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닉주디] 일상
W.B - 츠쿠리
5년 전까지만 해도 니콜라스 피벨리우스 와일드의 하루는 느지막한 기상알람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시간을 무시하고 블루베리 잼을 바른 식빵 또는 베이글을 우물거리며 오늘은 또 어떤 핑계를 대고 점보 하드를 얻을지 머리를 굴린다. 그야말로 '교활한 여우'라는 별칭에 걸맞은 삶이었노라고, 닉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하루는 어떤가. 한 때 닉의 동업자였던 피닉은 종종 그의 생활을 두고 5년 전과 비교한다면 여우 꼬리털 갯수만큼 달라졌을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리고 닉은 딱히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해가 고개를 들이밀기도 전에 시작되는 이른 기상 시간. 아침식사로는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신선한 버터를 얹고 블루베리 요거트로 입가심을 한다. 그 후에는 반짝거리는 금색 별이 달린 청색 경찰 제복을 입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어떻게 점보 하드를 얻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건을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이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교활한 여우라는 별칭 대신 '최초의 여우경찰' 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어깨를 꽤나 으쓱하게 만들었다.
아무렴 교활한 여우보다야 최초의 여우경찰이라는 말이 백 배는 낫지.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 옷을 단정하게 입었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던 닉은 거울에 비친 청색 제복과 경찰을 상징하는 뱃지가 꽤나 만족스러워 씩 웃었다. 커피를 들고 경찰 제복을 입은 제 모습이 이제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음, 좋아. 아주 멋있어.
어느 정도로 멋있냐 하면 홍당무가 첫눈에 반할 정도?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던 닉은 윤기가 흐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오늘도 그의 멋진 홍당무 파트너와 함께 멋진 하루를 보낼 것이란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 ◈ ◈
음, 분명 틀림없이 멋진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무일정을 들으러 온 닉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지만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어있는 그의 옆자리였다. 닉의 파트너 주디 홉스가 고향인 버니힐에 내려갔다 온다며 유급 휴가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닉은 책상 위에 머리를 뉘인 채 비어있는 그의 옆자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늘 그보다 일찍 나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있던 주디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청력이 좋은 토끼답게 작은 소리에도 몽실몽실한 귀를 움찔거리는 작은 파트너를 보는 것은 닉의 아침 일과 중 하나였다. 누가 열정적인 영웅경찰 아니랄까봐 아침부터 열렬하게 사건일지를 넘기던 주디가 떠오르자 닉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고 말았다. 닉이 옆에서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며 따끈따끈한 커피를 마시면 주디는 흘겨보며 일 좀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항상 마무리가 '누가 전직 탈세범 아니랄까봐' 로 끝나는 주디의 목소리를 듣는 것 또한 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의 작은 토끼는 모른다.
반짝거리는 제비꽃 눈동자가 그를 곧게 응시할 때, 닉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몸에 코를 박고, 핥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왠지 주디의 부드러운 털에서는 제비꽃 향기와 제비꽃 내음이 풍길 것 같았다. 하지만 닉은 이 사실을 결코 주디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바들바들 떨던 작은 토끼를 기억한다. 포식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탈출구를 찾던 모습은 누가 봐도 사냥당하기 직전의 가련한 피식자였다. 나중에 주디에게 여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오해를 풀었지만, 닉은 두 번 다시 그런 주디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디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소망과는 별개로, 그의 욕망은 종종 통제를 벗어나곤 했다. 코에 아른거리는 제비꽃 향. 닉은 주디를 향한 욕망이 '송두리째 잡아먹고 싶다'는 표현과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야생의 습성이 남아있는 동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이쯤 되면 DNA인지 뭔지에 포식자로서의 습성이 남아있다는 가설을 믿고 싶어지는걸. 닉은 코를 벌름거리며 생각했다.
오늘따라 옆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다.
경찰서 내에서도 유독 체구가 작은 축에 속하는 닉과 주디는 늘 커다란 의자 하나에 나란히 앉아 있곤했다. 직접적으로 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까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닉에게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은 아주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늘 자신을 안아줄 때 느꼈던 안온한 감각이었다.
아아, 그래서인가. 늘 옆에 있던 그 온기가 없어서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지는 건가.
닉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며칠 전, 주디가 휴가를 낼 거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닉은 주디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허전하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만 해도 시시덕거리면서 가는 김에 너희 농장에서 재배하는 블루베리나 선물로 가져와달라고 말한 게 작별인사의 전부였다.
열두 살 때부터 홀로 자란 닉은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애초에 주디를 만나기 전, 이십 년 정도를 혼자 지내왔다. 주디를 만난 건 고작 일 년 전의 일이니 그녀가 하루쯤 휴가를 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주디가 자기가 없는 동안 외로워서 울지나 말라는 농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온기라는 것은 간사하게도, 곁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 가치를 느끼는 법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휴가 내고 홍당무 마을이나 구경갈 걸 그랬나. 토끼만 바글바글 모여있는 광경은 흔치 않은 장관일테고, 나름 괜찮았을 거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닉은 모처럼 주디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온 도넛박스를 괜히 툭 하고 쳤다. 역시 반겨주는 목소리도, 장난스럽게 툭툭 어깨를 치던 자그마한 손도 없으니 괜히 기운이 축 쳐진다.
날 대체 얼마나 길들인 거야? 이 교활한 토끼 같으니.
사무치는 외로움을 애써 외면하며 닉은 점심시간쯤에 그의 친애하는 홍당무 파트너에게 전화라도 한 통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목소리라도 들으면 이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가시리라. 물론 전화도, 문자도 한 통 없는 매정한 파트너를 잔뜩 놀려줘야겠다는 심술궂은 결심은 덤이었다.
그렇게 닉은 경찰이 된 이래 처음으로 파트너가 없는 일상을 맞이했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임에는 틀림 없었다. 문득 떠오른 유머에 말을 걸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차에 올라탔을 때 운전석을 잡은 자신만만한 미소가 없다는 걸 체감하는 것은 무척 기분 나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비어있는 옆자리가 점점 더 외로움의 크기를 부풀렸다. 닉은 그 답지 않게 사소한 일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오전을 흘려보냈다.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나아지겠지.
축 쳐진 꼬리를 흘끗 쳐다보며 닉은 애써 자신을 달랬다. 점심시간을 이렇게 기다려보긴 처음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와일드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디는 점심시간에 닉의 전화도 받지 않았을뿐더러 아침에 보낸 문자메세지에 대한 답문조차 보내지 않았다. 닉은 평소 주디가 아무리 바빠도 일정한 간격마다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답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사과 문자라도 보내는 것이 닉이 알고 있는 주디 홉스였다. 때문에 덜컥 걱정부터 앞섰다. 아무런 이유없이 연락이 끊기지는 않을텐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휴대폰이 꺼져있는 건가? 혹시 지진이라도 난 거 아냐? 여러 추측이 난무할수록 닉의 예민해진 신경은 점점 생각을 극단적으로 치닫게 했다.
아아, 정말 니콜라스 와일드답지 않은 하루야. 닉은 달콤한 블루베리 크림이 들어간 도넛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주디의 눈동자를 닮은 보라색 크림이 듬뿍 들어있는 도넛은 무려 시즌 한정판으로 닉이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으나 이상하게 더 이상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정말 과보호라고! 니콜라스 와일드, 너가 홍당무의 부모도 아니고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이야!
문득 든 자괴감에 닉은 테이블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다른 동료들이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닉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연하게 웃어주기에는 그의 심경이 너무나 복잡했다. 스스로도 고작 하루 헤어졌다는 사실에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엄마와 헤어진 철부지 꼬맹이라고 생각하겠어. 닉은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손을 휘휘 저어주며 좋은 점심시간 보내라고 넉살좋게 대꾸해준 닉은 도넛박스를 들고 사내 휴게실을 나섰다. 휴게실에 있어봤자 쓸데없는 상상으로 기분을 망칠 바에야 차라리 주토피아의 성실한 일꾼이 되는 것을 택했다.
사내 휴게실에서 로비로 빠져나온 닉은 한 입 베어문 도넛과 남아있는 다른 도넛들을 클로하우저에게 건넸다. 어차피 같이 먹을 파트너가 없으니 있으나마나 한 도넛이었다. 도넛도 아마 먹으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더 좋을 테다. 닉은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이는 클로하우저에게 한 번 웃어주고 ZPD를 나섰다. 그래도 오후쯤에는 연락을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디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닉은 알람이 울릴 때마다 번개같은 속도로 핸드폰을 잡아채곤 했지만 그 때마다 보이는 것은 쓰잘머리 없는 광고와 사소한 안부문자 혹은 업무 관련 메세지들이었다.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람. 닉은 혀를 차며 핸드폰을 멀리 던져버렸지만 시야 끝에 여전히 문제의 기계가 아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닉은 몰려오는 자괴감에 머리를 핸들에 쾅쾅 들이박았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었다.
마침내, 태산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모두 흘렀다. 그토록 기다리던 근무시간 종료 알람이 정확히 여섯 번 울렸다. 닉은 불과 몇 시간만에 거뭇해진 눈으로 잠잠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부재중 전화 제로. 미확인 메세지도 제로. 툴툴거리며 불퉁하게 입을 내민 닉은 근무보고를 하기 위해 ZPD로 거칠게 차를 몰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차를 몰고 그대로 버니힐로 출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별 일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핸드폰이 고장났다거나 그 외의 사소한 일이 원인이라면 남은 뒷감당은 오로지 닉의 몫이었다…뭐, 여기까지는 사실 허울 좋은 핑계다. 배짱 두둑했던 사기꾼 니콜라스 와일드는 주디를 만난 후로 간덩이가 부은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로 승진했다. 주디의 안위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쪽팔림은 싸게 먹히는 거래지. 간덩이가 부은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진짜 이유는 자기 세뇌에 가까웠다. 그의 파트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며 블루베리를 잔뜩 가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자신은 태연하게 연락 한 통 없는 야속한 파트너를 탓하는 농담을 흘리면 되리라. 이와 같이 주디가 안전할 거라는 세뇌에 가까운 믿음이 닉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정말 니콜라스 와일드답지 않아!
닉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만약 근무보고가 끝난 뒤에도 주디의 연락이 없으면 주글(Zoogle)과 경찰국 자료를 샅샅히 뒤져 토끼 형상을 한 마약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만약 그런 마약이 없더라도 내일 휴가가 끝난 홍당무를 마주한 순간 토끼 중독에 걸리게 한 죄로 수갑을 채워 옆에 앉혀놓으면 되는 문제야.
맹세컨대, 그의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처럼 긍정적이고 태평하게 살기 위해 애쓴 적이 없었다.
그렇게 닉이 경찰복을 입고 한창 파트너 체포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르릉! 전화 벨소리가 그의 원대한 범죄 계획을 방해하고 말겠다는 듯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귀찮아 죽겠는데 이 사간에 대체 누구야. 닉은 미간을 찌푸리며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다.
"네네~마약 중독 환자 닉 와일드 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네? 저어, 주토피아 중심부 제 1관할서에 근무하시는 니콜라스 와일드 경찰관님 아니신가요?]
뜻밖에도,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는 몹시 앳되었다. 많이 잡아도 성인이 되기 직전의 나이 같았다. 기껏해야 스팸전화나 옛 친구 녀석의 전화이겠거니 했던 닉은 얼른 목소리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단 경찰관 니콜라스 와일드를 찾는 이상 그에 맞게 대응해야 했다.
"네. 제가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경찰 니콜라스 와일드가 맞다는 것을 밝히자마자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다행이다! 번호가 틀리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늦었는데 실례가 많습니다. 저는 주디 언니의 동생 지니 홉스라고 해요. 저어, 언니의 일로 부득이하게 연락 드릴 게 있어서요….]
"……!"
그토록 기다리던 연락이 예상치 못한 상대를 통해 왔다. 그러나 주디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닉은 밀려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입 밖으로 나오려는 질문들을 삼켰다.
[사실 언니가….]
그러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질문들은 뒤이어 들려오는 이야기에 모두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발 밑이 훅 꺼지는 것 같은 아찔함 그리고 눈 앞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막막함이 닉을 덮쳤다.
전화가 끝나기 무섭게, 닉은 ZPD 내로 진입했던 차를 돌렸다.
"닉? 닉! 어디가! 아직 근무보고 안 했잖아!"
마침 ZPD 외부로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클로하우저가 그런 닉의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무려 먹고 있던 도넛까지 팽게친 클로하우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지만 닉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경찰차 창문으로 손을 흔들며 클로하우저에게 임무 아닌 임무를 맡겼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먼저 퇴근합니다! 근무 중 별 일 없었으니까 서장님께 저 대신 말씀 좀 잘해 주십쇼, 선배님!"
"뭐? 아니 잠깐!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아참, 저 내일 휴가도 씁니다! 저 대신 휴가 신청도 좀 부탁드려요! 그리고 주디도 휴가 하루 연장한대요!"
"으악! 아냐 이건 아니라구! 닉 안돼! 가지마아! 나 서장님한테 죽어! 죽는다구우~!"
너 아까 이럴 줄 알고 나한테 도넛 준거야? 그거 뇌물이었어? 닉! 제발 잠깐만 좀 기다려! 너 이렇게 가면 나랑 같이 시말서 써야할 지도 몰라!
안타까운 클로하우저의 절규가 경찰청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닉은 못 들은 척 재빨리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클로하우저에게 좀 미안하지만 무려 도넛도 주고 선배님이라고까지 불러줬으니 이 정도 부탁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제멋대로 머리를 굴린 니콜라스 와일드다운 결론이었다.
힘찬 엔진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닉은 최대한 빨리 주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클로하우저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그는 도저히 태평하게 근무보고를 마칠 자신이 없었다. 뭐, 무단 퇴근에 무단 휴가까지 해버렸으니 클로하우저의 말대로 시말서나 가벼운 징계 정도는 각오해야겠지만.
닉은 침착하게 네비게이션을 가동시켰다. 목적지는 주디의 고향, 버니힐(Bunny hill)이었다.
◈ ◈ ◈
덜컹덜컹. 주토피아를 벗어나자 포장도로가 듬성듬성 보이더니 본격적인 시외로 접근하기 무섭게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도로가 펼쳐졌다. 그러나 닉은 거친 길에도 개의치 않고 몇 시간을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천장에 머리를 좀 박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쉬지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날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주디의 고향 버니힐(Bunny Hill)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니힐은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토끼언덕이란 별칭답게 마을 곳곳에는 홍당무 밭과 홍당무 가판대, 홍당무 모양 동상이 가득했다. 심지어 밭 주위를 빙 둘러놓은 울타리는 토끼 모양이었다! 만약 닉이 휴가 차 버니힐로 온 것이라면 마을 곳곳을 매우 흥미롭게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닉을 지배하는 감정은 온통 조급함과 초조함 뿐이었다. 닉은 차를 기차역 근처에 주차해놓고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디의 동생인 지니 홉스가 보내준 약도에 따르면 목적지는 바로 이 근방이었다.
똑똑.
마침내 약도에 나와있는 위치와 일치하는 집을 발견한 닉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닉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건지 희미한 불빛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들은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토끼 그림자가 창가에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문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아, 늦은 밤중에 죄송합니다. 주토피아 경찰국에 근무하는 주디의 동료 니콜라스 와일드라고 합니다. 지니 홉스씨의 연락을 받고 왔는데요."
상대방의 경계 어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수상한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닉이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철컹철컹. 굳게 잠궈놓은 빗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조그마한 얼굴이 하나 내밀어졌다. 주디를 닮은, 하지만 좀 더 앳된 티가 물씬 풍기는 토끼였다.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건지 아니면 상대가 여우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져 있었다. 크흠! 눈을 끔뻑이며 한동안 닉을 멀거니 쳐다보던 토끼는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파다닥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저, 정말 와주셨네요! 제가 전화드린 지니 홉스에요. 늦은 밤인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저야말로 늦은 밤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전화를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해해요. 저도 당황해서 한참 뒤에야 전화하는 걸 떠올렸으니까요. 아, 밤공기가 차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늦은 밤인데 여우를 집에 들여보내도 괜찮겠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닉은 일단 주어진 기회를 잡기로 했다.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자 토끼굴답게 이리저리 미로처럼 엉켜있는 구조가 펼쳐졌다. 현관을 지나자 갑자기 길이 여러개로 갈라지거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문이 불쑥 튀어나오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아늑하고 포근한 가정집이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바닥에는 직접 손으로 짠 것이 틀림없는 푹신한 러그가 깔려있었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목각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또 복도에 푹신푹신한 쿠션과 소파가 나란히 줄지어 있기도 했다. 왠지 모를 그리운 느낌에 닉은 자기도 모르게 멀거니 서서 집을 둘러보았다.
"헤헤, 집이 좀 정신없죠? 저희 토끼들은 워낙 형제수가 많다보니까 방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지었다고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평소에는 북적북적한데 다행히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동생들을 모두 재워놓은 참이에요."
그것 참 다행이군. 닉은 무심코 주디를 닮은 토끼 몇 십마리가 자신의 주위에 몰려있는 장면을 상상해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연스레 대화가 끊기면서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짧은 침묵 끝에 닉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저어, 주디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까 전화로 설명드렸다시피 가벼운 뇌진탕이래요. 계속 잠들어 있긴 하지만 호흡도 안정됐으니 괜찮을 거라고 아까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다행이네요."
"따라오세요. 주디 언니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지니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닉은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전화로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사건은 주디가 가족들과 버니힐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발생했다. 원인은 그 이름도 지긋지긋한 돌아뿌리 버럭시아스. 버니힐에서 평화롭게 아침을 즐기고 있던 양 가족이 먹은 샐러드에 돌아뿌리 버럭시아스, 일명 밤의 울음꾼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양 가족은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난폭해졌고, 집을 뛰쳐나와 마을을 온통 헤집고 다니며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주민이 초식동물에 속하는 동물들이었기에 도망치는데 급급했고 피해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마을에는 주토피아에서 밤의 울음꾼 사건을 직접 해결한 주디 홉스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디는 집집마다 연락해서 그물망을 있는 대로 긁어 모았다. 그리고 양들이 돌격하는 것을 틈타 그물망으로 발을 뒤엉키게 해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후, 수면제로 잠재웠다. 그러나 한 가지 패착이 있었다면, 양 가족 중 한 마리에게 수면제가 제대로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양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대로 주디에게 돌진했고, 주디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이 닉이 들은 사건의 전말이었다. 주디는 가벼운 뇌진탕이라 판정받았고 깊이 잠든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휴가 연장을 위해 뒤늦게 나마 동료인 닉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가 이렇게 불쑥 버니힐에 나타났다는 거지만.
그렇지만 그런 소식을 들었는데 태평하게 주디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어. 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디는 그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파트너였고 제 일상의 온기였으며 활력소였다. 주디가 다쳤다는 말을 들은 순간 닉의 머리 속은 새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굴러가던 머리가 텅 빈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공포가 닉을 잠식했다. 주디의 상태는 괜찮다고 듣기는 했지만 도저히 두 눈으로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니콜라스 씨는 우리 언니를 정말 좋아하나봐요?"
갑작스레 던져진 질문이 상념에 빠진 닉을 끌어올렸다. 닉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네?"
"소식을 듣자마자 피곤하실텐데도 이렇게 와주셨잖아요. 우리 언니를 아끼시는거죠?"
"아니, 뭐…."
닉은 제대로 대답을 못한 채 어물쩡거렸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제가요? 제가 홍당무를요? 아니 뭐 파트너니까 아끼긴 하지만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아마도?' 와 같은 온갖 츤츤거리는 답들이 오갔지만 이걸 주디의 여동생 앞에서 죄다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지니는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나갔다.
"사실 주디 언니가 니콜라스 씨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거든요. 부모님이 동료가 여우라는 걸 듣고 좀 놀라하시니까 니콜라스 씨가 능글거리긴 하지만 마음씨도 좋고 늘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준다고 언니가 엄청 열심히 변호하지 뭐에요? 아, 물론 부모님이 여우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에요. 옛날에는 좀 그랬지만 요새는 같이 일하는 동물 중에 여우도 있구요. 다만 언니가 워낙…, 옛날에 나쁜 일이 있어서 안 좋은 기억이 좀 있으신 것 뿐이에요."
"아, 그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습니다."
"와, 그럼 언니가 정말로 니콜라스 씨를 믿는다는 말이네요!"
지니가 활짝 웃었다. 휘어지는 눈가와 입가에 환하게 피어난 미소가 낯이 익어서, 닉은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답게 지니는 쾌활하고 명랑했다. 조잘거리는 입은 새처럼 지저귀듯 멈추지 않았다.
"저는요, 언니 곁에 니콜라스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언니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무작정 돌진하는 경우가 꽤 있으니까요. 언니가 경찰이라서 정말 자랑스럽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다치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이 많이 되거든요."
벽 곳곳에는 단란해보이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토끼들 중에서도 유독 활짝 웃고 있는 주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옹기종기 가족 사진이 모여있는 벽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던 지니의 발이 멈췄다. 액자 맞은 편에는 따뜻한 베이지 색으로 칠해진 원목 문이 있었다. 주황색 당근 모양 팻말에는 낯익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주디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좀 안심했어요. 언니가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하는 여우 씨가, 다친 언니를 걱정해서 한달음에 와 줄 정도로 좋은 동물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지니는 미소지으며 방문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우리 언니를 잘 부탁드려요."
◈ ◈ ◈
닉은 경찰 일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낯선 장소에 가면 최대한 감각을 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버릇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증거를 확보하려는 투철한 직업 정신에서 발휘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도 역시,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닉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킁킁 거렸다. 다행히 방은 낯설었지만 냄새에는 익숙한 향이 섞여있었다. 주디의 체향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기가 한데 모여 닉의 코를 간지럽혔다. 닉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 작은 원목 책상과 의자 하나,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옷장 하나, 푹신한 방석과 쿠션이 놓여있는 작은 소파 하나. 거기에 하늘색 벽지에 그려져 있는 작은 구름떼와 그 위에 걸려 있는 올빼미 모양 시계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토끼 인형들. 주토피아에 있는 주디의 낡은 회색빛 아파트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포근한 방이었다. 닉은 저도 모르게 주디를 닮은 귀여운 토끼 인형들에게 다가가 몇 번 쿡쿡 찔러보았다.
그 때 침대에서 몸이 뒤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닉은 저도 모르게 몸을 납작하게 움츠렸다. 홍당무가 귀가 밝은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행히 소리를 죽이자 다시 깊은 잠에 빠졌는지 더 이상의 뒤척거림은 없었다. 닉은 안심하고 최대한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하루종일 연락을 기다리게 만든 야속한 토끼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작은 전등이 깜빡거리며 잔잔한 불빛을 뿌렸다. 미동도 없이 감긴 두 눈은 다행히 평화로워 보였다. 평소의 제비꽃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주디가 제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머리에 붕대가 감겨있긴 하지만- 마음이 놓였다. 쌕쌕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오르락 내리락 숨을 쉬고 있는 작은 몸이 오늘 얼마나 그립고 보고팠던가.
"멍청한 토끼."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주디가 얄미워, 닉은 뒤늦게서야 괜스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주디가 다친 것이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디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하루종일 마음을 졸이면서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휴가가 끝나면 재회하여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 받았겠지…. 아니, 아니다. 닉은 생각을 정정했다. 사실 오늘 마음을 졸인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다만 그녀가 다쳐서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은 화가 났다. 머리에 감긴 새하얀 붕대가 자신이 없었던 사이 주디에게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몹시도 눈에 거슬렸다.
"제발 다치지 좀 마, 홍당무. 정말 누구누구씨 덕분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니까."
닉은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평소라면 주디에게서 교활한 여우라거나 멍청한 여우라는 답이 돌아왔을테지만 오늘만큼은 이 고요한 정적을 큰 맘 먹고 봐주기로 했다. 닉은 주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속도 모르고 새근거리며 잠든 얼굴은 아기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뭐, 오늘만큼은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닉은 오늘 딱 하루만 관대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좀 더 푸념을 늘어놓고 싶지만 다시 돌아온 온기가 너무 소중해서, 그저 곁에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아무래도 좋았다.
"주디. 주디 홉스. 홍당무…."
닉은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그제서야 오늘 내내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챗바퀴 돌리듯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는 하루였는데도 하루 종일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반복되는 일상 중에 딱 하나 빠뜨린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주디 홉스의 부재였다. 그녀는 이제 닉의 일상을 완성시키는 퍼즐 조각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하루는 마치 낯선 도시에 혼자 도착한 이방인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언제부터일까. 이미 주디 홉스는 니콜라스 와일드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주디 홉스가 곁에 있는 지금에서야 니콜라스 와일드는 비로소 자신의 일상을 되찾았다.
"흐아암~"
닉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에 기지개를 펴며 크게 하품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힐 정도로 거대한 하품이었다. 닉은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끔뻑이며 눈가에 덕지덕지 붙은 눈꼽을 떼어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평소 즐겼던 낮잠시간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었지. 거기다 전화를 받고 버니힐에 도착하기 위해 저녁 내내 차를 몰고 내달렸다. 닉은 슬쩍 주디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침대가 꽤 큰 편이라 같이 누워도 될 것 같았다.
닉은 음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주디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불편한지 몇 번 뒤척이던 홍당무는 이내 갑작스러운 온기에 적응한 건지 새근거리며 다시 잠들었다. 닉은 몸을 웅크리고 주디를 꼭 껴안았다. 그는 품 안의 따끈따끈한 온기를 마음껏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눈을 뜨면 경악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녕, 하고 웃어주겠지. 그리고 또 똑같은 일상이, 주디와 나의 일상이 시작되는 거야. 닉은 감겨오는 눈꺼풀을 반기며 키득거렸다.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덧1 - 닉은 예상대로 일어나자마자 쩌렁쩌렁한 주디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
덧2 - 일찍 주무셔서 닉의 방문을 몰랐던 주디의 부모님은 아침식사에 낯선 여우 한 마리가 있자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덧3 - 주디의 253마리 형제 중 아직 독립을 하지 않은 67마리의 동생들은 닉의 꼬리를 붙잡으며 신기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닉은 요새 자신이 하고 있던 스마트폰 게임을 떠올렸다.
<<니콜라스 와일드는 귀여운 토끼떼의 공격을 받았다!>> <<HP가 2000 감소했다!>>
이에 대해 주디는 다른 종족이 토끼에게 귀엽다는 건 실례라며 판에 박힌 잔소리를 했다.
덧4 - 닉의 휴대폰을 확인한 결과, 보고 서장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3통, 문자가 6통, 클로하우저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13통, 문자가 56통 정도 와있었다. 그 외 다른 동료들의 걱정은 덤. 다행히 클로하우저가 필사적으로 이야기해주고 나중에 주디가 따로 사과한 덕분인지 약 세 시간의 잔소리와 한 달의 감봉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닉은 경찰 봉급이 얼마나 짠지 아냐고 투덜거리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덧5 - 여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덧6 - Happy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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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를 본 직후 떠올랐던 연성물인데 한동안 멈춰 있다가 이제야 글을 완성하네요.
이 글은 닉과 주디가 만난 후 1년 정도 후에 벌어졌다는 가정 하에 쓴 글입니다.
뭐랄까, 닉과 주디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일상 같은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한 명이 부재했을 때, 다른 한명이 느끼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닉의 시점으로만 쓴 이유는 주디보다는 닉이 1인칭으로 썼을 때 좀 더 재밌을 거 같았고 닉이 느낄 외로움이 주디보다 상대적으로 더 크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무래도 닉은 주위의 온기를 느낄 일이 적었을테니까요.
다만 마무리에 힘이 딸려서 어설프게 끝난 점이 좀 마음에 걸리네요ㅠㅠ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을 쓰는 내내 닉주디의 연애력이 뽕차서 괴로웠습니다.
주토피아 후편 나와주세요. 닉주디 사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