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아린]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

W.B - 츠쿠리

 

  

 


 

 

 어제 내린 비가 무색하게 날이 개여 해가 비쳤다. 산들바람이 정원에 심어진 꽃들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렇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는 그야말로 피크닉을 가기에 제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레드포드 공작가는 아침부터 고함소리로 뒤덮였다.

 

",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납득할 수 없다는 겁니까, 자작님? 제가 충분히 설명을 드렸잖습니까?"

 

애쉬가 소리치자 부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는 원래 레드포드 공작의 소관 아래 있는 최측근으로, 매사에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기로 유명했다. 사실 좋게 말하자면 철두철미한 거고 소위 들려오는 말로는 깐깐하고 고지식하기 그지없어 레드포드 공작마저도 한 수 접어준다는 소문이었다. 부관은 최근 레드포드 공작의 요청으로 애쉬의 옆에서 집무를 돕는 중이었는데 어찌나 질책이 매섭던지 그의 앞에서는 계급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애쉬는 몸을 움츠렸다. 계급은 애쉬가 높았지만 부관은 아버지의 옆을 몇 십년동안이나 보좌해온 최측근이니만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애쉬도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쉬가 용기를 쥐어짜내 소리쳤다.

 

"설명만 하면 다인 줄 아십니까! 저도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왜 아들인 제가 서류를 처리해야 합니까? 아버님은요?"

 

"레드포드 공작님이시라면 어제 저녁 늦게 공작부인을 모시고 함께 여행을 가신다고 하시면서 자작님께 전언을 남겼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

 

"'흠흠, '오랜만에 부부동반 여행을 간다. 너도 슬슬 레드포드 공작가를 이어야 하니 내가 없는 동안 충분히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잘 부탁 한다 미래의 레드포드 공작아!' 이상입니다. 특별히 목소리도 공작님과 비슷하게 내어봤습니다."

 

부관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레드포드 공작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 말하기 전에 목소리를 조금 떠는 버릇마저 똑같았다. 그러나 애쉬는 부관이 레드포드 공작의 목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다만 평소 그의 성격답지 않게 격하게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메세지의 내용은 점잖았지만 그 속에는 일을 아들에게 모두 떠맡기고 희희낙락하며 놀러갔을 레드포드 공작 부부의 기쁨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애쉬는 끓어오르는 화를 최대한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늘 제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업무는 갔다 와서."

 

그러나 부관은 애쉬의 간절한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잘라버렸다.

 

"아하, 그거라면 정말 진심으로 절절하게 이해해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국가의 중대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국가의 중대사와 사적인 일 중 무엇이 더 중요하십니까?"

 

"그야 물론 국가의 중대사지만!"

 

"그럼 결정 났군요. , 어서 서류처리를 시작해주십시오. 지금 갑작스러운 몬스터 떼의 침입에 도성이 난리란 말입니다. 지방도 아닌 도성 외곽 지역에 몬스터가 출연하다니! 이게 전대미문의 사건인 것은 자작님도 잘 아시겠지요? 빨리 응원군을 불러야하니 쌓인 업무처리를 시작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일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부관의 행태에 피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렇지만 이번 사적인 일은 국가의 중대사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다! 애쉬는 간절한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제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주길 간절히 원했으나 부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결제할 서류를 분류해 그의 앞에 늘어놓았다. 게다가 애쉬의 원망어린 눈초리를 꿋꿋이 버티며 감시하기 위해 문 앞에 서 있기까지 했다! 결국 애쉬는 긴장, 초조 불안이라는 3대 스트레스 신경통을 끌어안고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애쉬를 지켜보는 부관의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대는 애쉬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됐을꼬.'

 

부관이 기억하기로 애쉬 레드포드, () 레드포드 가의 후계자는 철두철미하며 빈틈없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의 외모나 검술 실력은 몹시 뛰어나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영애들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애쉬 레드포드는 일찌감치 열렬한 애정공세에 질려 검술에만 매진하곤 했지만.

 

그런데 그런 그가 언제부터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우고 다니기 시작해 레드포드가의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성격을 개조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서 징징거리는 그를 누가 차갑디 차갑던 애쉬 레드포드라고 믿겠는가.

 

부관은 집무용 책상 옆에 걸려 있는 달력을 힐끔 쳐다보았다. 애쉬가 스케줄을 적어두는 달력이었다. 516. 오늘 날짜에는 빨간 펜으로 큰 동그라미가 여러 번 겹쳐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조그맣지만 정성이 듬뿍 들어간 글씨로 '아린과의 데이트' 라고 써져있었다.

 

'사랑에 미치면 제 부모도 몰라본다더니.'

 

부관은 혀를 끌끌 찼다. 옛 성현의 말씀은 들어봤자 틀릴 거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무섭다. 애쉬 레드포드가 저렇게 변한 것도 아시리안 A 플레이저 영애가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애쉬 레드포드가 플레이저 영애에게 사랑에 빠질 줄은! 부관도 몰랐고 레드포드 공작도 몰랐고 심지어 당사자인 애쉬 레드포드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애쉬가 변한 것이 그리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빠져도 너무 빠진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겉으로는 전과 달라진 점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눈에는 하루가 지날수록 무서우리만치 달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아시리안 A 플레이저 영애가 기꺼이 애쉬 레드포드의 사랑에 응했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쉬 레드포드는 첫사랑 상대를 잘못 만났다. 부관이 듣자하니 플레이저 영애는 아버지인 재상을 닮았는지 머리도 비상한데다가 검술, 마법, 정령술에 능숙한 인재 중의 인재라고 했다. 거기다 타고난 외양도 아름다워 한 때 제 1왕자였던 브랜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나. 문제는 플레이저 영애 자체가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다른 영애처럼 꽃이나 악세서리를 좋아했다면 공략이라도 해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잘생긴 남자에 혹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보석이나 돈에 혹하는 것도 아니다. 애쉬 레드포드는 어려워도 너무 어려운 여자를 첫사랑으로 택한 것이다.

 

심지어 애쉬 레드포드는 이미 플레이저 영애에게 고백했다가 단번에 차인 전적이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끈기만으로 세상만사가 모두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부관의 20년 넘게 갈고 닦아온 감에 의하면 솔직히 애쉬 레드포드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

 

'우리 자작님만 불쌍하게 됐군.'

 

부관은 새삼스레 애쉬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동시에 아시리안 플레이저 영애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도대체 어떤 영애이기에 저 철벽의 애쉬 레드포드가 넘어간단 말인가! 부관은 언젠가는 꼭 아시리안 영애를 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평가하고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 ◈ ◈

 

 

 

 


, 엣취!"

 

방금까지 레드포드 공작가의 부관이 절실히 궁금해 마지않던 대상, 아시리안 A 플레이저 영애, 아린은 느닷없이 나온 재채기에 코를 훌쩍이며 어리둥절해 했다.

 

"웬 기침이람? 이제 봄이라 딱히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 혹시 누가 내 욕을 하나?"

 

아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이 있는 광장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 이 주위에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붙잡아 치도곤을 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따라 그녀의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여기가 아닌가? 아린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매서운 눈빛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났는데 그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너무 늦잖아!"

 

아린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툴툴거렸다. 지금 시각은 한시 삼십분. 약속시간인 한시로부터 벌써 삼십분이나 초과됐다. 아린은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약속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고, 괜히 약속시간보다 이십분이나 일찍 나왔다고 후회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들떠 약속시간보다 이십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 패인이었다.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만 따지자면 벌써 오십 여분을 넘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랬담. 아린은 스스로에게 '난 약속시간 어기는 거 무지 싫어하니까!' 라고 서투른 변명을 남겼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 그러나 아무리 변명하고 툴툴거려도 그럴수록 풀이 죽었다. 동시에 그 녀석, 애쉬 레드포드에게 무한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자기가 먼저 제안해놓고 감히 바람을 맞혀? 아시리안 플레이저가 애쉬 레드포드에게 바람 맞았다는 사실이 사교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대망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아니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기라도 하지! 그 소식을 들은 아빠와 할아버지의 분노를 말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나쁜 놈! 먼저 제안한 사람이 누군데 감히 날 바람맞히다니!"

 

결국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아린은 씩씩거리며 발을 쾅쾅 굴리며 마구 성을 냈다. 주체하지 못한 분노를 타고 몸에서 광포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평일의 여유로운 오후. 광장에서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들을 덮친 날벼락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가는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할 미래를 예감한 것이다. 그러나 아린은 사람들이 뒷걸음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애쉬에 대한 욕을 늘어놓기 바빴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물론 꼼짝없이 레드포드 공작가에 갇힌 애쉬가 이런 아린의 태도를 보았다면 무척이나 억울해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지금 이 곳에 없었다. 게다가 아린도 이러한 애쉬의 처지를 알 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노하기 급급한 나머지 애쉬의 처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린의 머릿속에는 오기만 하면 무거운 응징으로 다스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여기서 잠깐,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며칠 전, 그러니까 아린이 차원의 틈에 빠져 다른 세계에 다녀온 후였다. 느닷없이 애쉬 레드포드가 새빨개진 얼굴로 플레이저 저택을 찾아왔더랬다. 한창 여행 준비로 바빠 지도와 책에 파 묻혀 있던 아린이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응접실로 안내했다. 책을 뒤적거리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냐는 아린의 무심한 물음에 애쉬는 '여행가기 전에 피크닉을 가지 않겠소?' 라고 제안했다.

 

평소 같았다면 거절했겠지만 아린은 차원의 틈에 빠진 이후로 마음이 몹시 너그러워져 있었다. 마침 여행가기 전에 한 번쯤은 애쉬와 데이트를 해줄 생각이 있었던 아린인지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문제는 애쉬가 떠난 이후였다. 남자와 단 둘이서 하는 데이트는 처음이라는 자각이 뒤늦게야 아린을 덮쳤다. 때문에 아린은 그녀로서는 보기 드물게 허둥거렸고 막상 피크닉 당일에는 긴장한 나머지 약속시간보다 이십분이나 일찍 나오게 된 것이다.

 

하하, 내가 미쳤지! 내가 미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녀석을 만나는데 긴장 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아린이 한창 상념에 빠져 온갖 자학과 더불어 애쉬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라, 아린?"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아린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브랜?"

 

"하하, 오랜만입니다."

 

그곳에는 전 1왕자이자 국왕이었던 브랜이 있었다. 그는 왕위 계승식이 끝난 후 궁을 떠나 아카데미로 들어갔기에 얼굴을 마주치기 쉽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무척 오랜만에 만난 셈이라 반가움이 앞섰다. 그렇지 않아도 여행가기 전에 브랜을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린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반가워요, 브랜!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카데미에 들어간 게 아니었어요?"

 

아린의 환대에 브랜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물론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이 나이에 어린 학생들 틈에 끼여서 공부하려니 좀 그렇긴 하지만요. 오늘은 휴일이어서 모처럼 오랜만에 누님을 뵈려고 왔어요. 왕궁에서 기별이 왔거든요."

 

"아하, 그랬군요."

 

아린은 사이가 좋아져서 자주 왕래하게 된 브랜과 루실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아린은 어쩐 일로 여기 계시는 거죠?"

 

"?"

 

", 별건 아니고 여행을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여기 광장에 계시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러고 보니 옷도 평소에 입는 거랑 좀 다르시네요?"

 

그렇게 입으니 아주 아름다우세요. 브랜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린은 브랜의 말을 듣고 얼른 자신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아린이 오늘 입은 옷은 활동하게 편하게 생긴 드레스였다. 사실 드레스라기에는 프릴도, 레이스도 없어 간단하게 걸치는 원피스에 가까웠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 보았다면 단조롭기 짝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을 터였다.

 

누가 봐도 귀족 영애가 입기에 걸맞은 옷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린은 왜 브랜이 의문을 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브랜은 아린의 취미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아린이 드레스라면 질색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스와 프릴이 달려있지 않아도 드레스는 드레스, 치마는 치마다. 브랜은 아린이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물음에 아린은 몹시 당황했다. 아침에 옷을 고른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자신의 모습이 들킨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왜 갑자기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담? 아린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애쉬의 모습을 외면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 아니, 이건 그러니까, ! 맞아, 일이 있어서요!"

 

누가 들어도 변명하기에 급급한 말투였다. 그러나 다행히 상대는 둔하기로 소문난 브랜이었다.

 

"일이요? 무슨 일이시기에? ! 혹시 외곽에 쳐들어온 몬스터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

 

갑자기 바뀐 화제에 아린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브랜은 그런 아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지금 수도 외곽에 쳐들어온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으신 게 아니었나요? 그래도 일단 자작이기 이전에 플레이저 영애시니까 재상님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옷은 단순하게나마 격식을 차리려고 드레스로 입고 오신 거고 말이죠."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는 게 우선이기에 아린은 위기에서 모면하기 위해 브랜이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말에 급하게 동의했다

 

"! 맞아요! 호호, 브랜이 말하신 그대로에요. 그래도 이 정도 드레스면 아버지 체면은 지켜드릴 수 있겠다 싶었죠. 여기서 애, 아니 레드포드 자작을 만나서 같이 몬스터 처리 임무를 가기로 했는데 아직 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어요."

 

"아아! 그러셨군요. 그거라면 일단 제가 애쉬에게 기별을 넣을 테니 먼저 가세요. 애쉬 녀석, 그래도 그런 녀석은 아닌데 여성분을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 아뇨, 브랜이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요. 브랜의 잘못도 아닌 걸요."

 

아닙니다. 급한 임무가 있는데 늦는 건 치명적인 일이지요. 마침 저도 궁에 잠시 들렸다가 외곽 쪽으로 바로 가볼 생각입니다. , 아린은 정령들이 있으니까 금방 가실 수 있겠네요. 어서 가세요! 지금 외곽 쪽은 한시가 급한 상황일거에요.

 

이게 아닌데! 아린은 왠지 삼천포로 자꾸 빠지는 계획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이미 브랜의 말에 동의한 터라 어디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애쉬와의 데이트가 있다고 말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아린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그래도' 하고 머뭇거렸지만 오늘따라 강경한 브랜의 태도에 결국 실프를 불러내어 몸을 실었다.

 

"그럼 이따 뵐게요."

 

". 아린의 실력이라면 그깟 몬스터쯤이야 우습죠. 최대한 저도 빨리 따라가겠습니다."

 

오지 마, 이 멍청아! 아린은 오늘따라 술술 나오는 욕을 중얼거리며 실프를 이용해 성 외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타오르는 분노를 괘씸한 몬스터들에게 퍼붓겠노라고 결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유가 어찌됐건 이번 데이트를 망친 장본인들을 직접 처리하러 가게 된 셈이었다.

 

 

 

 

 


◈ ◈ ◈

 

 

 



"이게 뭐야, 엉망이잖아!"

 

성 외곽에 도착한 아린은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성벽의 맨 끝으로 올라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높은 성벽 덕분에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예상보다 심각하게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보안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네. 아린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대가 싸우고 있긴 했지만 본디 수도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있어 산적들이나 몬스터, 또는 타 나라의 병사들이 침입해올 가능성이 상당히 적었다. 때문에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있는 경비대들이 있다 해도 왕족의 안전을 위해 궁, 또는 성의 중앙부분에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성의 외곽부분에는 검문을 하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수가 극히 적었다. 게다가 아까 언급했듯이 수도에 몬스터들이 침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경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꼴에 경비대라고 훈련은 잘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경비대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성벽에서 화살을 쏘며 몬스터들의 침입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을 상대한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득실거리는 몬스터 떼는 조금 있으면 성문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흉포했다. 외부지원도 도착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성문이 뚫리면 답이 없었다.

 

", 할 수 없지. 그래도 자작인데 이 정도는 나서야겠지?"

 

국어책 읽는 말투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아린의 눈은 스트레스를 풀고 말겠다는 의지로 번뜩이고 있었다. 후후, 하고 음침하게 웃던 아린은 일단 손에 커다란 불덩이를 생성시켰다. 원래 인생은 선빵이라고 했다! 아린은 성벽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그 불덩이를 몬스터에게 작렬시켰다.

 

! ! !

 

거대한 불덩이가 성문에 덤벼들고 있던 몬스터를 덮쳤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일렁이는 불길과 거센 열기가 휘몰아쳤다. 몬스터 살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풍겼으나 아린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정겨운 냄새였다. 불덩이를 날린 아린이 가볍게 성 밖에 착지하자 성 안에서 방어 하고 있던 경비대가 일제히 아린을 쳐다보았다. 아린은 다시 한 번 커다란 불덩이를 생성시켜 몬스터들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난 아시리안 A 플레이저 자작이다! 외부에서 지원이 오면 방어 체제를 강화하도록! 일단 급한 불은 끌 테니까 지금은 성문이 뚫리지 않도록 집중해라! 그리고 거기 너!"

 

아린은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성벽에 있던 병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병사는 얼른 경례를 붙이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 !"

 

"이 상황에서 경례를 붙일 시간 따위는 없어! 얼른 가벼운 검 한 자루만 던져!"

 

", 가벼운 검이요?"

 

"빨리 던져! 시간 없다고!"

 

아린의 재촉에 병사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어 아린에게 던졌다.

 

"이거면 됩니까!"

 

"오케이!

 

아린은 사악하게 웃으며 단번에 검을 빼들었다. 평소 자신이 쓰던 미스릴로 만들어진 레이피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하고 무거운 검이었다. 거기다가 손에 착 감기는 맛도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보니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검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 어쩔 수 없지! 진정한 검사는 어떤 검이든 명검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아린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빠졌을 때 배웠던 마음가짐을 떠올리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피처럼 보이는 붉은 마나가 검을 에워쌌다. 아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차례차례 검을 휘둘러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오우거부터 시작해서 트롤, 가고일, 대체 어디서 등장한 건지 몰라도 몬스터들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결국 4대 정령들까지 불러낸 아린은 검을 사용하는 틈틈이 마력 탄과 마법들을 조합하여 몬스터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50마리는 넘게 죽인 것 같은데 아직도 지원병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만약 이 곳에 도착한 게 아린이 아니었다면 이미 성문은 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투가 끝나는 대로 경비대를 뒤집어 엎어버려야지, . 부실한 방어 체제에 실망을 금치 못한 아린은 굳은 결심을 하며 끝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불덩이를 날렸다.

 

그 때였다. 아린은 문득 위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자신에게로 거세게 날아오는 가고일이 있었다. 입에서 마력을 뿜어내는 가고일의 작태에 아린은 혀를 찼다.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가고일이 남아 있다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제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력탄은 아린에게로 날아오고 있었고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방심했다!'

 

가고일의 마력탄 따위,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아프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린은 날아오는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 ◈ ◈

 

 

 

 


자작님! 성 외곽 쪽에서 전서구로 연락이 왔습니다! 아직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현재 아리시안 A 플레이저 자작이 전투에 참여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잠깐 전서구를 받기 위해 나갔던 부관이 급히 집무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시리안 A 플레이저 자작이라니! 애쉬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던 부관은 체면도 잊고 달음박질 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관의 열정 어린 말은 애쉬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책상에 얌전히 앉아 서류처리를 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느새 사라졌던 것이다. 오직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펜만이 주인 없는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이 망할 놈의 자작! 어디로 튀었어!"

 

그 새를 못 참고 도망을 쳐? 애쉬가 그의 존경해마지 않는 상사의 아들이건 말건, 부관은 계급장 따위는 무시하고 분노를 담아 소리 질렀다. 그러나 들을 사람 하나 없는 그의 공허한 외침은 한참동안 메아리가 되어 빈 집무실을 울렸다.

 

 

 

 


◈ ◈ ◈

 

 

 



!

 

눈을 감은 채 가고일의 마력탄이 날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아린은 온 몸을 뒤덮는 고통 대신 무언가가 마력을 베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코앞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에 아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의 팔이 아린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아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과 닮았으면 닮았지 결코 다르지 않을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아린은 낯익은 색에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평소 자신이 '왜 하필 저 녀석은 내 머리색이랑 같은 거야! 기분 나쁘게!' 라고 말하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욕하던 머리카락 색으로 누군지를 알아보다니 아이러니 했다.

 

"괜찮소?"

 

고개를 드니 애쉬가 아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마나가 그의 검을 선명하게 뒤덮고 있었다. 붉은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저를 감싸 안은 팔은 따뜻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척 하면서 온 힘을 실어 애쉬의 무릎을 걷어찼다.

 

"나중에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

 

무릎을 차인 고통에 끙끙거리고 있던 애쉬가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린은 태세를 정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브랜과 리틀 조로가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대체 언제 왔지?"

 

아린이 의문을 표하자 아직도 무릎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애쉬가 대답했다.

 

"저랑 같이 왔습니다. 실은 몬스터들의 침입으로 원군을 부르기 위해 서류처리를 하느라 부관한테 감시당하고 있었거든요. 약속에 늦은 건 그것 때문입니다. 그 후에 브랜이 아린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저를 만나러 왔다가 제 상태를 보고 리틀 조로를 불러줬습니다. 그의 정령을 이용해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구요. 그리고,"

 

"……?"

 

애쉬는 군데군데 까맣게 그을리고, 먼지가 묻어 원래의 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아린의 드레스를 슬쩍 보며 말했다.

 

"브랜에게서 드레스를 입으셨단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잘 어울리시는군요."

 

"……!"

 

아린은 얼굴을 확, 하고 붉혔다. 그러나 이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이죠? 원래 귀족가의 영애란 모름지기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제가 만약 이렇게 안 입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닌다면 아버지께서 얼굴을 들고 다니실 수가 없으시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실 수 있으십니까?"

 

드레스보다 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더 많이 본 애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린이었다. 그런 것쯤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백만 번쯤 말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아린에게는 얼굴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철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린은 자신을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애쉬에게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저는 떳떳하거든요. 그나저나 애쉬 레드포드 자작? 늦었으면 늦은 만큼 일을 해야죠? 저기서 고생하는 가엾은 브랜과 리틀 조로가 보이지도 않나요?"

 

아린은 열심히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리틀 조로와 브랜을 가리켰다. 그리고 얼른 몬스터들에게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단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린은 한 손에는 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붉은 마력탄을 생성시킨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농담 아니에요. 여자를 기다리게 한 대가는 크다고요? 나중에 국물로 없을 줄 알아요!"

 

"예이예이~!"

 

뒤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애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종료!"

 

아린의 말과 동시에 싸우고 있던 브랜과 리틀 조로 그리고 지원병으로 온 병사들이 헉헉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몬스터는 아린이 벤 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무심코 하늘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거야 원, 힘들어 죽겠네요."

 

브랜이 숨을 헉헉대며 힘겹게 말했다.

 

"저도요! 마나를 다 써서 힘들어 죽겠어요. 체력단련 좀 해야 하나 봐요. 아린님은 몇 번이나 마법을 날리고, 정령을 불러도 저렇게 멀쩡하신데.“

 

리틀 조로도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들을 보며 같이 주저앉아 웃던 아린은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손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애쉬가 겸연쩍은 얼굴로 아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까는 긴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싸움이 끝나고 나니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자기 잘못은 아나보죠?"

 

아린이 애쉬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묻자 애쉬는 머리를 긁적였다.

 

"약속시간에 늦은 건 정말로 미안합니다."

 

"당연히 미안해야겠죠! 정말이지, 귀족가의 영애가 약속한 시간에 상대방이 나오지 않아 땡볕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고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대망신이라고요. 한 시간 넘게 혼자 기다리는 심정을 애쉬가 알아요?"

 

"저를 걱정해주신 겁니까?"

 

", 걱정은 누가 했다고 그래요!“

 

아린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더듬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설득력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애쉬는 그런 아린을 보며 슬쩍 웃었다.

 

"거기다가 약속 시간은 분명 한 시였는데 브랜이 아린을 본 게 한 시 삽 심분 경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삼십 분이나 일찍 나와서 저를 기다려주신 겁니까?"

 

",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단지 시간이 남았을 뿐이에요!"

 

"이런, 그러셨던 겁니까?"

 

애쉬의 웃음은 이제 완전히 능글맞게 바뀌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아린은 애쉬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

 

"왜 웃어요!"

 

"그냥, 아린이 귀여워서요."

 

"애칭 부르지 마세요!"

 

"삐지신 겁니까?"

 

"쪼잔하게 삐지긴 누가 삐졌다는 거예요!"

 

씩씩거리며 애쉬를 노려보던 아린은 뒤를 돌아 저벅저벅 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애쉬가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아린! 같이 가요!"

 

"애칭 부르지 말라니까요! 나 먼저 갈 거예요!"

 

그러나 애쉬는 얼른 뛰어가 아린의 옆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린은 발걸음을 잠시 멈춰 그런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성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이 사이좋게 걸어가는 남녀를 비추고 있었다.

 

 

 

 



◈ ◈ ◈

 

 

 



Behind : ~갑자기 몬스터가 쳐들어온 이유~

 

 




플레이저 저택의 서재. 평상시라면 조용히 책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야 할 테지만 오늘만큼은 음산한 웃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린의 할아버지인 칸 시스파슈타인과 아린의 아버지인 칼 아펜젤러였다.

 

"후후, 성공인 것 같습니다. 시스파슈타인 님

 

"흠흠, 당연하지. 누가 세운 계획인데!"

 

"그럼요 그럼요! 역시 고룡은 다르시군요! 이렇게 쉽게 몬스터를 소환해내실 수 있다니!"

 

"고럼고럼.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완전히 의기투합을 해버린 둘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감히 우리 아린이와 데이트를 하려고 하다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며 애쉬를 가차 없이 까 내리고 있었다. 오늘 느닷없는 몬스터 소환 사건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손녀와 딸을 지키려는 두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드래곤이라고 짐작할 수 없는, 체통 따위는 팔아먹은 칸 시스파슈타인과 칼 아펜젤러는 참으로 바람직한 장인과 사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은 몬스터들만 불쌍하게 희생된 셈이었다.

 

 

 

 

 

 

 

 

 

 

 


+) 2016. 10. 15 1차 수정 완료

+) 2018. 01. 07 2차 수정 완료

+) 2018. 01. 22 3차 수정 완료

 

과거의 나를 매우 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