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데커] 작별의 노래 (1)

W.B - 츠쿠리

부제: 환상

 

 

 

 


 

 

 

"데커드!"

 

어디선가 아이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데커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너울거리는 들판 너머로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손을 크게 흔들며 기운차게 뛰어오는 소년은 용케도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뛰어오면 위험할텐데. 혹시라도 넘어져 상처라도 생길까 걱정된 데커드가 소년을 향해 천천히 오라고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데커드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은 로봇이었다. 감정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로봇. 그것은 결코 바꿀 수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각인된 태생적인 족쇄였다.

물론 로봇 중에서도 데커드는 특별한 존재였다. 데커드는 무려 로봇 경찰인 브레이브 폴리스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직위는 단지 로봇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명함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을 데커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브레이브 폴리스는 로봇으로서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여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 아래 범죄를 심판할 수 있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목적이 아니었다면 브레이브 폴리스도 그저 기계적인 인공지능을 가진 인간의 부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감히 소년을 걱정한다고? 데커드는 멍하니 달려오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래 이건 마치 자신이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데커드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과부하가 걸려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데커드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로봇이라는 정체감 뿐이었다.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대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란 말인가. 데커드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은 정체성을 붙들려는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맹렬한 거부감과 함께 생전 처음 느끼는 정체불명의 혼돈이 그의 머리와 온 몸을 강타했다.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발에- 인간과 달리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 발에 무언가 따스한 것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니 어느새 다가온 소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순식간에 혼란스러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따뜻함의 근원은 바로 이 소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데커드? 내가 불러도 아무 말도 안하고…, 혹시 무슨 걱정 있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야?"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혼내줄게!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소년은 이내 든든한 해결사처럼 으스대며 손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적어도 다섯 배는 큰 몸집을 가진 로봇에게 혼내주겠노라 자신있게 말하는 소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으스대는 소년에게 데커드는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포근함이었다. 데커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데커드의 질문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커드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함이 가득했던 천진난만한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데커드는 자신이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년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모를 죄책감이 그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만큼 소년의 순수함은 더럽혀져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었으며 데커드가 지켜야하는 대상이었다.

 

그래, 지켜야하는 것이다. 데커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아직도 안개에 파묻힌 것처럼 흐릿했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잡힐 듯 말 듯한 기억의 파편 속에서 소년은 아마 자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이유는 모르지만 데커드는 그러한 확신이 들었다.

 

소년과 함께 있는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서 마치 공기의 흐름이 멈춘 적막 속에 단 둘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듯,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춤을 췄고, 그 틈을 파고든 따뜻한 햇살이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가슴이 벅차서 마구 저릴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아, 네가 있는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다.

치밀어오르는 벅찬 감격에 데커드는 나지막히 탄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진귀한 보물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네 얼굴에 비할 수 있을까. 데커드는 번쩍이는 보석이 눈 앞에 있어도 소년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과 결코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데커드를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멀뚱히 쳐다보던 소년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투정을 늘어놓았다. 


"뭐야, 데커드.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어? 그치만 고작 며칠인데 날 잊어버린 척 하는 건 너무하잖아. 표정이 너무 진짜같아서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구! 대체 누가 그렇게 연기하는 걸 가르쳐준거야?"

"뭐?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대충 짐작은 가니까. 하지만 다시는 이런 장난 치지마.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안 속는다구?"


소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던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테커드가 나를 잊을 리가 없으니까!] 

 

 
두근. 밝게 미소짓는 소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데커드는 몸에 가득 차 있던 감격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봤다. 그리고 고통과 동시에 느껴지는 강한 흔들림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데커드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쿠구궁! 억지로 떠진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까의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 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종이가 찢겨지듯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에 너울거리던 들판도, 푸름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푸른 잔디 대신 누렇게 펼쳐진 메마른 땅이 쩍쩍거리며 갈라졌다. 땅이 마구 흔들리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고 하늘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데커드의 직감이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데커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에게 이곳은 위험하다고,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



갑자기 소년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년의 모습에 데커드는 말문이 막혔다.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았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위험을 감지하고 먼저 도망친 거라면 열 감지 센서가 달린 데커드의 눈으로 쉽게 찾았을 터였다. 그러나 소년은 마치 증발한 것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데커드가 정신없이 소년을 찾고 있는 이 와중에도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를 거대한 운석들이 땅에 내리꽂히며 충격을 가했다. 메마른 땅에 간신히 뿌리를 박고 있던 마른 풀에 불꽃이 튀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데커드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혼자서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소년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그를 짓눌러 차마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 네 이름을 힘껏 부르기라도 할텐데. 미처 소년의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데커드는 그저 애탄 한숨만 흘렸다. 어떠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막막함이 데커드를 점점 옥죄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데커드의 귀를 자극했다. 삐빅거리는 시끄러운 기계 소리는 급박하게 흘러가는 공기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데커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데커드는 비로소 자신히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인지하는 순간, 정신이 억지로 일으켜세워지는 것과 동시에 삐빅거리는 알람 소리가 예리하게 귀를 파고 들었다. 세상이 뭉개지면서 까만 점으로 수축했다.


초 인공지능 경찰로봇이자 Brave Police 의 리더, 데커드는 환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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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e Police(브레이브 폴리스)

 

세계의 기술이 진화하면서 점점 흉악해지고, 고차원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칭 로봇 경찰 단체로 현재 총 7명의 로봇들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고성능의 AI가 탑재되어 있어 명령을 내리면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로봇이라는 정체성으로 존재하며 목적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활동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로부터 5년 전, 첫 번째 브레이브 폴리스의 대원이자 현(現) 브레이브 폴리스의 리더인 데커드가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로 7기의 대원이 추가로 만들어져 영입되었다. 8기 체제로 운영되던 브레이브 폴리스는 일년 전, 영국 브레이브 폴리스의 요청으로 한 기체가 파견된 이후 현재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7기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아마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집요한 분석과 취재 끝에 우리 ‘코스모 폴릭탄’은 놀랄만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로봇으로 이루어진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인간 지휘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지휘관은 5년 전, 첫 번째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인 데커드가 '닥터 가우스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발탁되었다고 전해진다. 즉 브레이브 폴리스의 창립과 동시에 활동을 게시한 셈이다. 지휘관은 약 4년 동안 브레이브 폴리스와의 활동을 통해 탁월한 성과를 내놓으며 브레이브 폴리스의 황금기를 함께 했다. 그러나 1년 전부터 지휘관의 자리는 원인 모를 이유로 공석인 상태이며 브레이브 폴리스는 전원 로봇으로 구성된 체제로 전환되었다.

 

탁월한 성과를 내놓던 지휘관이 그만둔 것과 지휘관 자리를 공석인 상태로 놔두는 것에 대하여 초기에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리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고 하나 브레이브 폴리스가 해킹을 당하거나 원인 모를 이유로 조종당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경시청이 대대적인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적극 해명함으로서 논란은 모두 거두어진 상태다.

안타깝게도 경시청의 기자회견과 초대(初代)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에 대한 취임식 영상, 사건 기록 및 보도는 지휘관의 신분 노출로 빌런 집단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한 경시청의 대대적인 기밀화 정책과 1년 전 브레이브 폴리스가 비밀 수사대 체제로 강화되면서 모두 말소된 상태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기억은 기자회견 직후, 기억을 조종하는 빌런인 '메모리아'의 랜선 전파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손상되어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이와 관련하여 브레이브 폴리스를 국가 비밀 기관으로 전속시키기 위해 지휘관의 죽음을 은폐한 후, 경시청이 빌런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P.35참조).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은 지휘관의 체구는 어린아이처럼 매우 작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레이브 폴리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지휘관이 1년 전부터 더 이상 브레이브 폴리스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 안타까움을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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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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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슈이치(Matsumoto shuichi)-]

 

 


 

"-이상이 잡지의 보도일세. 오랜만에 '브레이브 폴리스 특집!' 이라고 대문짝만하게 표지를 실어놨길래 깜짝 놀라 집어왔더니 다행히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로군.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염문들을 모아놓은 삼류잡지일뿐이야."

 

 

총감실 소파에 앉아 커다란 글씨로 '브레이브 폴리스 특집!'이라고 써진 잡지를 대충 넘기던 토도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그리움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삼류잡지가 불러일으킨 예상치 못한 효과였다. 삼류잡지는 어중떠중한 염문을 모아놨을 뿐이지만 5년 전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예리하게 찔러오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 셈이었다. 가만히 앉아 토도의 말을 경청하던 사에지마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나 참, 모든 자료들을 다 말소시켰다고 생각했더니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역시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이 정도면 딱히 소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할 수 있겠어. 참, 이 잡지는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시켜야겠네. 공권력을 동원하는 건 누가 봐도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걸로 비춰지니까 될 수 있으면 아무런 반응을 내치지 않는 게 낫겠지. 차라리 이런 기사가 삼류잡지에 실린 게 다행일지도 몰라. 만약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이 이걸 봤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까 말일세‥‥."
 

"아아, 그럴 수 밖에."

 


토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련한 눈빛으로 잡지의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처럼 가진 느긋한 티타임이건만, 문득 떠오른 추억에 묻혀 차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가득 채운 그리움의 홍수에 토도는 차를 마시다말고 씁쓸하게 웃었다. 목을 먹먹하게 치고 올라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5년 동안의 기억이었다.

토도는 잔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심정인지 사에지마도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사에지마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묻어놓았던 추억들이 굳게 닫힌 문을 비집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의 연속 그리고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과 기적을 함께 했던, 누구보다도 밝고 명랑한 웃음을 지녔던 한 소년의 모습.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한 순간의 추억일 뿐, 현재는 결코 기억해서도, 존재해서도 안 될 기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사에지마는 감히 이 모든 순간을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사에지마는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잔인한 추억을 헤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現)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지휘관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그것은 현실과 추억을 가로막는 잔인한 경계를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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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혼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시에 위치한 요코하마 형무소. 수많은 범죄자들이 죄를 짓고 들어오는 곳인만큼 수감자들의 태도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죄를 뉘우치지 않는 태도를 숨기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성실한 태도로 조용히 죗값을 치르는 자도 있었다. 싸움을 벌이던, 조용히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어쨌거나 수감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형무소에 적응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 한 명, 형무소에 결코 어우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빼쩍 마른 몸에 마구 헝클어진 검은 머리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커다란 체형에 흉터를 가진 흉악범들이 득실거리는 형무소에서 남자는 유독 이질적이었다. 형무소의 간수와 수감자들은 그를 죄수번호를 따 602번이라고 명명하곤 했다. 형무소 생활은 고독이 상재하다보니 아무리 사회관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도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름을 부르고, 친분을 쌓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남자만은 602번이 이름이자, 성이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작은 602번이 처음 요코하마 형무소에 도착했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602번은 형무소에 온 첫 날에 바로 독방을 배정받은 케이스였다. 바깥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어떤 행위나 분란을 조장할지 몰라 독방을 배정받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는 없었다. 보통 독방을 배정받을 정도라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살인마거나 조직의 수뇌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죄자들에 대해 빠삭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정보상들조차 그의 정체를 추측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형무소에 있는 모든 수감자들은 첫 날부터 602번을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경계대상으로 주목했다.

아무리 독방을 배정받았을지라도 노동시간이나 식사시간에는 꼬박꼬박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때문에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세력을 깨뜨릴 위험이 있는 대상인지 살피는 것은 수감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기존에 무리를 형성하고 있던 세력들은 602번이 위험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끊임없이 탐색하고, 살폈다.

그러나 602번의 첫 인상은 유약해 보이는 샌님이었고 태도조차 심기를 거슬릴 데가 없을 정도로 얌전하고 소극적이었다. 602번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잔뜩 움츠린 채 눈치를 봤고 수감자들과 어울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조직에 휘말려 누명을 쓰고 형무소까지 들어온 멍청이가 아닐까. 그의 정체를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수감자들은 멋대로 결론을 내린 채 날카로운 경계를 풀었다. 독방을 배정받은 신입이 온 것치고 이례적으로 서열을 정하는 다툼이 없는 느슨한 평화가 찾아왔다.


만약 602번의 얌전한 태도에 배알이 꼴린 다른 수감자가 시비를 걸지만 않았다면 이 평화는 아마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평소 괄괄하기로 소문난 수감자는 602번의 얌전한 태도에 꽤나 골이 난 모양인지 식당에서 다짜고짜 식판을 집어던지며 싸움을 걸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이 602번의 서열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직 체격으로 싸움의 승패를 판단한다면 압도적으로 602번의 패배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싸움에서는 체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602번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현실이었다. 602번은 한 대라도 맞으면 비실거리며 쓰러질 것 같던 인상과는 달리, 수없이 맞으면서도 끝까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는 미친 개 마냥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몰랐지만 이미 그는 미쳐있던 게 틀림없었다. 유약해 보이는 샌님의 이미지는 한 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놔주지 않는 광견 그 자체였다.


싸움은 자연스레 602번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날 이후로 서열을 다시 세우려는 기존 세력과 602번의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감자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602번의 머리가 실로 기가 막히게 좋았다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602번은 더 이상 상황을 봐주지 않았고 저를 건드린 사람이 나오는 즉시 함정이나 트릭을 설치했다. 노동시간에 재봉틀을 조작해서 손에 구멍을 뚫리게 하거나 피를 줄줄 흘리게 만드는 것은 약과였다. 심한 경우 공업실에서 멀쩡하던 기계가 갑자기 폭파하거나 불이 나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는 자신을 건드린 자가 질질 짜며 용서를 구할 때까지 실로 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괴롭혔다.

 

그 사건 이후로 수감자들은 자연스레 602번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일단 건드리지만 않으면 602번이 얌전하다는 사실을 체득한 수감자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동적으로 602번은 혼자가 되었고, 간수들조차 독방을 쓰는 수감자치고 얌전한 602번의 태도에 만족을 표했기에 그런 그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래서일까. 그 누구도 602번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동시간에 항상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던 602번이 작은 기계 부품과 장비들을 슬쩍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도, 혼자 남은 독방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건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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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번. 굳게 닫힌 녹슨 철문 너머로 죄수번호가 표기된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홀로 있는 작은 쪽방은 조용했으나 한편으로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섬뜩했다. 문 틈새로 들어오는 미미한 형광등 불빛이 남자의 굳은 얼굴을 비추었다.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조용히 앉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오른쪽 눈만이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의 왼쪽 눈은 검은자위가 없고 오직 흰자위와 벌겋게 달아오른 핏줄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이 남자의 덤덤한 표정 일면에 드러난 분노와 더불어 더욱 섬뜩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허공만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덤덤한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음산한 웃음이 입꼬리에 자리잡았다. 그 웃음에 담긴 것은 즐거움이 아닌 진득한 광기였다.

 

한참 동안 소리없이 웃던 남자는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온통 짙은 회색빛으로 칠해진 칙칙한 벽 구석에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들어와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사진을 남자는 멀건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긁힌 자국이 역력한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은 특이하게도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었다. 각자 요란한 포즈를 취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각양각색의 로봇들 사이로, 함박 웃으며 힘차게 V자를 그리고 있는 소년만이 사진 속에서 유일한 인간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화목하면서도 재미있는 사진으로 보이겠지만 남자에게는 그저 증오스러운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남자의 시선이 로봇을 넘어, 웃고 있는 소년에 얼굴에 정확히 다다랐다. 남자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운 채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은 이렇게도 괴로운데 저들은 그를 비웃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다. 남자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분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 웃음을 어떻게든 고통에 찬 신음소리로 바꿔놓고 싶었다.

 

남자는 사진 아래에 떨어져 있는 누런 사기 그릇을 주워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릇이 산산 조각 났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조각난 것들 중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슬쩍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보니 베여서 피가 나올 정도로 날카로웠다. 긁힌 살갗을 비집고 떨어지는 붉은 피를 만족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사진을 향해 미친 듯이 사기조각을 휘둘렀다. 사진을 볼 때마다 울컥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이렇게나마 표출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어온 남자의 일과 중 하나였다.


사기 조각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비명소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마구 긁히고 찢어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던 사진은 점점 더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에 찍혀있는 웃음은 결코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를 비웃는 것처럼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종국에는 경쾌하게 웃는 환청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건방지게 나를 비웃는 거냐, 브레이브 폴리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사기 조각이 다시금 사진 속 소년의 얼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소년의 사진은 남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단지 안으로 삭혀서 얌전해 보일 뿐, 그는 엄청난 불꽃을 감춘 채 이를 갈고 있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남자는 오늘도 사진을 보며 자신이 왜 형무소에 갇혀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그 날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은 남자로 하여금 들끓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꼬박 일 년, 세월이 흐를수록 남자의 안에서 불타고 있는 불꽃은 점점 더 크기를 부풀려갔다.


남자는 아직도 그 날, 자신의 복수가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꼴사납게 이렇게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은 완벽하게 복수를 실행한 후 아무도 모르게 일본에서 사라져야 했다. 세상이 자신의 얼굴조차 모르도록 은밀하게,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회자되도록 떠들썩하게 복수를 마무리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 후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브레이브 폴리스를 우롱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엔딩의 끝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놓여있는 처지는 이게 뭔가. 남자는 복수를 끝내지도 못했고 자유마저 빼앗기고 구속당했다. 복수를 실행해야할 대상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은 남자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선사했다.

 

남자는 다시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래, 자신이 이 꼴이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게 모두 다 브레이브 폴리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여도 사진 속에 찍혀있는 웃음들은 비난이 되어 귓가에 아른거렸다. 남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웃지마! 날 비웃지 말란 말이야…!"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해 사진을 향해 지껄여댔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광기 어린 고함소리에 복도를 순찰하고 있던 간수들이 그제서야 허둥지둥 달려와 철창을 곤봉으로 세게 두드렸다. 그러나 그런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고분고분하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평소 602번이 건들지만 않으면 조용히 지내는 수감자라는 사실을 알기에 머뭇거렸던 간수들은 결국 견디다 못해 602번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602번, 이기라시! 입 다물고 얌전히 방에 앉아있지 못해!"

 

"평소에는 얌전했던 놈이…오늘따라 왜 그러는 거냐! 체벌이라도 받고 싶은 거야? 앙?"

 

 

얌전하다는 말은 평소 남자의 속이 얼마나 불타오르고 있는지 모르는 간수들이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단어였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는 얌전할지라도 마음만큼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야수에 가까웠다. 오늘따라 심기가 사나운 남자는 얌전히 몸을 움츠리기는 커녕 되려 간수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본다한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여전히 독방에 갇힌 수감자였고 간수들은 그를 옥죄는 감시자였다.

남자는 고함을 내지르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에 들린 사기조각을 미친듯이 휘둘렀다. 남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분노를 마음속이나마 외쳤다.

 

 

'나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다! 지금 네놈들이 나를 그렇게 비웃지만 곧 그 웃음을 얼굴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주지! 날 이 꼴로 만든 녀석들과 날 비웃은 네 놈들을…, 모조리 다 박살내버리겠어!'

 


"큭…크하하하하하하!"

 

 

상상만 해도 짜릿한 기분에 남자는 유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마구 광소를 터뜨렸다. 남자의 시선이 갈기갈기 찢겨진 사진에서 서서히 먼지가 잔뜩 끼어 있는 방구석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찢어져 있는 흰색 봉투와 세밀하게 그려진 교도소 내부의 지도, 간수들의 순찰 시간이 적힌 시간표 그리고 붉은 빛을 깜박거리는 작은 기계가 있었다. 작은 부품들을 간신히 이어 만든 기계는 조악했지만 불길하게 뿜어져나오는 붉은 빛만큼은 피처럼 선명했다. 틱, 틱,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시계소리가 째깍이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   ◈   ◈ 

 

 



 


 

"……드!"

 

"……."

 

"어이, 데커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데커드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대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대답하지 않는 데커드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은 눈치였다. 데커드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대원들을 흩어 보았다. 데커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데커룸은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진정된 내부의 모습에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니 맥클레인이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아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하려던 모양이었다. 데커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생각의 여운을 애써 털어내며 보고서를 받아들였다.

 


"아, 미안하군. 임무 보고서인가?"

 

"그래. 어제 도쿄에서 발생한 강도단 관련 보고서다. 사건 수습은 거의 마무리 지어진 단계로 더 이상 우리가 상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마 남은 건 일반 경찰들이 알아서 할테지."

 

"그렇군.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지. 수고했어. 피곤하면 이만 쉬어도 좋아."

 

"그래. 그런데 웬일이지? 네가, 그 냉철하기로 유명한 데커드가 다른 생각을 다 하고?"


"……."

 

 

겉으로 보기에 맥클레인의 질문은 궁금함에 기인한 걱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데커드는 그 질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예의를 차리려고 의례적으로 던지는 질문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별 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는 일을 하는 팀메이트일 뿐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다.


브레이브 폴리스라는 단체는 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건에 관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한 개인 플레이였다. 개인 플레이라고 해봤자 인간처럼 취미 활동이나 어떠한 사적인 활동이 없으니 단순히 보고서를 정리하거나 사건 관련 기록을 찾아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애초에 그들은 감정도 없이 단순히 논리적인 사고에 기인하여 인간처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일 뿐, 나머지는 컴퓨터나 다른 기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대감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감정이었다.

 

때문에 데커드는 대답 대신 맥클레인이 건네준 보고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제를 완료했다는 표시로 보고서 끝에 도장을 찍어 다시 맥클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보고서에 이상은 없으니 이대로 총장님에게 제출해도 괜찮을 것 같군."

 

"알겠어."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맥클레인에게서는 질문에 답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일말의 불쾌감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덤덤한 표정,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 그것이 동료라는 틀에 갇힌 이곳, 브레이브 폴리스의 관계였다. 정말 나답지 않군. 데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이지 않을 것들이 계속해서 메아리처럼 맴돌며 머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맥클레인이 물러가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자 데커드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정비 도중에 환상을 보고 난 후부터 종종 이렇게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당연한 것인데도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일까. 기술 총 책임자인 토도에게 물어보니 정비 도중 환상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간혹 있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정신회로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기억 데이터의 일부분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토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데커드는 토도의 대답에서 전보다 더한 의문만 안고 돌아왔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그 소년은 대체 누구일까. 데커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난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쉴새없이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품으로 가득 채워진 몸에서 나사라도 하나 빠진 것일까. 그렇다면 나사가 빠진 그 작은 자리가 이렇게 공허한 것일까. 데커드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 데이터를 재정비했다. 그 어디에도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사건들로 뒤덮힌 기억들 속에서 어쩐지 맑은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슬플 정도로 먹먹해지는 느낌에 데커드는 저도 모르게 주문을 작게 되뇌었다. 그것은 혼란에 잠긴 자신에게 유일하게 냉정을 찾아줄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나는, 로봇이다.

   

그 말을 되뇌이기가 무섭게 묵직한 감각이 몸을 짓눌렀다. 데커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환상의 통로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현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래, 자신은 로봇이었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 아닌, 차갑고 딱딱한 부품으로 이뤄져 인간의 명령을 따를 뿐인 로봇. 인간에게 프로그래밍된 감정 없는 로봇 주제에 마치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해버리다니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로봇이라는 말 한마디가 환상 속에서 웃어주던 소년과 벽을 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커드는 가슴이 죄여오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이것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   ◈   ◈ 

  


 


 


 


"있지, 파워죠. 잘은 모르겠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뭐가? 그리고 너 또 서류정리하기 싫어서 그러는거지? 한가하게 입을 놀릴 시간이 있으면 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나 정리하지 그래, 드릴보이?"

   

말 한마디 꺼내기가 무섭게 파워죠의 날카로운 일침이 날아오자 드릴보이는 일순간 침묵했다. 파워죠의 말대로 드릴보이의 책상에는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된 브레이브 폴리스지만 드릴보이는 유독 서류를 제대로 결재하지 않고 끝까지 미루다가 나중에야 허겁지겁 정리하곤 했다. 이와 관련해 브레이브 폴리스의 설비 총책임자인 토도가 몇 번씩이나 고장난 부분이 없는지 검사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늘 정상이었다. 그 이후로 토도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릴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릴보이의 옆자리에 배정된 파워죠로서는 그런 토도의 반응이 영 못마땅했다. 그는 드릴보이의 정비 결과가 정상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는데 드릴보이는 서류정리뿐만 아니라 가끔 오늘처럼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드릴보이의 증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워죠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그를 수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에이~!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고. 파워죠는 정말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겠어?"

 

 

순간의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고 깨졌다. 기꺼이 눈 앞에 있는 서류를 외면한 드릴보이는 파워죠의 일침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볍게 넘기고 또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파워죠는 귀찮거나 응답할 가치가 없더라도 드릴보이의 말을 받아주는 것이 그나마 빨리 대화를 끝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체득한 지 오래였다. 때문에 파워죠는 드릴보이의 질문에 나름 성실하게 답했다.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네 기분이 이상한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물론 내 기분도 이상하지만 지금 말하는 건 그게 아냐! 내 말은 브레이브 폴리스가 정말 이상하다는 거야!"


"브레이브 폴리스가? 내 눈에는 지극히 정상인데? 부서진 녀석도 없고, 불을 뿜는 녀석도 없고. 다들 제자리에 앉아 있는 이 상황이 대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야?"



파워죠의 대답에 드릴보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한심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표정에 순간 울컥해버린 파워죠는 당장이라도 내리꽂고 싶은 주먹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드릴보이와 대화하다보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한 감각들이 울컥울컥 솟구치곤 했다. 그런 파워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릴보이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 잘 생각해 봐. 우리 브레이브 폴리스는 무려 로봇 경찰이라구! 그런데 왜 나는 가슴에 축구공이 박혀있고, 파워죠는 온통 호랑이 무늬이며 다른 대원들은 각자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야."

 

"…무슨 뜻이야?"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파워죠가 되물었다. 이번만큼은 건성으로 되묻는 것이 아닌 진지한 물음이었다. 평소 드릴보이가 뜬금없이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히 넘어가기에 너무 진지한 주제였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우리는 로봇 경찰이잖아? 그렇다면 데커드처럼 경찰차를 본뜬 모습을 하는 게 훨씬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효과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왜 우리는 다른 차를 모델로 하고 있고 각자 다른 외양을 가지고 있는 걸까? "


"그래야지 다양한 기능들을 쓸 수 있었을테니까 그런 거 아냐? 우리가 모두 경찰차였다면 너처럼 드릴이라던가, 쉐도우마루처럼 다양한 변신기능을 탑재할 수 없었을 거 아냐."


 

게다가 모두 외양이 다르니 구별하기도 쉽고. 덧붙인 파워죠의 말까지 들은 드릴보이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다지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파워죠는 나름 머리를 굴려 나온 대답에 드릴보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맥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파워죠는 드릴보이가 그렇게까지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건에 관한 의문을 떠올리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드릴보이가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하지만 구별할 목적이었다면 색을 다르게 해서 구별하는 방법도 있어. 다양한 기능이라는 점은 납득이 가지만 저마다 다른 기능을 탑재해도 경찰을 나타내는 색을 동일하게 통일하거나, 디자인을 통일하는 다른 수단을 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단순히 로봇 경찰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걸? 내 생각에는 말야, 이건 구별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마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지 않아?"

 

"단순히 감정이 없는 로봇을 위해서 개성을 살려서 만들었다고? 마치 우리에게 감정이라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파워죠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추측을 늘어놓던 드릴보이는 파워죠의 웃음을 보며 말없이 침묵했다. 이윽고 드릴보이의 표정에 어딘가 공허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 미소는 감정이 없는 로봇이 드러내는 표정치고는 너무나도 인간다운, 슬픔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그러네…."

 


드릴보이의 힘없는 대답 이후로 파워죠와 드릴보이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만이 둘 사이에서 들리는 전부였다. 그러나 평온해보이는 파워죠와는 달리, 드릴보이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멍하니 데커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드릴보이의 시선이 문득, 데커드의 책상 바로 위에 놓여있는 작은 책상과 의자에 다다랐다. 드릴보이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가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이 앉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사에지마 총감이 종종 앉던 것을 제외하면 늘 비어있는 지휘관의 책상과 의자였다. 지휘관이 없는 브레이브 폴리스가 당연한데도, 어쩐지 오늘따라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지휘관이 없는 일상이 그렇게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걸까. 드릴보이는 애써 허전한 느낌을 털어내며 잔뜩 쌓여있는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처럼의 상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서류가 메꾸기 시작했다.

허전함의 원인이 더 이상 이 장소에, 이 나라에, 이 세계에 없는, 사라져버린 어떤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 채 드릴보이는 말없이 손을 놀렸다. 그렇게 오늘도 야속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   ◈   ◈ 

 


 


 

 

 

 

 

 


  [20xx년 겨울,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짜잔! 이거봐, 멋지지?"

 


소년이 잔뜩 힘이 들어간 포즈를 잡으며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양손을 허리에 척! 하고 얹은 채 다리를 V자로 벌린 소년의 모습은 왠지 눈부시도록 해맑았다. 아마 소년이 입고 있는 검은색의 교복, 가쿠란을 자랑하기 위한 포즈인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가쿠란은 소년이 입기에는 너무 컸다. 어떻게 보면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해!' 라는 포스를 내뿜는 소년을 보며 데커드는 잠시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소년을 위해 침묵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데커드의 이런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데커드 대신 진실을 말할 위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바로 파워죠였다.

  
 

"저기, 보스? 그 가쿠란은 보스한테 너무 큰데? 어…,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야."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다고 말하면서 파워죠는 잘도 자신의 의견을 가차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데커드는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묘한 안심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덤프슨과 맥클레인을 비롯한 모두가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어딜보나 변명으로 느껴지는 목소리로 서툴게 대답했다.

 

 

"나, 나도 알아! 그렇지만 누나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키가 클테니까 미리 큰 교복을 사놓는 게 낫다고 했어!"

 

"…키가 클 가능성은 확실히 있는 거지?"

 

 

무심코 덤프슨이 발표를 하듯이 손을 번쩍든 채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우와 직격인데!'라는 표정이 모두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쉿! 그건 민감한 부분이라 말하지 말랬잖아, 바보야!'라는 건맥슨의 타박이 이어졌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모든 소리를 소년이 듣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으이이이!' 하고 뜻 모를 비명을 내지르며 분한 듯이 씩씩거리던 소년은 애써 화를 삭히며 외쳤다.

 

 

"당연히 크지! 나, 난 성장기란 말야!"

 

"그렇지만 보스, 2년동안 10cm도 안 컸는데? 솔직히 보스 친구들 중에서 보스가 제일 작잖아. 아! 아닌가? 보스의 그 꼬마 아가씨 친구랑은 비슷했던 것 같기도…."

 

"으앙, 데커드으~!"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탄 제보에 이어 여자아이와 비교까지 당하자 소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데커드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이런이런, 그렇지않아도 키는 민감한 주제였는데. 데커드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진지하게 모두에게 충고했다.

 

 

"저기, 사실이긴 하지만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건 곤란하다고 생각해. 입장 바꿔서 생각을 해봐. 만약 너희들이 보스라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어? 계속 그러면 스트레스로 키가 더 안 클 수도 있단 말야. 그러니까 당분간 자제를 좀 해줘. 너무 솔직한 것도 좋은 건 아냐. 때로는 경찰로서 선의의 거짓말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익! 데커드!"

  
 

믿었던 데커드마저 이렇게 나오자 소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며 울상으로 변했다. 동시에 푸하하, 하고 경쾌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심지어 섀도우마루와 듀크마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어울려주기라도 하듯, 햇살이 부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고 포근한 온기가 모두를 감싸안았다.

소년이 존재하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부실은 언제나 봄 햇살이 반기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지금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는 매서운 겨울이 되었을지라도.

 


 

 


 


 


 

 

 ◈   ◈   ◈ 

 


 


 


 


 


 

"환상이라고?"

 


기계실로 내려와 토도의 보고를 듣던 중, 뜬근없는 단어에 사에지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토도는 사에지마가 들은 말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무슨 내용인지 듣고 싶었지만 데커드가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아서 자세히 묻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지워진 기억 데이터의 내용인 것은 확실해. 데커드가 이건 자신에게는 없는 기억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몰래 들었거든. 그렇다면 어떤 '환상'인지는 뻔하지 않나?"

 


사에지마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라는 거군."



사에지마는 헛웃음을 흘리며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잊게 만들려고 노력했는데도 어째서 그 아이에 대한 각인은 이리도 선명한 것인가. 그것은 지독하다면 지독한 인연의 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심장에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에 사에지마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천장만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토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는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사에지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나는 절대로 그들에게 기억을 되돌려줄 수 없다네."

 


과거의 파편이 사에지마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슬픈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작은 소년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더랬다. '부탁이에요, 사에지마씨.'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전한, 소년의 마지막 유언이자 약속. 그리고 사에지마는 그 잔인한 약속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나는, 그 아이와 약속해버렸으니까…."

마지막까지 브레이브 폴리스를 걱정하던 소년은 말했다. 온 몸이 상처와 피로 뒤덮혔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은 마지막에 간신히 잡은 의식의 끝을 오로지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해 바쳤다. 새하얀 병원 침대에 누워 손목에 여러 개의 링겔까지 꽃고 있었으면서 사에지마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세게 쥐며 몇 차례나 당부했었다.

 


[사에지마씨. 만약…,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제가 죽으면요, 브레이브 폴리스가 어떻게 변해버릴지는 아무도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절 보내고 꿋꿋하게 사건을 해결하길 바라지만…, 그건 그들에게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 될거에요. 저라도 브레이브 폴리스 중 누구 하나라도 다쳤다면 쿨럭, 무척이나 슬퍼서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을테니까요…. 사실 지금도 데커드가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을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걸요. 저도 그런데 모두가 얼마나 아플지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아요.

그거 아세요, 사에지마씨? 저는, 브레이브 폴리스를 로봇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분명 비웃을 일이겠죠…. '아무리 인공지능을 가지고 감정을 가졌더라도 브레이브 폴리스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해! 정신차려!' 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데커드를 만난 이후부터, 제가 꿈꿔왔던 기적이 현실로 이루어진 후부터 내내 생각했어요. 브레이브 폴리스는…, 내가 사랑하는 그들은…, 로봇이 아닌 인간이라고요.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답다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비록 브레이브 폴리스의 몸이 인간의 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더라도, 온 몸이 단단한 철로 되어있더라도, 저는 알 수 있어요…. 그들의 마음에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사에지마씨, 약속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만약 그들이 저를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면 메모리 칩에서 제 기억을 지워도 좋아요…! 아니면 저 말고 다른 훌륭한 지휘관을 그들에게 붙여줘도 돼요…! 저를 잊을 정도로, 훌륭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듬직한, 지휘관을요. 이기적인 부탁이란 건 알고 있지만 저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라도 브레이브 폴리스가 살아가길 바라고 있어요.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그들을 쓸모 없으면 버릴 수 있는 로봇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브레이브 폴리스를 인간으로서 살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돌이켜보면,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 잔인한 약속이었다. 무심코 해버린 약속의 결과가 이렇게 쓰라리고 아플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떄는 그저 잔뜩 흥분한 소년을 진정시키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나이가 아무리 먹었다고 한들 예측할 수는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구나. 밀려오는 향수에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사에지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소년이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고맙다고 할까 아니면 원망섞인 말을 내뱉을까.

사에지마는 가끔 생각한다. 과연 지금 자신이 한 선택이 정말 최선의 방책이었는지 그리고 소년의 기억을 그들에게서 반드시 지워야만 했는지. 소년의 사망 후, 브레이브 폴리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망가져버렸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품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심하게 상처입은 마음은 아무리 노력해봐도 고쳐지지 않았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성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브레이브 폴리스의 자랑거리인 합체조차 실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때로는 의견 차가 심하게 갈린 나머지 팀원들간의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다. 소년이 살아있을 적에는 늘 소년과 리더인 데커드가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거나 화해의 분위기를 조장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데커드는 아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기계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내비치는 감정이 있다면 끝없는 슬픔과 자책감이었다.

 

새로운 지휘관을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결국 경찰 내부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소년과의 약속대로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립을 위해 사에지마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의 지휘관 후보들을 도입했다. 우수한 경찰관에서부터 소년의 친구들까지, 연령대와 개성은 다양했다. 그러나 이 모든 후보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브레이브 폴리스가 경찰 상부에 불만을 가지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우리들의 보스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새로운 사람을 임명하는 거죠! 당신들은 우릴 지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들의 보스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벌써 잊은 겁니까! 끝내 곪아버린 상처에서 울음소리가 먹먹하게 터져나왔다. 그 방법은 그저 서로에게 상처만 더했을 뿐이었다.

 

죽어버린 시간을 보내는 부질없는 나날들이 이어지던 와중에, 기어이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끊없이 이어지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미해결 사건 보도에 결국 신문에서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기사까지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사회에 공론화되었다. 일본의 영웅이라고 지칭할 때는 언제고 성능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브레이브 폴리스를 단순한 고철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능력 없는 기계에게 세금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폐기 처분을 시키자는 의견들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때문에 사에지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 사항은 오직 두 개였다. 브레이브 폴리스를 폐기시키던지, 아니면 이제는 끊임없는 트러블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지우던지.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번민을 거듭했다. 소년이 죽고 망가져버린 브레이프 폴리스를 알면서도, 소년의 유언대로 차마 할 수가 없어 필사적으로 다른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년과 했던 약속은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사에지마의 눈 앞에는 오직 하나의 선택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결국 사에지마는 정비라는 이유를 핑계로, 아무 의심 없이 몸을 맡긴 브레이브 폴리스에게서 소년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소년이 존재했다는 모든 증거를 브레이브 폴리스의 주위에서 말소시켰다.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소년의 가족들을 경시청과 떨어진 곳으로 이사시켰고 소년의 친구들에게는 브레이브 폴리스를 만나지 말아달라고, 만나더라도 소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브레이브 폴리스와 친한 아야코나 세이아 일사에게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이라도 한건지 소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암살의 표적이 되기 쉽단 것을 알고 소년의 존재를 숨기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었기에 그나마 사회적인 흔적들을 지우는 것은 수월했다. 소년이 사망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 사건' 이후로 소년이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이라는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 또한 전 세계 매체에 특정 기억을 지우는 세뇌 전파를 내보냄으로써 소년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이제 소년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브레이브 폴리스에 인간 지휘관은 없다' 혹은 '브레이브 폴리스에 인간 지휘관이 있었지만 원인불명의 이유로 1년전에 사임했다' 정도로만 기억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빌런 '메모리아'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기억을 지운 결과, 브레이브 폴리스의 능력은 브레이브 폴리스를 처음 설계할 당시 예상했던 수치로 되돌아왔다. 문제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이 소년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 소년의 기억을 지움과 동시에 브레이브 폴리스의 모든 기억데이터가 말소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브레이브 폴리스는 소년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세이야 일사도, 아야코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처음 태어난 아기처럼 브레이브 폴리스는 어떤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남은 것은 '기억'이 아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지식' 뿐이었다. 마치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데이터처럼, 기계적인 자료만이 그들의 데이터에 기록되었다.

결국 감정으로 인해 강해진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으로 인해 무너졌던 것 뿐인가. 아즈마 부총감은 그런 브레이브 폴리스를 보고 이렇게 평했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서 기억을 없애자 마치 거짓말처럼 들쑥날쑥했던 능력치가 일정한 수치를 보였고, 미해결 사건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떠들썩하던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러나 브레이브 폴리스에 깊숙히 관여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브레이브 폴리스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과거, 브레이브 폴리스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던 감정은 모두 소년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기억을 지운 지금,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애써 논리적으로 돌아가려는 기계처럼, 어떤 희노애락도 표현하지 않은 채 단순한 로봇처럼 움직였다. 또한 아즈마 부총감의 말처럼 감정으로 인해 강해진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을 가졌던 계기인 소년의 기억이 사라지자 그 당시 보여주었던 능력조차 사라졌다. 일정한 수치를 보이기는 했으나 거기에 그칠 뿐, 소년과 함께 있을 당시의 높은 능력수치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기억을 지운 사에지마에게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소년은 분명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길 바랬다. 그러나 현재의 그들은, 결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로봇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에지마로서는 그저 어쩔 수 없었다고 끊임없이 되뇌일 뿐이었다. 소년이 존재하던 시절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며 사에지마는 끝없이 침잠하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자네 탓이 아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브레이브 폴리스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 그들을 책임졌던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토도가 자책으로 뒤덮힌 사에지마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후회하고 자책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중했던 4년 동안의 추억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는 죄책감은 끝없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토도는 말없이 사에지마의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서 있었다. 때로는 말없는 침묵이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해주던 침묵 끝에, 사에지마가 비로소 진정된 모습을 보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토도는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고 본론을 꺼냈다.

 


"실은 내가 자네에게 잠시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한 건 데커드가 보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야.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지만…, 지금 상태로 들으면 분명히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해서 망설이고 있었네. 그러니 자네가 직접 선택하게. 듣고 싶은가? 아니, 들어도 괜찮겠나?"

 


감정을 추스른 사에지마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말게. 이래뵈도 경시청의 총감이고 아직은 팔팔하기 그지 없어."

 

"…좋아, 그렇다면 말하겠네. 실은 이번에 데커드에게 경찰로서의 자질을 테스트하기 위해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 이 검사는 현재로부터 5년 전, 데커드가 처음으로 감정을 가졌을 때에도 받아보게 한 검사였지. 이 다음은 말로 설명해도 소용없을테니 이걸 보는 게 좋겠군."

 


토도는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콘을 꺼내 기계실의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켰다. 몇 번 리모콘을 조작하자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텔레비전에 무언가가 나왔다. 화면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토도와 데커드였다. 화면이 또렷하지 않은 것을 보니 방에 설치되어 있던 감시 카메라의 영상인 듯 했다. 화면 밑에는 작게 일자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에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토도가 물었다.

 

[데커드, 너는 지금 흉악한 살인범을 쫓고 있다. 살인범은 험한 산 속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산 너머에는 마을이 하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살인범을 잡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인범을 쫓는 도중, 너는 심하게 다쳐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만났다. 다친 사람을 즉시 병원으로 이송할 경우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만 만약 너가 여기서 다친 사람을 두고 간다면 곧 사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친 사람을 살린다면 살인범을 놓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너는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흐릿한 화면속에서 토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이 질문은 경찰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면접을 볼 때 최종적으로 던지는 질문 중 하나였다. 한 명의 희생이 있더라도 다수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만약 둘 다 살릴 방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과 이유에 따라 경찰이 될 자질 혹은 인성이 판단되며 최종적인 결과까지 달라지기도 했다.


사에지마는 떨리는 심정으로 데커드의 답을 기다렸다. 답하기에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토도가 던진 질문에 데커드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갈등의 기색도 없이 단번에 대답했다.

 

 

[저는 살인범을 쫓겠습니다.]

 




"....뭐라고!"


"진정하게. 아직 이유가 남았잖나."

 

영상을 보고 있던 사에지마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토도가 애써 사에지마를 달랬다. 이유가 남아있다는 말에 그제서야 사에지마는 초조함을 감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지되었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영상 속의 데커드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답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변의 내용은 사에지마를 진정시키기는 커녕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는 범죄를 예방하고,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입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명령이 제게 떨어지고, 그것이 인식되면 그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살인범을 쫓으라는 명령이 최우선시로 입력되었을 뿐, 그 이외의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저 살인범을 쫓을 뿐입니다. 혹시 그 이전에 다친 인명이 보이면 구조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에는 구하겠습니다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지금 제게 주어진 질문에서는 살인범을 쫓으라는 명령만 내려져 있지 않습니까.] 



  

사에지마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커드가 한 말은 한 점의 흠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로봇이라면 마땅히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여기게끔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를 아는 사에지마 그리고 토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지극히 기계적인 대답이 무척이나 쓰라리게 다가왔다. 만약 소년이 있던 때라면, 감정이 존재했던 브레이브 폴리스였다면 결코 이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았으리라. 참담한 기분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사에지마를 보며 토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충격이 컸나 보군. 하긴 나 또한 그랬으니 어쩔 수 없긴 하네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에지마가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저것이, 정말 현재의 브레이브 폴리스란 말인가? 그들이 1년 사이에 이렇게나…, 이렇게나 망가져 있었단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마음 자체가 없게 되어 버렸지. 사실 나도 이 검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브레이브 폴리스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지 못했네. 비록 그들이 기억을 잃고 마음을 전처럼 내보내지 않지만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 예전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네. 우리는 그저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그들은 단지 인간처럼 흉내내고 있을 뿐이었어. 절대로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네. 브레이브 폴리스 중 처음 감정을 알고, 마음을 가졌던 데커드가 이 정도의 상태라면…, 다른 대원들의 모습들은 생각할 것도 없지."

 

"……."

 

"내가 아까 말했었지. 이 검사는 5년 전에도 데커드에게 한 적이 있다고 말일세. 그 때 데커드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있나?"

 

 

토도는 기억을 5년 전으로 되돌렸다. 막 데커드가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브레이브 폴리스가 창설되었을 무렵의 과거. 토도는 소년과 데커드가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충동적으로 지금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데커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친 사람을 먼저 구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분명, 제가 받은 명령은 살인자를 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있다면 응당 먼저 해야할 일은 다친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기계이고 제 심장은 고철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진 경찰, 아니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구해야할 것은 인명의 구조일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데커드는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소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데커드에게 엄지 손가락을 올려보이고 있었다. 온전히 상대를 믿는 순수한 눈빛에 힘입어, 데커드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게는 동료가 있습니다. 누구보다 소중하고 또 제 마음을 잘 알아주는 동료. 제가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면 분명 그들은 이해를 해줄겁니다. 또 저 대신에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 폴리스는 결코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야말로 십점 만점의 십점의 대답이었다. 토도는 대답을 마친 데커드가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데커룸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은 비어있지만 머지 않을 미래에 이 데커룸은 신뢰로 뭉쳐진 동료들로 채워질 것이다. 분명 많은 일이 있을테고, 때로는 갈등도 있겠지만 결국 그 많은 일을 거쳐 소중한 동료로 자리잡으리라. 데커드의 굳은 의지가 담긴 눈동자가 토도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비록 차가운 유리로 만들어져 있을지언정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마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 말야. 하지만 지금의 브레이브 폴리스에게는 그것이 없네. 나는 브레이브 폴리스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옛날처럼 되돌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감히 그렇게 생각했지…."


"……."

침묵하는 사에지마를 곧게 응시하며 토도가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몸을 준 것은 나였지만…, 브레이브 폴리스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아이의 공이었네. 그 아이가 존재했기에 데커드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다른 대원들도 데커드의 마음에 기초하여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거야. 그 아이는 자신의 소망을 현실로 구현시켰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그 아이는 절대적인 존재, 말하자면 '신'이었던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없는 이상, 이대로 가다가는 브레이브 폴리스는 무너질 거네!"

 

"토도!"

 


브레이브 폴리스의 와해를 예상하는 그의 발언에 사에지마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토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에지마, 자네는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건 엄연한 사실이야! 마음이 없는 경찰에게 이 나라를 맡긴다고? 인간의 목숨의 소중함을 모르는 경찰에게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나! 그들이 마음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는 있을 수가 없어! 나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처음 만들 때는 마음이 있는 로봇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하지만 겪어보니 알겠어. 그들은 마음이 있어야만 해!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브레이브 폴리스가 이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정말 인간으로서 살길 바라는 그 아이의 마음에 부합되는 거라고 생각하냔 말일세!"

 

"……!"

 

 

토도는 사에지마가 생각하고 있는 핵심을 찔러왔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분명 소년의 소망이었을 터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브레이브 폴리스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마치 매서운 칼날이 되어 사에지마의 과오를 심판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기계실을 가득 채웠다. 토도도, 사에지마도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두려웠다. 침묵을 깨고난 다음에 이어질 결과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삐삐! 삐삐! 다급한 통신요청을 알리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트렸다. 그 소리의 근원은 사에지마의 주머니에 있는 무전기에서 들리고 있었다. 긴급상황이 아니면 결코 울리지 않을 무전기임을 알기에 사에지마는 황급히 통신을 연결했다.

 

 

[총감님! 들리십니까, 총감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긴박감으로 대충 사태의 중요성을 눈치챈 사에지마가 급히 답했다.


 

"나다, 사에지마다! 무슨 일인가?"

 

[긴급 사태입니다! 일 년전 타워 점거 소동을 벌였던 이기라시 긴타가 요쿄하마 형무소에서 탈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빨리 회의실로 와 주십시오! 자세한 상황은 오시면 바로 브리핑에 들어가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래 알겠네! 즉시 가도록 하지!"


 

사에지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뛰쳐나갔다. 그 뒤를 토도가 빠른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이기라시 긴타라니! 가끔 매체에서 회자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앞으로 30년은 직접적으로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도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 그가 탈옥한 거지? 어떻게 그리고 왜 탈옥한 건가. 사에지마는 솟구치는 수백 가지의 의문을 품은 채 황급히 발을 놀렸다.

사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사에지마는 어떤 미지의 소리를 들었다. 소년이 죽은 이후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시계는 줄곧 멈춰 있었다. 그러나 현재를 기점으로 멈춰있던 육중한 추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명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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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1차 수정 완료

늘 수정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이제야 1차 수정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수정하는 내내 오타에, 비문에, 설정오류까지...아무리 멋대로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요.

차라리 글을 새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몇 번이고 읽어보면서 고친 것 같네요.

이 미숙했던 과거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힙니다.

작별의 노래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글입니다. 하지만 스토리는 다 구상해두었고 완결까지 꼭 쓰고 싶습니다.

원래는 짧게 상, 중, 하로 구성했으나 폭발적인 분량으로 수정본은 나누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쓸 예정이에요. 물론 뒤엎은 설정 때문에 수정부터 완료한 후에 후편을 쓸 수 있겠지만요(,_,)

아래로는 과거에 썼던 후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츠쿠리라고 합니다.

블로그를 리뉴얼 하고 나서는 처음 올리는 제이데커 글입니다.

이 글은 몇 년 전부터 구상했습니다만 제이데커에 대한 애정도와 글 쓰는 실력은 별개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아마 짐작들 하셨겠지만 이 글은 제이데커 본편 완결 후의 미래, 유우타가 죽음을 가정하고 쓴 소설입니다.

제가 유우타에 대한 애정도가 워낙 충만해서 소재를 고르다보니 무려 죽음(..)이 나왔네요.

정작 주인공인 유우타는 후반에 나올 예정입니다((그리고 무기한 연재중지))

 

이 글을 구상했을 때, 저는 유우타라는 존재가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우타가 있었기에 데커드에게는 감정이 생길 수 있었고 데커드에게 감정이 생겼으므로 브레이브 폴리스, 나아가 모든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었지요. 즉, 유우타는 모든 감정을 가진 로봇의 기반이자 창조주, 신과 같은 대상입니다.

만약 유우타가 단순히 감정이 없는 기계를 창조했다면 별 다른 나비효과가 생기지 않았겠지만 감정이 있는 로봇을 창조한 이상, 로봇들은 부모를 잃은 인간처럼 슬퍼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수많은 존재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기억을 희석시킴으로서 슬픔 또한 흘려보내지만 로봇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죽은 존재가 창조주나 다름없는 유우타라면 슬픔이란 감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그런 가정 하에 이 글을 썼습니다.

후반에 좀 더 자세하게 나오겠지만 이미 브레이브 폴리스는 진화된 초A.I를 가졌기 때문에 '감정시스템'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메모리에서 유우타와 함께한 최초의 기억(데커드와의 첫만남을 비롯한 모든 기억)을 지움으로서 '감정을 가졌다는 기억' 자체를 지웠기 때문에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없는 로봇이라면 애초에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게 힘들겠지요. 제이데커 초기의 빌드팀처럼 단순히 명령인식+수행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후반에 글과 후기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점점 더 스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ㅋ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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