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오이이와] 말할 수 없는 당신에게

​W.B 츠쿠리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오이카와는 눈 앞에 놓인 제단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매캐한 선향 냄새가 설렁거리며 코 끝을 간지럽혔다. 향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회색 연기가 새하얀 국화꽃으로 물들인 제단을 채워나갔다. 제단 끝에는 낯익으면서도 어쩐지 낯선 얼굴이 있었다.

짧게 자른 삐죽한 머리카락, 고집 센 눈매 그리고 입가가 서툴게 올라간 이와이즈미의 무뚝뚝한 얼굴이 고스란히 액자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액자 속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알고 있던 이와이즈미와 많이 달랐다. 좀 더 앳된 그 얼굴은 매캐한 선향 냄새와는 달리 풋풋한 살내음이 풍길 것만 같았다. 오이카와는 비로소 그 사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기념으로 찍자며 싫은 기색을 잔뜩 내보이는 이와이즈미를 끌고 사진관에 갔던 것은 다름 아닌 오이카와였다. 현상한 사진을 보며 웃는 게 이게 뭐냐고 낄낄거리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있는 힘껏 쥐어박았었다. 아파, 이와쨩! 스파이커의 진심을 담은 주먹 맛에 오이카와가 징징거렸으나 이와이즈미는 상대해주기는 커녕 꼴 좋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오이카와는 무심코 옆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무뚝뚝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침통하게 일그러진 얼굴들뿐이다. 줄을 지어 인사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선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곳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츠카와가 벌개진 눈으로 맞절을 하고 있었고, 하나마키는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제단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저리도 자욱한데 선향 불은 꺼지기는커녕 더 빠르게 타들어갔다.

 

-미련을 버려, 오이카와. 그 편이 네게도 더 좋을 거야.

 

과거의 잔상이 허무하게 스쳐지나간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선향 불은 마치 미련을 버리고 이만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던 이와이즈미와 야속하리만치 닮아 있어서 오이카와는 순간 숨이 막혔다. 허억, 내뱉지 못한 호흡이 숨을 가로막았다. 제단을 타고 공중으로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선향 냄새가 지독해서 오이카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언젠가부터 이와이즈미에게서는 풋풋한 살내음 대신 시원한 나무의 향기가 났다. 수천 년의 세월을 묵묵히 혼자 버티고 있는 거목(巨木). 이와이즈미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을 너그러이 포용할 수 있는 고요한 나무가 생각나곤 했다. 오이카와의 눈에 이와이즈미는 늘 푸른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늘 그렇게 푸르게 있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는, 안타까울 정도로 푸르고 아름다워서 차마 손을 뻗을 수 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이와이즈미를 오이카와 토오루가 죽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왔다. 우욱,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참지 못한 오이카와가 장례식장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것 같았지만 오이카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이 순간만큼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역겹고 추한 것을 털어내야 한다는 일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허억, 헉…!"

 

화장실에서 한참동안 세면대를 붙잡고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오늘 먹은 것이라고는 간신히 배고픔을 면할 정도의 주전부리밖에 없어서인지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해도 뱉어내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제 뱃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이 역겨운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질척거리는 타액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흐윽,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이 신음인지, 꾹꾹 눌러 담았던 울음소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비로소 제가 줄곧 간직하고 있던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우욱……!"

 

연이어 나오는 헛구역질 때문인지 눈 앞이 노랗게 물들었다.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시야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마침내 투둑 떨어져내리는 눈물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빌어먹을, 정말…꼴사나워……."

 

거울 속에 비친 타액과 눈물 범벅으로 뒤덮힌 얼굴을 보며 오이카와는 홀로 과거의 잔상을 쫓았다.     ​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단순히 우정의 의미였다면 오이카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나날을 보냈을 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품은 감정은 연정과 욕정이 뒤섞인, 누가 봐도 우정은 아닌 질척한 사랑이었다.

오랜 소꿉친구였던 이와이즈미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짧게 자르고 다니는 머리카락, 치켜 올라간 고집 센 눈매, 웃는 방법조차 서툴어 무뚝뚝한 표정이 대부분인 오이카와의 소꿉친구는 누가봐도 반할만한 이상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툴툴거리면서도 힘들 때마다 늘 곁에 있어주는 그의 다정함과 세심함이 좋았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서서히 젖어들듯, 오이카와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이와이즈미를 서서히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는 못했다. 늘 자신감이 넘치는 오이카와였지만 반평생을 봐온 소꿉친구였기에 더욱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만약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이와이즈미는어떤 반응을 보일까? 경멸할까? 아니면 장난인 줄 알고 그냥 넘어갈까?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인 건 아닐까? 언젠가부터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미소를 지어주면서도 오이카와의 시선은 늘 이와이즈미에게 머물러 있곤 했다.

그렇게 아오바죠사이에서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졸업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도 오이카와는 아직 이와이즈미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이와쨩의 마음은 확신할 수 없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괜찮아. 봄고 예선에서 탈락해 마지막 부활동을 정리하던 오이카와는 그리 생각했다. 어차피 대학에 가서도 배구는 쭉 계속 할 예정이었고 오이카와의 곁에는 변함없이 이와이즈미가 함께 있어줄 것이다. 이와이즈미의 마음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와이즈미를 사랑하게 되었듯이, 이와이즈미에게도 그렇게 천천히 제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키워나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느긋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그러나 수험 막바지로 돌입한 추운 겨울 날, 그런 오이카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와이즈미가 선언했다.

 


 

"나, 너랑 같은 대학은 무리일 것 같다. 오이카와."

"에?"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예상치 못한 말에 오이카와가 멍청하게 반문을 내뱉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오늘 점심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너 도쿄 A 대학 추천 지망 받았다면서."

"…응."

"그 대학교, 너가 줄곧 가고 싶어했던 곳이잖아. 전문 배구부도 있고 코치와 감독층도 탄탄해. 분명 너라면 그 곳에서도 별 무리 없이 주전으로 그리고 최고의 세터로 활약할 수 있을 거야."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말하는 자신의 미래에 그가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이카와의 세상에 이와이즈미가 배제된 미래. 그것은 소름끼칠 정도로 두렵고, 낯선 세계였다.

 

"이와쨩도 같이 가는 거지? 그렇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A대학은 명문이야. 성적이 좋거나 추천 지망을 받지 않는 이상 가지 못한다는 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대학에 가서도 같이 배구하기로 했잖아. 왜 나 혼자만 A대학에 간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난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와쨩도 어디로 갈 지 정해진 건 없고. 이와쨩은 내가 아는 최고의 스파이커고, 나만의 에이스야. 대학에 가서 같이 최고의 배구를 하는 건 나 혼자가 아냐. 이와쨩이 필요해."

"A대학에 가면 넌 최고로 거듭날 수 있어. 같이 배구를 하는 건 다른 학교, 다른 팀으로 만나서도 충분해. 아니면 바로 옆집이니까 평소에 만나서 연습을 할 수도 있고."

 

이와이즈미는 이미 오이카와가 곁에 없는 미래 구상을 끝마친 것 같았다. 입만 열면 A대학, A대학!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A대학 추천이 들어온 건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A대학의 추천 지망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이미 지원 리스트에서 A대학을 탈락시켰다. 오이카와는 최대한 이와이즈미와 함께 갈 수 있는 대학을 고르고 싶었다. 그에게는 이와이즈미와 함께 하는 배구가 1순위였고 대학은 2순위에 불과했다. 그 어떤 좋은 대학이라도 곁에 이와이즈미가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이런 오이카와의 마음도 모르고 헛소리나 늘어놓고 앉았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결정은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A대학만 고집하는 이와이즈미의 바보 같은 작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소에 쿠소카와라고 하더니 바보 짓은 저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하교 한다고 천국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이 들뜨던 마음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처박혔다.  

 


"다 필요 없다니까? 내게는 이와쨩과 함께 하는 배구가 제일 중요해! 다른 팀으로 만나면 더 이상 내가 올려주는 공을 칠 수 없게 된다고! 이와쨩은 그래도 좋아?"

 

아니라고 말해. 내가 올려주는 공을 치고 싶다고 말해 줘, 이와쨩. 이 때만큼 오이카와가 간절히 신께 기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믿었고 그 믿음은 자신감을 뒷받침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신의 도움이 간절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면 이미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손을 잡고 꽃길만 걸었을 터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신마저 오이카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여전히 덤덤하게 오이카와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의 풍랑도 일지 않는 잠잠한 바다는 이와이즈미의 변함없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발 나 때문에 네게 주어진 기회를 버리지 마. 오이카와. A대학은 누가봐도 네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야. 난 우시지마의 그 빌어먹을 재배론 따위 믿지 않지만, 네게 더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는 인재라는 건 분명하다고."

"알 게 뭐야. 난 A대학이라면 그 빌어먹을 우시와카쨩도 가겠지? 우시와카쨩과 팀을 이뤄야하는 학교 따위 안 가! 내게 필요한 건 더 좋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너야, 쿠소 이와쨩!"

 

오이카와는 씩씩거리며 이와이즈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씨근덕거리며 소리쳐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결정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미련을 버려, 오이카와. 그 편이 네게도 더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와이즈미는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이어졌던 설전이 허무할 지경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늘 자신의 장단에 어울려주던 이와이즈미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오이카와는 타들어가는 답답한 속마음에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언제나 든든하게 느껴지던 이와이즈미의 등이 오늘만큼은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고집불통으로 보였다. 오이카와는 속에 남은 집념을 득득 긁어모아 있는 힘껏 소리쳤다.

 

"백 날을 말해보시지! 누가 포기할 줄 알고? 나는 반드시 이와쨩과 같은 대학을 가고 말테니까!"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절대로 안 떨어질거라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네가 뭐라 하던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오이카와는 앞서 걸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등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이 날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오이카와가 알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너네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로부터 며칠 후, 점심시간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옥상계단으로 집합한 하나마키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러면서 붙어 있는 것도 병이지, 병. 뒤따라 온 마츠카와가 무심하게 빵 봉지를 뜯으며 사족을 붙였다.

 


"너네 자꾸 그럴거면 가라."

 

이와이즈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고,

 

"맞아, 맞아! 너네 화해 모드로 전환시켜줄 거 아니면 불 붙이지 말고 가버려!"

 

오이카와가 지지 않고 깝죽거렸다.

 


"너네 싸웠다는 거 거짓말이지? 어떻게 싸웠다는 놈들이 하루 종일 붙어있냐."

 

쿵짝쿵짝. 도저히 싸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묘한 콤비를 보면서 하나마키가 얼굴을 찡그렸다. 요 며칠 내내 오이카와는 사과해, 취소해! 를 연발하면서 집요하게 이와이즈미의 뒤를 쫓아다녔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꾸준히 무시하면서도 뒤에 달고 다녔다. 오이카와가 하소연을 늘어놓은 덕분에 대충이나마 전후사정을 알게된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좋든 싫든 이 끝없는 싸움을 관람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반이 달라서 다행이지 반마저 같았으면 폭발하는 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였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싸운 거 맞거든! 다만 이와쨩이 사과하고 자기 말을 취소하는 걸 듣기 위해서라도 붙어 있을 거야!"​

"스토커냐?​ 화장실까지 따라오면 신고한다, 망할 오이카와."


"흥, 이와쨩이 취소 안하면 화장실까지 따라 붙을거거든? 그러니까 사과 해!"


​"난 취소 안 할거고, 사과도 안 할거니까 경찰서에서 봐야겠네."

 


마치 4주후에 뵙겠습니다, 같은 말투였다. 끝까지 고집을 꺾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루면 제 뜻을 이해하고 같은 대학에 가겠노라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의미없는 실랑이는 벌써 일주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이유라도 말해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도 이와이즈미는 A대학에 가는 것이 장래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할 뿐이었다.

아니 대학에 가는 걸 결정하는 건 당사자인 나,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내가 싫다면 싫은 줄 알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사실 이와이즈미가 아무리 A대학에 가라고 한들 오이카와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강제할 수는 없었다. 즉, 오이카와가 A대학 추천지망을 거절하고 이와이즈미와 같은 대학에 지원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런 간단한 방도를 무시하고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이와이즈미를 물고 늘어지는 건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이와이즈미에 대한 오기였다. 또한 이렇게 서로에 대한 합의 없이 무시한 채 넘어가는 것은 이와이즈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오이카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평소 능글능글하게 넘어가는 오이카와지만 이와이즈미만큼은 뭐든지 확실하게 답을 받아내고 싶었다. 자칫하다간 소꿉친구 관계에 있어서도, 연정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세터와 스파이커의 관계에 있어서도 금이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견고히 쌓아올린 그들만의 유대에 금이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아 몰라! 난 절대 A대학 안 갈거니까 경찰을 부르던 맘대로 해! 어차피 이 얼굴로 스토킹 한다고 신고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줄걸? 이와쨩은 못생겼으니까 또 모르겠지만~?"


"……."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오이카와가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로 한껏 빈정거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도시락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자 더 열이 뻗친 오이카와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마구 내뱉었다. 


 

"아, 그리고 못생긴 이와쨩의 곁에 이 오이카와상이 있어줘야 하는 이유가 또 있어! 이와쨩의 얼굴 보고 사람들이 신입생이 아니라고 오해하면 어떡해? 잘생긴 오이카와상이 옆에서 상큼하게 웃어주기라도 해야 못생긴 이와쨩도 신입생이라고 생각해줄 거 아냐.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나랑 같은…"


 

그 때였다. 묵묵히 도시락을 채우던 이와이즈미가 쾅! 하고 도시락 뚜껑을 세게 닫았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묻혔다. 이와이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도시락 통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은 가감없이 살벌했다. 느닷없는 이와이즈미의 돌발 행동에 오이카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벙찐 채 이와이즈미의 잔상만 쫓을 뿐이었다.

 

"이번엔, 네가 좀 심했어 오이카와."

 

지켜보던 마츠카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나마키의 얼굴 또한 마츠카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이와이즈미가 사라진 방향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오이카와는 잇따른 질책에 울상을 지었다.

 

"그치만 이렇게라도 말 안하면 이와쨩이 전혀 상대해주지 않는 걸…."

"어디의 초등학생이냐, 네 녀석은."

"하여튼 이와이즈미만 고생이지. 이번 일은 제대로 네가 사과하도록 해."

"그건 싫어. 이와쨩이 사과하면 그 땐 나도 사과할거야.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절~대 사과 안할거라고!"

 


하나마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었다. 그나마 말이라도 받아주던 이와이즈미가 이번 일을 계기로 완전히 오이카와를 무시할 게 뻔했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또 징징거리면서 푸념을 늘어놓겠지. 하나마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들이라니까. 이와이즈미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흥, 그런 거 이 오이카와 상은 몰라요!"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마츠카와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구라치고 있네. 봄고 카라스노와 붙었을 때 이와이즈미가 에이스로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


"전국은 번번히 시라토리자와에게 막혔지. 그리고 이번에는 카라스노에게 막혀 아예 결승 진출조차 하지 못했어. 이와이즈미가 널 최고의 세터로 인정하는 이상, 결국 비난의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에이스인 자신이 부족해서 널 전국에 보내지 못했다고, 널 최고의 세터로서 인정받게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을거야."

"…….""

"이와이즈미는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네 앞길이 막히는 걸 원하지 않는 거야. 널 어떻게든 A대학에 보내려고 집착하는 것도 자신 때문에 너가 A대학에 가는 걸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그런 걸 원했대?"

 

오이카와가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나도 알아! 이와쨩이 그런 기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왜 그렇게 날 A대학에 보내고 싶어하는 지도 알아! 하지만 이와쨩이 날 최고의 세터라고 느끼고 있듯이 나도 이와쨩을 최고의 스파이커라고 여기고 있다구. 내가 하고 싶은 배구는 이와쨩과 함께하는 배구야. 다시 한 번 둘이서 최고의 자리를 노리고 싶은 거지 나 혼자 배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야…!"

 

오이카와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그 동안 꾹꾹 참았던 설움이 터져나왔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고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던 이와이즈미가 떠올라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나 참, 하여튼 바보들이라니까."

 

하나마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츠카와도 다 먹은 빵 봉지를 구기더니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손에 쥐어주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바보짓 그만하고 얼른 가서 사과해. 그리고 이와이즈미랑 좀 진득하게 대화해보려고 해 봐. 그렇게 백날 생떼를 써봤자 이와이즈미에게는 안 먹힐테니까."

"참고로 좋아하는 애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는 거 아니다, 오이카와."

"잠깐! 내가 이와쨩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야…?!"​

 


 

느닷없이 폭탄처럼 떨어진 통보에 오이카와가 허둥대며 일어섰다. 정작 폭탄을 남긴 당사자들은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면 바보 아냐?"


"둘이 바보짓 하는 거 보는 것도 이제는 좀 질리니까 빨리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그리고 지금 네가 말한 내용, 꼭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도 친구랍시고 우려섞인 말을 던져주고 휘적휘적 손을 내저으며 사라지는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최후의 양심이 찔려오는 걸 느꼈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젠장, 쪽팔려서라도 오늘 반드시 이와쨩에게 확답을 받아내고 말겠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도 건네야지. 오이카와는 모처럼 어른스러운 결정을 내린 후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사과를 건네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반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그는 조퇴를 한 후였다. 그리고 학교가 끝날 무렵, 이와이즈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이카와."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오이카와의 등을 누군가 거칠게 쓸어주었다. 영안실에 들어가 시신까지 확인했으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제 뒤에 있는 것이 아닌지, 헛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에 잡힌 것은 이와이즈미가 아닌,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마츠카와였다. 아까 하나마키와 함께 있는 것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뛰쳐나온 것을 보고 뒤따라나온 모양이었다.

 

"……."

 

오이카와는 마츠카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눈자위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눈물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영정사진을 봐도 실감이 나지 않던 이와이즈미의 죽음이 마츠카와의 얼굴을 보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이와쨩이 죽었구나.

잠시 멈췄던 눈에서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파트너는, 소꿉친구는, 연모하던 사람은 영영 이 세상을 떠났다. 이와이즈미 하지메에게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었을까. 소꿉친구이자 파트너라는 사람이 이와이즈미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빈정거림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험담이었다.

네가 이와쨩에게 그런 말을 해서 그래. 마음 속에서 그를 좀먹고 있는 벌레 한 마리가 속닥거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이와이즈미는 조퇴하지 않았을거고, 여전히 네 곁에 있었을거야.


 

"맞아, 이와쨩은 나 떄문에 죽었어. 내가, 병신같이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오이카와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못생겼다' 가 아니었다. 관계가 깨질까봐 두려워 제 마음조차 고백하지 못한 겁쟁이의 심장에는 늘 붉게 물든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어줘서 고마워.

너의 푸른 그늘에 항상 감사하고 있어.

너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야.


…널 사랑해.


 

"이와쨩…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묵직한 죄책감이 심장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고통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단 하나뿐인 심장은 어느새 꺾여서 말라버렸다.

아아, 그는 내게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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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츠쿠리입니다.

처음 쓰는 하이큐 연성을 오이이와로 할 줄은 몰랐는데 정신차려보니 오이이와를 쓰고 있네요.

평소에 히나른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오이이와는 마성의 커플인 것 같습니다.

매달리며 징징거리는 오이카와x싫은소리하면서도 다 받아주는 이와이즈미 너무 좋지 않나요 ㅠㅠ

사실 이번 글은 이와이즈미에게 싫은 소리했다가 이와이즈미가 죽고 멘탈이 박살나는 오이카와를 보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평범한 청춘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지만요.

 

나름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 막판 가서는 멘탈이 박살나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그래도 쓰는 내내 징징거리는 오이카와 써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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