전쟁에 휘말려서 사경을 헤매다가 숨이 넘어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죽음은 아니었다.
역시 첫 만남에서 뭔가 씌었나봐.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대체 너는 내게 무슨 마법을 건 걸까. 그 마법에 걸려버린 나는 이제 절대로 네 손을 놔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스팬담, 네가 손을 먼저 놔버려도 나는 널 붙잡고 있을 거야.
삶으로부터 네가 달아날 수 없도록.
06
고백한 이후로 스팬담은 나를 슬금슬금 피했다. 집무실 아니면 갈 곳도 없으면서 자리에 없다고 핑계를 대거나 몸이 아파 만날 수 없다며 면회 사절을 내세웠다. 뭐,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지. 땀을 뻘뻘 흘리며 난처한 얼굴로 거절 의사를 전하는 터포키만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은 아침 일찍 운행하는 바다열차를 타고 에니에스 로비로 가서 집무실에 들어앉았다. 정상결전 이전에 에니에스 로비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더니 장관의 친구로 확실하게 인식된 모양인지 다들 아무런 의심도 않고 들여보내줬다. 에니에스 로비의 보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재건 공사에 보안을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집무실에 들어왔더니 내가 있어 식겁하는 스팬담의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팬담을 움츠리게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그런 그가 평안을 느껴야 할 나조차 피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터포키가 마련해준 집무실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가져온 서류를 처리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류를 처리하자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스팬담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평온한 시간이 유영하는 구름처럼 흘러갔다.
점심시간에는 스팬담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고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늘 그랬던 것처럼 골고루 먹으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자 스팬담은 안심하는 기색임과 동시에 짜증을 냈다. 넌 얼마나 잘 먹길래! 라고 말하는 스팬담에게 깔끔하게 없어진 빈 접시를 보여주었다. 스팬담은 인상을 썼지만 한 쪽에 있던 샐러리를 꾸역꾸역 먹었다. 강력한 진통제도 샐러리에게서 오는 맛은 없애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후를 함께 보내고, 저녁을 함께 먹었다. 때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기도 했고 그 때마다 스팬담은 짜증을 내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줬다. 마치 정상결전 이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 날의 마지막 기차로 워터세븐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똑같이 아침 기차를 타고 에니에스 로비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흘렀다.
스팬담은 더 이상 내가 그의 집무실에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07
그저 덫을 놓고 싶은 것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스팬담을 붙잡아서 아주 얇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족쇄를 그 가느다란 발목에 채우고 싶었다. 처음에야 신경 쓰이고 거치적거릴 테지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없는 것이 오히려 허전하게 될 것이다.
그래, 나는 될 수만 있다면 스팬담의 족쇄가 되고 싶었다. ‘아이스버그’는 스팬담의 유일한 친구였고, 유일한 안식처였다. 족쇄가 될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스팬담이 망설임 없이 끊어낼 수 있는 족쇄로는 곤란했다. 마린포드에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하는 야속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는 오히려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친구보다 더 강력한 끈으로 이어진 걸 찾아야 했다.
몇 번 얼굴을 보고 말 사이로는 안 된다. 그의 곁에 있되 없으면 상실감에 사로잡힐만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연인이었다. 그러나 연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건 스팬담이 나의 존재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스팬담이 친구로서의 나를 스스럼없이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서다. 내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면 결코 그리 쉽게 쳐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존재를 각인시켜주면 된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가까스로 숨만 쉬고 있는 그에게 편안하고 안온한 존재가,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가 곁에 항시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내가 그를 다정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스팬담이 나를 놓을 수 없게 될 미래를 보았다. 친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어느 쪽도 포기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곧 삶을 놓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네가 날 사랑하게 된다면, 나도 널 사랑하게 될까?
문득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네가 하루라도 빨리 나를 사랑하길 바랐다.
08
워터세븐이 아닌, 에니에스 로비 집무실에 출석도장을 찍게 된 지 한 달 정도가 흘렀다. 그날도 아침 일찍 집무실로 들어왔는데 CP9, 아니 이제는 CP0가 된 블루노가 그 곳에 있었다.
“엄머, 오랜만이네.”
음, 새하얀 옷도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천연덕스레 인사를 건네자 블루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스버그. 당신이 왜 여기 있지?”
아, 설명을 듣지 못한 건가. 그러고 보니 다시는 보지 말자는 이유 중에 하나도 CP0랑 마주칠 수 있다는 거였지. 그렇다면 유감이었다. 블루노의 손이 까딱거렸다. 대답 여하에 따라 죽일 수도 있다는 걸까.
“엄머, 죽이면 스팬담이 많이 슬퍼할 텐데. 일단 에니에스 로비 재건 공사 총 책임자거든?”
“총 책임자라고? 장관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신에게 재건공사를 맡긴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스팬담이 맡긴 게 아냐. 세계 정부가 맡긴 거지. 스팬담도 어이없어 하더라고. 그렇지만 안심해. 붕괴 이전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줄 테니까.”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
“안 믿으면 어쩌겠어. 이미 돈도 받았고 재건공사도 끝나 가는데. 난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하자는 주의라 일에는 장난 안 쳐. 입찰도 세계 정부가 돈을 워낙 빵빵하게 지원해줘서 넣어봤는데 바로 해주더라?”
세계정부도 머리가 그다지 좋은 건 아닌 거 같아. 아니면 장관에게 엿을 먹이고 싶었거나. 내 말에 블루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음, 스팬담도 딱 저런 반응이었지. 추억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뭐, 그렇게 됐으니 의심되면 스팬담에게 물어봐. 마침 오는 것 같으니까.”
“감히 장관의 이름을 부르다니.”
엄머, 그걸 이제야 눈치 챈 거야? 내 말에 블루노가 몹시 못마땅한 기색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름을 안 부르고 뭘로 부르겠어. 나는 스팬담의...”
“블루노!”
“…친군데.”
아직은 말이지. 미처 말하지 못한 뒷말을 생략한 채 뒤를 돌아보니 스팬담이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발을 다쳐 뛸 수 없게 된 스팬담은 숨을 헐떡거릴 일이 거의 없었다. 아마 블루노가 집무실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필사적으로 걸어온 것 같았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장관. 이 자가 장관의 친구라고 주장하던데 맞습니까?”
“…그래, 맞아.”
그러니까 손대면 안 돼. 스팬담이 무뚝뚝하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블루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엄머, 오해하지 마. 장관이랑 친구가 된 건 에니에스 로비가 붕괴된 이후에 병문안을 갔을 때거든. 친구 되자고 말한 것도 나고.”
그러니까 다른 CP0들에게도 전해주면 고맙겠어. 카쿠나 루치한테 죽고 싶지는 않거든. 내가 죽으면 스팬담도 슬퍼할 테고. 블루노는 나와 장관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장관, 이 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래.”
“이 자는 위험합니다. 지금 오로성의 감시를 받고 있는 마당에 플루톤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이 자를 가까이 두게 된다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뭐랄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어.”
“장관!”
“어, 잠깐. 말 못한 게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장관에게 반해서 말이야. 장관이 연을 끊자고 했는데 무작정 와 버렸어. 뭐, 일단 세상에서 제일 무해한 사람처럼 굴어 볼게. 이래봬도 워터세븐의 시장이라 조금은 눈치가 있거든.”
“……….”
“……….”
내 말에 블루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미친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스팬담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즐거운 사람은 나밖에 없는 모양이다.
09
사실 머리로는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바보도 아니었고, 괜히 갈레라의 사장과 워터세븐의 시장을 엮임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팬담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왜 스팬담이 저를 밀어내고 싶어 하는지, 동시에 스팬담이 하나뿐인 친구를 얼마나 지키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오로성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것도, 그 비밀에 근접한 스팬담을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것도, 하지만 영웅이 된 스팬담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스팬담에게 접근하는 이가 위험 분자라고 생각된다면 죽이는 것은 스팬담이 아니라 위험 분자가 될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라면 그 위험분자는 다름 아닌 나, 아이스버그일 테고 말이지. 뭐, 톰도 그렇게 한 순간에 죄를 엮어 죽였는데 워터세븐의 시장이라고 해서 못 죽일 건 없다. 다만 좀 더 정교하고, 공들인 함정을 판다는 게 차이점일 것이다.
스팬담은 그걸 알기에 어떻게든 저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스팬담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생각보다 죽는 게 무섭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스팬담으로 인해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죽을 수 있다는 이유로 스팬담과 친구로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 더 괴롭고 비참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은 스팬담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사실 절반쯤은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살아생전 처음으로 나를 위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유쾌한 해방감인지! 온전히 나체가 되어 거리를 뛰어다니는 악동이 된 기분이었다.
내 삶은 언제나 나를 위한 삶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톰의 유지를 위해, 그 다음에는 워터세븐의 시민들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를 위한 건배도, 나를 위한 울음도, 나를 위로해줄 온전한 친구 하나 없었다. 공허함이 목구멍을 넘어 토하기 직전까지 왔는데도 그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등에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름답고 번영한 워터세븐을 톰 씨에게 보여주자. 그러나 내 꿈은 삶과 마찬가지로 톰 씨의 꿈이었고 워터세븐 시민들의 꿈이었다. 사실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죽은 톰 씨를 저승에서 불러올 수도 없잖아. 하지만 사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꿈을 이루고 난 이후의 삶이 너무나 막연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도망쳤다. 과연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톰 씨에게 워터세븐을 보여준 순간,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꿈이 이루어진 순간,
이 얼마나 공허하던지.
술에 취해 껄껄 웃는 톰과 프랑키를 두고 나는 홀로 취할 수가 없었다. 수년의 공허함과 원망이 쏟아져 나올까봐 두려워서 술 대신 물로 꾸역꾸역 텅 빈 속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위해 건배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나를 위해 울어주지는 않지만 울음을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술에 취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뼈대가 가늘어 기대는 맛은 없지만 그래도 울 때 어깨를 빌려주는 친구가 생겼다. 스팬담을 부여잡고 엉엉 울고 나니 원망을 쏟아내 비어버린 자리에 꿈을 채우고 싶어졌다. 워터세븐을 물 위에 띄워서 아쿠아 라구나가 와도 끄떡없는 곳으로 만들자. 그리고 그런 워터세븐을, 스팬담에게 보여주자. 친구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것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어.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수년 후를 상상했다. 기대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네가 없다면 죽어버릴 꿈이었다.
겨우 어깨를 빌려줄 친구를 만들었더니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통보를 받다니. 거 참 꼬이는 인생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만나지 말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건 그쪽이고, 정작 내 동의도 없었잖아? 그래서 나는 멋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넌 만나기 싫다고? 난 만나고 싶으니까 만나러 갈 건데? 코흘리개 어린아이 같은 치기를 부렸다.
나는 마린포드의 가장 큰 병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덜덜 떨던 너를 기억한다. 보라색 꽃향기가 자욱한 병실에서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다시 혼자 외로운 세상에 던져두라고? 인간으로서도, 유일한 친구로서도 차마 못할 짓이었다.
나는 그래서 살면서 제일 이기적인 선택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스팬담이 나를 잃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스팬담이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먼저 죽는 것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하고 싶은 걸 다 해봤다. 톰 씨의 유지도 이뤘고 워터세븐도 번영한 물의 도시로 만들었다. 시장이란 직위도 해봤고 사장으로서 번영과 부도 누렸다.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친구도 만들었으니 딱히 죽어도 여한이랄 것이 없었다. 워터세븐을 띄우는 일이야 설계도를 만들어 놓으면 밑에 있는 조선공이나 여행을 마친 프랑키가 와서 대신 해주겠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좀 싹수가 있는 나 같은 녀석이 대신 해줄지도 모르고.
하지만 스팬담은 아니었다. 그는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부유하며 살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운명을 알고 있으면 뭘 하나. 살고 싶지도 않은, 저렇게 텅 빈 인생을 살고 있는데.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꿈이 없는데 여한이 남을 리가 있나.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만약 스팬담이 살고 싶어진다면, 살아서 끝내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인생이라도 네가 살아서 언젠가 빛을 본다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악착같이 옆에 붙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안겨주기로 결심했다. 뭐, 가장 좋은 건 나도, 스팬담도 죽지 않고 사랑의 힘으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거지만 딱히 내가 죽어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죽어서 자극제가 된다면 복수심에 스팬담이 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팬담. 나는 괜찮아. 나는 지금 살면서 처음으로 가장 더럽고 치사하고 이기적으로 살고 있거든.
내가 죽어도 네가 산다면, 살아서 나중에 황천에서 날 만나 살아서 다행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족해.
그러니까 죄책감 따위 갖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생각보다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10
블루노를 만난 이후로 CP0가 된 낯익은 얼굴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블루노에게 미리 언질을 들은 모양인지 그들은 형형한 살기를 띄우거나 시비를 걸지언정 직접적으로 손대지는 않았다. 스팬담의 말에 따르면 원래 감시의 명목으로 적어도 한 명은 곁에 붙어 있어야했는데 중요한 임무가 있어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운 거라고 했다. 즉, 이전의 한 달이 특이했을 뿐 지금이 일상이라는 이야기였다.
정작 일상으로 돌아온 스팬담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죽어있지만 말이지. 눈이 반쯤 풀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이거 놔,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별 다른 제지는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조차 귀찮은 모양이었다.
그의 집무실에 드나들게 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스팬담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기상, 서류처리, 식사, 서류처리, 휴식, 취침. 예전에는 그나마 에니에스 로비를 산책하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다리를 다친 후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산책하고 싶다면야 그의 옆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청해서 휠체어를 밀 테지만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산책의 목적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지 이목을 집중시켜서야 주객전도일 테니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류를 잠깐 쳐다보다가 스팬담의 얼굴을 쳐다보는 걸 반복했다. 스팬담의 다크서클은 거의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걸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휴식이 절실해보였다.
“스팬담.”
“왜?”
“워터세븐에 놀러올래?”
“…뭐?”
“워터세븐이 코앞인데 놀러온 적은 없잖아. 매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기도 지겹지 않아? 너 장관이라며. 휴가 좀 빼봐.”
스팬담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자 이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너 진짜 죽으려고 작정했냐.”
“안 죽는다니까? 여튼 놀러오기나 해. 내가 극진하게 대접해줄게.”
이럴 때 친구가 시장인 덕도 좀 보고 그러는 거지. 참나, 난 장관이거든? 장관이면 뭐해 맘대로 휴가도 못 가는데. 그래 이런 장관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한참을 아웅다웅 다퉜지만 스팬담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나마 에니에스 로비는 그의 영향권이라 오로성의 감시가 비교적 느슨했지만 워터세븐으로 나가는 순간 사방에 귀가 생기고 눈이 달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워터세븐은 나의 영역이기도 했다. 지난 8년 동안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남는 법을 배운 곳은 다름 아닌 워터세븐이었다. 적어도 그 도시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입을 단속할 수 있는지, 정보를 교란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내가 진짜 기가 막힌 계획을 짜왔다니까? 일단 홍대치 불을 타고 워터세븐 관광을 하는 거야. 그러면 걷지 않아도 워터세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거든. 너 물물고기랑 물물사탕은 먹어봤어? 내가 잘하는 곳 아니까 거기서 간단하게 군것질하고 점심 먹으러 가면 되겠다.”
“이봐.”
“점심에 브런치 잘 하는 곳 있으니까 조금 가볍게 먹고 갈레라 컴퍼니 투어를 하는 거야. 너 배 만드는 거 본 적 있어? 원래 외부인은 공개가 안 되지만 시장 권한으로 특별히 보여줄게.”
“아이스버그.”
“점심을 가볍게 먹었으니까 저녁에는 음, 돼지 통구이 바비큐 먹자. 내가 미리 주문해놓을게. 우리 둘이 있기 적적하면 파울리도 부를까? 파자마 파티 하면 되겠다. 파자마 없으면 내 거 빌려주면 돼.”
“아이스버그, 제발 좀!”
“왜? 싫어?”
스팬담은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정말 싫었다면 차라리 욕설을 내뱉거나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에니에스 로비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이리저리 걸리는 게 많아서 곤란한 게 정확한 심정이겠지. 나는 장관이지만 제 거취하나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가엾은 친구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뭐 그리 어려울 게 있담? 그냥 가면 되지. 나조차도 하기 싫은 스케줄은 종종 캔슬 해버리는 걸. 스팬담은 나를 올려 보았다. 퀭한 눈에는 갈등이 어려 있었다.
“갈 거지?”
“……….”
스팬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워터세븐으로의 휴가가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