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히나른] 10년 후로 워프해 자신이 실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히나타 썰1 (가제 : 시간을 달리는 소년)

 

 

 

 

그 날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하루. 카라스노 고교가 전국대회에 진출하고 우승한 직후, 3학년들은 수험에 몰두하고 다른 학년들은 다가올 겨울방학을 기다리던, 초겨울로 진입하던 그런 어느 날.

 

그날도 히나타는 방과 후에 부활동을 하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쯤에 체육관에서 나왔음. 전국대회 우승 직후 3학년 선배들은 수험에 몰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부활동에서 은퇴했으나 아주 가끔 체육관에 들러 부원들과 연습하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음. 덕분에 오늘 부활동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연습마저 원하는 대로 진행돼서 히나타는 기분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었음.

 

우카이 코치네 가게에서 만두를 우물거리며 배구부원들과 신나게 대화하다가 헤어지고,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카게야마와는 집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진 히나타는 자전거를 끌고 집에가기 위해 막 페달을 밟으려던 찰나였음.

 

실수로 자전거 페달을 헛밟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더니 속이 울렁거리면서 어지러움이 밀려왔음. 균형을 잡지 못한 히나타는 비틀거리다가 자전거를 놓치고 넘어졌음. 아야야...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리던 히나타는 잠시 후 현기증이 가라앉자 고개를 들었음.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히나타의 눈에 보인 것은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아닌 해가 밝게 떠 있는 푸른 하늘이었음.

 

어라? 이상하다? 히나타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잠시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음.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활동이 끝나고 집에 가던 길이었는데? 설마 피곤해서 내가 잠시 꿈을 꿨나? 눈을 비비적거리며 몇 번이고 믿기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던 히나타는 지금이 해가 떠 있는 낮이라면 학교에 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창백하게 질렸음. 으아아, 지금 몇 시지?! 설마 지각인가?! 히나타는 허둥지둥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했음.

 

그렇게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학교에 도착한 히나타는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음. 쾅! 너무 급하게 연 탓에 엄청난 소리가 났지만 이상하게 교실의 그 누구도 히나타를 주목하지 않았음. 아니,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들이 하던 일을 하고 있었음.

 

어라?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음. 그런데 이상하게 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모르는 얼굴이었음. 내가 반을 잘못 들어왔나? 그래도 아는 얼굴이 하나라도 있을텐데? 친화력이 좋았던 히나타는 같은 반이 아니라도 다른 반 친구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음. 그런데 여기 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처음보는 얼굴들로 가득한데다가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음. 마치 히나타를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 처럼 무시하듯 행동하고 있었음.

 

히나타는 슬금슬금 반의 팻말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교실로 들어감. 그런데 원래 자신의 자리에 모르는 누군가 앉아있는데다가 말을 걸어도 콕콕 찔러보아도 히나타의 존재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음. 그제서야 히나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교실 밖으로 나온 히나타의 눈에 뭔가 이상한 점들을 보이기기 시작함. 처음에는 교실에 도착하는 것에만 급급해서 별 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묘하게 학교시설이 더 낡아있거나 새로 교체된 책상이나 의자가 보이고 부서져있던 울타리가 고쳐져 있는 등 히나타의 기억과는 달라진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함. 심지어 분명 계절은 초겨울이었는데 창 밖은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갓 피어나 있었고 공기도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했음. 히나타는 비틀거리며 복도 한편에 걸려있는 달력을 응시했음. 20xx년 x월 x일. 자신이 있던 날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날짜. 히나타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음.

 

이곳은 10년 후의 세계이며 이곳에서의 자신은 마치 유령같은 존재로 아무에게도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게 뭐야! 히나타는 패닉에 빠진 채 비틀거리며 정처없이 학교를 유령처럼 떠돌았음.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거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아무도 히나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음. 유령이란 엄청 외로운 거였구나...여기저기 떠돌다가 제일 친숙한 체육관 구석에 주저앉은 히나타는 기운이 빠진 채로 축 늘어져서 체육관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음. 만화를 보면 누군가는 꼭 유령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데 여긴 그렇지도 않네. 어느새 부활동 시간이 되었는지 떠들썩해진 체육관을 우울하게 바라보며 히나타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

 

미래에도 이 체육관은 여전히 배구부가 사용하고 있는 건지 어느새 익숙한 타격음과 함께 스파이크,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음. 어느 순간부터 히나타는 우울한 생각보다는 멍하니 그런 배구부원들의 연습을 바라보았음. 아 저 사람 엄청 키가 크다. 와, 토스 깔끔해! 물론 카게야마 만큼은 아니지만. 저 사람은 리베로인가? 노야상보다 키가 조금 클지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 때였음.

 

집합! 다들 집합! 누군가 체육관 문을 열고 박수를 치며 부원들을 불러모았음. 아, 담당 선생님인가? 문득 자신도 우카이 코치나 타케다 선생님에게 집합 구호를 받고 모이던 것이 기억난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음. 그러다가 배구부원들을 집합시킨 담당 선생님에게로 눈을 돌린 바로 그 순간, 히나타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음.

 

기억보다는 조금 더 커진 키, 듬직한 어깨. 학생 티를 벗었지만 그래도 낯익은 얼굴. 여전히 책임감으로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보며 히나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음. 다이치 선배...?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목소리에 히나타는 얼른 입을 막았음. 고요한 체육관의 히나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역시나 아무도 히나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음. 아아, 역시나. 히나타는 피어오른 자그마한 희망을 꺼트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음. 그리고 바로 그 때,

 

히나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음. 히나타는 고개를 들었음. 그곳에는 정확히 히나타를 바라보고, 히나타를 응시하고, 히나타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10년 후의 사와무라 다이치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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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히나른+추리물+미스테리물+포카포카물(??)

 

10년 전의 히나타가 10년 후로 워프해서 자신이 10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포카포카+미스테리 물입니다.

일단 구상은 띄엄띄엄 중간까지는 해놨고 결말도 대강 생각은 해놨는데 이거 쓰면 장편각. 더없이 길어질 느낌...ㅠㅠ

 

 

 

 

 

 

 

 

   

 

다이스가+사랑받는 히나타+카라스노 가족물로 포카포카 썰.

 

사와무라家는 엄마아빠인 다이스가, 이란성(?) 네쌍둥이 일학년즈로 구성된 가족.

다이스가는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에서 처음 만나 포카포카한 연애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도 교제를 이어나가다가 졸업 후 바로 결혼에 골인함.

 

다이치는 전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주장이었고 졸업 후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가 현재 카라스노 고교 체육선생님이자 배구부 고문으로 있음. 일학년즈의 고삐를 쥘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 가족 내에서는 든든하고 책임감 있는 아빠.

스가는 전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부주장이었고 졸업 후 국어교육학과에 들어가 현재 미도리가오카 중학교의 국어선생님. 일학년즈의 고삐를 쥘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 매운 맛을 무시무시하게 좋아해서 가족들과 매운 맛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물론 가족들은 고통에 시달리며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하는 중. 언제나 일학년즈를 다독거려주는 상냥한 엄마.

 

엄마아빠가 학창시절에 배구부였고 현재도 동네 배구단에서 활둥 중이기 때문에 일학년즈는 어렸을 때부터 배구를 접하며 자랐음. 일단 일학년즈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히나타는 일학년즈의 장남. 키가 작고 하는 행동만 보면 영락없는 바보라 막내로 오인받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형제 모두를 이끌며 든든한 장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 알게 모르게 형제들의 멘탈을 보듬보듬해줘서 다른 형제들이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는 편. 친화력 만렙 오브 만렙. 현재 카라스노 고교 1학년이며 배구부에서 미들블로커를 맡고 있음.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불과 10초 차이로 태어난 둘째. 히나타가 밝고 친화력이 넘쳐나는 것과는 반대로 무뚝뚝하고 눈치를 팔아먹었음. 배구 천재지만 머리는 어쩔 수 없는 바보. 히나타를 보게라고 부르며 어렸을 때부터 티격태격했지만 형제 중에서 히나타와 제일 유대감이 깊음. 히나타를 제일 친한 형제이자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음. 카라스노 고교 1학년이며 배구부에서 세터를 맡고 있음.

야마구치는 기쎈 바보 형들과 무뚝뚝한 막내 사이에서 치이며 살아온 가련한 셋째. 정줄 놓고 돌아다니는 배구바보 형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바쁨(히나타! 숙제 했어? 카게야마 가정통신문 제출해야지!). 그나마 형이라고 막내인 츠키시마를 각별하게 챙김. 이걸 알기 때문에 어그로 킹 막내 츠키시마도 야마구치에게는 쓴소리를 못함. 운동신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배구를 좋아하며 성실히 노력하는 타입. 현재 카라스노 고교 1학년이며 배구부에서 핀치서버를 맡고 있음.

츠키시마는 바보 형들에게 어그로를 끄느라 바쁜 막내. 형제 중에서 제일 키가 크고 머리도 좋아 사실상 유전자 몰빵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음. 일학년즈의 유급을 책임지고 막아내고 있음. 바보형들에게 어그로를 끄는 어그로킹이며 가련한 셋째 형을 몰래몰래 챙기며 살아옴. 귀염성 없는 성격이지만 막내인지라 은연중에 어리광을 부리는 편. 물론 알아차리는 건 가족들 밖에 없지만(...). 툴툴거려도 가족들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음. 카라스노 고교 1학년 재학중이며 배구부에서는 미들블로커를 맡고 있음.

 

+) 성은 사와무라지만 그냥 편하게 부릅시다(....)

 

 

다이치에게는 누나 한명과 나이 차가 꽤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늦둥이 남동생이 바로 아사히. 현재 토목과에 재학중인 대학생이지만 액면가만 보면 다이치랑 비슷해보여서 오해를 많이 받는 편. 온화한 성정을 가진 소심남. 카라스노 배구부 출신이었으며 대학교에서도 배구부에 들었다. 포지션은 윙 스파이커.

 

아사히는 다이치네 집 근처에서 자취중인데 누나의 동생, 그러니까 아사히에게는 조카인 엔노시타, 타나카, 니시노야 통칭 이학년즈와 함께 살고 있음. 이학년즈는 일학년즈와 마찬가지로 이란성(?) 세쌍둥이인데 아사히가 자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종종 누나네 집에서 신세를 지곤 했어서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는 아사히와 호형호제하며 지냈음. 원래 이학년즈의 집은 카라스노 고교에서 꽤 떨어진 곳인데 가까운 가족, 친척들이 모두 카라스노 배구부 출신이라 카라스노고교 배구부+가쿠란 때문에 무작정 카라스노 고교에 원서를 넣었음. 물론 일을 저지른 건 니시노야와 타나카고 엔노시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얼떨결에 카라스노에 지원하게 됨. 이학년즈의 집은 나중에서야 이 사태를 알게되었지만 이미 합격한 뒤. 결국 아사히에게 생활비를 주는 조건으로 이학년즈는 무작정 아사히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아사히의 홀로 자취 생활은 물 건너가게 되었음. 가끔 이학년즈의 누나인 장녀 사에코가 반찬을 들고 방문하며 일학년즈와도 친하기 때문에 종종 저녁을 같이 먹는 편.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니시노야가 아사히를 끌고 가는 편이라 누가 보호자인지 모를판.   

 

이학년즈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엔노시타는 이학년즈의 장남. 이학년즈 중에서 유일하게 바보가 아니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편. 겁이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음. 기쎈 동생들의 사고처리반을 맡고 있음. 현재 카라스노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며 배구부에서는 윙 스파이커.

니시노야는 이학년즈의 둘째. 쾌활하고 통 큰데다가 멘탈이 부처라 알게 모르게 타나카와 히나타의 존경을 받고 있음. 키는 작지만 하는 행동만 보면 첫째라 장남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음. 하지만 바보임. 형제 중 다이치와 제일 친한데 어릴 때부터 리베로 연습을 해왔고 니시노야가 띄워주는 공을 아사히가 멋지게 날려보내곤 했기 때문. 가쿠란과 아사히를 동경해 카라스노 고교를 택한 장본인. 현재 카라스노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며 배구부에서는 리베로. 

타나카는 이학년즈의 셋째. 바보2. 니시노야를 무척 존경하고 있어서 그 의미를 담아 노야상이라고 부른다. 막내라 그런지 장녀인 사에코에게 무척 약한 편. 이학년즈에서는 막내지만 일학년즈에게는 나름의 형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음. 현재 카라스노 고교 2학년에 재학중이며 배구부에서는 윙 스파이커.

 

다이치는 현 카라스노 고교 체육 선생님이자 배구부 고문을 맡고 있는데 일학년즈와 이학년즈가 연달아 입학하면서 인생 최대 인내심이 위기를 맞고 있는 중. 혈연관계인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다 들통났다는 것을 본인만 모름. 사실 사와무라 성을 가진 네쌍둥이와 성은 다르지만 애초에 숨기려는 기색도 없는 세 쌍둥이 중 두명의 존재감은 어마무시하게 크다. 배구부는 암암리에 '사와무라 가족 배구부'로 불리는 중. 교감 선생님의 가발을 날려먹는 바보 아들+조카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쫄깃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 온후하고 듬직한 아빠지만 화낼 때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서 일학년즈와 이학년즈의 제어장치를 맡고 있음.

 

 

 

 

평화로워보이는 가족이지만 이 가족이 과거에도 이렇게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님. 사실 히나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겨 어지럼증과 균형문제로 몇 차례의 수술을 해야했음. 타고난 신체감각과 민첩성을 가진 히나타였지만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겨 그토록 좋아하던 배구를 할 수 없었고 이 때 괴로워하던 히나타를 보며 츠키시마는 배구에 대한 애증을 갖게 되었음. 고작 공놀이에 불과한 배구 때문에 형이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던 츠키시마는 배구로부터의 도피를 택했음. 카게야마 또한 파트너인 히나타가 배구를 할 수 없게 된 모습을 보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서툰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등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냄. 그리고 형제 사이에 낀 야마구치는 나름대로 형제사이를 중재하느라 바빴으나 자신이 그렇게 좋은 중재자가 아니라는 자책감에 주눅들고 표현을 쉽게 하지 못하게 됐음.

 

한편 히나타는 6학년 때 도쿄에서 수술을 받고 완치판정까지 받았으나 한동안 재활에 전념해야했고 재활기간만큼은 히나타가 배구를 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가족들은 히나타를 배구부가 없는 유키가오카에 보냈음. 당시 스가가 국어선생님으로 유키가오카에 있었기 때문에 히나타를 잘 지켜볼 수 있다는 이유도 한 몫 했음.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는 유키가오카가 아닌 다른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배구부에 들지 않았고 카게야마는 혼자 키타가와제일중에 입학해 세터로서 입지를 다졌지만 의사소통 부족으로 제멋대로인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됨. 형제들 모두에게 중학교는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가 됨. 

 

하지만 히나타는 유키가오카에 입학한 이후로도 배구를 포기하지 않았음. 오히려 필사적으로 재활에 임해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홀로 배구부를 만들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을 모아 출전함. 그리고 그 곳에서 카게야마속한 키타가와제일중과 붙었고 졌음.

 

문제는 히나타가 이후 카게야마의 시합을 보면서 발생함.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시합을 보고 기가 차서 아무말도 못함. 그동안 히나타는 수술받고 재활하느라 바빴고 배구하는 모습을 보면 더 가슴이 아파서 일부러 배구관련 화제를 묻지 않았음. 그렇게 동생들과는 암묵적으로 배구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카게야마는 완전 지멋대로 행동하고 있지, 야마구치와 츠키시마는 배구의 배자도 꺼내지 않으니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

 

히나타는 동생들을 집합시키고 호되게 혼을 냈고 그 과정에서 츠키시마의 분노와 카게야마의 화가 터져나옴. 츠키시마는 그렇게 힘들어하는 배구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을 죄다 쏟아냈고 카게야마는 내 잘못이 아니라 실력이 부족한 팀원 탓이라고 우겼음.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훈육이 필요하겠다며 웃던 히나타는 멱살을 잡다시피해서 형제들을 모두 카라스노에 입학시키고 강제로 배구부에 입부시킴.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히나타의 분노와 더불어 카라스노 입학 후 이학년즈의 도움으로 어느정도 배구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시작함.

 

참고로 이 때의 기억 탓인지 사와무라가는 유독 히나타가 아픈 것에 예민한 편. 거기다가 히나타는 한동안 배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배구 수비에 약한편인데 형제들은 히나타가 아팠던 걸 일부러 떠올리지 않기 위해 리시브가 허접하다며 놀린다. 물론 다른 팀이 히나타를 놀리면 절대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는 장남 빠돌이들(훈훈

 

 

 

 

 

 

 

 

 

 

 

 

 

 

 

 

 


 


[하이큐/오이이와] 말할 수 없는 당신에게

​W.B 츠쿠리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오이카와는 눈 앞에 놓인 제단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매캐한 선향 냄새가 설렁거리며 코 끝을 간지럽혔다. 향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회색 연기가 새하얀 국화꽃으로 물들인 제단을 채워나갔다. 제단 끝에는 낯익으면서도 어쩐지 낯선 얼굴이 있었다.

짧게 자른 삐죽한 머리카락, 고집 센 눈매 그리고 입가가 서툴게 올라간 이와이즈미의 무뚝뚝한 얼굴이 고스란히 액자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액자 속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알고 있던 이와이즈미와 많이 달랐다. 좀 더 앳된 그 얼굴은 매캐한 선향 냄새와는 달리 풋풋한 살내음이 풍길 것만 같았다. 오이카와는 비로소 그 사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기념으로 찍자며 싫은 기색을 잔뜩 내보이는 이와이즈미를 끌고 사진관에 갔던 것은 다름 아닌 오이카와였다. 현상한 사진을 보며 웃는 게 이게 뭐냐고 낄낄거리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있는 힘껏 쥐어박았었다. 아파, 이와쨩! 스파이커의 진심을 담은 주먹 맛에 오이카와가 징징거렸으나 이와이즈미는 상대해주기는 커녕 꼴 좋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오이카와는 무심코 옆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무뚝뚝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침통하게 일그러진 얼굴들뿐이다. 줄을 지어 인사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선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곳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츠카와가 벌개진 눈으로 맞절을 하고 있었고, 하나마키는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제단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저리도 자욱한데 선향 불은 꺼지기는커녕 더 빠르게 타들어갔다.

 

-미련을 버려, 오이카와. 그 편이 네게도 더 좋을 거야.

 

과거의 잔상이 허무하게 스쳐지나간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선향 불은 마치 미련을 버리고 이만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던 이와이즈미와 야속하리만치 닮아 있어서 오이카와는 순간 숨이 막혔다. 허억, 내뱉지 못한 호흡이 숨을 가로막았다. 제단을 타고 공중으로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선향 냄새가 지독해서 오이카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언젠가부터 이와이즈미에게서는 풋풋한 살내음 대신 시원한 나무의 향기가 났다. 수천 년의 세월을 묵묵히 혼자 버티고 있는 거목(巨木). 이와이즈미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을 너그러이 포용할 수 있는 고요한 나무가 생각나곤 했다. 오이카와의 눈에 이와이즈미는 늘 푸른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늘 그렇게 푸르게 있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는, 안타까울 정도로 푸르고 아름다워서 차마 손을 뻗을 수 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이와이즈미를 오이카와 토오루가 죽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왔다. 우욱,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참지 못한 오이카와가 장례식장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것 같았지만 오이카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이 순간만큼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역겹고 추한 것을 털어내야 한다는 일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허억, 헉…!"

 

화장실에서 한참동안 세면대를 붙잡고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오늘 먹은 것이라고는 간신히 배고픔을 면할 정도의 주전부리밖에 없어서인지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해도 뱉어내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제 뱃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이 역겨운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질척거리는 타액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흐윽,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이 신음인지, 꾹꾹 눌러 담았던 울음소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비로소 제가 줄곧 간직하고 있던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우욱……!"

 

연이어 나오는 헛구역질 때문인지 눈 앞이 노랗게 물들었다.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시야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마침내 투둑 떨어져내리는 눈물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빌어먹을, 정말…꼴사나워……."

 

거울 속에 비친 타액과 눈물 범벅으로 뒤덮힌 얼굴을 보며 오이카와는 홀로 과거의 잔상을 쫓았다.     ​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단순히 우정의 의미였다면 오이카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나날을 보냈을 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품은 감정은 연정과 욕정이 뒤섞인, 누가 봐도 우정은 아닌 질척한 사랑이었다.

오랜 소꿉친구였던 이와이즈미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짧게 자르고 다니는 머리카락, 치켜 올라간 고집 센 눈매, 웃는 방법조차 서툴어 무뚝뚝한 표정이 대부분인 오이카와의 소꿉친구는 누가봐도 반할만한 이상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툴툴거리면서도 힘들 때마다 늘 곁에 있어주는 그의 다정함과 세심함이 좋았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서서히 젖어들듯, 오이카와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이와이즈미를 서서히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는 못했다. 늘 자신감이 넘치는 오이카와였지만 반평생을 봐온 소꿉친구였기에 더욱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만약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이와이즈미는어떤 반응을 보일까? 경멸할까? 아니면 장난인 줄 알고 그냥 넘어갈까?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인 건 아닐까? 언젠가부터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미소를 지어주면서도 오이카와의 시선은 늘 이와이즈미에게 머물러 있곤 했다.

그렇게 아오바죠사이에서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졸업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도 오이카와는 아직 이와이즈미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이와쨩의 마음은 확신할 수 없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괜찮아. 봄고 예선에서 탈락해 마지막 부활동을 정리하던 오이카와는 그리 생각했다. 어차피 대학에 가서도 배구는 쭉 계속 할 예정이었고 오이카와의 곁에는 변함없이 이와이즈미가 함께 있어줄 것이다. 이와이즈미의 마음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와이즈미를 사랑하게 되었듯이, 이와이즈미에게도 그렇게 천천히 제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키워나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느긋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그러나 수험 막바지로 돌입한 추운 겨울 날, 그런 오이카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와이즈미가 선언했다.

 


 

"나, 너랑 같은 대학은 무리일 것 같다. 오이카와."

"에?"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예상치 못한 말에 오이카와가 멍청하게 반문을 내뱉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오늘 점심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너 도쿄 A 대학 추천 지망 받았다면서."

"…응."

"그 대학교, 너가 줄곧 가고 싶어했던 곳이잖아. 전문 배구부도 있고 코치와 감독층도 탄탄해. 분명 너라면 그 곳에서도 별 무리 없이 주전으로 그리고 최고의 세터로 활약할 수 있을 거야."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말하는 자신의 미래에 그가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이카와의 세상에 이와이즈미가 배제된 미래. 그것은 소름끼칠 정도로 두렵고, 낯선 세계였다.

 

"이와쨩도 같이 가는 거지? 그렇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A대학은 명문이야. 성적이 좋거나 추천 지망을 받지 않는 이상 가지 못한다는 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대학에 가서도 같이 배구하기로 했잖아. 왜 나 혼자만 A대학에 간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난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와쨩도 어디로 갈 지 정해진 건 없고. 이와쨩은 내가 아는 최고의 스파이커고, 나만의 에이스야. 대학에 가서 같이 최고의 배구를 하는 건 나 혼자가 아냐. 이와쨩이 필요해."

"A대학에 가면 넌 최고로 거듭날 수 있어. 같이 배구를 하는 건 다른 학교, 다른 팀으로 만나서도 충분해. 아니면 바로 옆집이니까 평소에 만나서 연습을 할 수도 있고."

 

이와이즈미는 이미 오이카와가 곁에 없는 미래 구상을 끝마친 것 같았다. 입만 열면 A대학, A대학!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A대학 추천이 들어온 건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A대학의 추천 지망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이미 지원 리스트에서 A대학을 탈락시켰다. 오이카와는 최대한 이와이즈미와 함께 갈 수 있는 대학을 고르고 싶었다. 그에게는 이와이즈미와 함께 하는 배구가 1순위였고 대학은 2순위에 불과했다. 그 어떤 좋은 대학이라도 곁에 이와이즈미가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이런 오이카와의 마음도 모르고 헛소리나 늘어놓고 앉았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결정은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A대학만 고집하는 이와이즈미의 바보 같은 작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소에 쿠소카와라고 하더니 바보 짓은 저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하교 한다고 천국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이 들뜨던 마음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처박혔다.  

 


"다 필요 없다니까? 내게는 이와쨩과 함께 하는 배구가 제일 중요해! 다른 팀으로 만나면 더 이상 내가 올려주는 공을 칠 수 없게 된다고! 이와쨩은 그래도 좋아?"

 

아니라고 말해. 내가 올려주는 공을 치고 싶다고 말해 줘, 이와쨩. 이 때만큼 오이카와가 간절히 신께 기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믿었고 그 믿음은 자신감을 뒷받침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신의 도움이 간절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면 이미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손을 잡고 꽃길만 걸었을 터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신마저 오이카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여전히 덤덤하게 오이카와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의 풍랑도 일지 않는 잠잠한 바다는 이와이즈미의 변함없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발 나 때문에 네게 주어진 기회를 버리지 마. 오이카와. A대학은 누가봐도 네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야. 난 우시지마의 그 빌어먹을 재배론 따위 믿지 않지만, 네게 더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는 인재라는 건 분명하다고."

"알 게 뭐야. 난 A대학이라면 그 빌어먹을 우시와카쨩도 가겠지? 우시와카쨩과 팀을 이뤄야하는 학교 따위 안 가! 내게 필요한 건 더 좋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너야, 쿠소 이와쨩!"

 

오이카와는 씩씩거리며 이와이즈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씨근덕거리며 소리쳐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결정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미련을 버려, 오이카와. 그 편이 네게도 더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와이즈미는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이어졌던 설전이 허무할 지경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늘 자신의 장단에 어울려주던 이와이즈미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오이카와는 타들어가는 답답한 속마음에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언제나 든든하게 느껴지던 이와이즈미의 등이 오늘만큼은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고집불통으로 보였다. 오이카와는 속에 남은 집념을 득득 긁어모아 있는 힘껏 소리쳤다.

 

"백 날을 말해보시지! 누가 포기할 줄 알고? 나는 반드시 이와쨩과 같은 대학을 가고 말테니까!"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절대로 안 떨어질거라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네가 뭐라 하던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오이카와는 앞서 걸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등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이 날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오이카와가 알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너네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로부터 며칠 후, 점심시간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옥상계단으로 집합한 하나마키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러면서 붙어 있는 것도 병이지, 병. 뒤따라 온 마츠카와가 무심하게 빵 봉지를 뜯으며 사족을 붙였다.

 


"너네 자꾸 그럴거면 가라."

 

이와이즈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고,

 

"맞아, 맞아! 너네 화해 모드로 전환시켜줄 거 아니면 불 붙이지 말고 가버려!"

 

오이카와가 지지 않고 깝죽거렸다.

 


"너네 싸웠다는 거 거짓말이지? 어떻게 싸웠다는 놈들이 하루 종일 붙어있냐."

 

쿵짝쿵짝. 도저히 싸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묘한 콤비를 보면서 하나마키가 얼굴을 찡그렸다. 요 며칠 내내 오이카와는 사과해, 취소해! 를 연발하면서 집요하게 이와이즈미의 뒤를 쫓아다녔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꾸준히 무시하면서도 뒤에 달고 다녔다. 오이카와가 하소연을 늘어놓은 덕분에 대충이나마 전후사정을 알게된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좋든 싫든 이 끝없는 싸움을 관람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반이 달라서 다행이지 반마저 같았으면 폭발하는 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였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싸운 거 맞거든! 다만 이와쨩이 사과하고 자기 말을 취소하는 걸 듣기 위해서라도 붙어 있을 거야!"​

"스토커냐?​ 화장실까지 따라오면 신고한다, 망할 오이카와."


"흥, 이와쨩이 취소 안하면 화장실까지 따라 붙을거거든? 그러니까 사과 해!"


​"난 취소 안 할거고, 사과도 안 할거니까 경찰서에서 봐야겠네."

 


마치 4주후에 뵙겠습니다, 같은 말투였다. 끝까지 고집을 꺾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루면 제 뜻을 이해하고 같은 대학에 가겠노라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의미없는 실랑이는 벌써 일주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이유라도 말해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도 이와이즈미는 A대학에 가는 것이 장래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할 뿐이었다.

아니 대학에 가는 걸 결정하는 건 당사자인 나,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내가 싫다면 싫은 줄 알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사실 이와이즈미가 아무리 A대학에 가라고 한들 오이카와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강제할 수는 없었다. 즉, 오이카와가 A대학 추천지망을 거절하고 이와이즈미와 같은 대학에 지원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런 간단한 방도를 무시하고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이와이즈미를 물고 늘어지는 건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이와이즈미에 대한 오기였다. 또한 이렇게 서로에 대한 합의 없이 무시한 채 넘어가는 것은 이와이즈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오이카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평소 능글능글하게 넘어가는 오이카와지만 이와이즈미만큼은 뭐든지 확실하게 답을 받아내고 싶었다. 자칫하다간 소꿉친구 관계에 있어서도, 연정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세터와 스파이커의 관계에 있어서도 금이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견고히 쌓아올린 그들만의 유대에 금이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아 몰라! 난 절대 A대학 안 갈거니까 경찰을 부르던 맘대로 해! 어차피 이 얼굴로 스토킹 한다고 신고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줄걸? 이와쨩은 못생겼으니까 또 모르겠지만~?"


"……."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오이카와가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로 한껏 빈정거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도시락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자 더 열이 뻗친 오이카와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마구 내뱉었다. 


 

"아, 그리고 못생긴 이와쨩의 곁에 이 오이카와상이 있어줘야 하는 이유가 또 있어! 이와쨩의 얼굴 보고 사람들이 신입생이 아니라고 오해하면 어떡해? 잘생긴 오이카와상이 옆에서 상큼하게 웃어주기라도 해야 못생긴 이와쨩도 신입생이라고 생각해줄 거 아냐.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나랑 같은…"


 

그 때였다. 묵묵히 도시락을 채우던 이와이즈미가 쾅! 하고 도시락 뚜껑을 세게 닫았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묻혔다.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도시락 통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은 가감없이 살벌했다. 느닷없는 이와이즈미의 돌발 행동에 오이카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벙찐 채 이와이즈미의 잔상만 쫓을 뿐이었다.

 

"이번엔, 네가 좀 심했어 오이카와."

 

지켜보던 마츠카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나마키의 얼굴 또한 마츠카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이와이즈미가 사라진 방향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오이카와는 잇따른 질책에 울상을 지었다.

 

"그치만 이렇게라도 말 안하면 이와쨩이 전혀 상대해주지 않는 걸…."

"어디의 초등학생이냐, 네 녀석은."

"하여튼 이와이즈미만 고생이지. 이번 일은 제대로 네가 사과하도록 해."

"그건 싫어. 이와쨩이 사과하면 그 땐 나도 사과할거야.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절~대 사과 안할거라고!"

 


하나마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었다. 그나마 말이라도 받아주던 이와이즈미가 이번 일을 계기로 완전히 오이카와를 무시할 게 뻔했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또 징징거리면서 푸념을 늘어놓겠지. 하나마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들이라니까. 이와이즈미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흥, 그런 거 이 오이카와 상은 몰라요!"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마츠카와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구라치고 있네. 봄고 카라스노와 붙었을 때 이와이즈미가 에이스로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


"전국은 번번히 시라토리자와에게 막혔지. 그리고 이번에는 카라스노에게 막혀 아예 결승 진출조차 하지 못했어. 이와이즈미가 널 최고의 세터로 인정하는 이상, 결국 비난의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에이스인 자신이 부족해서 널 전국에 보내지 못했다고, 널 최고의 세터로서 인정받게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을거야."

"…….""

"이와이즈미는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네 앞길이 막히는 걸 원하지 않는 거야. 널 어떻게든 A대학에 보내려고 집착하는 것도 자신 때문에 너가 A대학에 가는 걸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그런 걸 원했대?"

 

오이카와가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나도 알아! 이와쨩이 그런 기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왜 그렇게 날 A대학에 보내고 싶어하는 지도 알아! 하지만 이와쨩이 날 최고의 세터라고 느끼고 있듯이 나도 이와쨩을 최고의 스파이커라고 여기고 있다구. 내가 하고 싶은 배구는 이와쨩과 함께하는 배구야. 다시 한 번 둘이서 최고의 자리를 노리고 싶은 거지 나 혼자 배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야…!"

 

오이카와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그 동안 꾹꾹 참았던 설움이 터져나왔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고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던 이와이즈미가 떠올라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나 참, 하여튼 바보들이라니까."

 

하나마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츠카와도 다 먹은 빵 봉지를 구기더니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손에 쥐어주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바보짓 그만하고 얼른 가서 사과해. 그리고 이와이즈미랑 좀 진득하게 대화해보려고 해 봐. 그렇게 백날 생떼를 써봤자 이와이즈미에게는 안 먹힐테니까."

"참고로 좋아하는 애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는 거 아니다, 오이카와."

"잠깐! 내가 이와쨩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야…?!"​

 


 

느닷없이 폭탄처럼 떨어진 통보에 오이카와가 허둥대며 일어섰다. 정작 폭탄을 남긴 당사자들은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면 바보 아냐?"


"둘이 바보짓 하는 거 보는 것도 이제는 좀 질리니까 빨리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그리고 지금 네가 말한 내용, 꼭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도 친구랍시고 우려섞인 말을 던져주고 휘적휘적 손을 내저으며 사라지는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최후의 양심이 찔려오는 걸 느꼈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젠장, 쪽팔려서라도 오늘 반드시 이와쨩에게 확답을 받아내고 말겠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도 건네야지. 오이카와는 모처럼 어른스러운 결정을 내린 후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사과를 건네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반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그는 조퇴를 한 후였다. 그리고 학교가 끝날 무렵, 이와이즈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이카와."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오이카와의 등을 누군가 거칠게 쓸어주었다. 영안실에 들어가 시신까지 확인했으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제 뒤에 있는 것이 아닌지, 헛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에 잡힌 것은 이와이즈미가 아닌,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마츠카와였다. 아까 하나마키와 함께 있는 것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뛰쳐나온 것을 보고 뒤따라나온 모양이었다.

 

"……."

 

오이카와는 마츠카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눈자위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눈물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영정사진을 봐도 실감이 나지 않던 이와이즈미의 죽음이 마츠카와의 얼굴을 보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이와쨩이 죽었구나.

잠시 멈췄던 눈에서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파트너는, 소꿉친구는, 연모하던 사람은 영영 이 세상을 떠났다. 이와이즈미 하지메에게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었을까. 소꿉친구이자 파트너라는 사람이 이와이즈미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빈정거림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험담이었다.

네가 이와쨩에게 그런 말을 해서 그래. 마음 속에서 그를 좀먹고 있는 벌레 한 마리가 속닥거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이와이즈미는 조퇴하지 않았을거고, 여전히 네 곁에 있었을거야.


 

"맞아, 이와쨩은 나 떄문에 죽었어. 내가, 병신같이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오이카와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못생겼다' 가 아니었다. 관계가 깨질까봐 두려워 제 마음조차 고백하지 못한 겁쟁이의 심장에는 늘 붉게 물든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어줘서 고마워.

너의 푸른 그늘에 항상 감사하고 있어.

너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야.


…널 사랑해.


 

"이와쨩…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묵직한 죄책감이 심장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고통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단 하나뿐인 심장은 어느새 꺾여서 말라버렸다.

아아, 그는 내게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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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츠쿠리입니다.

처음 쓰는 하이큐 연성을 오이이와로 할 줄은 몰랐는데 정신차려보니 오이이와를 쓰고 있네요.

평소에 히나른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오이이와는 마성의 커플인 것 같습니다.

매달리며 징징거리는 오이카와x싫은소리하면서도 다 받아주는 이와이즈미 너무 좋지 않나요 ㅠㅠ

사실 이번 글은 이와이즈미에게 싫은 소리했다가 이와이즈미가 죽고 멘탈이 박살나는 오이카와를 보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평범한 청춘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지만요.

 

나름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 막판 가서는 멘탈이 박살나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그래도 쓰는 내내 징징거리는 오이카와 써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써보고 싶네요!

 

 

 


 

[주토피아/닉주디] 일상

W.B - 츠쿠리







5년 전까지만 해도 니콜라스 피벨리우스 와일드의 하루는 느지막한 기상알람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시간을 무시하고 블루베리 잼을 바른 식빵 또는 베이글을 우물거리며 오늘은 또 어떤 핑계를 대고 점보 하드를 얻을지 머리를 굴린다. 그야말로 '교활한 여우'라는 별칭에 걸맞은 삶이었노라고, 닉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하루는 어떤가. 한 때 닉의 동업자였던 피닉은 종종 그의 생활을 두고 5년 전과 비교한다면 여우 꼬리털 갯수만큼 달라졌을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리고 닉은 딱히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해가 고개를 들이밀기도 전에 시작되는 이른 기상 시간. 아침식사로는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신선한 버터를 얹고 블루베리 요거트로 입가심을 한다. 그 후에는 반짝거리는 금색 별이 달린 청색 경찰 제복을 입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어떻게 점보 하드를 얻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건을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이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교활한 여우라는 별칭 대신 '최초의 여우경찰' 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어깨를 꽤나 으쓱하게 만들었다.

아무렴 교활한 여우보다야 최초의 여우경찰이라는 말이 백 배는 낫지.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 옷을 단정하게 입었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던 닉은 거울에 비친 청색 제복과 경찰을 상징하는 뱃지가 꽤나 만족스러워 씩 웃었다. 커피를 들고 경찰 제복을 입은 제 모습이 이제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음, 좋아. 아주 멋있어.

어느 정도로 멋있냐 하면 홍당무가 첫눈에 반할 정도?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던 닉은 윤기가 흐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오늘도 그의 멋진 홍당무 파트너와 함께 멋진 하루를 보낼 것이란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  ◈  ◈

음, 분명 틀림없이 멋진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무일정을 들으러 온 닉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지만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어있는 그의 옆자리였다. 닉의 파트너 주디 홉스가 고향인 버니힐에 내려갔다 온다며 유급 휴가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닉은 책상 위에 머리를 뉘인 채 비어있는 그의 옆자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늘 그보다 일찍 나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있던 주디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청력이 좋은 토끼답게 작은 소리에도 몽실몽실한 귀를 움찔거리는 작은 파트너를 보는 것은 닉의 아침 일과 중 하나였다. 누가 열정적인 영웅경찰 아니랄까봐 아침부터 열렬하게 사건일지를 넘기던 주디가 떠오르자 닉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고 말았다. 닉이 옆에서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며 따끈따끈한 커피를 마시면 주디는 흘겨보며 일 좀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항상 마무리가 '누가 전직 탈세범 아니랄까봐' 로 끝나는 주디의 목소리를 듣는 것 또한 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의 작은 토끼는 모른다.

반짝거리는 제비꽃 눈동자가 그를 곧게 응시할 때, 닉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몸에 코를 박고, 핥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왠지 주디의 부드러운 털에서는 제비꽃 향기와 제비꽃 내음이 풍길 것 같았다. 하지만 닉은 이 사실을 결코 주디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바들바들 떨던 작은 토끼를 기억한다. 포식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탈출구를 찾던 모습은 누가 봐도 사냥당하기 직전의 가련한 피식자였다. 나중에 주디에게 여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오해를 풀었지만, 닉은 두 번 다시 그런 주디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디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소망과는 별개로, 그의 욕망은 종종 통제를 벗어나곤 했다. 코에 아른거리는 제비꽃 향. 닉은 주디를 향한 욕망이 '송두리째 잡아먹고 싶다'는 표현과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야생의 습성이 남아있는 동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이쯤 되면 DNA인지 뭔지에 포식자로서의 습성이 남아있다는 가설을 믿고 싶어지는걸. 닉은 코를 벌름거리며 생각했다.

오늘따라 옆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다.

경찰서 내에서도 유독 체구가 작은 축에 속하는 닉과 주디는 늘 커다란 의자 하나에 나란히 앉아 있곤했다. 직접적으로 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까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닉에게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은 아주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늘 자신을 안아줄 때 느꼈던 안온한 감각이었다.

아아, 그래서인가. 늘 옆에 있던 그 온기가 없어서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지는 건가.


닉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며칠 전, 주디가 휴가를 낼 거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닉은 주디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허전하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만 해도 시시덕거리면서 가는 김에 너희 농장에서 재배하는 블루베리나 선물로 가져와달라고 말한 게 작별인사의 전부였다.

열두 살 때부터 홀로 자란 닉은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애초에 주디를 만나기 전, 이십 년 정도를 혼자 지내왔다. 주디를 만난 건 고작 일 년 전의 일이니 그녀가 하루쯤 휴가를 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주디가 자기가 없는 동안 외로워서 울지나 말라는 농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온기라는 것은 간사하게도, 곁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 가치를 느끼는 법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휴가 내고 홍당무 마을이나 구경갈 걸 그랬나. 토끼만 바글바글 모여있는 광경은 흔치 않은 장관일테고, 나름 괜찮았을 거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닉은 모처럼 주디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온 도넛박스를 괜히 툭 하고 쳤다. 역시 반겨주는 목소리도, 장난스럽게 툭툭 어깨를 치던 자그마한 손도 없으니 괜히 기운이 축 쳐진다.

날 대체 얼마나 길들인 거야? 이 교활한 토끼 같으니.

사무치는 외로움을 애써 외면하며 닉은 점심시간쯤에 그의 친애하는 홍당무 파트너에게 전화라도 한 통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목소리라도 들으면 이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가시리라. 물론 전화도, 문자도 한 통 없는 매정한 파트너를 잔뜩 놀려줘야겠다는 심술궂은 결심은 덤이었다.

그렇게 닉은 경찰이 된 이래 처음으로 파트너가 없는 일상을 맞이했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임에는 틀림 없었다. 문득 떠오른 유머에 말을 걸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차에 올라탔을 때 운전석을 잡은 자신만만한 미소가 없다는 걸 체감하는 것은 무척 기분 나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비어있는 옆자리가 점점 더 외로움의 크기를 부풀렸다. 닉은 그 답지 않게 사소한 일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오전을 흘려보냈다.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나아지겠지.

축 쳐진 꼬리를 흘끗 쳐다보며 닉은 애써 자신을 달랬다. 점심시간을 이렇게 기다려보긴 처음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와일드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디는 점심시간에 닉의 전화도 받지 않았을뿐더러 아침에 보낸 문자메세지에 대한 답문조차 보내지 않았다. 닉은 평소 주디가 아무리 바빠도 일정한 간격마다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답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사과 문자라도 보내는 것이 닉이 알고 있는 주디 홉스였다. 때문에 덜컥 걱정부터 앞섰다. 아무런 이유없이 연락이 끊기지는 않을텐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휴대폰이 꺼져있는 건가? 혹시 지진이라도 난 거 아냐? 여러 추측이 난무할수록 닉의 예민해진 신경은 점점 생각을 극단적으로 치닫게 했다.

아아, 정말 니콜라스 와일드답지 않은 하루야. 닉은 달콤한 블루베리 크림이 들어간 도넛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주디의 눈동자를 닮은 보라색 크림이 듬뿍 들어있는 도넛은 무려 시즌 한정판으로 닉이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으나 이상하게 더 이상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정말 과보호라고! 니콜라스 와일드, 너가 홍당무의 부모도 아니고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야!


문득 든 자괴감에 닉은 테이블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다른 동료들이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닉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연하게 웃어주기에는 그의 심경이 너무나 복잡했다. 스스로도 고작 하루 헤어졌다는 사실에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엄마와 헤어진 철부지 꼬맹이라고 생각하겠어. 닉은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손을 휘휘 저어주며 좋은 점심시간 보내라고 넉살좋게 대꾸해준 닉은 도넛박스를 들고 사내 휴게실을 나섰다. 휴게실에 있어봤자 쓸데없는 상상으로 기분을 망칠 바에야 차라리 주토피아의 성실한 일꾼이 되는 것을 택했다.

사내 휴게실에서 로비로 빠져나온 닉은 한 입 베어문 도넛과 남아있는 다른 도넛들을 클로하우저에게 건넸다. 어차피 같이 먹을 파트너가 없으니 있으나마나 한 도넛이었다. 도넛도 아마 먹으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더 좋을 테다. 닉은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이는 클로하우저에게 한 번 웃어주고 ZPD를 나섰다. 그래도 오후쯤에는 연락을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디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닉은 알람이 울릴 때마다 번개같은 속도로 핸드폰을 잡아채곤 했지만 그 때마다 보이는 것은 쓰잘머리 없는 광고와 사소한 안부문자 혹은 업무 관련 메세지들이었다.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람. 닉은 혀를 차며 핸드폰을 멀리 던져버렸지만 시야 끝에 여전히 문제의 기계가 아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닉은 몰려오는 자괴감에 머리를 핸들에 쾅쾅 들이박았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었다.

마침내, 태산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모두 흘렀다. 그토록 기다리던 근무시간 종료 알람이 정확히 여섯 번 울렸다. 닉은 불과 몇 시간만에 거뭇해진 눈으로 잠잠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부재중 전화 제로. 미확인 메세지도 제로. 툴툴거리며 불퉁하게 입을 내민 닉은 근무보고를 하기 위해 ZPD로 거칠게 차를 몰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차를 몰고 그대로 버니힐로 출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별 일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핸드폰이 고장났다거나 그 외의 사소한 일이 원인이라면 남은 뒷감당은 오로지 닉의 몫이었다…뭐, 여기까지는 사실 허울 좋은 핑계다. 배짱 두둑했던 사기꾼 니콜라스 와일드는 주디를 만난 후로 간덩이가 부은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로 승진했다. 주디의 안위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쪽팔림은 싸게 먹히는 거래지. 간덩이가 부은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진짜 이유는 자기 세뇌에 가까웠다. 그의 파트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며 블루베리를 잔뜩 가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자신은 태연하게 연락 한 통 없는 야속한 파트너를 탓하는 농담을 흘리면 되리라. 이와 같이 주디가 안전할 거라는 세뇌에 가까운 믿음이 닉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정말 니콜라스 와일드답지 않아!

닉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만약 근무보고가 끝난 뒤에도 주디의 연락이 없으면 주글(Zoogle)과 경찰국 자료를 샅샅히 뒤져 토끼 형상을 한 마약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만약 그런 마약이 없더라도 내일 휴가가 끝난 홍당무를 마주한 순간 토끼 중독에 걸리게 한 죄로 수갑을 채워 옆에 앉혀놓으면 되는 문제야.

맹세컨대, 그의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처럼 긍정적이고 태평하게 살기 위해 애쓴 적이 없었다.

그렇게 닉이 경찰복을 입고 한창 파트너 체포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르릉! 전화 벨소리가 그의 원대한 범죄 계획을 방해하고 말겠다는 듯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귀찮아 죽겠는데 이 사간에 대체 누구야. 닉은 미간을 찌푸리며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다.

 

 

"네네~마약 중독 환자 닉 와일드 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네? 저어, 주토피아 중심부 제 1관할서에 근무하시는 니콜라스 와일드 경찰관님 아니신가요?]

 

뜻밖에도,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는 몹시 앳되었다. 많이 잡아도 성인이 되기 직전의 나이 같았다. 기껏해야 스팸전화나 옛 친구 녀석의 전화이겠거니 했던 닉은 얼른 목소리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단 경찰관 니콜라스 와일드를 찾는 이상 그에 맞게 대응해야 했다.

 

"네. 제가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가 맞다는 것을 밝히자마자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다행이다! 번호가 틀리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늦었는데 실례가 많습니다. 저는 주디 언니의 동생 지니 홉스라고 해요. 저어, 언니의 일로 부득이하게 연락 드릴 게 있어서요….]

"……!"

 

그토록 기다리던 연락이 예상치 못한 상대를 통해 왔다. 그러나 주디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닉은 밀려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입 밖으로 나오려는 질문들을 삼켰다.

 

[사실 언니가….]

 

그러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질문들은 뒤이어 들려오는 이야기에 모두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발 밑이 훅 꺼지는 것 같은 아찔함 그리고 눈 앞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막막함이 닉을 덮쳤다.

전화가 끝나기 무섭게, 닉은 ZPD 내로 진입했던 차를 돌렸다.     

 

"닉? 닉! 어디가! 아직 근무보고 안 했잖아!"

 

마침 ZPD 외부로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클로하우저가 그런 닉의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무려 먹고 있던 도넛까지 팽게친 클로하우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지만 닉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경찰차 창문으로 손을 흔들며 클로하우저에게 임무 아닌 임무를 맡겼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먼저 퇴근합니다! 근무 중 별 일 없었으니까 서장님께 저 대신 말씀 좀 잘해 주십쇼, 선배님!"

"뭐? 아니 잠깐!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아참, 저 내일 휴가도 씁니다! 저 대신 휴가 신청도 좀 부탁드려요! 그리고 주디도 휴가 하루 연장한대요!"

"으악! 아냐 이건 아니라구! 닉 안돼! 가지마아! 나 서장님한테 죽어! 죽는다구우~!"

 

너 아까 이럴 줄 알고 나한테 도넛 준거야? 그거 뇌물이었어? 닉! 제발 잠깐만 좀 기다려! 너 이렇게 가면 나랑 같이 시말서 써야할 지도 몰라!

 

안타까운 클로하우저의 절규가 경찰청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닉은 못 들은 척 재빨리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클로하우저에게 좀 미안하지만 무려 도넛도 주고 선배님이라고까지 불러줬으니 이 정도 부탁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제멋대로 머리를 굴린 니콜라스 와일드다운 결론이었다.

힘찬 엔진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닉은 최대한 빨리 주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클로하우저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그는 도저히 태평하게 근무보고를 마칠 자신이 없었다. 뭐, 무단 퇴근에 무단 휴가까지 해버렸으니 클로하우저의 말대로 시말서나 가벼운 징계 정도는 각오해야겠지만.

닉은 침착하게 네비게이션을 가동시켰다. 목적지는 주디의 고향, 버니힐(Bunny hill)이었다.      


​◈  ◈  ◈





덜컹덜컹. 주토피아를 벗어나자 포장도로가 듬성듬성 보이더니 본격적인 시외로 접근하기 무섭게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도로가 펼쳐졌다. 그러나 닉은 거친 길에도 개의치 않고 몇 시간을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천장에 머리를 좀 박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쉬지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날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주디의 고향 버니힐(Bunny Hill)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니힐은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토끼언덕이란 별칭답게 마을 곳곳에는 홍당무 밭과 홍당무 가판대, 홍당무 모양 동상이 가득했다. 심지어 밭 주위를 빙 둘러놓은 울타리는 토끼 모양이었다! 만약 닉이 휴가 차 버니힐로 온 것이라면 마을 곳곳을 매우 흥미롭게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닉을 지배하는 감정은 온통 조급함과 초조함 뿐이었다. 닉은 차를 기차역 근처에 주차해놓고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디의 동생인 지니 홉스가 보내준 약도에 따르면 목적지는 바로 이 근방이었다.


똑똑.


마침내 약도에 나와있는 위치와 일치하는 집을 발견한 닉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닉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건지 희미한 불빛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들은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토끼 그림자가 창가에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문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아, 늦은 밤중에 죄송합니다. 주토피아 경찰국에 근무하는 주디의 동료 니콜라스 와일드라고 합니다. 지니 홉스씨의 연락을 받고 왔는데요."

 

상대방의 경계 어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수상한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닉이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철컹철컹. 굳게 잠궈놓은 빗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조그마한 얼굴이 하나 내밀어졌다. 주디를 닮은, 하지만 좀 더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토끼였다.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건지 아니면 상대가 여우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져 있었다. 크흠! 눈을 끔뻑이며 한동안 닉을 멀거니 쳐다보던 토끼는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파다닥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저, 정말 와주셨네요! 제가 전화드린 지니 홉스에요. 늦은 밤인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저야말로 늦은 밤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전화를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해해요. 저도 당황해서 한참 뒤에야 전화하는 걸 떠올렸으니까요. 아, 밤공기가 차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늦은 밤인데 여우를 집에 들여보내도 괜찮겠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닉은 일단 주어진 기회를 잡기로 했다.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자 토끼굴답게 이리저리 미로처럼 엉켜있는 구조가 펼쳐졌다. 현관을 지나자 갑자기 길이 여러개로 갈라지거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문이 불쑥 튀어나오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아늑하고 포근한 가정집이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바닥에는 직접 손으로 짠 것이 틀림없는 푹신한 러그가 깔려있었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목각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또 복도에 푹신푹신한 쿠션과 소파가 나란히 줄지어 있기도 했다. 왠지 모를 그리운 느낌에 닉은 자기도 모르게 멀거니 서서 집을 둘러보았다.

 

"헤헤, 집이 좀 정신없죠? 저희 토끼들은 워낙 형제수가 많다보니까 방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지었다고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평소에는 북적북적한데 다행히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동생들을 모두 재워놓은 참이에요."

 


그것 참 다행이군. 닉은 무심코 주디를 닮은 토끼 몇 십마리가 자신의 주위에 몰려있는 장면을 상상해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연스레 대화가 끊기면서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짧은 침묵 끝에 닉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저어, 주디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까 전화로 설명드렸다시피 가벼운 뇌진탕이래요. 계속 잠들어 있긴 하지만 호흡도 안정됐으니 괜찮을 거라고 아까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다행이네요."


"따라오세요. 주디 언니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지니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닉은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전화로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사건은 주디가 가족들과 버니힐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발생했다. 원인은 그 이름도 지긋지긋한 돌아뿌리 버럭시아스. 버니힐에서 평화롭게 아침을 즐기고 있던 양 가족이 먹은 샐러드에 돌아뿌리 버럭시아스, 일명 밤의 울음꾼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양 가족은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난폭해졌고, 집을 뛰쳐나와 마을을 온통 헤집고 다니며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주민이 초식동물에 속하는 동물들이었기에 도망치는데 급급했고 피해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마을에는 주토피아에서 밤의 울음꾼 사건을 직접 해결한 주디 홉스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디는 집집마다 연락해서 그물망을 있는 대로 긁어 모았다. 그리고 양들이 돌격하는 것을 틈타 그물망으로 발을 뒤엉키게 해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후, 수면제로 잠재웠다. 그러나 한 가지 패착이 있었다면, 양 가족 중 한 마리에게 수면제가 제대로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양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대로 주디에게 돌진했고, 주디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이 닉이 들은 사건의 전말이었다. 주디는 가벼운 뇌진탕이라 판정받았고 깊이 잠든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휴가 연장을 위해 뒤늦게 나마 동료인 닉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가 이렇게 불쑥 버니힐에 나타났다는 거지만.


그렇지만 그런 소식을 들었는데 태평하게 주디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어. 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디는 그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파트너였고 제 일상의 온기였으며 활력소였다. 주디가 다쳤다는 말을 들은 순간 닉의 머리 속은 새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굴러가던 머리가 텅 빈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공포가 닉을 잠식했다. 주디의 상태는 괜찮다고 듣기는 했지만 도저히 두 눈으로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니콜라스 씨는 우리 언니를 정말 좋아하나봐요?"

 


 

갑작스레 던져진 질문이 상념에 빠진 닉을 끌어올렸다. 닉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네?"

"소식을 듣자마자 피곤하실텐데도 이렇게 와주셨잖아요. 우리 언니를 아끼시는거죠?"


"아니, 뭐…."

 

닉은 제대로 대답을 못한 채 어물쩡거렸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제가요? 제가 홍당무를요? 아니 뭐 파트너니까 아끼긴 하지만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아마도?' 와 같은 온갖 츤츤거리는 답들이 오갔지만 이걸 주디의 여동생 앞에서 죄다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지니는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나갔다.

 

"사실 주디 언니가 니콜라스 씨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거든요. 부모님이 동료가 여우라는 걸 듣고 좀 놀라하시니까 니콜라스 씨가 능글거리긴 하지만 마음씨도 좋고 늘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준다고 언니가 엄청 열심히 변호하지 뭐에요? 아, 물론 부모님이 여우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에요. 옛날에는 좀 그랬지만 요새는 같이 일하는 동물 중에 여우도 있구요. 다만 언니가 워낙…, 옛날에 나쁜 일이 있어서 안 좋은 기억이 좀 있으신 것 뿐이에요."

"아, 그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습니다."

"와, 그럼 언니가 정말로 니콜라스 씨를 믿는다는 말이네요!"

 

지니가 활짝 웃었다. 휘어지는 눈가와 입가에 환하게 피어난 미소가 낯이 익어서, 닉은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답게 지니는 쾌활하고 명랑했다. 조잘거리는 입은 새처럼 지저귀듯 멈추지 않았다.

 

 

"저는요, 언니 곁에 니콜라스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언니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무작정 돌진하는 경우가 꽤 있으니까요. 언니가 경찰이라서 정말 자랑스럽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다치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이 많이 되거든요."

 


 

벽 곳곳에는 단란해보이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토끼들 중에서도 유독 활짝 웃고 있는 주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옹기종기 가족 사진이 모여있는 벽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던 지니의 발이 멈췄다. 액자 맞은 편에는 따뜻한 베이지 색으로 칠해진 원목 문이 있었다. 주황색 당근 모양 팻말에는 낯익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주디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좀 안심했어요. 언니가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하는 여우 씨가, 다친 언니를 걱정해서 한달음에 와 줄 정도로 좋은 동물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지니는 미소지으며 방문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우리 언니를 잘 부탁드려요."












​◈  ◈  ◈

  ​

​닉은 경찰 일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낯선 장소에 가면 최대한 감각을 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버릇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증거를 확보하려는 투철한 직업 정신에서 발휘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도 역시,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닉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킁킁 거렸다. 다행히 방은 낯설었지만 냄새에는 익숙한 향이 섞여있었다. 주디의 체향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기가 한데 모여 닉의 코를 간지럽혔다. 닉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 작은 원목 책상과 의자 하나,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옷장 하나, 푹신한 방석과 쿠션이 놓여있는 작은 소파 하나. 거기에 하늘색 벽지에 그려져 있는 작은 구름떼와 그 위에 걸려 있는 올빼미 모양 시계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토끼 인형들. 주토피아에 있는 주디의 낡은 회색빛 아파트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포근한 방이었다. 닉은 저도 모르게 주디를 닮은 귀여운 토끼 인형들에게 다가가 몇 번 쿡쿡 찔러보았다.


그 때 침대에서 몸이 뒤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닉은 저도 모르게 몸을 납작하게 움츠렸다. 홍당무가 귀가 밝은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행히 소리를 죽이자 다시 깊은 잠에 빠졌는지 더 이상의 뒤척거림은 없었다. 닉은 안심하고 최대한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하루종일 연락을 기다리게 만든 야속한 토끼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작은 전등이 깜빡거리며 잔잔한 불빛을 뿌렸다. 미동도 없이 감긴 두 눈은 다행히 평화로워 보였다. 평소의 제비꽃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주디가 제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머리에 붕대가 감겨있긴 하지만- 마음이 놓였다. 쌕쌕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오르락 내리락 숨을 쉬고 있는 작은 몸이 오늘 얼마나 그립고 보고팠던가.

 


 

"멍청한 토끼."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주디가 얄미워, 닉은 뒤늦게서야 괜스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주디가 다친 것이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디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하루종일 마음을 졸이면서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휴가가 끝나면 재회하여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 받았겠지…. 아니, 아니다. 닉은 생각을 정정했다. 사실 오늘 마음을 졸인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다만 그녀가 다쳐서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은 화가 났다. 머리에 감긴 새하얀 붕대가 자신이 없었던 사이 주디에게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몹시도 눈에 거슬렸다.

 

"제발 다치지 좀 마, 홍당무. 정말 누구누구씨 덕분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니까." 

 

닉은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평소라면 주디에게서 교활한 여우라거나 멍청한 여우라는 답이 돌아왔을테지만 오늘만큼은 이 고요한 정적을 큰 맘 먹고 봐주기로 했다. 닉은 주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속도 모르고 새근거리며 잠든 얼굴은 아기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뭐, 오늘만큼은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닉은 오늘 딱 하루만 관대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좀 더 푸념을 늘어놓고 싶지만 다시 돌아온 온기가 너무 소중해서, 그저 곁에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아무래도 좋았다.

 

"주디. 주디 홉스. 홍당무…."

 

닉은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그제서야 오늘 내내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챗바퀴 돌리듯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는 하루였는데도 하루 종일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반복되는 일상 중에 딱 하나 빠뜨린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주디 홉스의 부재였다. 그녀는 이제 닉의 일상을 완성시키는 퍼즐 조각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하루는 마치 낯선 도시에 혼자 도착한 이방인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언제부터일까. 이미 주디 홉스는 니콜라스 와일드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주디 홉스가 곁에 있는 지금에서야 니콜라스 와일드는 비로소 자신의 일상을 되찾았다.

 

"흐아암~"

 


닉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에 기지개를 펴며 크게 하품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힐 정도로 거대한 하품이었다. 닉은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끔뻑이며 눈가에 덕지덕지 붙은 눈꼽을 떼어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평소 즐겼던 낮잠시간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었지. 거기다 전화를 받고 버니힐에 도착하기 위해 저녁 내내 차를 몰고 내달렸다. 닉은 슬쩍 주디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침대가 꽤 큰 편이라 같이 누워도 될 것 같았다.

닉은 음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주디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불편한지 몇 번 뒤척이던 홍당무는 이내 갑작스러운 온기에 적응한 건지 새근거리며 다시 잠들었다. 닉은 몸을 웅크리고 주디를 꼭 껴안았다. 그는 품 안의 따끈따끈한 온기를 마음껏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눈을 뜨면 경악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녕, 하고 웃어주겠지. 그리고 또 똑같은 일상이, 주디와 나의 일상이 시작되는 거야. 닉은 감겨오는 눈꺼풀을 반기며 키득거렸다.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덧1 - 닉은 예상대로 일어나자마자 쩌렁쩌렁한 주디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

덧2 - 일찍 주무셔서 닉의 방문을 몰랐던 주디의 부모님은 아침식사에 낯선 여우 한 마리가 있자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덧3 - 주디의 253마리 형제 중 아직 독립을 하지 않은 67마리의 동생들은 닉의 꼬리를 붙잡으며 신기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닉은 요새 자신이 하고 있던 스마트폰 게임을 떠올렸다.

<<니콜라스 와일드는 귀여운 토끼떼의 공격을 받았다!>> <<HP가 2000 감소했다!>>

이에 대해 주디는 다른 종족이 토끼에게 귀엽다는 건 실례라며 판에 박힌 잔소리를 했다.

덧4 - 닉의 휴대폰을 확인한 결과, 보고 서장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3통, 문자가 6통, 클로하우저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13통, 문자가 56통 정도 와있었다. 그 외 다른 동료들의 걱정은 덤. 다행히 클로하우저가 필사적으로 이야기해주고 나중에 주디가 따로 사과한 덕분인지 약 세 시간의 잔소리와 한 달의 감봉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닉은 경찰 봉급이 얼마나 짠지 아냐고 투덜거리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덧5 - 여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덧6 - Happy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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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를 본 직후 떠올랐던 연성물인데 한동안 멈춰 있다가 이제야 글을 완성하네요.

이 글은 닉과 주디가 만난 후 1년 정도 후에 벌어졌다는 가정 하에 쓴 글입니다.

뭐랄까, 닉과 주디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일상 같은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한 명이 부재했을 때, 다른 한명이 느끼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닉의 시점으로만 쓴 이유는 주디보다는 닉이 1인칭으로 썼을 때 좀 더 재밌을 거 같았고 닉이 느낄 외로움이 주디보다 상대적으로 더 크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무래도 닉은 주위의 온기를 느낄 일이 적었을테니까요.

다만 마무리에 힘이 딸려서 어설프게 끝난 점이 좀 마음에 걸리네요ㅠㅠ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을 쓰는 내내 닉주디의 연애력이 뽕차서 괴로웠습니다.

주토피아 후편 나와주세요. 닉주디 사겨주세요.


 

 

 

 

 

 

[또봇/세모하나] 늦가을 밤

W.B - 츠쿠리

 

 

 

 

 

째깍째깍. 방 안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책상 앞에 앉아 정신없이 무언가를 계산하던 하나는 펜을 놓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너무 오랫동안 수식만 봐서 그런지 눈이 아팠다.

 

지금 몇 시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 푸느라 시간이 가는 지도 몰랐네. 하나는 혀를 차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불이 꺼져 깜깜했고 하나의 방 못지않게 조용했다. 아주 가끔 두리가 축구 경기를 봐야 한다며 소파에 앉아 열렬한 응원을 펼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시간의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내심 그 조용한 적막을 맘에 들어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소리를 죽이며 하나는 부엌의 냉장고로 갔다. 며칠 전에 사다놓은 아이스크림이 있으려나? 왠지 단 것이 먹고 싶어서 냉동실의 문을 연 하나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공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두리가 먹을 걸 내버려뒀을 리가 없었다. 요새 두리는 성장기라는 이유로 걸어다니는 저장고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이 먹곤 했다. 하여튼 차두리, 먹으면 좀 사다놓으라니까. 하나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윗옷을 걸쳤다. 머리도 식힐 겸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가지고 와야겠다.

 

그러나 신발을 신고 현관 문을 여는 순간 쌀쌀한 바람이 하나를 덮쳤다. 슬슬 겨울로 흘러가기 시작한 늦가을 저녁은 생각보다 추웠다. 추운데 가지 말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의지의 차하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과감하게 집 밖으로 몸을 던졌다. 추운 건 추운 거고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였다.

 

 

[하나, 어디 가는 거임?]

 

 

문 여는 소리를 듣고 깼는지 엑스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물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몇년 전부터 또봇들에게 수면모드에서 소리를 감지하면 일어날 수 있게끔 해놓았다. 아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면모드가 해지된 모양이었다. 하나가 엑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편의점에. 잠깐 아이스크림 좀 사오려고."

 

[새벽은 위험함. 같이 가는 것이 어떻겠음?]

 

"요 앞에 잠깐 가는 건데 뭘…, 금방 갔다 올거야. 그런데 요즘 날씨 쌀쌀하던데 춥지 않아? 차고로 들어갈래?"

 

[지금은 괜찮음. 춥다 싶으면 이야기 하겠음. 고맙다, 하나.]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럼 나 갔다올게! 나 기다리지 말고 자, 알았지?"

 

[알겠음. 하지만 기다릴 수도 있음.]

 

 

기다리겠다는 걸 굳이 돌려말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성격인 엑스다웠다. 걱정이 잔뜩 담긴 엑스의 말에 하나는 키득거리며 집을 나섰다.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엑스는 아직도 하나를 보호해줘야 하는 어린아이로 보곤 했다. 어린아이라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해주는 엑스가 싫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보호해줘야 하는 어린아이 취급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하나는 무뚝뚝한 얼굴을 가진 한 소년을 떠올렸다. 소년이라기엔 너무 커버렸지만 청년이라기에는 약간 엣된 모습이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하나는 원래 철없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기에 누군가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걱정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힘들 때, 내색하지 않아도 다가와서 걱정해주는 사람이 하나 생겨났다. 안 그런 척하면서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 권세모를 떠올리자 하나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하고 웃었다.

 

 

"뭘 그렇게 웃고 있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하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헤드셋을 목에 걸치고 트레이닝 복을 입은 세모가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약간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모의 모습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내 웃었다. 세모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를 노려봤다.

 

 

"왜 웃어."

 

"아하하, 미안미안. 넌 평소에 잘 안 뛰어다니고 매일 빼딱하게 걷잖아? 그런데 뛰어와서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좀 우스워서."

 

"…안 뛰어왔어. 그리고 평소에 빼딱하게 걷지도 않아."

 

"에이,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것보다 밤이 늦었는데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요 앞 편의점에.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말야."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추운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아이스크림은."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세모는 하나 옆에 서서 골목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학교 이야기, 공부 이야기, 때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가는 길은 조용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즐거웠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편의점에 도착했다. 하나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스크림 코너로 직행했다. 하드를 살까, 콘을 살까? 아니면 쭈쭈바도 괜찮은 거 같은데. 뒤에서 세모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는 진지하게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마침내 고른 하드를 입에 문 채, 하나는 다른 아이스크림 하나를 세모에게 건넸다.

 

 

"자, 너도 먹어. 내가 살게. 덕분에 여기까지 심심하지 않게 왔으니까."

 

"그래. 잘 먹을게."

 

 

몇 년을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지냈더니 이제 서로의 취향쯤은 서로 꽤뚫고 있었다. 그 증거로 추운 날씨라고 투덜거렸던 것과는 달리 세모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빠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그걸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하나는 계산을 치르고 편의점을 나왔다.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세모가 옆에 나란히 섰다.

 

쌀쌀한데다 새벽이라 그런지 하얀 입김이 서렸다. 하지만 그랬기에 하늘은 높았고, 별들이 총총히 빛났다. 달도 밝게 떠서 은은하게 비춰지는 골목은, 늘 보던 것임에도 꽤나 다른 감상을 갖게 했다. 그렇게 말 없이 하드를 베어먹으며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일상에 감탄하던 하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세모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안 자고 밖에 나와 있었어?"

 

"뭐?"

 

"아니 나야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나왔지만 너는 왜 밖에 있었냐구. 문득 궁금해져서."

 

"……."

 

 

금방 답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세모는 답이 없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가득찬 적막에 어리둥절해진 하나는 가만히 세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나름 소꿉친구인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권세모가, 당황해하고 있었다.

 

뭐야, 왜 당황해하는 거야? 하나가 계속 시선을 맞추자 세모가 홱, 고개를 돌리며 하나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그, 그냥… 운동 좀 하려고 나왔는데 너가 있어서 말 건거야! 뭐 내가 너 나오는 거 보고 나올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어?"

 

"큼! 늦었다, 빨리 가자."

 

"야, 잠깐! 권세모 너 방금 뭐라고 그런…, 야!"

 

 

새빨개진 얼굴로 먼저 가버리는 세모의 뒷모습을 하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추운 바람이 부는 늦가을 밤, 한기가 들어야하는데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도 세모와 같이 귀끝까지 얼굴이 달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나는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  ◈  ◈

 

 

 

 

 

 

 

 

 

몇 시인지도 모르는 새벽.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던 세모는 방 한편에 있는 넓은 창을 바라보았다. 창은 남향으로 나 있어 낮에는 햇빛이, 저녁에는 가로등 불빛을 타고 별들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점은 창이 앞 집을 마주보게끔 되어 있어서 마음껏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세모는 무의식적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의 일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이면 거의 스토킹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단짝이라는 빌미로 낮이고 밤이고 붙어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뭐할까. 차하나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둔해서 무얼 해도 친구라는 이유로 끝나는 것 같았다. 아니지 그냥 저 차씨 집안의 유전자 자체가 둔한 게 틀림없다. 눈치없이 은근슬쩍 하나와 제 사이로 끼어드는 차두리를 떠올리며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집은 딱 한 곳만 빼고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커튼이 쳐져 볼 수는 없지만 세모는 하나가 보이는 것마냥 뚫어져라 불이 켜진 곳을 응시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대체 안 자고 뭐하는 거야. 내일도 아침 일찍 학교 가야 하면서. 마찬가지로 학교를 가야하는 입장인 자신은 생각하지 못한 채 세모는 투덜거렸다. 그렇게 일찍 좀 자라고 잔소리 했는데도 참 말을 안 듣는다.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 차하나다웠지만 가끔은 좀 말을 들어줬으면 싶었다. 걱정하는 입장에서는 속이 타 들어가는데 꿋꿋하게 자기 주장만 내세우니 뭐 어쩌란 거야.

 

그 때였다. 갑자기 앞집의 문이 열리더니 윗옷을 간단하게 걸친 하나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좋았지만 그보다는 지금 시각이 새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니 이 새벽에 대체 어딜 가려는 거야! 세모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 사이에 하나는 벌써 집을 나와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최대한 조용히, 그렇지만 속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만큼 내달리던 세모는 현관 문을 열고 거의 뛰쳐 나오다시피 나왔다. 조용히 나온다고 나왔건만 그 소리를 듣고 깼는지 제트가 헤드라이트를 끔뻑거리며 소리쳤다.

 

 

[세모! 어디가는 거냐고, 그러더라구?] 

 

"깼어? 어, 나 잠깐 운동 좀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말고 자!"

 

 

제트는 다급하게 말을 내뱉고 달려나가는 세모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남들보다 몇 배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제트는 볼 수 있었다.

 

 

[아니 무슨 슬리퍼를 신고 운동을 하냐고, 그러더라구.]

 

 

그러나 제트의 혼잣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의문을 표하던 제트는 혀를 몇 번 차며 다시 수면모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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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작.

 

또봇 최애는 하나....우리 귀요미 하나 ㅠㅠㅠㅠㅠㅠ

셈한 너무 풋풋하니 귀엽지 않나요ㅠㅠㅠㅠㅠ

 

 

 

 

 

 

 

[어시장 삼대째/에이지] Platonic

 

 

 

 

 

 

 

 

도쿄에서 소비되는 생선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츠키지 어시장. 수많은 중간 도매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80년 전통을 자랑하는 생선 도매상 '어진'은 요새 들어 시끌벅적하다. 새로 들어온 어전의 삼대째, 아키키 쥰타로가 그 시끌벅적한 소리의 중심인데, 먹보에 왕초보인 신입 중간 도매상이면서 늘 묘하게 사람을 이끈다. 오늘도 그는 처음 보는 생선을 보며 호기심에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고 그 주위로 어떻게든 삼대째의 시선을 돌려보려는 마사, 생선을 상세하게 설명 해주려는 타쿠야, 느긋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는 에리와 와카가 있었다.  

 

그런 삼대째를 지켜보는 어진 최고의 중간 도매상인 에이지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삼대째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나온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소탈한 성격과 열정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삼대째가 어시장에 온 이후로 어시장의 흐름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어시장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고, 어시장의 활로가 다양하게 뚫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의 입가에서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대째를 만나는 사람들은 기분 나빴던 일은 어느새 잊고 그를 따라 웃음을 짓곤 했다. 심지어 신궁의 삼대째인 슈이치로마저 처음에 보냈던 못마땅했던 시선을 지운 채 점점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지 않은가. 그것은 어시장에 찾아온 놀랄만한 변화였다.

 

사실, 에이지는 아키키 쥰타로라는 남자가 어진을 잇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살을 찌푸렸었다. 전직 은행원에, 사람을 무자비하게 해고시킨다는 소문은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물론 소문 전부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풋내기이던 에이지를 어진 최고의 중간 도매상으로 성장시킨 이대째 사장님이 맞이한 사위다. 사장님의 귀한 딸인 아스카를 데려간 남자가 그렇게까지 형편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으로 불안감이 가득찬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어진이 소중했다. 어진은 그의 생활의 보람이며 소중한 장소였다. 그런 곳에 새로운 삼대째가 오는데 소문부터 좋지 않으니 불안감이 엄습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진에 도착한 삼대째라는 남자는 생각과는 다른 남자였다. 삼대째라는 남자가 어시장을 헤메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삼대째를 찾으러 갔을 때, 정작 그는 어슬렁어슬렁 어진에 도착해서 생선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물을 뒤집어쓴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생선을 살펴보는 남자. 가게를 지키며 사나운 눈매에 무뚝뚝한 인상의 삼대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에이지는 쥰타로가 어설픈 초보 손님인 줄 알고 쫓아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맹한 남자가 새로운 삼대째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때만큼 에이지는 놀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생각만큼 인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척 보기에도 초보에, 생선이라고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일 것이 뻔했다. 그런 남자에게 가게를 맡긴다니 지나가는 개가 비웃을 거라고 에이지는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괜히 심술이 나서 에이지는 삼대째를 축하하기 위해 쓰일 방어를 쥰타로에게 직접 골라보라고 말해버렸다. 평소의 에이지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그 정도의 눈도 갖지 않고서는 어진을 맡길 수 없다는 오기도 있었다. 그런 에이지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지켜보던 이대째 사장님도 흔쾌히 허락을 했고, 쥰타로도 방어를 골라보겠다며 헤픈 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에이지가 생선을 모르는 초보 삼대째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골라보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더니 과연 둔한걸까, 아니면 그걸 알면서도 선선히 넘어간 것일까.

 

그런데 의외로 아키키 쥰타로는 훌륭한 방어를 골라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훌륭한 방어였다. 에이지는 그 때,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이 남자의 깊이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 그것은 한 사람에게 보이는 일종의 관심에 가까웠다.

 

그 후로 어진에 자리잡은 삼대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온전히 에이지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켜볼수록 처음에 미덥지 못하던 그의 모습은 점차 다른 모습으로 에이지의 머릿속에 새겨져갔다. 왕초보에, 둔하고, 덜렁대지만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한 따뜻함과 열정은 에이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켜갔다. 그는 서서히 둥지를 틀어가고 있는 새와 같았다. 자유롭게 날 수 있지만 항상 둥지로 돌아와서 주변 사람들을 품어준다. 에이지는 그런 삼대째의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에이지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천명의 사장님이 다시 요리계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을 거절해버린 것은. 물론 요리는 에이지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이었다. 비록 요리를 위해 생선을 배우러 어시장에 왔다가 생선의 매력에 빠져 어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요리는 어시장과 버금갈 정도로 에이지의 생활의 일부였다. 천명의 사장님이 제시한 조건은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어시장에서 벗어나 요리계로 돌아갈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다. 에이지에게 있어서도, 에이지와 장래를 함께할 치아키에게 있어서도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에이지는 요리계에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무언가 하나 빠져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이지는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머리가 아닌 심장이 어진에 남아서 삼대째를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키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두근거리고, 말랑말랑한 그런 달콤쌉싸름한 감정. 

 

 

"으악, 삼대째! 또 먹을 생각이에요?"

"하하, 맛있어 보이는 생선인데 보기만 하면 아깝잖아? 에이지! 오늘도 부탁할게!"

 

 

이런, 처음 보는 생선에게 또 삼대째가 마음을 뺏겨버린 모양이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 생선을 내미는 삼대째를 보며 에이지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맡겨두세요."

 

 

 

 

 

 

 

 

[은혼/긴토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W.B - 츠쿠리 

 

 

 

 

 

 

 

 

 

소요 선생님. 잘 지냈어?

 

나 누군지 알지? 어라, 설마 모르는 거야?

사람이 늙으면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더니 선생님도 그 절차를 밟고 있는 거야?

나야! 선생님의 제자인 긴토키라고!

 

선생님. 언제까지나 당신의 커다란 등만 바라보며 살아갈 것 같았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어. 이제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매일 잔소리 하던 거 다 할 수 있다고. 담배도 펴도 되고, 늦잠도 마음껏 잘 수 있고, 단 음식은‥‥, 당뇨 때문에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하여튼 간에 먹을 수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검을 휘두를 수 있지. 물론 함부로 휘두르지는 않아, 선생님. 검에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무게를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그게 당신이 준 가르침이니까. 그리고 담배도 피지 않아. 선생님은 담배 연기 싫어했으니까. 제멋대로였긴 하지만 선생님의 어린 제자였던 긴토키는 꽤나 바람직하게 성장한 것 같지?

 

그런데 신스케 그 자식은 어떻게 되버렸는줄 알아? 내 동태눈깔 보다 아주 더 맛이 간 눈이 돼버렸어. 참나, 지가 나이가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눈이 희번득한 광기로 가득 찼다니까? 그 뿐인 줄 알아? 담배도 막 핀다고! 그것도 늙은이처럼 뻐끔거리며 낡은 곰방대로 펴.

 

하여간, 그자식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영 삐뚤어졌어. 담배피면 맛이 간다는 선생님 말 그다지 안 믿었는데 지금은 믿어. 역시 주변에 샘플이 있으니까 잘 믿게 되더라고.

 

도대체 언제까지가 질풍노도의 시기야?? 자기가 키가 작으니까 아직도 사춘기를 겪는 줄 아나보지? 그 녀석 거울도 안 보나봐! 담배를 피니까 그렇게 얼굴이 폭삭 늙지!

 

그나저나 선생님 정말 눈이 삔 거 아냐? 어떻게 이런 녀석을 '착한 아이'라고 칭찬할 수 있어? , 선생님은 실눈이여서 항상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착각도 무리가 아니려나.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그 녀석, 내가 아는 어떤 중증 S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 되어버렸다고.

 

, 그래도 즈라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아. 근데 솔직히 그 녀석도 좀 삐뚤어졌어.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글쎄 테러 활동을 하고 있더라니까? 그리고 나더러 같이 테러활동 하자고 막 꼬드기는 거 있지? 선생님이 항상 범생이라고 불렀던 녀석이 어쩌다가 저렇게 되어버렸는지.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이 틀린 게 아니라니까.

 

사카모토 녀석이 그나마 나은 건가? 그 녀석은 우주를 돌아다니고 있어. 쾌원대라는 상단을 이끌고 무역 일을 하고 있지. 사실,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옆에는 유능한 부하들도 있으니 그 녀석이라면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

 

, 친구 녀석들만 소개하고 정작 내가 뭘 하는지는 말을 안했네. 나는 지금 '해결사'라는 일을 하고 있어. 간단히 말하자면 부탁한 일들은 뭐든지 다 해결해주는 곳이야. 물론 내 신념에 배반하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안심해. 지금 나는 먹보 야토족인 카구라와 매일 츳코미 걸기 바쁜 신파치와 함께 일을 하고 있어. 다행히도 아주 착한 녀석들이야. 소싯적에 나를 보는 것 같다니까? 물론 난 먹보도 아니었고 태클도 걸지 않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지만 말야. 그치?

선생님. 당신이 죽고 나서 나는 종종 악몽을 꿔. 선생님이 잡혀가고 난 후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복수심에 모든 세상을 검으로 베어나갔지. 요새도 그 당시의 꿈을 자주 꾸곤 해. 그 때 나는 '백야차'라고 불렸어. 은발을 휘날리며 적들을 베어가는 모습이 실로 야차 같았다나?

 

우습지 않아? 정작 난 내가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는데. 복수심으로 불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으니까. 난 그저 내게서 선생님을 뺏어간 놈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너희들도 내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외쳤지. 선생님이 항상 말하던 '남을 사랑하라', 그런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하지만 복수심과 동시에 든 생각이 뭐였는지 알아? 이제는 동료를 잃기 싫다는 마음이었어. 그래서 더욱 전장에서 날뛰었는지도 몰라. 수백 명을 베고 죽여도 내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자랐으니까. 그 때는 오직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중요했어.

 

하지만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그런 모래 같은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지. 나는 그 모래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어. 모래는 손 사이로 얼마든지 빠져나가는데 말이야.

 

그래, 나는 그런 게 사람 목숨이란 걸 알아버린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그 모래를 움켜쥘 수 있다고 필사적으로 믿었어. 참 바보 같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어. 이래서는 증오심만 키울 뿐 결국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결코 당신을 잃은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양이 전쟁을 그만뒀어. 하지만 그 전쟁으로부터 10년 더 넘게 지난 지금도 나는 내 안에서 피에 굶주려있는 야차를 느낄 수 있어. 느긋한 내 모습과 냉정한 내 모습이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지. 때문에 주변에 조그만 살기만 흘러도 순식간에 반응해버리는 내 자신이 있어. 아마 그 감각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것일 테지. 언제 다시 '야차'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니까.

 

사실 알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마침내 이성을 잃고, 다시 '야차'가 되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기는 해. 하지만 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언젠가 이 결심을 깨트려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선생님. 나는 선생님을 잃고 전쟁터에 간 그 때 결심했어. 이게 당신을 지키지 못한 벌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지금도 그 결심은 버리지 않았어. 내가 야차가 되더라도, 손에 다시 피를 묻히더라도 그건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 나에 대한 벌이야. 그러니까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야차가 되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손에 피를 묻히겠어.

 

선생님. 사실 나는 금방 죽을 생각이었어.

 

나를 구원해준 선생님이 없다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 조금만 선생님에게 가는 시간을 늦춰야 될 것 같아. 지켜야 할 녀석들이 생겼거든. 다시는 지켜야 할 것들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짊어지고 있더라.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책임을 져야할 거 같아.

 

요즘 들어 인연이란 신기한 것이라고 새삼 깨닫고 있어. 선생님이 죽은 후 없어질 것만 같던 인연들은 어느새 셀 수 없이 많이 생겨나 나를 감싸고 있어. 이 인연들로 인해 내 마음은 지탱이 되고 있는 거겠지. 세상은 살수록 정말 이상한 게 많은 거 같아.

 

나 할일이 많이 생겼어. 선생님.

 

일단 선생님이 사랑했던 이곳을, 이 에도를 파괴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비록 많은 것들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지만 이상하게 선생님이 강조했던 내 영혼은 그대로 자리 잡고 있어. 그러니까 그것들을 지킬게. 무엇보다 꼬맹이 신스케 녀석도 막아야지. 글쎄 선생님이 숨 쉬었던 세상을 파괴하겠다잖아? 즈라 녀석만으로는 막기 힘들 테고, 우주를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카모토에게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별 수 있어? 나라도 막는 수밖에.

 

선생님, 과거에 사람들을 많이 죽였던 나는 지금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어. 비록 얼렁뚱땅 시작한 일이지만 난 과거보다 훨씬 행복해. 그러니 다행이지, 선생님?

 

이거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은 신스케, 즈라, 사카모토보다 나를 더 믿어 주리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늘 그랬잖아, 선생님은. 그렇지?

 
















2018.01.24 1차 수정


2012년작입니다. 지금은 은혼 내 전개가 엄청 많이 바뀌었죠.


 

 

 

 

 

 

[식탐정/오가타x다카노] 선배

W.B by - 츠쿠리

 

 

 

 

 

 

 

다카노 세이야. 유명한 역사 소설가이자 탐정 일을 하고 있는 남자가 오가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항상 옆에 붙어 다니던 비서 교코는 웬일로 보이지 않았다.

 

"다카노 선배!"

 

오가타가 싱긋 웃으며 다카노에게 다가갔다. 우물거리며 한 입 가득 크로켓을 베어 물고 있던 다카노는 웅얼거리는 입을 하며 오가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루 종일 먹는 버릇은 여전하다 싶었다. 하긴 먹지 않으면 식탐정 다카노 세이야일 리가 없지.

 

"웬일로 교코 씨가 없으시네요?"

 

오가타의 말에 다카노가 크로켓을 한 입에 삼키며 대답했다.

 

"교코는 부모님과 함께 3일간 온천여행 갔어. 나도 가고 싶었지만 마감이 있어서 말이야. , 모처럼 온천을 즐기면서 지역 특산물을 마구 먹어 치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선배가 가면 그 지역은 장사가 불가능하니 참아주시죠. 그런데 언제부터 선배가 마감을 그렇게 충실하게 지켰다고 그러십니까?"

 

찌릿. 다카노가 동정은커녕 아픈 곳을 찌르는 오가타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언제나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인지라 오가타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경시청 간부 후보생이라는 그의 명함도 다카노 앞에서는 언제나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나도 양심이 있어! 라기 보다는 편집자인 테라다가 위염에 걸렸다지 뭐야. 이번에도 마감 안 지키면 정말 편집자가 바뀔 것 같아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라다는 내 담당을 5년 넘게 맡았으니까 죽으면 곤란하다고."

 

죽으면 곤란하다라. 과연 선배에게도 자신은 죽으면 곤란할 존재일까? 오가타는 얼마 전에서야 다카노가 소설 작가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카노와 알게 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려주는 것이 얄밉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한 놈이 죄라면 죄니까. 게다가 왜 그걸 여태까지 알려주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 자신도 없었다.

 

물어봤자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요리조리 빠져나갈 선배를 오가타는 지나치게 잘 알았다. 결국 선배와 후배,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꼴밖에 더 되나. 때문에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디냐고 오가타는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대학교 시절부터 다카노와의 관계는 언제나 선배와 후배라는 평행선 위였다. 처음에 봤을 때 그의 인상은 그저 '많이 먹는 선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표정들에 매료되었다. 음식 이외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도 의외의 면에서 따뜻함을 보여준다. 엉뚱하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지만 그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배와 후배라는 평행선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오가타는 다카노의 옆에 있고 싶었다. 경찰청 경감의 자리에 있는 그가 늘 다카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나가려는 제 노력 중 하나였다. 물론 그의 선배는 이런 면에서는 의외로 둔하기에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어이, 오가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먹을 것 좀 사줘."

 

"네에? 방금 크로켓을 세 봉지나 드셨잖아요!"

 

"그거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가. 너 마침 휴일이지? 교코도 없는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선배랑 같이 밥을 먹으면 제 지갑이 털리는데요?"

 

"에이, 왜 이러나. 쩨쩨하게 신경 쓰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러면 쓰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이 덜컥 튀어나와 버렸다. 오가타는 순간적으로 나온 진심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다카노는 태연했다. 그는 씨익 하고 웃었다. 평소의 다카노가 늘 짓던 밝은 미소였다.

 

"무슨 사이긴! 절친한 선배와 후배 사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 먹으러 가자!' 라고 외치는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음식점으로 걸음을 옮기게 된 오가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어떠랴. 지금은 절친한 선배와 후배 사이로 만족을 해야지. 오늘도 그는 선배의 물주가 되어야할 듯싶다.

 

 

 

 

 

 

 

 










2018. 01. 24 1차 수정


2012년에 쓴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테라사와 다이사쿠씨의 만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워낙 요리만화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요리 장르를 만화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테라사와 씨의 만화는 개인적으로도 참 재미있거든요.

미스터 초밥왕은 보신 분이 많겠지만 아마 식탐정은 생소할 겁니다.

 

오가타와 다카노의 조합은 참 좋습니다. 매일 조언을 구하는 후배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요 ㅋㅋㅋㅋ

아무리 대학 선배에다가 도움을 받고 있다지만 그런 것 치고 먹을 것을 매일 조달하는 오가타의 눈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ㅋㅋㅋㅋ조은 커플이다 ㅋㅋㅋㅋ

 

 


 

 

 

 

 

 

 

어느 날 너는 내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말을 했다. 그 날은 녀석이 갑작스레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래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던 나는 너에게 물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비밀, 이라고 말하는 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때 나는 몰랐다.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대답했는지 그리고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래로 달려갈 각오를 했는지 그리고 너가 하려고 하는 일이 그 녀석을 위한 너의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랬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남겨진 자의 이야기

W. B - 츠쿠리

 

 

 

 

 

 

 

 

 

 

"선배를 좋아해요."

 

떨리는 성대. 떨리는 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녀는 내게 수줍은 목소리로 내게 고백했다. 그녀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선배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귀여웠으며 무엇보다 여성스러웠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었을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후배였다. 그러나 나는 고백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삐쭉빼쭉 제멋대로 뻗쳐있는 머리카락과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네가 그리워졌다. 정말 별일이었다. 좀 여성스럽게 다니라고 면박을 주던 네가 이다지도 그립다니.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없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나를 향해 올려다보는 그 간절한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바보같은 너보다 나를 더더욱 좋아하고 또 좋아해주겠지. 그러나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그 이상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몇 년동안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지를 알면서도, 그 고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답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런데 너의 고백을 받아들이면...그 여자애는 혼자가 되어 버려."

 

 

그래, 혼자가 되어 버린다. 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그 때와 같은 맑은 하늘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녀석이 가버리고 난 후 밝게 웃지만 축 늘어져버린 그 등을.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지금처럼 맑은 하늘을 보며 울던, 그 바보 같은 너의 뒷모습을. 어쩌면 너와 나는 닮았을지도 모른다. 너도 바보, 나도 바보. 바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것을 보니 나도 바보가 맞는 것 같다. 이성은 내게 그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마음은 그녀를 향해 거절의 말을 내뱉는다. 아아, 정말 소꿉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향해 손수건을 건내고는 뒤돌아섰다.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건 저 멀리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너다. 들쭉날쭉하고 제멋대로인 짧은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반가워보였다. 방금까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씁쓸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마음은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소리쳤다.

 

"어이-마코토!"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여성스럽지 못한데다가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들린다. 이거 중증인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너에게 다가갔다. 네가 윽박지르는 목소리마저도 이다지도 반갑다.

 

 

"고스케! 어디 갔었어, 기다리다가 가려고 했잖아! 일이 있으면 있다고 문자 같은 것 좀 보내란 말이야!"

 

"미안미안. 잠깐 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참, 그리고 오늘부터 야구는 못할 것 같다. 캐치볼로 바꿔야겠어."

 

"뭐? 늘 같이 하던 후배들 있잖아?"

 

"…아마 오늘부터 날 마주치기도 싫어할걸? 고백받았는데, 차 버렸거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귀를 막을 준비를 했다. 너가 얼마나 기가 막혀할지 알기 때문이다. 어찌나 평소에 나를 연애시키기 위해 애를 쓰던지. 일부러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나면 내 옆에서 걷게 해주거나 일이 있다고 둘러대서 나와 그녀, 단 둘만 있게 한다던지 정말 너답다면 너답다고 생각해야 할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노력은 가상하지만 몇 번의 패턴을 겪고 나자 자연스레 피하는 법도 익혔다. 덕분에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고백하려는 시도를 언제나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움직여야만 했다. 고백을 받고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야구를 못하게 된다고 실망하는 너의 얼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이런 나의 노력도 모르겠지. 예상대로 기가 막히다는 너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어어어? 왜 거절한거야? 내가 너한테 고백하게 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야구도 같이 하자고 부르고, 둘 만 있으면 은근슬쩍 자리 피해주고, 내가 혼자서 집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는데 그걸 다 참아줬더니…! 그리고 고스케, 알고 있어? 그 애 중학교 때부터 널 좋아했다고! 무려 중학교 때부터!"

 

"…강조하지마. 그리고 우린 이제 입시 준비해야 하잖아, 연애는 무슨 연애야. 그리고 지금 너가 내 연애 걱정해야 할 때냐? 입시 준비나 하시지? 너 저번에 모의고사 성적 올랐다고 자만하는 거 아냐? 너가 목표하는 대학에 가려면 넌 아직 한참도 멀었어."

 

"이익, 이럴 때만 성적이야기 꺼내고! 고스케 넌 바보야!"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야, 이 바보야."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대화인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며 가는 것을 좋아했다. 너가 알면 비웃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너와 둘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제는 야구같은 거 하지 않아도 좋다. 캐치볼이면 충분하다. 너와 단 둘이서 있다면 캐치볼이라도 야구보다 더 재미있으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표정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옆을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툴툴대며 가는 모습은 조금도 어른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3학년에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 너가 얼마나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장래를 털어놓았는지를 기억한다. 너는 큐레이터가 되어서 이모가 일하는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복원하고,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너의 그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얼굴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녀석을 향한 것이었음을. 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떠나가버린 그 녀석이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는 그냥 보기만 해도 알았고 어느 순간부터 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셋 중에서, 어느 순간부터 뒤쳐저서 걷고 있는 것은 나였다. 부정하고 싶었다. 너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녀석을 향한 우정이 있었고 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 3 자는 빠져주는 게 도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너와 녀석의 사이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물론 가슴은 아프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너가 웃는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 너가 녀석에 대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가버렸다. 그리고 너를 놓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아직도 너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떠올리며 막막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분명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그 생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 녀석을 위한 것인지. 

 

나는 말을 꺼냈다.

 

 

"있잖아."

 

"……."

 

 

너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치아키 녀석, 잘 지내고 있겠지?"

 

"……."

 

"그러고보니 너, 치아키한테 고백은 받았냐?"

 

 

대답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앞으로 가고 있던 너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녀석과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부터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애써 치밀어 올라오는 쓴 웃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뭘? 치아키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너가 치아키 좋아하는 거? 둘 중 어느 걸 알고 있냐고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빤히 다 보이는데 못 알아채면 오히려 바보지. 그래서 너 두고 치아키가 유학 가버렸다는 소식 듣고는 정말 놀라버렸지만 말야. 설마 그 녀석, 지금까지 편지 한 통 안 보낸 건 아니겠지? 혹시 주소 알면 편지 쓸 때 같이 써 줘라. 나한테 유학 안 알리고 간거, 정말 배짱 좋은 일이었다고. 다음에 만나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 배트로 후려치겠다고 전해."

 

"…편지, 오지 않아."

 

"뭐?"

 

 

이번에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그럴리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솟구쳤을 정도로 믿기지 않을 대답이었다. 그러나 쓸쓸함과 그리움을 감추고 있는 너의 얼굴의 일면을 본 순간, 네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벌써 녀석이 사라진지 반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편지 한 통이 오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유학 간 곳을 수소문해서 녀석을 두들기고 싶었다. 녀석은 내게는 감정을 숨기게 하고, 너에게는 새로운 감정을 심었다. 그렇게 멋대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으면 최소한 너에게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내게 너의 쓸쓸한 모습을 보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답지 않게 잔잔한 목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치아키가, 너무 급하게 뛰다가 넘어지지 말라고 했어. 기다려주겠다고."

 

"…뭐?"

 

"치아키는 미래에서 기다리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달려가야해. 치아키가 있는 곳으로."

 

 

그 말은 무척이나 추상적이었다. 아마 너와 녀석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영영 너와 그 녀석의 관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 알 것 같았다. 너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쓸쓸함과 그리움이 걷히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너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갔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손을 올려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러저리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손을 간질였다.

 

 

"으왓! 고스케?"

 

 

너의 놀란 목소리가 들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아마 언젠가, 먼 미래에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너와 녀석은 아마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서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런 미래도, 왠지 너희들이라면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고 해도 지금은 조금만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이렇게 단 둘이서.

 

 

"그럼, 나도 같이 달려가주지. 그 녀석에게 도달할 때까지, 있는 힘껏 달려줄게. 그러니까,"

 

 

물론 너가 달려가는 미래의 끝과 나의 끝은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무 급하게 뛰어서 다치면, 내게 와. 치료해줄테니까." 

 

 

 

 

 

 

 

 

 

 

달려가자, 너에게로.

기다리자, 너를 위해

지켜보자,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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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연성의 해였던가.

나는 왜 이리 글을 열심히 쓴 것인가.

 

여튼, 학교에서 본 시달소를 보고 썼던 글.

그 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시달소가 소설과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치아키x마코토x고스케 사랑해요.

 

 

 

밑은 당시의 후기.

 

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아시다시피 이 글은 고스케의 이야기 입니다.

고스케야 말로 정말 시달소에서 제일 아리송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고백을 해도 차버리고! 말하는 멘트만 보면 마코토를 좋아하는 건데 말이죠.

 

제 입장에서 고스케는 마코토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치아키가 너무 티나게 마코토를 좋아하니까 이 셋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그런거고요. 치아키가 사라진 이 시점에서, 고스케는 절대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면 마코토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잖아요. 집도 혼자 가고ㅠㅠ 

 

이런 고스케의 심정은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데요, 눈치채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워낙 제 멋대로 써서- 달려가는 건 마코토, 기다리는 건 치아키, 그리고 지켜보는 것은 고스케입니다. 이 셋의 대표적인 마음을 표현한거에요. 여기에서도 고스케의 불쌍함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불쌍한 고스케ㅠㅠㅠㅠ

 

마음 같아서는 남겨진 자의 이야기 1편 -고스케- 를 끝냈으니 남겨진 자의 이야기 2편 -마코토&고스케-, 떠나간 자의 이야기 -치아키-를 쓰고 싶습니다. 이 셋의 미래를 다룬 내용이 될 것 같아요. 마코토는 마코토의 마녀 이모처럼 큐레이터가 되서 박물관에서 치아키를 위해 그림을 지키면서 있을 거고, 고스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마코토의 곁을 지켜주겠죠. 친구이상 연인 미만인 관계로요.

 

사실 제일 걱정되는 게 치아키인데요, 아니 도대체 하늘이 파랗지 않고, 야구가 없어지고 인구가 그만큼 줄어들고 타임머신이 발명되려면 몇 년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기다려도 이건 못 만나잖아요! 환생하라는 거야 뭐야.

하지만 전 쓸 겁니다. 아마도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쓰고 싶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를 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에 뵈요!

 

 

 

그리고 쓰지 않았다고 한다(후눈

 

 

 

 

 

[노블레스/프랑라이] 회상

W.B - 츠쿠리

 

 

 

 

 

 

아프다. 온 몸의 신경들이 저릿거리면서 통증을 호소한다. 라이제르는 붉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블러드 필드를 한 번 사용한 것만 해도 몸이 견디지 못하는데 봉인까지 풀었으니 당분간은 이 통증을 감안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인을 푼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노블레스와 로드는 한 쌍을 이루는 존재. 로드가 자신의 구실을 하지 못하면 노블레스의 힘 또한 완벽해지지 못한다. 그래,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서서히 의식이 사라져간다. 조금이라도 성지에 들어가 쉬는게 어떻겠냐는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의 말이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다. 물론 성지에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순간의 안식이 아닌,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될 지도 몰랐다. 쇠잔해진 몸이 영원의 안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약간의 안식을 취하려고 해도 시간의 압박이 그를 죄여왔다. 그래서 그는 결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영원한 잠을 자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에 끝까지 성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무엇보다 그가 영문 모를 820년이란 시간 동안 긴 안식을 가졌을 때, 그를 찾아 전 지역을 힘들게 헤맸을 프랑켄슈타인에게 다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결코 성지에서 잠들 수 없는 처지였다. 하긴 지금도 걱정을 끼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씁쓸하게 읊조린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프랑켄슈타인이 다시 걱정을 하기 전까지 의식이 돌아와야할텐데. 라이제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의식을 놓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 프랑켄슈타인의 걱정스러운 푸른 눈동자가 보인 것 같았다.

 

 

 

 

 

 

 

 

 

 

 

 

◈ ◈ ◈

 

 

 

 

 

 

 

쿠웅!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땅이 움푹 패이고 질식할만큼 매캐한 연기가 폐를 압박해왔다. 프랑켄슈타인은 콜록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미지의 것을 연구하는 자로서 노블레스의 영토인 루케도니아에 들어가 호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루케도니아는 그의 부족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그는 정상에 군립하는 존재였으나 이곳에서는 고작 두 명만으로도 자신을 충분히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건가."

 

 

프랑켄슈타인 못지 않게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금발의 남자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금발머리 남자의 뒤를 이어 은발을 가진 중년의 남자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도주 범위를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다. 케르티아가의 가주와 란데그르가의 가주라고 했던가. 두 남자 또한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상대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지라 수적으로는 열세임이 분명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은 혀를 차며 다크 스피어를 강하게 쥐었다. 상처입은 몸이 욱신거렸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에서 감도는 비장한 기색을 읽었는지 두 남자 또한 소울 웨폰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아직도 우리를 상대할 생각인가. 그만 포기하고 순순히 잡혀주는 게 네 몸에도 이로울텐데? 로드의 생포하라는 명령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너를 좀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성한 루케도니아에 침입하여 중앙 기사단을 욕보이고 아름다운 대지를 심하게 손상시킨 죄는 죽어 마땅하나 로드의 앞에 가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쎄……."

 

 

그냥 '항복을 해라' 라고 간단히 말하면 될텐데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겉멋만 들었군. 프랑켄슈타인은 속으로 비웃으며 대답을 느릿하게 끌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체내에 산소가 공급이되자 프랑켄슈타인은 입을 열었다.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린 채였다.

 

 

"미안하게도 말이지, 우리 과학자란 생명체는 속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존재거든. 아, 너희처럼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말을 길게 끄는 취미는 없으니 간단하게 말하지. 거절한다."

 

 

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우리는 네 반응에 대해 합당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달려들었다. 다시 한 번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헉헉…!"

 

프랑켄슈타인은 곁눈질로 뒤를 살피며 끊임없이 달렸다. 끈질기게 따라오던 두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몸을 숨기는데 급급해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숲으로 들어왔지만 어쩐지 이 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두 남자의 기색이 사라졌던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상처 입고 도망치던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두 남자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흔치 않을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추격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프랑켄슈타인은 달리는 것을 멈추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새소리나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문득 프랑켄슈타인은 예전에 심심풀이로 읽었던 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무서운 괴물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저주받은 숲에 한 소녀가 찾아가 괴물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준다는, 뭐 그런 시시한 내용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피식 웃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린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아무리 현재 처한 상황과 소설 속의 배경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럴리가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품격을 중시여기는 노블레스들이 괴물 따위를 그들의 땅에 방치해둘리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걸음을 옮겼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이 숲이 수상쩍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괴물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프랑켄슈타인에게는 휴식이 절실했다. 그러나 추격자들이 없다는 안심 때문일까. 걷는 속도는 아까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게다가 슬슬 한계가 닥쳐오는 것인지 시야가 흐릿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프랑켄슈타인은 몽롱한 시야를 애써 바로잡기 위해 고개를 여러 번 흔들었지만 소용 없었다. 이제는 발마저 꼬여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가 걸어가는 길이 붉은 핏자국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힘의 부작용이 이제서야 오는 건가. 프랑켄슈타인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버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숲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두 남자가 이 숲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짐작은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적어도 쫓기는 신세보다는 나을 테지. 조금이라도 견뎌서 어떻게든 내일 아침까지는 몸을 지탱해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자. 프랑켄슈타인은 마음을 다지며 애써 발을 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동안의 결심이었을 뿐이다. 결국 한계가 그를 덮쳐왔다. 프랑켄슈타인은 상처 부위를 움켜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스라이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풋풋한 풀내음이 코를 찔러왔다. 여기까지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지금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직감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벽돌이라도 얹어놓은 것 같은 무거운 눈꺼풀이 그에게 눈을 감으라며 유혹했다. 그 유혹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켄슈타인은 곁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왠지 그의 의식의 끝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프랑켄슈타인은 깊은 수마에 몸을 맡겼다.

 

 

 

 

 

 

 

 

 

향긋한 라벤더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프랑켄슈타인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감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따가운 불빛이 그의 시야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머리를 울리는 두통에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의식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기억을 생각해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와주지 않았다. 프랑켄슈타인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상처부위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우아한 미술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을 채우고 있는 모든 물건들이 인간 세계에 내놓으면 평생을 부귀를 누려도 남을 만큼 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화려한 물건들을 보고 프랑켄슈타인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은 '차갑다'는 것이었다.이 화려한 물건들에서는 그 어떠한 애정이나 온기, 심지어 사용한 흔적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귀하게 모아놓은 장신구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채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건가."

 

 

프랑켄슈타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단순히 한 남자가 서 있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를 압도하는 것 같은, 흡사 신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가 그 곳에 있었다.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프랑켄슈타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은빛의 십자가가 남자의 귓가에서 흔들리며 샹들리에의 영롱한 불빛을 반사시켰다. 남자는 불과 한 뼘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두고 멈춰섰다. 남자의 홍옥처럼 붉은 눈이 프랑켄슈타인을 흩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순간적으로 고고한 야수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오만했으며 그 오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기품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프랑켄슈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동안'을 겪는 내내 프랑켄슈타인은 전신을 지배하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상황이 그에게 닥쳐올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이곳에서 도망 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는 것과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가 만난 노블레스들 중에서도 그 높이를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이 그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 열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마침내 남자가 입이 열렸다.

 

 

"…혹시 붕대를 감을 줄 아는가?"

 

 

그토록 깨지길 바라던 침묵이 깨지던 순간,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멍하니 되물었다.

 

 

"…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 때 남자의 얼굴은 마치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아 보였다.  

 

 

 

 

 

 

 

 

 

 

남자는 말이 짧았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용케도 그 짧은 말을 토대로 남자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재구성 해낼 수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자는 아마 '나는 붕대를 감을 줄 몰라, 미안.'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프랑켄슈타인은 다친 자신의 몸에 약만 발라져있을 뿐, 지혈을 위한 붕대가 감겨져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붕대 대신 담요로 보이는 천이 자신의 몸에 둘둘 감겨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 먼지투성이의 천을 담요로 알아본 것이 용했다. 아무리 담요를 수백 장 감겨놓으면 뭐하나. 지혈이 될 리가 만무한데. 프랑켄슈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체력이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른 인간들이었으면 지혈이 되지 않은 순간 과다출혈로 죽었다.

 

아니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다치면 붕대도 안감나? 이런 의문점은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켄슈타인은 깨달았다. 귀족들이 이상한게 아니라 이 남자한테 뭘 기대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도 그럴 것이 프랑켄슈타인이 누워있는 침대 주변에는 이미 감으려고 시도하다가 너덜너덜해진 붕대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붕대를 감아주려다가 실패를 거듭했으면 부상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붕대를 감을 줄 아냐고 물어보았겠는가. 게다가 차를 끓이려다가 실패한 모양인지 곳곳에 물기와 엎질러진 찻잎들이 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귀족 중에서도 정말 손 한 번 까딱 안 해본 귀하신 몸이구나. 그리고 그 추측은 안타깝게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는 최악의 간병인에게 주워지게 된 셈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가 건네준 붕대를 받아 말 없이 팔과 복부에 감았다. 다행히 이미 약이 발라져 있어서인지 피는 멈춘 상태였다.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은 한동안 무리겠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기적에 가까웠다. 사실 숲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밤에 숲에 머무른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숲의 새벽은 평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그곳을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머물렀다면 아마 프랑켄슈타인은 지금쯤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못했을지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남자는 프랑켄슈타인의 옆에 앉아 그가 붕대를 감는 걸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남자에게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의 눈은 건조했으며 얼굴에는 일체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왠지 모르게 남자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무표정했고, 무감각했고, 무감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풍겨져나오는 옅은 빛깔의 감정을 프랑켄슈타인은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애초에 감정이란 것이 없다면 왜 그토록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쓰고, 차를 끓여다 주려고 애쓰고, 약을 찾아주려고 애썼겠는가. 물론 노력이라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최소한의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처음 대면하는,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성스러운 땅의 '침입자'에 대해서 말이다.

 

침입자라, 씁쓸하게 웃던 프랑켄슈타인은 문득, 아직도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처음 만난 사이인데 자기소개를 미처 하지 못했다. 남자 또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상황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생각만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통제를 벗어난 입 때문에 프랑켄슈타인도 당황했지만 남자 또한 놀란 모양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보일 테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어쩐지 그에게서 놀랐다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름을 물은 것이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이었던가? 남자의 눈에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자 프랑켄슈타인은 저도 모르게 귀족들에게는 이름을 묻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름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남자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다."

 

"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은 것은…, 처음…이다."

 

"……."

 

 

프랑켄슈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프랑켄슈타인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내게 이름을 물어오지 않았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이란 어떻게보면 태어날 때부터 듣고 자라는 이름이니까.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내 이름을 모르는 자에게 미리 말해주곤 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이름을 누군가가 알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당돌하기 짝이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말에 남자는 아까보다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아마 평생동안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남자는 귀족 중에서도 높은, 어쩌면 그들을 지배하는 로드와 거의 비슷한 지위를 가진 것 같았다. 어제 만난 가주와는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랐을 뿐더러, 품격을 중요시하는 귀족이 이름과 정체를 모두 알고 있으며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라면 결코 보통 귀족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존재이건 프랑켄슈타인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노블레스가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었다. 그에게 남자는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귀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에게서 또 다른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놀라움, 망설임 그리고, 기대. 남자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무겁게 닫혀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프랑켄슈타인은 어쩐지 남자가 조금 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카디스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다."

 

"좋은 이름이네요, 라이제르. 처음 인사드립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끝에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남자의 손은 차가웠으나 따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에게 이토록 관심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인간들에게는 동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으면서 왜 이 남자, 라이제르에게는 이토록 여러 감정이 드는 걸까.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 느끼는 이 감정, 사람들은 이 감정을 호감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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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작성했던 프랑라이 글. 옮겨적으면서 수정하는데 비문에 오타가 너무 많아서 지쳐 죽는 줄;;

원래는 노블레스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라이의 만남이 나오기 전에 제멋대로 상상해서 적은 연성이었는데

이후 진짜 만남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뒷편이 생략되었습니다.

 

프랑라이 좋아하긴 하는데 라이제르는 너무 다루기가 어려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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