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생일합작] 봄의 캄파눌라

W.B - 쿠리






5.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싱그러웠던 봄의 끝물이 찾아왔다.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맑고 푸르렀고 여름에 가까운 훈풍이 살랑거리며 초목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수많은 생명이 잉태되고 박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명의 냄새가 넘실거리는 계절은 곳곳에 씨앗을 뿌렸고 아이들은 봄에 취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까르르 웃었다. 바다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피 냄새와 비명소리마저 잠시 주춤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고래를 닮은 배는 도리어 침묵에 빠져 침잠했다. 5월의 마지막에 가까운 날. 그것은 한 소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시작한 날이다.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을 꽃피우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으나 끝내 그가 태어난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덧없이 져버렸다.

그런 청년을 기리기 위해 흰 수염 해적단은 그의 기일 외에 생일 또한 챙겼다. 어두운 밤배에 불을 밝히고 음식과 술을 나르고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기만이라 해도 좋았다. 더 이상 축하받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건만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바다는 그들의 터전이며 삶이었으니 어쩌면 바다 밑에 잠들어 있을 형제에게 인사라도 전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2. 에이미가 죽은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으나 그의 죽음을 마음에 묻어버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슬픔을 잊기에는 그와 함께 걸어간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고, 그는 함께 걸어간 세월보다 더 깊고 강렬한 상흔을 남긴 채 떠나갔다.


그러고 보니 왜 그 동안 에이미의 생일을 챙기지 않은 거야?”


모비딕의 연회는 늘 밝고 유쾌했지만 530일에 열리는 연회만큼은 예외였다.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다가올 무렵 시작된 연회는 해가 지고 아스라이 떠오른 밤별이 검푸른 하늘을 밝혔음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갑판에 둘러앉아 말없이 술을 홀짝이던 형제들 사이로 에이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은 타당했다. 모비딕의 막내인지라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함께한 세월이 짧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시간상으로는 이미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중 이 년 정도는 에이미의 탈주와 정상결전에 힘입어 미처 챙겨줄 정신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전의 기간마저도 에이미의 생일은 단 한 번도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에이미가 평소에 형제들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적막한,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로 기억되었을 5월의 어느 날.


그야 처음에는 에이미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지요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르코가 느릿느릿 답했다. 마르코는 흰 수염이 죽은 후 모비딕을 이끄는 실질적인 맏형으로서 안정기를 구축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손에 럼주를 들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는 먼 바다를 배회하는 것 같기도,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미는 어릴 때 1년을 넘길 거라는 장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니께.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어요이. 그래서 첫 해에는 일부러 생일도 묻지 않았지요이.”


마르코는 손에 든 럼주를 홀짝였다. 그가 목을 축이는 만큼 목소리에도 조금씩 물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그 쬐끄만 아이가 생기를 폴폴 흘리며 돌아다니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이? 정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그렇게 마음 먹었는데두 어느 순간부터 속절없이 정을 주고 있었던겨.”


, 요컨대 에이미가 우리를 사랑해준 만큼 우리도 그 애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야.”


이제는 럼주를 병째로 들이키고 있는 마르코를 대신해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온 삿치가 형제들 사이로 넉살좋게 주저앉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자못 쾌활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차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면 차라리 더 일찍 사랑해줬다면 좋았을 걸. 1년이라도 더 그 애를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요새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해.”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두서없는 넋두리에 에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삿치는 대답 대신 묵묵히 술을 털어 넣었다. 맨 정신으로 말하기에는 그 때의 기억이 지나치게 쓰라렸던 탓이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뇌리를 잠식해 목소리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었다.


에이미 녀석이, 모비딕에 살게 된 지 1년이 조금 넘었나? 이미 정도 잔뜩 들어버렸고, 1년을 넘겼으니 모두들 어린 송장 하나 치울 걱정을 덜었다며 에이미의 생일파티를 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한테 생일을 안 챙겨준 건 너무 했다고 말이야. 하긴 그 어린 게 얼마나 서운했겠어? 그래서 생일이 언제냐고 물으러 갔는데, 그 어린애가, 이렇게 말하지 뭐야.”

 


[제 생일이요? , 제 생일 같은 건 챙겨주지 않으셔도 돼요! 나 말고도 어차피 챙겨야 할 사람 많잖아요.]

[나 참, 어린 녀석이 별 걱정을 다 하고. 아무리 그래도 네 생일 정도는 충분히 챙겨줄 수 있다고. 이럴 때는 사양 말고 냉큼 생일이랑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는 거야, 욘석아!]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어린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마치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뭐냐고 묻는 것 마냥 태평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 같은 거 챙기느라 굳이 삿치 대장님이 수고스러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난 여기 없었어야 했으니까, 이런 걸로 폐를 끼칠 수는 없는 걸요.]

아아,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던 것 같다. 에이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히자 당황해하면서도 이내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를 곱게 휘며 죽을 만큼 행복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걸 아버지께서 자식으로 받아들여주시고 형제로 인정해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생일인 것처럼 죽을 만큼 행복하니까, 내 생일은 몰라도 돼요.]

[,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잊지 마, 넌 우리의 형제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던지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음 속에 자그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다는 험난했고 어린아이가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눈앞의 아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가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그 때 멱살을 쥐어서라도 생일을 알아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적어도 어린 동생을 생일 한번 챙겨주지 못한 채 떠나보낸 무정한 형은 되지 않았을 테니.

 

, 그런 이유로 에이미는 끝내 자신의 생일을 말해주지 않았어. 시간이 좀 지나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고집이 센지.”

푸흡, 한 번 정한 건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성격은 어릴 때부터였군.”

그래. 매년 꼬박꼬박 물어봤는데도 끝내 입을 다물었지요이. 심지어 아버지가 물어봤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이. 맹랑한 녀석 같으니.”

푸하, 들이키던 럼주가 끝을 다했는지 마르코가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던 새 병을 집어 들었다. 에이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그래요이. 아무리 흰 수염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아들로 맞았으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신거지요이. 종종 불러서 과자라도 쥐어주실 정도로 귀여워했으니 그런 이야기를 허투루 넘기실 리가 없지요이.”

하지만 그 멍청이는 아버지한테도 말 안했어.”

이조우!”


대장진들의 술판에서 잠시 멀어져 16번대 대원들을 살피고 온 이조우가 다시금 가세했다. 작작 좀 마시라며 대원들에게 잔소리를 잔뜩 하고 왔으면서 정작 그의 손에도 어김없이 술잔이 들려있었다.


이조우도 그 때 옆에 있었어?”

그래. 아버지가 진료를 받을 시간이어서 들렀다가 우연찮게 듣게 됐지.”


이조우가 새하얀 이마를 찌푸리며 불퉁하게 답했다.


그 녀석, 아버지가 물었는데도 끝내 대답하지 않더군. 이미 구해주고 아들로 삼아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여기서 더 빚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그걸 그냥 보고만 계셨단 말이야?”

당연히 아니지! 아버지는 아이는 아이답게 구는 거라고 혼내셨어. 다만 그 멍청이가 끝내 웃는 얼굴로 사양했을 뿐이야. 생일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 원, 아버지가 패기까지 실었는데도 꼼짝도 안하더군!”


이야기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조우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결국 시근거리며 화를 토해내다 못한 이조우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평소에 술을 자재했으나 오늘만큼은 울화통이 터져 마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체 가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가족 사이에 빚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나 하고, 그 때 두들겨 패서라도 그 사고방식을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

그랬다면, 그 멍청이가 은혜를 갚겠다고 멋대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어쩌면 지금도 살아있어서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내 목소리는 점차 힘이 빠져, 후회와 슬픔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건 모비딕 사람들이 한 번쯤 떠올려본 생각이기도 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부질없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거나 후회를 짊어지고 난 후 헛된 기대를 품고 상상해보곤 하는 질척한 미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늘 그렇듯 후회를 번복하고 이따금 부질없는 상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보곤 하는 것이다.


하여튼 천하의 머저리 같으니!”

이조우, 취했어요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말이 너무 심하다. 어서 들어가 자.”

취한 거 아냐. 열 받아서 그래, 열 받아서! 아직 더 있을 수 있다고. 적어도 날이 바뀌기 까지는 말이야.”


이조우가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며 퉁명스레 답했다. 어느새 달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흘렀던가.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은 바뀌어 5월의 마지막 날로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며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다만 아직 그 때가 아닐 뿐이다.


마르코 대장! 저 멀리서 산하 해적단의 깃발이 보입니다! 화이티 베이의 쇄빙선입니다!”

,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요이. 모두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해라요이!”


연회가 열리는 와중에도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견문색 패기로 익숙한 기운이 잡힌다 싶었더니 화이티 베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화이티 베이는 에이미와 인연이 남달랐던 산하 해적단이라 그런지 작년에도 에이미의 기일과 생일 모두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 중에서도 레몬이라고 했던가? 에이미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았던 여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찾아와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몬은 배에 올라타자마자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술 항아리부터 내놓았다.


너무 늦게 와서 염치가 없지만슬슬 술이 떨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요.”

오오, 술이다!”

크으!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레몬이라고 했던가? 어서 여기 앉아! 술을 들고 와줬는데 늦은 게 무슨 흠이 되겠어?”

! 겨울의 과실주라니 내가 이 맛을 못 잊어서 여태까지 안 들어가고 있었나보다!”


와하하하! 능청스러운 너스레에 떠들썩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 원, 못 말린다니까.”


죠즈가 피식 웃더니 화이티 베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르도, 하루타도 그리고 다른 대장진들도 조금씩 술판에서 빠져나와 화이티 베이 일당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대원들과 어울려 과실주를 마셨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들 틈에 어울리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모비딕의 활기는 분명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것 중 하나였으나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


그리고 마르코는 기민하게 이질감의 원인을 눈치 챘다. 입과 눈의 표정이 달랐다. 늘 같은 방향으로 휘어져 있던 두 주름이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은 올라가 있으나 눈은 잔뜩 처졌다. 마르코는 그들의 눈에서 여전한 슬픔을 읽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어버린 어린 형제의 안배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이리라.


마르코는 문득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에이미는 끝까지 당신들을 걱정했어요.]

작년 530, 날이 바뀌기까지 채 몇 분을 남겨 둔 시각이었다. 과실주를 잔뜩 들고 온 레몬 덕분에 어둑어둑하던 모비딕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인지 형제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술을 마셨고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레몬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즈음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연회가 파해가는 시점에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언젠가, 그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한다면,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배에 방문해달라고. 그래서, 당신들이 더 이상 울지 않게 해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는 술에 취한 까닭일까, 아니면.

[저는 잘 해냈나요? 당신들이 웃을 수 있게 한 걸까요? 그의 부탁을, 조금이나마 들어줄 수 있었나요?]

갑판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것은 혼잣말일까. 아니, 어쩌면 에이미가 조금이나 전하고 싶었던 마음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모두 버려달라고 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어요. 정말 끝까지 바보 같은 사람.]

[…….]



그래, 그는 정말로 바보 같은 동생이었다. 죽어서도 형제들을 걱정하고, 자신 때문에 슬픔에 젖는 것조차 싫어 차라리 잊어주길 원한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정작 잊으면 잊는 대로 잔뜩 서운해 하면서도 끝내 내색하지 않을 녀석. 하지만 그랬기에 그를 좋아했다. 그 태양 같은 상냥함에 정신없이 이끌렸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이토록 사랑하게 됐다. 길고 긴 상실감에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고통마저 품고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미안하게도 에이미, 그 무엇도 널 대신할 수는 없었어요이.”


마르코는 쓰게 웃고는 형제들로부터 등을 돌려 갑판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불이 밝혀진 선내의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더니 이윽고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게 됐다.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이 익숙하다. 문득 담배가 고파져 주머니와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피지도 않던 담배가 있을 리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만 가끔 한 개비씩 빌리곤 했으니. 그러나 뒷골이 당기는 것이 유독 한 대를 입에 물고 싶은 날이었다. 고픈 것이 담배인지 아니면 눈에 아른거리는 동생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따라 에이미가 보고 싶었다.


마르코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이 드리워진 검푸른 바다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고 삶이자, 그들의 형제를 보낸 준 바다. 또한 그들의 형제를 다시 삼켜버린 바다. 마르코는 한참동안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태양을 삼켜버린 바다는 짙고 어두워서 눈을 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고요함이 있었다.

마르코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에이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음을, 끝내 부정하고 싶어 외면해왔음을.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순간들을 잘 이겨내 주었듯이, 죽어버린 그의 형제는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그 동안 잘 있었냐며 밝은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기에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였으니.

허나 이제는 슬슬 모든 것을 내려놔야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죽은 자를 두고 이리 미련을 보이는 것은 에이미 녀석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그 만큼의 죽음을 봐왔다. 죽음은 어느새 익숙한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된 만큼 죽음을 가슴에 묻는 일도 쉬워졌다. 그래,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이제 슬슬 내려놔야지요이.”


내려놔야지. 5월이면 에이미가 유독 케이크를 자주 먹던 것도, 정작 몇 입 베어 물다가 멋쩍게 웃으며 남은 케이크를 건네던 것도, 자기 생일은 챙기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일은 유독 챙기던 모습도, 전부 내려놔야지.


전부, 내려놔야하는데.

 

[생일 축하해요, 마르코!]

 

………!”


마르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웃는 얼굴을, 애써 모은 용돈으로 사온 선물을 고사리 같던 손으로 건네며 수줍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르코는 숨 죽여 오열했다.

 


[저는 530일에 태어났었어요.]

[기왕 기억할거면그런 날이 좋잖아요.]

 


종종 생각하곤 한다. 끝내 생일을 이야기하지 않던 에이미가 죽기 직전에 털어놓듯이 자신의 생일을 말했던 일을. 자신에게 전하려고 의도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들었다. 에이미는 결코 축하받지 못할 생일을 말하면서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서웠을까? 쓸쓸했을까? 아니면외로웠을까?

투둑.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불빛이 닿지 않는 갑판은 눈물 자국 또한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날이 넘어가고, 5월의 마지막 날이 찾아올 것이다. 형제들은 또 다시 슬픔을 가슴에 묻고 웃으며 새로운 나날을 맞이할 것이며 그렇게 모든 것은 어둠에 묻힌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에이미는 어떤 아픔이 있어도 티내지 않고 밝게 웃는 녀석이었지만 실은 혼자인 것에 지독히도 외로움을 탔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생일이니까, 바다에 홀로 잠들어 있을 동생을 위해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라? 마르코, 왜 울고 있어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이기도 했다. 2년 넘게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환청인가. 너무 울어서 잠시 파도소리에 착각이라도 했나보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닿는 감촉은, 흉터로 가득한 손은 분명 기억에 있었다.


에이미?”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햇살 같은 미소가 있었다. 부스스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휘어진 눈매가 날카로운 금안을 감추고 둥글게 웃었다. 마르코는 눈을 깜박였다. 붉게 충혈 되었을 눈에 담긴 것은 바다에서 온 소년이다. 소년은 이윽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바다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삶인 바다에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에이미,”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라도 좋으니 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마르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요이.”


그 말을 끝으로, 날이 바뀐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다. 전하지 못한 말은 틀림없이 전해졌다.


?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거에요?”


에이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이윽고 귀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얼굴, , 그리고 몸 전체가 수줍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래도 그런 거, 엄청 기쁘네.”


그 웃음은 분명 봄의 캄파눌라와 닮아있었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다.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 어느새 모비딕 한 귀퉁이를 차지한 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춘 상냥한 형제를 닮았다.


마르코, 여기서 뭐에이미?”

에이스 대장도 참!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거기서 에이미가 왜 나오는, 에이미?!”

, 안녕하세요 줄리!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에이스 씨는 여전히 잘 생기셨네!”

!”

, 줄리 정신 차려!”

줄리가 기절했다아아!”


곧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또 다시 피어날 봄의 캄파눌라를 기다리며.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합작후기 :


안녕하세요. 쿠리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미 생일 합작에 다른 분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요. <우리는 삼총사!> 에 입덕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일 합작에 참여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사실 저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흑흑 에이미 사랑해! 생일 축하해!

합작 이야기를 해보자면 생일 합작은 생각보다 주제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소재를 쥐어 짜내다 보니 답이 없는 피폐물 3종 세트가 나왔는데 생일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하게 되어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 지금 보고 계시는 글입니다. 천만다행이죠.

모티브는 우리는 삼총사! 원작에서 얻었습니다.

 

121삼총사

그러고 보니 그래. 본인 생일은 별로 챙기지 않았잖아.”

아하. 에이스의 말이 맞았다. 이 모비딕의 위에 승선한 이후로는 그저 하루하루가 생일처럼 기뻤으니 말이야. 달리 생일을 챙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반쯤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가끔은, 삿치에게 조각 케이크를 부탁하며 생일 기분을 내보기도 했지만서도.

 

125에필로그

혹시라도,

내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했을 때, 내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하면.

또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우리 배에 방문해주세요. 더 이상 그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여러분께 드린 사랑은 남기되, 저와의 기억은 모두 바다 한켠에 버려졌으면 합니다.

 

126에필로그

침묵하고 있던 사내는 마른 눈으로 무덤의 한켠에 놓인 술병과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잔을 채운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데, 신기한 일이지. 보통 누군가의 애도를 위해 이런 술을 준비하진 않을텐데.

 

캄파눌라(bellflower)의 꽃말 : 따뜻한 사랑, 상냥한 사랑, 변하지 않는다.

 

글이 전개되고 있는 시점은 에이미가 죽고 2년 후의 530일입니다. 저는 에이미가 다시 원피스 세계로 돌아온 것이 530, 즉 에이미의 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호크가 에이미의 무덤을 방문하는 날짜가 530일이라는 점, 잔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어요. 다행히 모비딕이 에이미를 기리기 위해 무덤과 그리 떨어져있지 않은 해역에 머무르고 있어 에이미는 무사히 생일 직전에 당도하여 축하받을 수 있었다는 후일담입니다.

개인적으로 흰 수염 해적단과 에이미의 일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마르코와 에이미의 맏형과 막내라는 포지션을 좋아해요. 에이미를 주운 게 마르코라는 것도, 제일 에이미를 동생처럼 여기는 게 마르코라는 점도요. 그래서인지 유독 후반부에 마르코 독백이 많이 추가됐습니다. 쓰면서 마르코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그치만 에이미가 선물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저 대신 마르코를 많이 힐링시켜 줄 거라고 믿습니다ㅠㅠ 물론 정신 차린 흰 수염 해적단이 진짜 에이미가 맞는지 심문하는 과정이 남았지만...3년 후의 생일은 보다 확실하게 챙겨줄 수 있겠죠?ㅎㅎ

어떻게든 생일이라는 주제에 맞게 녹여보려고 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미호크도 등장시키고 싶었지만 에이미는 사랑보다 우정이라서요^^...나중에 에이미가 찾아가서 만나는 걸로ㅎㅎㅎ!

다시 한번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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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마의 회귀에 헤라 아그리파와 쥬라큘 미호크 둘 다 관여되어 있었다면

-상상과 날조








[라리마] 내기

W.B - 츠쿠리








아비수스Abysuss. 혀끝에 닿는 순간 독성이 시신경을 지배해 환각을 보게 만든다던 악마의 술. 술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독은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이름 높아 해적들마저 꺼리는 액체가 되었다. 그러나 쥬라큘 미호크는 아랑곳 않고 빈 잔에 아비수스를 따랐다. 독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액체가 유리잔 가득 채워지자 망설임 없이 입으로 털어 넣었다. 이미 그의 발치에는 족히 열개는 넘을 빈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이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더 많은 술을 원했다. 목구멍까지 차올라 흘러 넘쳐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라리마.

이제는 가슴에 사무쳐버린 이름을 미호크는 힘겹게 끄집어냈다. 입 밖으로 흩어진 이름은 애달팠으나 그 뿐이었다. 껌뻑거리는 시야에는 어떤 환각도 나타나질 않았다. 아직 부족한가. 그는 테이블 옆에 놓인 새 아비수스 병을 집어 들었다. 입에 털어 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과도한 상상이 빚어낸 환각일지라도 미호크는 이미 두 번이나 죽어버린 아들을 마주했다. 썩 좋은 만남이 되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이미 시꺼멓게 죽어버린 그리움이 다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뜻밖의 불청객이었다.

 

꼴이 참 볼만하구나.”

 

환각인지 모를 여인이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이 들어 주름졌음에도 변함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눈에는 어김없이 증오가 서려있었다. 헤라 아그리파. 미호크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래, 나를 잊지 않았구나.”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환각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기다리는 이는 네가 아니다.”

오자마자 쫓아내는 건가. 손님 접대가 영 불쾌한 걸? 지금 쫓아내면 후회하게 될 텐데. 다시는 아들을 못 볼 수도 있어.”

무슨 뜻이냐.”

 

아그리파의 눈이 휘어졌다.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지금 마시고 있는 그 술은 해적마저도 제조업에서 손을 놔버린 것이지. 그렇다면 그 귀한 술을 샹크스는 어디서 구했을 것 같으냐.”

당신이 바로 유통업자군.”

바로 그거야.”

 

아그리파는 정답을 맞힌 상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우아하게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미호크는 가식적인 얼굴을 찢어발길 기세로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아들을 잃었으니 비웃어주러 온 건가? 복수를 위해서?”

, 복수라니. 무슨 말이니.”

 

아그리파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그녀는 과장되게 깔깔 웃으며 방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축제가 열린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무희의 춤을 추기라도 하듯 더 없이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노래하듯 가락이 흘러나왔다.

 

상상해본 적 있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발루아 라리마가 얼마나 찬란했을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발루아 라리마의 일생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라리마는 활짝 웃고 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답게 그늘 한 점 없는 새하얀 얼굴이었다. 비록 쥬라큘 미호크와 발루아 마르그리트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였으나 라리마를 향한 애정만큼은 진실이었다. 그들은 감정을 기만하지 않았으며 라리마를 더없이 사랑했다.

 

여섯 살, 쥬라큘 미호크는 라리마의 생일날 방문해 아이에게 사랑을 속삭였으며,

일곱 살, 공부하기 싫다며 칭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덟 살, 쥬라큘 미호크는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아이의 곁을 지켰으며,

아홉 살, 처음으로 검을 든 아이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리마가 열 살이 되던 해, 미호크는 어미의 재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라리마를 데리고 어두우르가나섬으로 왔다. 그곳에서 아이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살게 된다는 사실을 더없이 기뻐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부자는 우려와는 달리 잘 지냈다. 아이가 가끔 부모를 닮은 성정으로 말을 비꼬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어두우르가나섬에서 보낸 오년동안 부자(父子)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루아 라리마는 성인이 되었다. 부모가 극진히 보살핀 덕분에 병세는 그리 악화되지 않아 무사히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장한 발루아 라리마는 사랑받는 왕태자였고 사랑받는 오라비였으며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사랑받고 자란 발루아 라리마의 인생은 이토록 찬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지켜본 미호크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저리 밝게 웃을 수 있는, 저리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아이를 저는 어떻게 대했나. 어떻게 밀어내고 어떻게 박대하고 어떻게 서슴없이 칼날 같은 말을 던졌던가.

 

어때? 보고나니 후회되니? 그 아이를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내게 이러는 저의가 뭐냐, 아그리파.”

 

미호크가 그르렁거렸다. 맹수가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기 직전에 나오는 흉포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검호라 불리는 자의 살기를 마주하고도 아그리파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기뻐. 쥬라큘 미호크. 네가 네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 아들이 네놈 때문에 죽었는데! 하지만 이제 아냐.”

 

그녀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네가 네 아들을 사랑해서 더없이 기뻐, 미호크. 그래야 내 복수가 완성될 테니까.”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모양이야. 아까 복수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래, 하지만 곧 시작할 거야.”

! 네가 무슨 수로?”

 

그러나 미호크가 면전에서 비웃었음에도 아그리파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더없이 우아하게 속삭였다.

 

너는 나를 비웃었지만 곧 내 복수의 시작에 협력하게 될 거야.”

내가?”

그래. 왜냐하면 그래야 다시 네 아들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미호크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었다. 튼튼한 몸은 아비수스의 독성조차 희석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수없이 많은 액체를 들이켰음에도 제 아들의 모습은 겨우 두어 번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라리마를, 다시, 볼 수 있다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희망이란 이름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기회를 줄게, 쥬라큘 미호크. 이건 내 복수를 위해 함부로 시간을 돌리는 것에 대한 대가야.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려무나. 이 기회마저도, 너와 마르그리트가 준 것은 아니니.”

지금, 시간을 돌린다고?”

그래. 작고 예쁜 꼬마 아가씨가 제 목숨을 내놓았지. 참으로 우습지 않더냐, 제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반쪽짜리 피가 섞인 동생한테 구원받다니 말이야.”

 

미호크는 아그리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만큼은 심장을 태우는 분노도, 증오도 모두 잊었다. 라리마, 라리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시간을 돌려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열아홉에 죽어버린 라리마가 아니라, 찬란한 미래를 가질 아이를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미호크가 다급하게 물었다.

 

내 기억을 가진 채로 시간을 돌릴 수 있나?”

 

아그리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증오가 절절 끓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착각하지 마. 이건 널 위한 게 아냐. 엄연히 내 복수를 위해서지! 다만 아까 말했듯이 기회는 주지. 이건 핏덩이 같은 그 애의 여동생이 목숨을 내놓은 것에 대한 대가다. 네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아이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돌려준 상태로 시간을 되돌리겠어.”

그럼 라리마는 아픈 기억을 모두 끌어안은 채 다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란 인간은, 마르그리트라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잃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중함을 모를 정도로! 그러니 내 기억을 되살려!”

! 착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살점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네 놈의 부탁을 내가 들어줄 성 싶으냐? 이건 네 행복을 위해서가 아냐. 내 복수를 위해서지! 바로 네 앞에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네 앞에서 네 놈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줄 테다.”

 

아그리파는 더없이 고혹적으로 웃었다.

 

, 과연 이번에는 네 아이의 심장을 온전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

 

그 순간,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갔다. 째깍째깍. 시침과 분침이 정신없이 되감아지고 정확히 십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열 살의 발루아 라리마가 다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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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 푸른 꿩

W.B - 츠쿠리




"잘 있었어요, 샤키? 오랜만이에요.”

어머, 에이미!”

 

공손하게 바의 문을 닫은 에이미가 코주부 안경을 벗고 웃는 낯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신반의하던 눈빛으로 방금 들어온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샤키는 낯익은 얼굴이 드러나자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격한 포옹은 덤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거 아니었어? 분명 신문에는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했는데!”

. 그게 사정이 생겨서. 으음, 죽을 뻔 했고 죽은 것도 맞지만 어떻게 용케 살아있네요.”

뭐야,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잖아?”

하하, 그런가요? 그치만 저 살아 있는 건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 아무도 모르거든요.”

 

샤키니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라구요. 눈을 찡긋거리며 그리 말하자 샤키는 살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바가지를 씌우지만 아는 사람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의리 있고 상냥한 샤키다. 애초에 무법지대인 13번 글로브에서 혼자 장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입이 가벼웠다면 진즉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터. 티치를 죽이고 흰 수염 해적단에서 탈주했을 때조차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니 그녀는 꽤 믿을만한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주문은 오렌지 주스?”

. 기억하고 계셨군요. 거기에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식사도 추가로 부탁해요!”

후후, 몇 안 되는 단골손님의 메뉴를 잊으면 곤란하지. 그나저나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니 그거 보이의 단골 메뉴잖아. 이따가 보이도 와?”

, . 아뇨, 제가 먹을 거예요. 보이가 얼마나 맛있어하던지 괜히 궁금해져서요. 최근에 건강이 괜찮아져서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게 됐거든요.”

 

갑자기 튀어나온 친구의 이름에 동요한 것도 잠시, 에이미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다행히 샤키는 짐작 가는 바가 있던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내심 어떤 변명을 해야 하나 조마조마했던 에이미는 그제야 등을 의자에 기대며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씨씨의 근황은 묻지 않았네.’

 

에이미는 쓰게 웃었다. 아마 일부러 씨씨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것이리라. 당시만 해도 밀짚모자 해적단의 노커, 씨씨의 죽음은 해군이 가장 대대적으로 떠들어대던 선전거리였으니 말이다. 시체를 찾을 수 없었던 에이미와는 달리 씨씨는 시신이 남았으니 해군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샹크스가 시신을 수습한 후 관 뚜껑의 문짝을 단단히 걸어 잠그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니 밀짚모자 해적단과 친분이 있는 샤키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 에이미에게 말을 아끼고 있는 건 아마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인 셈이었다.

 

샤키는 어릴 때부터 우리를 봐왔으니 웬만하면 모든 걸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역시 밀짚모자 해적단과의 교류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게다가 루피는 레일리의 제자고.’

 

그 동안 조용히 살았으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에이미를 포함해 삼총사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꽤나 날린 전적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으니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최선책이었다. 에이미는 착잡한 표정으로 샤키가 건네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탈주했을 적에 형제들을 속일 때도 느꼈지만 역시 친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꽤나 양심에 찔리는 일이다.

 

인생을 너무 정직하게 살아서 그런가.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아파.”

 

에이미가 칭얼거리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꽤나 뻔뻔한 한탄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보이가 있었다면 약탈을 밥 먹듯이 하는 새끼가 거짓말도 잘해!’ 라며 머리를 쥐어박았을 것이다. 씨씨는 그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겠지. 그러나 늘 삼총사가 앉아있던 테이블에는 에이미만이 홀로 자리하고 있다. 윽박지르는 소리도, 가벼운 웃음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시간을 더듬다보니 조금 쓸쓸해졌다. 에이미는 말없이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평화로운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에이미는 괜스레 품에 넣어두었던 전보벌레를 꺼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전보벌레는 눈을 감고 고요히 잠을 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호크는 잘 도착했을라나.”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연락이나 해주면 좋으련만. 기왕이면 잘생긴 로우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좋고! , 그건 도청의 위험이 있어서 곤란하려나? 하긴 애초에 미호크가 먼저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가. 이전에도 내가 항상 먼저 연락하고! 나 참, 찾아오기는 뻔질나게 찾아왔으면서 연락은 왜 아날로그인가 몰라! 에이미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렇다. 미호크는 오늘 마리조아에서 열리는 칠무해 소집에 참석했다. 덕분에 에이미도 미호크의 배에 동행해 샤본디 제도까지 나올 수 있었다. 미호크가 소집에 응하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부터 일찌감치 매달려 데려가 달라며 떼를 썼던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심산이냐. 아직 갈 거라고 확답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확답하면 되겠네요. ! 귀찮으시면 제가 대신 연락해드릴까요? 나 참, 미호크도 칠무해면 칠무해답게 회의 정도는 참석하라구요! 매일 섬에 틀어박혀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답답한 건 네 녀석이겠지. 괜히 이런저런 핑계 댈 것 없다.’

, 그치만 기분전환도 하고 싶고, 쇼핑할 것도 잔뜩 있는 걸? 그리고 오랜만에 샤본디 제도에 가서 지인도 보고 싶으니까 나도 데려가줘요, ?’

정체를 들키고 싶어 안달이 났나보군. 그동안 숨어 지낸 걸 다 무용지물로 만들 셈이냐.’

 

그러나 미호크는 칭얼거리는 에이미를 몹시 탐탁찮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명백한 불신의 눈빛이었으나 에이미는 꿋꿋하게 졸랐다.

 

그 동안 잘 숨어있었으니 잠깐 쇼핑하는 것 정도야 괜찮잖아. 어차피 다들 제가 죽은 줄 알거고 변장도 할 테니까 문제없어요!’

…….’

 

손에 들려있는 코주부 안경을 보고 미호크의 눈매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러나 에이미는 움츠려들기는커녕 무해하게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애초에 미호크와 함께 살면서 얻게 된 건 두꺼운 신경줄밖에 없으니 말이지. 게다가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샤본디 제도에 발을 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에이미의 서툰 항해술로는 샤본디 제도는커녕 그 전에 조난당하는 게 더 빠를 테니. 여튼 그렇게 며칠을 조른 끝에 미호크의 허락이 떨어졌고 그의 배에 동행하여 샤본디 제도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기름진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음식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때울 무렵이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지 몰라도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네. 에이미는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보통 낮 시간에는 꽤 한가한 편인데 손님이 오다니 별일이다.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사람이려나?

 

샤키의 바에 오는 손님은 보통 두 종류였다. 샤본디 제도가 처음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오는 경우와 에이미처럼 단골손님이 되어 더 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경우. 바가지만 아니라면 샤키의 바는 꽤 괜찮은 곳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호구가 되는 셈이니 보통 초행인 손님이 걸리곤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금액에 분노한 손님이 돈을 못 내겠다고 우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샤키,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레일리가 행차하여 무력행사가 들어가니 요금을 징수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해적왕의 전 부선장이 직접 가하는 응징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잖아! 에이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그래서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어떤 경우이려나?’

 

마침 할 일도 없는데다가 흥미가 더해진 에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로 막 닿으려던 찰나였다.

 

?

??

????????

 

에이미는 곧바로 고개를 원위치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테이블에 잠시 벗어두었던 코주부 안경을 잽싸게 썼다. 어림잡아 5초쯤 되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장이 펄떡거리며 미친 듯이 펌프질 했다. 온 몸의 피가 혈관을 타고 팽팽 돌았다. 온 몸이 긴장으로 저릿했다.

 

미친! 아오키지가 왜 여기에?!?!?!’

 

그렇다. 샤키의 바에 들어선 손님은 다름 아닌 해군대장 아오키지였다! 해군의 상징인 새하얀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단연 눈에 띄었다. 3미터에 가까운 큰 키와 여전한 파마머리 그리고 이마에 착용하고 있는 수면안대와 흐리멍덩한 눈동자. 착각하래야 착각할 수도 없는 사내가 희미한 기척을 흘리며 가게 안에 서 있었다.

 

에이미는 속으로 한껏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대장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지금쯤 마리조아나 다른 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마음 같아서는 해군에 신고라도 하고 싶었다. 해군아저씨, 여기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서 와서 잡아가세요! 물론 해군아저씨가 해군대장을 목격하고 잡아갈지는 미지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절실했다.

 

'아냐, 그래도 날 알아볼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안경도 썼으니 못 알아보겠지!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것도 한참 전의 일인 걸.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본 샤키한테는 미안하지만 빨리 돈을 지불하고 나가자. 최소한 옆자리에만 앉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그러나 그 순간 불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라라, 여기 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 걸?”

 

드르륵. 바로 옆에서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끼기긱. 에이미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견문색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하며 착석하는 생생한 느낌이 전해졌다.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오키지다! 해군대장 아오키지가 옆에 앉았다!

 

역시 신은 날 버렸어!’

 

그러나 절규도 잠시, 에이미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찰나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걸. 분명 검성은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

 

들켰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혼잣말로 넘기기에는 그 의도와 가리키는 바가 명백했다. 그러나 에이미는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아하하, 저한테 하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흰 수염 해적단의 검성이라면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들었어요. 한동안 꽤 떠들썩한 이야깃거리였죠.”

그랬던가? 그런데 왜 지금 내 옆에 검성,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 아무렴 어때. 하여튼 네가 있는 거지?”

나 참, 아무리 농담이라도 지나치시네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제 이름은!”

에이미, 여기 음식 나왔어.”

…….”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검성> 에이미.”

 

에이미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베이컨과 잘 양념된 스테이크.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감자튀김과 싱싱한 샐러드가 반갑다며 인사를 건넸다. 안타깝게도 그다지 안녕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샐러드를 콕콕 찔렀다.

 

, 그래요. 용건이 뭐에요? 체포?”

아라라, 용건은 딱히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그거 맛있어 보이는군. 한 입 맛봐도 될까?”

다리를 작살냈던 사람한테 뻔뻔하네요.”

 

그러나 한숨을 내쉬면서도 에이미는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 한 점을 건네주었다. 아오키지는 사양하지 않고 덥석 베어 물었다.

 

, 이거 맛있군. 언니, 나도 똑같은 걸로 하나 부탁하지. 그리고, 어디보자위스키도 하나.”

어머. 기꺼이요, 해군 대장 나으리.”

 

담담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샤키가 생긋 웃으며 사라졌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녀에게서 새로운 호구가 등장했을 때 보이던 눈빛을 읽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해군대장인데 작작 벗겨먹어요. 샤키 씨. 에이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방을 응시했다. 그다지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으음,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 뭐야, , 귀찮네. 그래, 체포해도 될까?”

이런. 안타깝게도 저는 선량한 민간인이어서요. 해적은 관뒀답니다!”

, 뭐 그렇긴 하지만 수배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죽었다고 공표된 지가 몇 년인데. 수배서 운운할거면 효력부터 부활시켜요. 폐기처리 된 수배서로 체포하는 건 규정 위반 아닌가요? 그렇게 꼼꼼하게 사시는 양반도 아니면서.”

아라라, 나에 대해서 꽤 잘 아는 말투인데?”

 

아오키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에이미는 남아있는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자른 단면 사이로 적당히 익은 속살이 보였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죠. 아시다시피 해적생활을 한 지가 꽤 돼서요.”

그렇군. 으음, 생각해보니 보이 소장한테도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어.”

보이 소장이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어보네요. 물론 그 사람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아시다시피 배신당한 순정이 좀 쓰라려서요. 에이미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오키지는 그런 에이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 아무렴 어때. 문득 생각나서 해본 소리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려는 건 이게 아니었어. 오히려 뭐랄까, , 그렇지. 뭐냐, 덕분에 아카이누가 좀 유해졌으니 공격해준 걸 고마워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흐음? 아무리 이념이 다르다고 해도 당신 동료를 공격했는데요? 게다가 저는 제 개인적인 원한을 갚은 것뿐이니 딱히 감사인사를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라, 까칠하네.”

그럼 동생을 체포한데다가 제 다리뼈를 부서뜨렸는데 말이 곱게 나가겠어요? 아직도 비가 오면 다리가 욱신거리는데. 그나마 해군대장 중에서는 당신이 제일 마음에 들지만 역시 직접 마주하니 조금.”

 

에이미는 눈을 찡그렸다.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를 기억한다. 우득, 하고 무릎 뼈가 부서지던 그 생생한 소리가. 정상결전은 아픔과 고통이 점철된 기억이었다. 아버지, 흰수염이 죽었으며 씨씨가 눈앞에서 스러졌다. 정상결전에서 입었던 심각한 부상은 내내 따라다니며 악몽처럼 괴롭혔다. 만약 통각이 있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오키지라는 캐릭터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지금 대면하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오키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센고쿠의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는데 말이지. 나라고 흰수염 해적단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그래도 인사는 해두지. 만약 아카이누가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꽤나 다퉜을 테니까. 그와 나의 정의관은 너무나 다르거든.”

…….”

 

에이미는 속으로 긍정했다. 원작과는 다르게 이곳은 아직 센고쿠가 원수를 맡고 있었다. 에이미가 저지른 여러 가지 변화로 인해 정상결전의 흐름과 규모가 축소된 까닭이다. 정상결전의 전후를 비교했을 때 해적과 해군의 세력 면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티치를 죽였기에 새로운 사황의 등극도 없었으며 에이스를 빠르게 구출해내고 피해를 최소화한 덕분에 흰 수염 해적단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명성을 되찾았다. 삼대장 중 한명인 아카이누가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인데다가 전쟁 후에도 판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해군에서는 아직 원수를 세대교체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직 해군의 삼대장은 아카이누, 아오키지, 키자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다. 루피 일행이 다시 모험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슬슬 해군 내에서도 세대교체를 논하고 있다고 들었다. 센고쿠와 가프를 비롯해 기존의 중진들이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밑에서 원수자리를 두고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다. 키자루는 별 관심이 없다고 들었으니 이번에도 아오키지와 아카이누가 다투겠지. 원작과는 달리 아카이누가 팔을 잃었으니 아오키지에게도 꽤 승산이 있으리라. 에이미 입장에서도 감정은 내려두고서라도 아오키지가 원수를 맡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편이 에이스를 비롯한 형제들의 안위를 조금이라도 더 보장해줄 수 있을 테니까.

 

아라라, 표정이 무섭네. , , 너무 그러지마. 가뜩이나 미움 받고 있는 처지인데 말이야.”

미움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모르는 건가? 매의 눈 말이야, 매의 눈.”

……?”

 

에이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미호크의 이야기가 왜 나온담? 그런 에이미의 의문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아오키지가 말을 이었다.

 

어라? 진짜 몰랐나 보네. , 뭐냐, , 정상결전 이후로 해군은 매의 눈에게서 꽤나 미움 받고 있거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특히나 내가.”

미호크가 누굴 미워하고 그럴 사람은 아닌데요? 오히려 뒤끝은 없는 성격인데.”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왜 그런 성격 있잖나. 화를 잘 내지는 않지만 한번 화나면 말릴 수가 없는 사람. 매의 눈은 그런 유형이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아오키지의 목소리에서 짙은 한숨이 느껴졌다. 어느새 말투도 푸념하듯이 바뀌었다. 잔을 살짝 흔들자 얼음이 유리잔과 부딪히면서 잘그락거렸다. 아오키지는 집요한 시선으로 액체를 응시하다가 목구멍으로 가볍게 넘겼다.

 

정상결전 이후부터 매의 눈은 그 어떤 소집 명령에도 응하지 않았어. 물론 칠무해야 워낙에 제멋대로인 성정이라 소집에 응하는 게 오히려 드물긴 하지만그래도 매의 눈은 비교적 흥미가 있는 일에는 참석하는 편이었단 말이지. 그걸 죄다 거절한 덕분에 일거리가 넘쳐났다고. 수면 시간도 줄고.”

 

에이미는 뒷말은 못 들은 척 넘겼다. 게다가 아직 아오키지의 말은 신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장 오늘만 해도 미호크는 칠무해 소집에 떡하니 참석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미호크는 오늘 열리는 칠무해 소집에는 참석했는걸요.”

아하, , 그렇겠지. 검성, 혹시 네가 의식을 차린 건 꽤 최근의 일 아닌가? , 미리 말하지만 딱히 취조하거나 악용하려는 건 아니야. 본인이 민간인을 지향하는 이상 해군에도 알리지 않을 거고.”

 

아오키지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그의 얼굴에서 거짓을 읽을 수 없었던 에이미는 순순히 답했다.

 

그렇죠. 그 전까지만 해도 다들 죽은 줄 알았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칠무해 소집에 참석한 거겠지. 네가 살아 돌아왔으니까 말이야.”

?”

아라라, 생각보다 눈치가 느린 걸? 매의 눈이랑 검을 맞대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지? 네 죽음에 상심한 매의 눈이 정부와 해군의 부름에 일절 거절했다는 이야기인데.”

……?!?!?!”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에이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뿐이랴. 눈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경악이 어려 있었다. 아니 미호크는 전혀 그런 말 안 하던데? 설마 그래서 오늘 회의도 참석 안하려고 한 건가? 내가 정상결전에서 거의 죽을 뻔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참석 하라고 해서 참석 한 거고? 세상에나! 미호크 이 츤데레 양반 같으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거 뭐냐, , 좀 기분 나쁜 얼굴인데.”

, 참나~! 그런 이야기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구~!!”

아니 엄청 기뻐하고 있잖냐.”

 

헤벌쭉해진 얼굴을 본 아오키지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저 행복하게 웃었다. 아오키지에 대한 악감정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기도? , ! 딱히 그런 걸 알려줘서 이러는 건 아냐!

 

, 어쨌든 네가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매의 눈에 대해서 신경을 안 써도 되겠지. 마주치면 살기를 흩뿌리질 않나 이쪽은 엄청 귀찮았다고. 위쪽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인데 말이야. 오늘만 해도 마리조아에 있어야 하는데 그, 뭐냐, 매의 눈이 참석한대서 쫓겨났고.”

그리고 저를 발견해서 쫓아왔다?”

, 그러니까, 그렇게 되나? 뭐 아무렴 어때.”

 

그렇게 말하는 아오키지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에이미는 미래에 해군원수가 될 지도 모르는 남자를 흩어보았다. 귀찮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정의를 집행하는데 있어서 철두철미한 남자. 그러나 그는 분명 양심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에이스를 잡아간 것도, 저를 비롯한 형제들을 공격한 것도 껄끄럽기 그지없지만 그건 그가 해군대장인 이상 감안해야할 문제였다.

 

여기 음식 나왔어.”

, 맛있겠는데? 고마워, 나이스 바디의 언니.”

어머, 별 말씀을. 참고로 가격은 100만 베리야.”

 

가격을 들은 아오키지의 손이 멈칫했다.

 

아라라, 언니 너무하네. 너무 비싸게 부르는 거 아냐? 평범한 월급쟁이한테 돈을 그렇게 뜯어내다니.”

후후, 애초에 우리 가게 상호명이 바가지 BAR인걸? 못 내겠으면 말해. 나도 해군대장이 무전취식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재밌는 구경은 대환영이야.”

 

그렇게 말하는 샤키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농담이 아니란 걸 눈치 챈 아오키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잘못 걸렸네. 검성은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었죠. 근데 전 단골이라 할인 받거든요.”

할인 받으면 얼만데?”

“2000베리요.”

진짜 너무하네. 혹시 내 몫까지 계산해줄 생각은?”

제가 계산하고 나머지 998000베리를 주신다면 기꺼이요.”

흰수염이 참 자식교육을 잘 시켰어.”

, 목이 타네. 샤키 여기 와인도 팔아요?”

어머, 이제 술도 먹어? 당연히 팔지.”

그럼 와인 좀 갖다 주세요. , 계산은 여기 해군 아저씨가 할 거예요. 저한테 빚이 좀 있거든요.”

, 흰수염이 자식교육을 정말 잘 시켰어.”

 

그러나 에이미는 아오키지의 푸념을 못들은 척 넘기며 샤키가 건네준 와인을 기꺼이 받아들었다. 샤키는 건네준 것은 가게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와인이었다. 아오키지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면서 에이미는 기꺼이 와인을 따랐다. 투명한 잔에 붉은 액체가 콸콸 부어졌다.

 

 

 



◈  ◈  ◈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미호크는 형형한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칠무해 회의는 여전히 쓰레기들의 집합소였고 시시껄렁한 안건으로 시간을 질질 끈 탓에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잡배들 같으니.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의 친우를 챙겨 다시 어두우르가나섬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건 또 못 보던 광경이군.”

 

그러나 정작 눈앞에 놓인 건 꽤 낯선 장면이었다. 미호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와인병과 위스키병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가 막힌 것은 해맑은 미소를 드리운 채 무해한 웃음을 실실거리고 있는 전 흰 수염 해적단원이자 검성 에이미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술을 들이키는 남자는 현 해군대장이자 차기 원수로 지목되고 있는 아오키지다. 그의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정상결전에서 아오키지가 에이미의 무릎 뼈를 박살내지 않았던가.

 

대체 흰수염은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조합에 미호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물론 나중에 에이미는 농사 짓겠다고 나가더니 혼자서 아오키지를 만났다고 마르코한테 혼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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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미호에이] Break of day

W.B - 츠쿠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물길 사이로 자갈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휩쓸려간다. 새하얗게 일어나는 포말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가 이윽고 빛을 머금고 일렁인다.

 

손을 넣자 파도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럼을 태우듯 살랑거리는 물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세계에서 제법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 공기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별들도, 이제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나 마찬가지인 바다도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환경이 달라진 까닭일까,

 

여기 있었나.”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이 다른 까닭일까.

 

에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 휴양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인 걸. 애당초 섬을 비우라는 칠무해의 통보에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배짱 두둑한 사람이 있다면 명령과 복종이 우선시 되는 휴양섬에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유령이 아닐까? 그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섬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 제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유령이라고 해도 딱히 무서울 것 같지는 않지만. 게다가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 중에는 고스트 프린세스가 있는 걸.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에이미는 태평스레 대꾸했다.

 

좀 더 자지 왜 나왔어요?”

 

너야말로 꽤나 일찍 눈을 떴군.”

 

그야 초저녁부터 침대에서 보냈으니까. 눈이 일찍 떠질 만도 하잖아요?”

 

.”

 

에이미의 셔츠 깃 사이로 새하얀 목에 남은 붉은 울혈 자국과 잇자국이 드러났다. 매를 닮은 남자의 동공이 집요하리만치 몸 곳곳을 훑는다. 남자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에이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딱히 남자가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지만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시선 앞에는 조금 긴장하게 된다.

 

하기야 모처럼 둘만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끔은 어두우르가나 섬에서 벗어나 번화가를 돌아다니곤 했으나 살아있는 게 발각될까봐 검은 로브를 쓰고 다니거나 코주부 안경으로 변장하곤 했으니. 그러니 어두우르가나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손꼽히는 휴양섬 중 하나였다. 칠무해의 권한으로 정부 소유의 섬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던가. 원래대로라면 시중드는 사용인이나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가 고용되어 있지만 이번만큼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며 모두 물렸다고 했다. 칠무해 중에서도 손꼽히는 매의 눈의 명령이니 거부할 자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휴양섬에 도착한 것이 어제 낮의 일이다. 태양 아래 새하얀 모래사장을 걷고, 청해의 빛깔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물고기들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서로를 탐했다.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둘만 남겨진 세계였다.

 

조금 급하게 나왔나 봐요?”

 

머리 위를 톡톡 치며 키득거리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오른다. 새하얀 프릴셔츠에 바지 그리고 늘 쓰고 있는 모자. 잠을 자다가 나온 차림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차림새였으나 에이미는 그의 모자 위에 장식되어 있는 깃털이 조금 흐드러진 것을 발견했다.

 

왜요? 내가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요?”

 

“…그래.”

 

남자, 미호크가 모래사장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옷이 펄럭거리며 에이미의 위로 덮였다. 가디건은 차디찬 새벽공기를 막아줄 정도로 두꺼웠다. 본인은 급하게 나왔으면서 이런 건 또 언제 가져 온 건지. 무언의 재촉에 결국 비어있는 소매에 팔을 꿰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참, 반지를 주고받았는데 도망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구요.”

 

그런가. 하지만 언제나 넌 상상을 뛰어넘으니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흰 수염 해적단으로 돌아가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미호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이었으나 기저에 희미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 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런, 난감하네. 에이미는 볼을 긁적였다. 흰 수염 해적단과 관련된 이야기면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다. 다시 살아났을 때조차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모비딕이었는 걸. 하지만 그런 제 태도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 걸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있죠, 미호크. 나는 욕심쟁이에요.”

 

에이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을 타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검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수만 개의 보석을 잘게 쪼개어 흩뿌린 것 같은 장관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별은 하늘이라는 또 다른 바다를 유영한다. 투명했던 바다는 밤에는 하늘의 빛을 훔쳐, 하늘의 색을 띈다. 어두우르가나 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색이다.

 

손 안에 끌어안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걸 버릴 생각도 없구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아요.”

 

에이미가 웃었다.

 

이기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과 단 둘이 있는 이 곳이 내 세계에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

 

긴 정적이 흘렀다. 파도는 여전히 하얀 포말을 일으켰고 수면은 별빛을 머금는다. 그러나 저 멀리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경계로 옅어지기 시작하는 검보랏빛은 태양이 떠오르면 별을 온전히 제 몸뚱이로 감싸고 사라질 것이다.

 

이제 곧 동이 트겠지.”

 

적막을 부순 남자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네 머리색으로 하늘이 물들겠군.”

 

그리 말하며 미호크는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있을까. 손을 기꺼이 붙잡으며 에이미는 활짝 웃었다.

 

미호크.”

 

“?”

 

“저를 사랑해요?" 

 

청아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 웃음은 이내 햇살 같은 미소가 되어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그의 하늘로 물들인다. 맞잡은 손 너머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소리.


“…너는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군.”

 

그런가요?”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새벽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검을 다루는 사람에게 반지는 미세한 철의 감각을 방해하는 장신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반지를 내밀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반지를 내민 그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재단할 수 있을까.

 

마주보는 얼굴이 눈동자 안에 담긴다. 같은 색을 지닌 금빛이 서로의 눈에 깃들고, 같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그 사람이 보는 세상조차 공유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전해질까. 당신이 있는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노라고. 당신과 함께하는 내게,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유난히 뜨겁다. 에이미는 발을 조금 들어, 그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미호크의 눈을 응시했다. 거울로만 보았던 자신의 얼굴이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 담겨있다.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으나 마침내 입술이 닿은 순간 완전히 사라진다. 커다란 손이 눈을 가렸다가 떨어진다. 닿았던 입술 대신 한 줌의 온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검을 휘두를 때조차 나오지 않던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있죠, 미호크. 오늘 아침식사로는 크레페가 어떨까요?”

 

그 말은 나보고 만들라는 소리인가. 배짱 한번 두둑하군.”

 

으응? 그래서 싫어요? 어제 그렇게 침대에서 혹사시켜 놓고선.”

 

“...재료가 있나 봐야겠다. 대신 너도 도와라. 적어도 과일 같은 건 썰 수 있을 테지.”

 

미호크는 퉁명스레 덧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에이미 또한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앞서가던 발자국이 이윽고 나란히 이어지기 시작한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이 걷히고 검보라빛 하늘이 옅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캄파눌라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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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미호에이] 편지

W.B - 츠쿠리







그날도 미호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비딕에 접근해 에이미를 불러냈다. 에이미는 여전히 대련하기 전에 실없는 말을 종알거렸고 미호크는 능숙하게 넘기거나 간단하게 대꾸해주곤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따라 에이미가 건넨 것이 와인이 아니라 편지라는 점일까. 손바닥만 한 크기의 편지는 봉투가 붉은 색이었다.

 

으아아! 지금 열지 마세요!”

 

봉투를 열어보려던 찰나 에이미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애당초 지금 열어보라고 할 게 아니면 왜 준 거지.”

 

미호크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보기 위해 멈춰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편지를 채 꺼내기도 전에 손은 재차 항로를 가로막혔다. 까만 점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새하얀 손이 겁도 없이 미호크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 열지마세요! 이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제가 열어도 된다고 할 때 열어보셔야 한다구요!”

 

눈을 꼭 감고 말하는 모습이 자못 필사적이었다. 대체 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이기에? 미호크는 흠, 하고 낮은 숨을 흘리고는 편지를 꺼내려던 손을 거두었다. 내용물에 대한 궁금함보다 나중에 그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커졌다.

 

더 이상 미호크가 열어보려는 생각이 없는 듯하자 눈치를 보던 에이미가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물러섰다. 미호크의 손을 붙잡고 있었음을 이때서야 인지한 모양이다. 시체마냥 일말의 온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온도에 기분이 가라앉을 만도 하건만,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미호크는 말없이 그의 등에 있던 흑도를 빼들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 눈빛은 흡사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던 매와 같았다.

 

아니 갑자기 달려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으악!”

 

과연, 예상대로 허전함은 금세 채워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에이미는 미호크를 만날 때마다 빈번히 편지를 건넸다. 크기는 여전히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나 색이 달랐다. 처음 만날 때는 붉은 색이더니 두 번째에 건넨 것은 주황색이었다. 세 번째에 건넨 것은 노란색, 네 번째에 건넨 것은 초록색, 다섯 번째에 건넨 것은 파란색 그리고 여섯 번째에 건넨 것은 남색, 일곱 번째에 건넨 것은 그를 닮은 보라색이었다. 무지개의 색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일곱 번째, 보라색 봉투를 받은 뒤에는 또 어떤 것이 주어질지 알 수 없었다.

 

미호크는 에이미에게 편지를 받을 때마다 물었다.

 

아직인가?’

 

그는 답했다.

 

, 아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봉투를 받을 때조차 미호크는 물었다.

 

아직인가?’

 

그는 답했다.

 

, 아직. 하지만 아마도 곧.’

 

그렇게 말하는 그는 웃었던가? 부드럽게 빛나던 금색 눈동자를 곱게 휘며, 그는 고요히 웃었던 것 같다. 석양이 지는 노을은 유독 찬란했고,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태양을 등 뒤로 맞이하던 청년은 상냥한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를 휘감고 있던 분위기는 지극히 온화했고 평온했다. 그래서 미호크는 다음 만남과 다음의 편지를 기약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미호크는 오랫동안 편지를 받지 못했다.

 

검성에이미의 흰 수염 해적단 탈주 그리고 정상결전.

 

아주 오랫동안 침묵의 밤이 이어졌다. 숨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버거운 하루하루였다. 피로 물든 바다만큼 슬픔에 물든 인간은 신음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들에 정신을 온전히 가누기에도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어느새 미호크의 뇌리에서 편지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다만 유독 잔인하리만치 상냥했던 그 태양의 빛깔이 오랫동안 마음 한 자락에 남았다.

 

 



편지가 떠오른 것은 편지를 주었던 사람이 죽은 해, 그의 생일이었다. 미호크는 연보랏빛 캄파눌라 꽃이 만개하던 초원을 밟아 붉디붉은 술 한 잔을 죽은 자에게 바치고 왔다. 착잡한 마음에 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의 잔에는 붉디붉은 술이 넘실거렸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에이미가 처음 건넨 붉은 편지가 생각난 것은.

 

미호크는 술잔을 두고 그의 서재로 향했다. 책상 서랍 안으로 손을 뻗자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일곱 개의 봉투가 나란히 딸려왔다.

 

열어보라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지만, 네 녀석 또한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 정도는 봐주겠지.”

 

허공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미호크는 봉투를 차례대로 열어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읽었다. 각 봉투에 들어있는 것은 내용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짧은, 고작 한 글자짜리 편지조각.

 

붉은색 봉투에는 []

주황색 봉투에는 []

노란색 봉투에는 []

초록색 봉투에는 []

파란색 봉투에는 []

남색 봉투에는   []

보라색 봉투에는 []

 

좋아해요, 미호크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그리 말하며 멋쩍게 웃던 얼굴이,

 

내가 열어보라고 할 때 열어보셔야 해요.’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동자가,

 

그리 말하며, 그는 웃었던가.

 

미호크는 편지를 움켜쥐었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호크는 이내, 보라색 봉투의 가장 안쪽에 또 다른 편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그마한 하얀 종잇조각에는 눈에 익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또 다른 글자가 써져있었다.

 

[미안]

 

그것은 무엇에 대한 사과인가. 미호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글자가 써진 하얀 종잇조각을 뒤집어, 또 다른 하얀 공간을 까만색 잉크로 채워 넣었다.

 

[나도 좋아한다, 에이미]

 

양면이 까맣게 물든 종이를 흰 봉투에 넣어 봉했다. 미호크는 다른 일곱 개의 봉투를 그러모아 흰 봉투와 함께 다시 책상 서랍 안으로 채워 넣었다.

 

미호크는 그 이후로 좀처럼 서재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서재로 향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 년 후였다. 편지를 주었던 사람이 죽은 지 어느덧 이 년, 또 다시 그의 생일이 돌아왔다. 그날도 미호크는 어김없이 연보랏빛 캄파눌라 꽃이 만개하던 초원을 밟아 붉디붉은 술 한 잔을 죽은 자에게 바치고 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미호크는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 불명의 새하얀 봉투였으나 낯이 익었다. 봉투를 열었더니 익숙한 글씨가 그를 반겼다.

 

[이제 읽어도 돼요]

 

편지에 담겨있는 것은 상냥한 빛깔로 물든 태양의 색.

 

그토록 기다리던 다음 만남과 다음의 편지가 돌아왔다. 미호크는 편지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보내지 못한 답장이 전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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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는 개그가 난무합니다

-상상과 날조 주의






[우삼총] 영혼체인지 외전의 막간

W.B - 츠쿠리







01

 

다들 모였지요이?”

 

모비딕 구석에 있는 널찍한 창고에 흰 수염 해적단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각 번대의 대장들은 물론이고 쟁쟁한 무력을 갖춘 일반 선원들까지 굳은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토록 엄청난 인사들이 은밀하게 모여 있는 까닭은. 그들이라면 모비딕의 작전 회의실을 정당하게 빌릴 수 있음에도 왜 굳이 이런 퀴퀴한 냄새가 나는 구석진 창고에서 회의를 하는 것일까.

 

에이미는 방에 있지요이?”

 

그래. 다른 선원들에게 부탁해 되도록 방에 있게끔 감시해달라고 했으니 틀림없어.”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해. 만약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에이미가 더 삐뚤어질지 몰라.”

 

!”

 

외마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 껌을 질겅질겅 씹는 에이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몸을 떨던 사람들은 사회를 맡은 1번대 대장 마르코가 몸을 일으키자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마르코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에이미 사춘기 대비 및 대책 회의를 시작하겠다요이!”

 

그렇다. 겉보기에는 해군 본부라도 습격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였으나 실상은 그저 어릴 때부터 둥기둥기 키워온 에이미의 뒤늦은 사춘기 대책 회의반이었다.

 



 

02

 

흐윽, 우리 에이미가 욕을! 무려 새끼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건 양반이지 이 사람아! 난 아까 시발이라는 말도 들었어!”

 

,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두문자를...”

 

와글와글. 잇따라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증언은 오히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참담한 실정이었다.

 

심지어 에이미 녀석, 아버지에게 다짜고짜 흰 수염이라고 불렀다고! 아버지만 보면 좋아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던 녀석이 말도 놓고 말이야! 아버지가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상심해 하시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만!”

 

, 아버지가 에이미를 좀 예뻐하셨어야지. 하긴 에이미는 어릴 때 무쟈게 천사 같았으니 말이여.”

 

어릴 때만 천사였는 줄 알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걔는 여전히 천사였어, 천사!”

 

바다에서 건져놓았던 무뚝뚝한 인상의 꼬맹이는 알고 보니 형제들의 얼굴만 봐도 좋아서 실없이 웃어버리는 햇살 같은 아이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허리의 반도 오지 않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있어 에이미는 여전히 모비딕을 활발하게 누비던 어린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어느새 사춘기라니! 다 컸구나 싶어 감개무량한 한편 대체 에이미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비딕 사람들은 열 살짜리 아이에게 고무오리를 사줄 정도로 육아에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잠자코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르코가 결국 치솟는 혈압을 감당하지 못해 머리를 감싸 쥐더니 마구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이! 평소에 말 곱게 쓰라고 했어, 안했어? 애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구분 않고 다하더니 이게 뭐여요이!”

 

, 마르코 대장!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이?! 애 앞에서 해적답지 않다는 둥 온갖 참견은 다 하더니 이게 뭐냔 말이여! 그러니까 애가 상처받고 삐뚤어졌겠지!”

 

마르코의 말에 참회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흐윽, 맞아! 한두 번 욕을 한 솜씨가 아니던데 그 어린 게 얼마나 흰 수염 해적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으면 욕을 연습 했겠어?”

 

오늘 보니까 아주 찰지던데? 훌쩍, 에이미 녀석 훌륭한 해적이 되어 버렸다구!”

 

이대로 에이미가 안 돌아오면 어쩌지?”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사춘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어줄 거라구, 에이미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희망사항이었다. 사춘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그 결과 또한 미지수이지 않은가. 그들만 해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각자의 과거가 있었던지라 차마 확언을 할 수 없었다.

 

, 그래도 에이미, 상냥한 건 여전하니까! 아까도 밥 먹고 나서는 이렇게 맛있는데 많이 못 먹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줬어.”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띄우기 위해 삿치가 필사적으로 대변했다. 사춘기가 와도 천성이 상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투박하고 거칠어진 말투에 가려져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착하고 고운 에이미의 심성이 엿보였다.

 

형제들이 앞 다투어 동의했다.

 

맞아! 에이스 챙기는 것도 여전하고. 아까 뜨거운 국물을 쏟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잖아. 그건 에이미의 상냥함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사춘기 따위로 에이미를 평가하면 안 돼! 에이미는 여전히 착하고 천사 같은 우리 막내인걸!”

 

에이미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보이가 알았더라면 욕을 한 사발 붓고도 남을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현재 형제들의 필사적인 만류 하에 선실에 갇혀 비타민 과다 섭취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물론 귀한 과일을 자기만 먹을 수는 없다며 선실 앞을 지키는 선원들에게 건네주어 사춘기가 왔을 뿐 역시 상냥한 에이미!’ 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이건 나중의 일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에이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이.”

 

대하긴 뭘 대해. 머리에 총알 한 방 박아 넣으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겠지.”

 

여태껏 탐탁찮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에 탄창을 장전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에이미가 어디 아픈가 싶어 진찰하려다가 난 멀쩡하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쇼.’ 라는 말을 들은 탓에 현재 그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마르코 못지 않게 에이미를 오래 봐왔던 이조우로서는 웃는 낯으로 의사 선생님, 하고 부르던 꼬맹이의 태도가 돌변하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만큼은 누구보다 급한 이조우다. 당장이라도 에이미의 얼굴을 두 쪽 낼 것 같은 기세에 형제들이 화들짝 놀라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조우, 참아!”

 

애를 매로 다스리면 쓰나! 그리고 이조우가 매일 총만 쏴 갈기니까 에이미가 그렇게 삐뚤어진 걸 수도 있어!”

 

그래! 애는 사랑으로 품어줘야지!”

 

우리의 사랑이라면 에이미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논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타령에 이조우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어디 해적 주제에 사랑 타령이나 하고! 이게 무슨 사랑 노래로 모든 게 해결되는 모 애니메이션인 줄 알아? 장르가 달라, 장르가! 이조우가 제 4의 벽을 뛰어넘을 뻔한 찰나였다.

 

마르코 대장! 큰일 났어!”

 

누군가 창고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왔다. 에이미의 선실 앞을 지키고 있던 선원 중 한 명이었다. 마르코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선원은 가쁜 숨을 내쉬며 폭탄을 투하했다.

 

에이미 녀석이 글쎄 3일 뒤에 친구를 만나러 모비딕을 잠시 떠나겠대!”

 

쿠궁! 묵직한 효과음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마르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에이미 녀석! 설마 가출을 꿈꾸는 건가요잇?!”

 

청소년기의 반항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나쁜 친구와 어울려 돌아다니는 게 아니던가! 술담배를 하며 거리를 들쑤시고 다닐 에이미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빠지는 기분이다. 마르코는 몰려오는 두통에 뒷목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선언했다.

 

당분간 에이미는 외출 금지다요이!”

 

쉬쉬하고 있지만 마르코는 모비딕 내의 제일가는 에이미 팔불출이었다. 덕분에 보이는 때 아닌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니미 시벌, 그러니까 이 몸을 다시 에이미한테 돌려주려면 일단 애들을 만나야할 거 아냐! 보이는 장장 이틀 동안이나 가출이 아니며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닌 그저 친구들 간의 건전한 모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했다. 욕설만 아니었다면 과정이 한결 수월했을 것을, 상황이 너무 엿 같은 나머지 대화 중간 중간에 욕을 자제할 수 없었던 보이는 결국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행동계획서까지 갖다 바쳐야 했다.

 

 



03

 

한편 마린포드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온화해졌나 싶었던 벚꽃공주는 아니나 다를까 다시 그 불같은 성미를 드러내어 지켜보던 사람들로 하여금 심적 평화를 갖게 했다. 그럼 그렇지! 그 성질이 아니면 우리 보이 대령님이 아니지! 너무 적응된 나머지 해군들은 미소보다 욕설을 더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보이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에이미는 아카이누의 부관이라는 상황 덕분에 원치 않게 강제로 대면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에이미는 걸핏하면 스트레스를 해적소탕에 풀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서류처리는 봐도 모르겠고 나중에 보이가 한 번에 몰아서 하겠지! 원래 몸이 아닌지라 적응하기가 좀 까다롭긴 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먼치킨의 반열이 아니던가. 흰 수염 해적단에 있을 때도 밥 먹듯이 덤벼오는 해적을 상대했던 에이미는 오히려 손속에 더 자비가 없었다.

 

보이 대령님, 어쩐지 더 터프해지신 것 같아.”

 

크흑, 멋있어! 역시 보이 대령님이야!”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에이미는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기 바빴다.

 

뒈져!!! 아카이누!!!!’

 

마음의 소리와 발차기가 나란히 나갔다. 분노를 200% 실은 발차기에 해적 여럿이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알 게 뭐람! 에이미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해적들을 하나하나 즈려밟았다.

 

이건 뭐 화병 나서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네! 보이의 몸만 아니었으면 기회를 노려 쓱싹해버릴 텐데! 왜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질 못하니, 엉엉! 그리고 아카이누 이 자식은 왜 자꾸 눈앞에 얼쩡거리고 난리야, 죽이고 싶게!

 

울화통에 속만 타들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주변의 그 누구도 몰랐다. 아카이누 덕분에 본의 아니게 보이의 몸에 완벽하게 녹아들어버린 에이미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과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순조로운 삼일을 보냈다.

 

 



04

 

그리고 마지막으로, 씨씨.

 

그녀는 그 누구와도 바뀐 일이 없기에 다가올 모임 날짜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저녁 늦게 걸려와 서로의 이야기를 하소연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점이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씨씨는 하소연을 듣는 것이 제법 즐거웠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삼일 후, 에이미와 보이가 원래대로 돌아왔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에이미와 씨씨가 바뀐다는 것을. 사춘기가 접어들기를 기대했던 모비딕 사람들이 침착하고 차분한 또 다른 에이미를 대면하게 되어 뒷목잡고 쓰러지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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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 Long time no see

W.B - 츠쿠리









01

 

돌이켜보자면, 이것은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때의 꿈같은 이야기이다.

 

  


02

 

모비딕에 정착한지 일 년, 그러니까 에이미가 열한 살쯤 되었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엑스트라 해적단이 공격을 가해왔다. 다만 습격해오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일제히 달려들던 다른 해적단과는 달리, 선장이라는 놈이 달랑 바주카포 하나를 꺼내들고 당당히 외치는 것이 아닌가.

 

푸하하! 오늘이야말로 흰 수염 해적단, 네 놈들의 제삿날이다! 10년 후의 더 강해진 내가 네놈들을 상대할 테니 말이다! 10년 후의 나라면 흰 수염 해적단쯤은 아무 것도 아냐!”

 

바주카포 하나 꺼내들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간을 배 밖으로 내놓은듯한 그의 선언에 전투를 준비하던 흰 수염 해적단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선장이란 녀석, 미친 거 아냐? 조심해,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고도의 술수일지도 몰라. 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단 한 명만큼은 저 바주카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헐 미친. 저거 가x리에 나오는 10년 바주카포 아냐?!’

 

그렇다. 해적단에 어울리지 않게 홀로 훤칠한 전투원들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남자아이. 그러나 정체는 모비딕으로 트립한 () 여고생 에이미다. 전생에 원피스 말고도 꽤 다양한 만화를 봤던 에이미는 모 소년 만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10년 바주카포 정도는 바삭하게 꿰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알아챈 것까지는 좋은데 도대체 왜 저게 여기 있지? 아무리 봐도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뎁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엑스트라가 10년 버프를 받았다고 해서 얼마나 강해지겠어.’

 

무례한 생각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루피나 다른 메인 캐릭터들이야 2년 버프만으로 충분히 강해지지만 아무리 봐도 엑스트라인 저 사람은 가망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에이미가 한가롭게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상황을 관망하던 마르코가 순식간에 불사조로 변해 선장의 손에 발차기를 날렸다. 선장이 막 자신에게 10년 바주카포를 쏘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체를 모르니만큼 함부로 쓰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앞섰으리라. 문제는 손에 발차기를 날리면서 바주카포가 허공으로 높이 날아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주카포의 예상 착지 지점은 다름 아닌 에이미였다!

 

, 에이미!”

 

피해!!!”

 

?”

 

!!!

 

뒤늦게야 상황을 눈치 챈 형제들이 부랴부랴 달려왔으나 바주카포은 이미 에이미에게 직격한 후였다. 엄청난 연기가 갑판을 뒤덮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에 당황스러워 하던 것도 잠시, 마르코가 날개를 퍼덕거려 재빨리 연기를 걷어냈다. 그러나 막상 연기가 거두어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바주카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뭐야, 에이미는 어디로 간 거야?”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에 있었는데?”

 

우리 귀여운 막내 어디 갔어! 모여 있던 형제들이 갑판을 샅샅이 뒤졌으나 에이미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아이의 선실도 가보았으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흉흉해진 흰 수염 해적단원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딸꾹!”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로 팔아치웠는지 새하얗게 질린 엑스트라 해적단의 선장이 살기에 질려 공포에 떨고 있었다.

 

 

 


03

 

한편, 에이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익숙한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리둥절했겠지만 전생이란 치트키를 가지고 있는 에이미는 이곳이 10년 후의 세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미친,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10년 바주카포였어? 트립신은 대체 뭘 했기에 타 장르의 시그니쳐 아이템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둔 거야?

 

투덜거림도 잠시, 에이미는 5분이라는 짧은 지속시간동안 무얼 할까 고심했다. 10년 후의 나라면 스물한 살인가? 용케도 모비딕에 남아 있었구나. 에이스 쨩은 만났으려나? 아니 그보다 에이스 쨩 살리기 대 작전은 어떻게 된 거지? 으으, 10년 후의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이거 인생 강제 스포일러잖아! 그렇게 갑판에 털썩 주저앉아 골몰하고 있는 에이미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미?”

 

어쩐지 울음이 섞인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그러나 제 기억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삿치 대장님?”

 

늘 주어진 양을 못 먹는 제게 살갑게 간식을 쥐어주곤 하는 삿치의 모습에 에이미는 화색을 띄우며 일어섰다. 원래 죽었어야할 삿치가 살아 있다는 건 10년 후의 내가 뭘 바꿨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에이스가 살아있을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기뻐서 희희낙락하던 것도 잠시, 눈에 들어온 삿치의 얼굴은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왓! 삿치 대장님,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 에이미...정말...정말 너 맞아....?”

 

내가 에이미지 그럼 누구겠어요.”

 

일부러 그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활짝 웃어보였는데 그럴수록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니 이러면 내가 울린 거 같잖아!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 일이야, 삿치?”


삿치의 울음소리를 들은 건지 조용하던 갑판에 하나 둘씩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으아, 이거 일이 커지는데! 갑자기 쏠린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절부절 못하던 에이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울리고 싶어서 울린 게 아니고...그냥 삿치 대장님이 절 보자마자 울었어요! 진짜에요! 전 아무 것도 안 했는데...”

 

“..........”

 

어라? 어쩐지 조용하지 않아? 시끌벅적한 흰 수염 해적단은 어디로 갔담? 조용한 반응에 의아해진 에이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힐끗, 하고 모여든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는 이미.....

 

“?! 아니 다들 왜 울어요?!”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단체로 눈병이라도 걸렸나! 대체 왜 이런데?!

 

, 에이미다!”

 

진짜, 진짜 에이미 맞아? 흐어어엉!! 에이미!!!!”

 

저를 덥석 끌어안고 울어대는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들에, 에이미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이유라도 좀 알자구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형제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모비딕 사람들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 소년이 겪는 당혹스러움을 미처 헤아려줄 수 없었다.

 

 

 


04

 

갑자기 형제가 사라진 전대미문의 사건에 흰 수염 해적단은 말 그대로 엑스트라 해적단을 탈탈 털었다. 말로만 그랬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탈탈 털었다는 말이다. 10년 후 바주카포가 없는 엑스트라 해적단은 흰 수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얼마 가지 않아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엑스트라 해적단이 털어놓은 10년 후 바주카포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 바주카포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주운 물건이다. 둘째, 살상력은 없지만 맞은 사람이 누구든 현재의 자신과 10년 후의 자신을 5분 동안 맞바꿔서 불러올 수 있다. 셋째, 간혹 10년 후 바주카포를 맞았음에도 10년 후의 자신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십중팔구....

 

죽었다는 말이야? 10년 후의 에이미가?”

 

줄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 들은 설명으로 대충 내막을 짐작하고 있던 마르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에이미의 몸 상태는 1년을 넘긴 것조차 신기한 상태였어. 10년 후의 에이미가 죽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조우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 배의 선의로서, 끝내 아픈 형제를 고쳐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쓰라렸다.

 

어쨌든, 에이미가 다시 돌아온다면 이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렇게나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한 아이인데 10년 후의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지도 모르니.”

 

이조우 말이 맞아요이. 오히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지요이. 에이미가 10년 후에도 죽지 않게 노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지요이.”

 

마르코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하다시피 말했다.


미래란 것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니까요이.”


과연 1번대 대장답게 결코 형제를 헛되이 죽게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05

 

꺼이꺼이 우는 형제들 앞에 한 소년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렇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10년 후의 세계로 날아간 () 여고생 에이미다. 에이미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하면 통곡을 하다시피 울어대는 형제들에 질려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사실, 이렇게 울어대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 죽었나?’

 

아니면 실종이거나. 에이미는 애써 덤덤하게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울어대는 형제들을 보면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슬슬 제한시간인 5분이 가까워지지 않았나? 5분 동안 얻게 되는 스포일러가 최소 실종 아니면 사망이라니 스펙타클한 걸. 원피스 세계에서 엄청난 모험을 했구나, 10년 후의 나.

 

.’

 

슬슬 시간이 다 된 모양인지 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엉엉 울던 형제들이 화들짝 놀라 다급한 표정으로 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으음, 그렇게 잡아봤자 소용없을 텐데.

 

그 때였다.

 

에이미라고요이?”

 

거짓말 하는 거면 네놈들, 총으로 갈겨 주마!”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사람은 10년 전에도 항상 제 곁에 있어주었던 마르코와 이조우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누군가 걸어 나왔다. 주근깨로 가득한, 그러나 에이미가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듬직하고 어른스러워진 얼굴이다. 그토록 행복하기를 바랐던, 늘 종이로만 접했던 사람이 그 곳에 있었다.

 

에이미!”

 

에이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 정말 에이스야? 실물 에이스가 내 앞에 있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에이스가 여기 있다는 건, 정상 결전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리잖아!

 

에이미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모비딕 형제들이 늘 좋아해주었던, 햇살 같은 미소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한 기시감이 에이미를 끌어당겼다. 에이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그는 현재의 시간인, 1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에이스의 손이 강하게 제 어깨를 그러쥐는 순간, 거대한 연기가 에이미를 감싸 안았다. 연기 너머로 일그러지는 형제들의 표정이 눈에 밟힌다.

 

기억해, 에이미! 우리는 너를 사랑했어!”

 

에이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형제들도 마치 바통을 이어받듯이, 앞 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기억해줘, 너를 사랑했음을! 너가 우리를 사랑했듯이, 우리도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일그러져가는 시간 속에서 그 무엇보다 달콤한 고백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에이미는 눈을 감았다.

 

 

 


06

 

눈을 뜨니 어딘가 익숙한 장소였다. , 그렇다고 해서 모비딕이란 소리는 아니다. 모비딕으로 오기 전 경험했던 새하얀 장소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잊고 싶어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니 말이지. 눈앞에 머리만 동동 떠다니는 트립신도 있고.

 

안녕! 오랜만이지 냥?”

 

역시 당신 짓이었구나, 트립신!”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비장하게 범인은 당신이다! 라는 대사를 외치니 트립신이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이거 미안하게 됐다냥. 실수로 그 세계에 존재하지 말았어야할 물건이 넘어가버렸는데 영 찾기가 곤란했지냥. 다행히 트립퍼인 네가 맞아준 덕분에 물건을 수월하게 회수할 수 있었다냥.”

 

정말이지, 조심 좀 하라고. 맞은 게 나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에이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말이다냥. 그래서 말인데, 10년 바주카포는 원래 그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냥. 아마 네가 모비딕으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10년 바주카포로 겪은 기억은 모두 사라져버릴 거다냥. 그럼에도 너를 여기에 부른 건 본의 아니게 인생 스포일러를 미리 겪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부른 거다냥.”

 

, 정말? 그런 거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에이미가 웃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에이스도 살았고 나도 꽤 사랑받았던 거 같으니 말이지. 10년 바주카포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괜찮아.”

 

“...그 행복했던 기억이 지워지는데도 말이지냥?”

 

, 그러게. 하지만 괜찮아. 기억이 지워져도, 나를 사랑했다고 말해줬으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했어.”

 

“...그런가. 다행이네.”

 

어라? 방금 트립신 너, 끝에 냥 안 붙이지 않았어? 그러나 에이미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트립신의 휘어지는 눈꼬리를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지며 발이 쑥 꺼졌다. 지독한 수마가 의식을 잠식했다.

 

 

 

07

 

어라, 나 잠들어버렸나? 얼굴에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에 에이미는 끔뻑거리며 잠긴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평화로운 모비딕의 갑판. 앉아서 잠깐 쉰다는 게 그만 낮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일어났어?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

 

갑판을 지나가던 네네가 눈곱이 잔뜩 묻어있는 에이미를 보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거친 손이 에이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이 쓰다듬었다.

 

그런가요? 어쩐지 행복한 꿈을 꾼 것 같아서요.”

 

에이미가 햇살처럼 웃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쩐지 지독히 그립고도 행복한 내음이 묻어났다.

 




08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한 장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러나 아직은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미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렇다. 돌이켜보자면이것은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때의 꿈같은 이야기이다.

 

 


 

 

 

 

 

 




-네임버스AU






[우삼총/미호에이] Name

W.B - 츠쿠리










네임이라는 것은 몸에 새겨지는 일종의 각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임을 운명이라는 단어로 더 자주 칭하곤 했다. 애초에 네임이 특정 신체부위에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니만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네임이 어떤 원리로 새겨지는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달려들어 연구에 매달렸지만 알아낸 것은 네임이 지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뿐이었다. 심지어 모든 인간에게 네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살아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네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죽기 직전에서야 새겨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운명의 상대와 접촉해야 비로소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네임은 사람도, 시기도 지극히 무작위로 나타났다.

 

때문에 매의 눈, 쥬라큘 미호크는 오히려 네임이란 것이 저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운명이라니, 네임은 그런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살면서 네임에 목을 매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다. 노네임, 즉 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갑자기 나타난 네임에 수십 년 동안 사랑을 속삭이던 아내를 내팽개치고 바다로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다. 장래가 유망하여 지켜보던 한 검사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음에도 정작 그 사람은 노네임인지라 기약 없는 짝사랑만 하다 지쳐 자살을 택했다.

 

결국 네임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시답잖은 농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쥐고 흔드는 그 고약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미호크는 차라리 자신이 노네임인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바다를 떠돌다보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기연을 마주하게 된다. 미호크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며 수없이 피고 지는 얄궂은 삶을 봐왔다.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강자로서 운명을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을 택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소식을 접하게 된 검성이란 이명을 가진 어린 애송이는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신문이 떠들어대는 가십거리를 모두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배를 일격에 두 동강 냈다고 하니 그저 그런 쭉정이는 아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정작 마주하게 된 검성은 예상보다 훨씬 어리고 유약한 청년이었다. 새하얀 얼굴로 눈만 끔벅거리는 앳된 인상을 보며 내심 기가 찼다. 조건을 내걸며 칭얼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덜 자란 어린아이였다. 이번에도 별 수확 없이 돌아가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뽑은 찰나였다.

 

어린아이였던 청년이 순식간에 발도하며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왔다. 유약했던 인상이 말끔하게 가시고 나른했던 금안이 맹수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아직 미숙한 점이 엿보였으나 나이에 비해 성취한 결과는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이제까지 스쳐 지나보낸 수많은 검사들 중 단연코 우위에 있는 어린 애송이를 보며 미호크는 흡족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세월이 흘러 청년은 훌륭한 사내로 성장했다. 검성이란 이명은 그를 수식하기에 더 이상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관계 또한 변했다. 단순히 검을 겨루던 사이는 친구라는 설명이 뒤따랐고 검 말고도 그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받아줄 만큼 발전했다.

 

그러나 동시에, 청년의 빛나던 금안은 때때로 빛을 잃고 바스러졌다. 나날이 짙어지는 병색과 힘없이 허물어지는 그의 육신은 계절이 바뀜에 따라 떨어지는 꽃잎과 닮았다. 그럼에도 끝내 그는 꿋꿋하게 삶을 이어서 다음 해를 기약하곤 했다.

 

하지만 마침내 한계가 닥치고 말았다. 정상결전 이후 반짝 빛을 드러내던 것도 잠시, 오랜만에 마주한 청년의 모습은 참담했다. 담담하게, 허나 끝내 울며 웃으며 안녕을 고하는 그의 모습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 불쾌한 폐부를 휘저었다가 사라진다. 그제야 깨달았다. 운명이란 이름을 가진 신의 농간에 휘둘리는 것은 비단 네임뿐만이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심장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눈앞의 이 청년이야말로 자신의 짝임을 알린다. 굳이 네임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몸에 새겨지는 각인은 그저 허울뿐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네임이 아니어도,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이야말로 분명한 증거일진데. 허나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크고 작은 운명에 휘말려,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곤 한다.

 

쥬라큘 미호크는 뒤늦게 찾은 제 짝의 마지막 모습을 뒤로한 채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참담한 신음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그는 더 이상 알 수 없어졌다.

 

운명에 휘둘린 것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야속한 초침은 분침으로 이어져 끝내 시침을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숫자로 옮겼다. 미호크는 한 쪽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흘낏거리며 말없이 손 안에 든 와인만 홀짝였다. 종소리가 정확히 열한 번 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번의 종소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

 

가슴팍에 새하얀 빛무리가 어린다. 간질거리면서도 생경한 고통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 가슴에 새겨진 선명한 이름이 보인다.

 

‘AMY'

 

성이 없는 익숙한 세 글자 이름에 쥬라큘 미호크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리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그에게 제 짝을 찾을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차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이시여, 왜 하필 지금입니까. 왜 지금에서야, 왜 이렇게 늦게서야..!

 

원망도 잠시, 미호크는 벽면에 걸려있는 코트를 꺼내들었다. 코트의 안주머니에는 청년이 한 때 그의 거처에 머무를 적에 만든 비브르 카드가 놓여있었다. 미호크는 서둘러 그의 흑도를 챙기고 낡은 고성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그의 운명이 있는 곳이었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작은 나룻배 하나로 반나절을 꼬박 항해했다. 어둑하던 하늘이 밝아지고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까지 올라왔다. 미호크는 품속의 회중시계로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의 시각은 오후 2시에 가까워져가는. 가장 지면이 태양빛을 많이 머금었을 시각이다.

 

신세계의 무인도로 안내하던 비브르 카드가 돌연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멈춘다. 그리고 미호크는 자정에 느꼈던 그 생경함이, 다시 가슴팍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다만 저번에는 이름이 새겨졌다면, 이번에는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조금씩 자취를 감추는 글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글자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무심하게 빠져나간다. 사르륵, 사르륵. 마치 모래가 새어나오는 것 같은 소리가 파도소리를 짓누른다. 잠시 후, 글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그토록 무심하게.

 

미호크는 더 이상 아무 이름도 새겨져있지 않은 그의 가슴과, 미동도 하지 않는 비브르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글자가 있었다가 사라진 만큼의 공허함이 그를 덮쳤다.

 

거세게 닥쳤다가 허물어지는 새하얀 물거품처럼, 운명은 이다지도 얄궂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그의 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쥬라큘 미호크는 낯익고도 생경한 감각에 감았던 눈을 떴다. 지금 시각은 오후 219. 따스한 햇살이 지면을 데울 화창한 낮의 시간.

 

그에게 다시 운명의 이름이 찾아왔다.











+) 쥬라큘 미호크와 에이미는 서로에게 네임이 있었다.

+) 그러나 에이미는 엄연히 말하자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네임의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 에이미가 죽는 날, 에이미는 비로소 완전하게 이 세상을 벗어날 결심을 했다. 분리되어 있던 두 개의 세계가 에이미의 영혼을 합치기 위해 겹쳐지는 순간, 에이미의 삶은 비로소 원피스의 세계에 받아들여져 네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말 그대로 행앗에서 풀었던 미호에이 고딩au (with 하임님)

 


 

01

 

근본 없는 썰이므로 세세한 설정 따위는 따지지 않겠다.

 

 


02

 

선도부 부장 미호크(2학년) X 예의바른 날라리 에이미(1학년) 보고싶다.

사실 에이미는 그렇게 날라리는 아닌데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라 수업 째고 땡땡이치고 옷 대충 입고 다녀서 인식이 그렇게 된 거면 좋겠다ㅋㅋㅋㅋㅋ넥타이도 안하고 맨날 셔츠에 조끼차림으로 다님ㅋㅋㅋㅋㅋ머리도 연보라색이라 학교 입장에서는 못마땅한데 이건 염색이 아니라 자연모발이라 어쩔 수가 없다면서 맨날 잔소리 피해서 도망다니고ㅋㅋㅋㅋㅋㅋ

 

미호크는 오히려 겉모습만 보면 인상 겁나 사나워서 소문이 안 좋은데 알고 보니 바른 생활 학생인데다가 선도부 부장인 거 존나 짱이다. 오히려 순둥순둥하게 보이는 에이미가 맨날 수업 째고 놀러 다니는 게 참 트루ㅇㅇ

 

그리고 어느덧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수업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같이 간식 먹는 거 보고 싶다. 처음에는 분명 훈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네 녀석 또 땡땡이인가, 하고 말하고는 간식 뇸뇸하는 미호에이....

 

 


03

 

미호크는 인상 안 좋아서 다가오는 사람이 드문데 에이미가 되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말 걸고 그러니까 어느새 짱 절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친구가 서로밖에 없음ㅋㅋㅋㅋ에이미는 사교성이 좋으니까 친구가 많긴 한데 정작 학교에서 진짜 마음 터놓고 지내는 건 미호크밖에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나중에 학교 밖에서 에이미가 다른 양아치 무리한테 시비 걸려서 싸우다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거 미호크가 발견했음 좋겠다. 그제야 에이미에 대한 감정 자각하는 미호크....절친이라고 생각했는데 에이미 보니까 막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거 같고...알고 보니 우정이 아니고 사랑이었고....벌벌 떨리는 손으로 에이미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미호크....

 

 


04

 

맨날 서로 기다렸다가 하교 같이하고 아이스크림 뇸뇸 하면서 집 가는 미호에이 보고 싶다.

미호크, 제가 완전 맛있는 떡볶이 집을 발견했거든요>< 하면서 미호크 손잡고 룰루랄라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하는 에이미ㅋㅋㅋㅋㅋ 스테이크만 썰 거 같은 애를 떡볶이 집으로 데려가는 유일한 사람... 에이미랑 어울리면서 미호크 입맛 강제로 개척당함ㅋㅋㅋㅋ 이렇게 순혈귀족은 화전파 농민의 손에 이끌려 서민음식을 접하게 되는데....

 


 

05

 

미호크가 한 학년 선배인데 에이미 겁나 스스럼없이 미호크한테 가서 스킨십하고 부비적거리는 거 보고 싶다ㅋㅋㅋㅋ막 맨날 반말 까고 다니는데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는 미호크...

 

그러다가 에이미가 그러는 거 보고 에이미랑 동갑인 다른 반 친구가 미호크도 동갑인줄 알고 말 놨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히익;;;; 하는 거 보고 싶다 ㅋㅋㅋㅋ의문의 피해자 등판ㅋㅋㅋㅋㅋㅋㅋㅋ

 

 


06

 

아 그리고 에이미한테는 소꿉친구인 보이랑 씨씨가 있는데 둘 다 여학교 다니고 에이미 혼자만 남학교 들어온 거면 좋겠다. 첨에는 친구들 없이 혼자 다니니까 히잉ㅠㅠ;;;; 이러면서 다녔는데 미호크랑 짱 절친 되면서 학교 즐겁게 다니는 에이미ㅋㅋㅋㅋㅋ

 

에이미 하교하고 종종 보이랑 씨씨보러 여학교 가는데 에이미가 하도 여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니까 에이미가 사귀는 여자애가 그 학교 다닌다고 소문이 쫙 남ㅇㅇ 나중에 미호크가 와서 거기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하고 진지하게 물어봤으면ㅋㅋㅋㅋㅋㅋㅋ아닙니다...에이미는 당신과 사귑니다 미호크씨....((왈칵))

 

 


07

 

이러다가 미호크가 졸업하고 대학가면 에이미 엄청 쓸쓸하겠지 ㅠㅠㅠㅠㅠ 맨날 해실해실 웃던 얼굴이 완전 험악하게 바뀌었음 좋겠다...에이미가 미호크 대학가서 축 쳐져 있으니까 나중에 미호크가 찾아와서 나랑 같은 대학에 다니면 되지 않겠나 하고 대학 진학하라고 꼬시는 거 보고 싶다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이게 청춘물의 끝판왕이지ㅠㅠㅠㅠ

 

나중에 같은 학교에서 윤리교사랑 체육교사로 나란히 취직해서 교내 연애하는 것도 보고 싶다. 사실 보건실 선생님이랑 체육선생님도 좋아. 왜냐하면 에이미가 맨날 다쳤다는 핑계로 미호크 보러 가고 보건실 침대에서 연애하는 게 보고 싶으니까...ㅎㅎㅎㅎㅎ

 

근데 미호크 겁나 명문대 다닐 거 같으니까 미호크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강제 공부시켰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데이트 하고ㅠㅠㅠㅠㅠ아무리 에이미가 체대 지망한다고 해도 명문대인 이상 공부는 뒷받침 되어야 하니까....여튼 그렇게 공부하다가 방안에서 눈맞는 미호에이 보고싶다^0^

 

그냥 공부하다가 서로 딱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그날따라 뭔가 분위기가 묘해서 한동안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키스하는 미호에이....미호크가 먼저 에이미 허벅지 덥석 움켜쥐면 좋겠다. 그 순간 완전 불꽃이 확 튀어서 침대로 폴 인 러브하는 미호에이 ㅠㅠㅠㅠㅠ(야광봉!!!

 


 

08

 

그날따라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다퉜다거나, 서운했던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고,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평소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에이미는 책을 팔락팔락 넘기다가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채 사각거리며 복잡한 공식을 써내려가던 미호크가 보였다. 창백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오늘따라 시선을 잡아끈다. 문제를 푸는 것도 잊은 채, 에이미는 저도 모르게 하염없이 미호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미호크의 손이 멈추더니 이윽고 에이미의 눈을 응시한다. 같은 색을 띈 금안은 오늘따라 낯설어보였다. 꿀꺽.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침 넘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탈탈거리며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묘한 열기가 둘 사이를 타고 돌았다. 불이란 것은 도화선이 지펴지면 무섭게 타오르는 법이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고,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불꽃은 이윽고 도화선을 타고 들어가 열기로 점화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마치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끌었다. 입술과 입술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미호크가 에이미의 입술을 다급하게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단순한 입맞춤이던 것이 배 속을 타고 끓어오르는 흥분과 맞닿으면서 분홍빛 혀를 잡아끌었다.

 

흐읏!”

 

미호크의 혀가 입천장을 살살 긁어내리자 에이미의 입에서 한숨과 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혀는 치열을 훑고, 혀뿌리를 뽑아버릴 것처럼 강하게 입안 곳곳을 적셨다. 미처 삼키지 못한 질척한 타액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호흡이 미칠 듯이 달았다.

 

에이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이윽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미호크의 손이 탄탄한 허벅지 위로 올라온 순간, 겹쳐져 있던 입이 떨어지고 가쁜 호흡이 새어나왔다.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똑같은 빛을 가진 자들이 눈을 마주하고 마침내 그 안에서 같은 뜻을 읽어냈다.

 

에이미가 조심스레 미호크의 셔츠 단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은, 어쩐지 오늘따라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단추를 벗겨내는 동안, 미호크는 끊임없이 에이미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빨리 하라며 재촉하는 듯 하면서도 아이를 다독이는 손처럼 차분해지기를 반복한 끝에, 미호크는 참지 못하고 에이미의 셔츠를 잡아챘다. 과연 연륜이라는 것일까. 에이미의 단추가 빠른 속도로 풀어지더니 완전히 셔츠를 벗겨내기에 이른다. 미호크는 조심스레 에이미의 손을 잡고 옆에 있던 침대로 이끌었다. 배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흥분과 열기가 뒤섞여 빨리 이 모든 것을 해방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 그 위를 가로지르는 크고 작은 흉터, 분홍빛 유륜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은 날카로운 맹금류의 것과 같았다. 아무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진득한 소유욕이 온 몸을 샅샅이 훑더니 이윽고 머리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에이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호에이는 결혼하고 선생님 되어서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끗~







말 그대로 행앗에서 미호에이는 어떤 반지가 어울릴까 고찰하다가 나온 썰(with 하임님)



 

01

 

이 썰은 금색 십자가 목걸이도 그렇고 역시 미호크한테는 금반지가 어울릴 거 같은데 에이미가 너무 쿨톤이라 은반지가 어울릴 거 같다는 고뇌에서 시작됨ㅋㅋㅋㅋ

에이미는...넘나 작중 공식 쿨톤인 거시다....(아무말)

애초에 에이미는 금 장신구를 차는 순간 양애취로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색을 잘 선택해야함.

그렇다면 금색과 은색의 중간인 로즈골드로 하자! 로 결정 났으나 이번에는 미호크가 마음에 걸린다...핑꾸핑꾸한 로즈골드링을 차는 미호크라니ㅋㅋㅋㅋ 아 물론 에이미는 좋아하겠지.

 

에이미 : 역시 소녀라면 로즈골드지~!

미호크 : ((짜식))((동공지진))

 

결론적으로 이 썰은 부결되었습니다. 너무 기승전 개그가 되어버렸다.

 

 


02

 

그러고 보니 에이미가 고른 우정반지는 아저씨 같은 금반지 아니었나? 라는 말에서 시작된 썰. 오히려 에이미가 아저씨스러운 취향이고 미호크가 세련된 감각의 취향이었으면 좋겠다ㅋㅋㅋㅋㅋㅋㅋ(미호크 : 나한테 왜 이래)


반지 고르는 에이미 옆에서 홀로 어리둥절해하는 미호크. 아무리 봐도 이쪽이 더 세련된 거 같은데 기가 막히게 아저씨스러운 촌스러운 반지만 골라대고 흡족해하는 에이미.

오히려 너무 그러니까 나중에는 미호크가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했으면 좋겠다.

나도 나이가 들었군. 요즘에는 저런 게 취향인가, 이런 게 세대차이인가 하고 고뇌하는 미호크.

그러다가 나중에 보이랑 씨씨가 와서 원래 에이미 취향이 그렇다는 말 듣고 짜게 식는 미호크....

 

그리고 이 썰 또한 기승전 개그가 되어버려서 부결되었다. 땅땅

 

 


03

 

하임님이 엄청 세련되고 예쁜 백금반지 이미지를 찾아주셔서 단번에 미호에이 커플링으로 채택됨(???)

반지 위에 상대방의 이름을 새기고 약지에 껴줬으면 좋겠다에이미는 쥬라큘 미호크라고 새겨진 반지를, 미호크는 에이미라고 새겨진 반지를 끼는 거지ㅇㅇ 미친 결혼 각이다! 미호에이 결혼해!!!!!(축의금 던짐(혼수상품권 던짐

 

나중에 미호크가 에이미 각인 새겨진 반지 끼고 칠무해 회의 갔는데 에이미가 아직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시점이라서 사람들이 막 수군거렸으면 좋겠다. 그 쥬라큘 미호크가 어지간히 검성에게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라면서 검성을 기리기 위해 반지를 끼고 다니는 거군((숙연)) <<이렇게 시작되는 착각물




결론 : 미호에이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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