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봇/세모하나] 늦가을 밤

W.B - 츠쿠리

 

 

 

 

 

째깍째깍. 방 안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책상 앞에 앉아 정신없이 무언가를 계산하던 하나는 펜을 놓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너무 오랫동안 수식만 봐서 그런지 눈이 아팠다.

 

지금 몇 시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 푸느라 시간이 가는 지도 몰랐네. 하나는 혀를 차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불이 꺼져 깜깜했고 하나의 방 못지않게 조용했다. 아주 가끔 두리가 축구 경기를 봐야 한다며 소파에 앉아 열렬한 응원을 펼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시간의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내심 그 조용한 적막을 맘에 들어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소리를 죽이며 하나는 부엌의 냉장고로 갔다. 며칠 전에 사다놓은 아이스크림이 있으려나? 왠지 단 것이 먹고 싶어서 냉동실의 문을 연 하나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공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두리가 먹을 걸 내버려뒀을 리가 없었다. 요새 두리는 성장기라는 이유로 걸어다니는 저장고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이 먹곤 했다. 하여튼 차두리, 먹으면 좀 사다놓으라니까. 하나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윗옷을 걸쳤다. 머리도 식힐 겸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가지고 와야겠다.

 

그러나 신발을 신고 현관 문을 여는 순간 쌀쌀한 바람이 하나를 덮쳤다. 슬슬 겨울로 흘러가기 시작한 늦가을 저녁은 생각보다 추웠다. 추운데 가지 말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의지의 차하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과감하게 집 밖으로 몸을 던졌다. 추운 건 추운 거고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였다.

 

 

[하나, 어디 가는 거임?]

 

 

문 여는 소리를 듣고 깼는지 엑스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물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몇년 전부터 또봇들에게 수면모드에서 소리를 감지하면 일어날 수 있게끔 해놓았다. 아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면모드가 해지된 모양이었다. 하나가 엑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편의점에. 잠깐 아이스크림 좀 사오려고."

 

[새벽은 위험함. 같이 가는 것이 어떻겠음?]

 

"요 앞에 잠깐 가는 건데 뭘…, 금방 갔다 올거야. 그런데 요즘 날씨 쌀쌀하던데 춥지 않아? 차고로 들어갈래?"

 

[지금은 괜찮음. 춥다 싶으면 이야기 하겠음. 고맙다, 하나.]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럼 나 갔다올게! 나 기다리지 말고 자, 알았지?"

 

[알겠음. 하지만 기다릴 수도 있음.]

 

 

기다리겠다는 걸 굳이 돌려말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성격인 엑스다웠다. 걱정이 잔뜩 담긴 엑스의 말에 하나는 키득거리며 집을 나섰다.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엑스는 아직도 하나를 보호해줘야 하는 어린아이로 보곤 했다. 어린아이라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해주는 엑스가 싫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보호해줘야 하는 어린아이 취급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하나는 무뚝뚝한 얼굴을 가진 한 소년을 떠올렸다. 소년이라기엔 너무 커버렸지만 청년이라기에는 약간 엣된 모습이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하나는 원래 철없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기에 누군가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걱정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힘들 때, 내색하지 않아도 다가와서 걱정해주는 사람이 하나 생겨났다. 안 그런 척하면서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 권세모를 떠올리자 하나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하고 웃었다.

 

 

"뭘 그렇게 웃고 있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하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헤드셋을 목에 걸치고 트레이닝 복을 입은 세모가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약간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모의 모습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내 웃었다. 세모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를 노려봤다.

 

 

"왜 웃어."

 

"아하하, 미안미안. 넌 평소에 잘 안 뛰어다니고 매일 빼딱하게 걷잖아? 그런데 뛰어와서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좀 우스워서."

 

"…안 뛰어왔어. 그리고 평소에 빼딱하게 걷지도 않아."

 

"에이,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것보다 밤이 늦었는데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요 앞 편의점에.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말야."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추운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아이스크림은."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세모는 하나 옆에 서서 골목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학교 이야기, 공부 이야기, 때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가는 길은 조용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즐거웠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편의점에 도착했다. 하나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스크림 코너로 직행했다. 하드를 살까, 콘을 살까? 아니면 쭈쭈바도 괜찮은 거 같은데. 뒤에서 세모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는 진지하게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마침내 고른 하드를 입에 문 채, 하나는 다른 아이스크림 하나를 세모에게 건넸다.

 

 

"자, 너도 먹어. 내가 살게. 덕분에 여기까지 심심하지 않게 왔으니까."

 

"그래. 잘 먹을게."

 

 

몇 년을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지냈더니 이제 서로의 취향쯤은 서로 꽤뚫고 있었다. 그 증거로 추운 날씨라고 투덜거렸던 것과는 달리 세모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빠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그걸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하나는 계산을 치르고 편의점을 나왔다.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세모가 옆에 나란히 섰다.

 

쌀쌀한데다 새벽이라 그런지 하얀 입김이 서렸다. 하지만 그랬기에 하늘은 높았고, 별들이 총총히 빛났다. 달도 밝게 떠서 은은하게 비춰지는 골목은, 늘 보던 것임에도 꽤나 다른 감상을 갖게 했다. 그렇게 말 없이 하드를 베어먹으며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일상에 감탄하던 하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세모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안 자고 밖에 나와 있었어?"

 

"뭐?"

 

"아니 나야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나왔지만 너는 왜 밖에 있었냐구. 문득 궁금해져서."

 

"……."

 

 

금방 답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세모는 답이 없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가득찬 적막에 어리둥절해진 하나는 가만히 세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나름 소꿉친구인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권세모가, 당황해하고 있었다.

 

뭐야, 왜 당황해하는 거야? 하나가 계속 시선을 맞추자 세모가 홱, 고개를 돌리며 하나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그, 그냥… 운동 좀 하려고 나왔는데 너가 있어서 말 건거야! 뭐 내가 너 나오는 거 보고 나올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어?"

 

"큼! 늦었다, 빨리 가자."

 

"야, 잠깐! 권세모 너 방금 뭐라고 그런…, 야!"

 

 

새빨개진 얼굴로 먼저 가버리는 세모의 뒷모습을 하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추운 바람이 부는 늦가을 밤, 한기가 들어야하는데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도 세모와 같이 귀끝까지 얼굴이 달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나는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  ◈  ◈

 

 

 

 

 

 

 

 

 

몇 시인지도 모르는 새벽.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던 세모는 방 한편에 있는 넓은 창을 바라보았다. 창은 남향으로 나 있어 낮에는 햇빛이, 저녁에는 가로등 불빛을 타고 별들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점은 창이 앞 집을 마주보게끔 되어 있어서 마음껏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세모는 무의식적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의 일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이면 거의 스토킹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단짝이라는 빌미로 낮이고 밤이고 붙어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뭐할까. 차하나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둔해서 무얼 해도 친구라는 이유로 끝나는 것 같았다. 아니지 그냥 저 차씨 집안의 유전자 자체가 둔한 게 틀림없다. 눈치없이 은근슬쩍 하나와 제 사이로 끼어드는 차두리를 떠올리며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집은 딱 한 곳만 빼고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커튼이 쳐져 볼 수는 없지만 세모는 하나가 보이는 것마냥 뚫어져라 불이 켜진 곳을 응시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대체 안 자고 뭐하는 거야. 내일도 아침 일찍 학교 가야 하면서. 마찬가지로 학교를 가야하는 입장인 자신은 생각하지 못한 채 세모는 투덜거렸다. 그렇게 일찍 좀 자라고 잔소리 했는데도 참 말을 안 듣는다.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 차하나다웠지만 가끔은 좀 말을 들어줬으면 싶었다. 걱정하는 입장에서는 속이 타 들어가는데 꿋꿋하게 자기 주장만 내세우니 뭐 어쩌란 거야.

 

그 때였다. 갑자기 앞집의 문이 열리더니 윗옷을 간단하게 걸친 하나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좋았지만 그보다는 지금 시각이 새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니 이 새벽에 대체 어딜 가려는 거야! 세모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 사이에 하나는 벌써 집을 나와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최대한 조용히, 그렇지만 속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만큼 내달리던 세모는 현관 문을 열고 거의 뛰쳐 나오다시피 나왔다. 조용히 나온다고 나왔건만 그 소리를 듣고 깼는지 제트가 헤드라이트를 끔뻑거리며 소리쳤다.

 

 

[세모! 어디가는 거냐고, 그러더라구?] 

 

"깼어? 어, 나 잠깐 운동 좀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말고 자!"

 

 

제트는 다급하게 말을 내뱉고 달려나가는 세모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남들보다 몇 배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제트는 볼 수 있었다.

 

 

[아니 무슨 슬리퍼를 신고 운동을 하냐고, 그러더라구.]

 

 

그러나 제트의 혼잣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의문을 표하던 제트는 혀를 몇 번 차며 다시 수면모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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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작.

 

또봇 최애는 하나....우리 귀요미 하나 ㅠㅠㅠㅠㅠㅠ

셈한 너무 풋풋하니 귀엽지 않나요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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