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퀴네스/라피엘] 오늘은 흐림 上
W.B - 츠쿠리
손을 담그면 시릴 것 같은 푸른 하늘이 보였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코 손을 뻗어 보았다. 나는 이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좋아했다. 푸른 하늘 아래 에바스 에덴의 커다란 미루나무 나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노라면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곤 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몽롱한 기분. 그건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이런 감상은 얼마가지 않았다. 찬란한 태양이 눈을 찌를 듯이 비춰왔던 것이다. 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맑은 날이 싫었다. 특히 태양은 질색이었다. 푸른 하늘은 좋아하지만 맑은 날과 태양은 싫어한다니 모순적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싫어하는 걸 어떡해. 싫어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대신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잠시 내리는 소나기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른 하늘과 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여우비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안절부절 못하다가 점심시간에 뛰쳐나가 비를 맞거나 에바스 에덴의 미루나무 아래서 비를 감상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트로웰과 미네는 이런 나를 보며 질겁했지만 점점 익숙해진 건지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고, 때로는 우산을 쓰고 따라와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눈꺼풀 사이로 어렴풋이 들어오는 빛의 강도로 보아 태양이 점점 따갑게 비춰오는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낮잠이나 자버릴까, 하는 태평한 생각을 잠시 해버렸다. 그러나 일단 한번 잠들어버리면 그대로 아홉 시간 이상을 자야 비로소 깨어나는 습관이 있어 곤란했다. 거기다 지금은 집이 아니라 학교, 그것도 점심시간이었다. 여기서 자다가 깨면 아마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보거나 내 방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예전에도 무심코 잠들어버려서 트로웰이 낑낑거리며 집까지 나를 옮겨준 것을 생각하면 신빙성은 높았다.
때문에 나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쏟아지는 낮잠의 유혹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먹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막 의식을 놓아버리려고 하려던 찰나, 약간이나마 느껴지던 햇빛이 사라졌다.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그늘지는 걸로 봐서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누구지? 트로웰인가? 그렇지만 트로웰이라면 일어나라고 귀에다 대고 속삭였으면 속삭였지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역시 신은 내가 잠드는 것이 영 못마땅한가 보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잠을 포기하고는 살짝 실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뜬지 0.1초 만에 재빨리 눈을 감았다. 애써 잠든 척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이마에 슬그머니 생겨난 식은땀이 눈을 찔러오기 시작했다. 으아, 눈 아파! 그렇지만 움찔거리기라도 했다가는 저 잠든 척한 게 들킬 것이 분명했다. 누가 뭐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이니까. 그러나 이런 나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자는 척이라고 하는 거냐? 정말인지 거짓말에는 서투른 녀석이군."
"……."
나는 속으로 열심히 나를 응원했다. 참아라, 엘퀴네스! 저 재수 없는 신랄한 말투에 넘어가서는 안 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는 척을 하는 거야! 왜, 그게 뭐였더라? 물아일체 사상이라고 했나? 어쨌거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거라고!
"어이! 눈 뜬 거 다 봤다. 얼른 일어나지 못해?"
"……."
나는 시체다. 나는 시체다.
"너…."
녀석은 잠시 말을 하다말고 멈추었다. 뭐지? 괜스레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한층 능글맞아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너 안 일어나면 키스해버린다?"
"일어났습니다아!"
번쩍 손을 들며 힘차게 일어나는 나를 본 녀석, 라피스 라즐리의 얼굴에는 진실로 아쉽다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망할 놈! 나는 내 순결을 위협당할 뻔 했건만 라피스 때문에 졸음도, 감상적인 기분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화를 내봤자 통하지 않는 녀석이란 것을 알기에 혼자서 괜히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은 나보다 훨씬 그늘져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와중에도 그의 눈은 아름다운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루비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매끄럽고 반짝거렸다. 햇빛이 연상되어서 붉은 색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라피스의 머리카락만큼은 예외였다. 어쩌면 내 푸른 머리카락과는 반대되는 색이어서 더욱 매혹적이게 보였을 지도 모른다.
"뭐야?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잘생긴 얼굴 처음 보냐?"
"…아냐. 아무것도."
외모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이 녀석은 왕자병 중에서도 중증이라는 것을. 아마 세상에서 잘난 사람은 저뿐인 것 같겠지. 아, 물론 라피스는 확실히 잘생겼고,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딱 하나, 남들보다 못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성격이었다. 저 배배꼬인 성격만 아니었어도 한결 살기 편했을 텐데. 문득 생긴 것만 잘생긴, 그러나 성격은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최악인 첫 만남이 떠올랐다.
◈ ◈ ◈
때는 사립학교인 아크아돈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는 분명 푸른 하늘로 가득했는데 2교시가 시작될 무렵 갑자기 먹구름으로 하늘이 뒤덮이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만 오면 설레는 특성상 이런 날을 그냥 지나칠 리가 만무했다. 마침 점심시간쯤에 학급위원인 트로웰과 미네가 교무실로 불려가서 잔소리의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학교 건물을 벗어난 나는 망설임 없이 비를 맞으며 에바스 에덴으로 향했다. 아크아돈은 사립학교라는 이유로 답답한 교복을 입어야 해서 불만이었지만 대신 다른 장점이 이를 충분히 상회하고도 남았다. 넓은 부지 안에 학교가 세워져 있어 건물도 크고 좋았고, 무엇보다 나무와 숲이 풍성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사실 자유로운 공립학교들을 놔두고 굳이 이곳에 온 이유도 크고 작은 동산이 곳곳에 있고 숲과 나무들이 무성해서였다. 교육환경이 좋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만 나에게 우선순위는 자연 환경이었다. '그곳'을 떠나 아버지와 만난 이후로 쭉 울창한 숲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 나무들이 많아야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래서 아크아돈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동산인 에바스 에덴은 그야말로 마음에 쏙 들어서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에바스 에덴은 평소에도 사람이 많이 없는 장소였다. 숲이 울창해서 잘못하다가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비까지 오고 있으니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헉헉거리면서도 동산을 올라 중앙에 있는 미루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한결 맘이 편해졌다. 가만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 있자니 아래에서 정겨운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렇게 가만히 비가 오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내가 기대고 서 있는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편에서 떨어진 걸까? 미루나무는 사람 다섯 명 정도가 서로 손을 잡고 에워싸도 공간이 남을 만큼의 굵기였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떨어진 사람을 보기위해 슬금슬금 나무의 뒤로 다가갔다.
"큭…, 제길! 아프잖아!"
그 곳에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애꿎은 나무를 발로 차며 화내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화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빗물이 방울방울 매달려있는 붉은 머리카락만큼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봐서는 학생임이 분명한데 한 번도 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붉은 머리카락만큼은 인상에 깊게 남을 텐데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는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강렬한, 마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깊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은 석고상처럼 새하얗다. 마치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그리고 남자는 붉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뭘 봐? 잘 생긴 사람 처음 보냐?"
‥‥나는 생각했다.
저런 개 싸가지를 봤나!
◈ ◈ ◈
그리고 첫 만남으로부터 네 달 후, 나는 녀석과 이런 관계가 되어있었다. 잠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첫 만남이 떠오르자 나는 잊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비만 오지 않았어도 엮일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어쩌자고 이런 놈과 엮인 거지.
알고 보니 라피스는 그 날 온 전학생이었다. 여학생들의 꺅꺅거리는 소리에 질려 점심시간에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우연히 에바스 에덴까지 오게 되었고 나를 만나게 된 모양이었다. 라피스는 내 옆 반이라 종종 마주치다 보니 인사까지 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고 어느새 트로웰과 미네와도 어느 정도의 안면을 가지게 되었다.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라피스는 종종 에바스 에덴에 들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가 이 곳에 올 때마다 마주쳐서 요즘은 오는 걸 좀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라피스와 만나버렸다.
에휴, 고민해봤자 뭘 하나. 관두자. 라피스는 이미 예전에 '비는 좋아하지만 미친놈처럼 비를 맞고 다니는 건 싫어'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더러운 성격에 대해 입지를 확고히 굳힌 바가 있다. 새삼스레 이 녀석 성격의 더러움을 의논해봤자 머리가 아파지는 건 나였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에바스 에덴을 내려올 준비를 했다. 이곳은 웬만하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좋았는데 라피스가 온 이후로는 꽤나 피곤해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감쌌다. 시계를 흘끗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좀 서둘러야겠네. 그렇게 교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서늘한 무언가가 손목을 잡아챘다. 나를 놀라게 한 주인공은 라피스의 손이었다.
"…뭐야?"
미간을 찡그리며 묻자 라피스는 피식거리며 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머리카락, 만져 봐도 돼?"
"왜?"
"햇빛에 반짝거리니까 수면에 비친 물처럼 예뻐서."
예쁘다고? 내 머리카락이? 옅은 신음이 굳어버린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잔잔히 가라앉아있던 수면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결코 지울 수 없을 기억들이 떠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고함과 금방이라도 나를 두 동강 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너 같은 건 죽어버려! 어디서 이상한 돌연변이 같은 게 나와서....!’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온 걸까? 너 같은 거,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기억 속의 남자가 뺨을 때렸다. 쓰러지는 내 몸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거세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어디선가 가져온 날카로운 가위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낸다. 섬뜩한 목소리로 남자는 끝없이 속삭인다.
'너는 쓸모없는 녀석이야'
그의 입가에는 지독한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 ◈ ◈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엘?"
"헉?!"
라피스가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내 눈에 맞춰왔다. 붉은 색 눈에 내 얼굴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제야 지독한 과거의 상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차마 숨조차 쉬지 못했는지 호흡이 가빠왔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지독하게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너 괜찮은 거냐? 갑자기 멈추더니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해서 깜짝 놀랐어."
나는 애써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뭐랄까, 잠깐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났을 뿐이야."
"…그래?"
라피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잠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애써 무시한 채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무언가가 내 어깨를 덮치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턱이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두 팔을 내 목에 두른 채 매달려 있었다. 라피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내 가슴까지 흔들거리며 내려왔고 좋은 샴푸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머리카락은 더욱더 매끄러웠다. 이제야 아까 라피스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녀석도 나처럼 이런 느낌이 들었던 걸까? 그러나 내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기에 아쉬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라피스?"
"응? 왜?"
그렇게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있지 말아줄래? 보통 이성이 다짜고짜 날 껴안는다는 게 이상한 거라고?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날 왜 껴안는 거야?"
"……."
금방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너무 작았지만 내 귀에는 충분히 들릴 만큼 컸다.
"안 좋은 일이 생각나면 이렇게 껴안아줘야 되는 거래. 그래야지 좋은 일만 생각난다고 그랬어."
뺨을 긁적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라피스의 얼굴은 홍조로 물들여져 있었다. 키가 180이 넘는 덩치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홍조라니. 나는 키득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해는 여전히 쨍쨍했다. 그러나 이런 날이라면 태양을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구나."
내가 웃는 걸 봤는지 라피스는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내 몸을 확 밀쳤다. 뭐야 이 시츄에이션은? 자기가 먼저 껴안아놓고서!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씨익 웃으며 내게로 점점 다가와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역시 너 가슴은 작네."
3
2
1
그리고 제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라피스의 턱에다가 어퍼컷을 날리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녀석은 얄밉게도 뒷걸음질 한번으로 가볍게 혼신의 주먹을 피해버렸다. 라피스 이 자식, 한참 민감할 때의 이야기를! 그렇지 않아도 나보다 키가 작은 미네의 가슴이 점점 커가는 거 같아서 스트레스 쌓이는데 말이다.
코에서 바람이 씩씩 불어나왔다. 내가 한동안 주먹을 휘둘렀으나 라피스는 매번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등 뒤로 접근해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얄미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있었다.
"헤에, 반응이 그런걸 보니 찔리나 보지?"
"시끄러워! 그보다 남의 머리카락 가지고 놀지 말란 말이다!"
"흥, 그래도 꼴에 여자라는 건가? 머리카락이 무지 부드럽네. 뭐, 그래봤자 성격이 저 모양이니 이 몸이 아니면 누가 널 데려가주겠어? 내게 선택된 것에 감사해라고. 이왕 입을 거 교복도 치마로 입어주면 좋을 텐데. 이놈의 학교는 교복 착용 규정이 남녀 교복 둘 중 하나만 입으면 된다는 거라니 이상하지 않아? 확 교장실에 건의해버릴까?"
라피스는 어느새 내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땋아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였다. 아예 레게머리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듯 수많은 갈래가 라피스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엮여지고 있었다.
"시끄러, 바보 라피! 빨리 그만두지 못해?!"
"싫거든?"
"뭐가 어째?"
아아, 어째서 하늘은 이리도 쓸데없이 푸른 것일까. 나는 괜히 애꿎은 하늘을 원망하며 도망가는 라피스를 이리저리 쫓아다녔다. 물론 머리는 미처 땋은 것을 풀지도 못한 채였다.
그리고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점심시간이 끝난 지 오래라는 것을.
"어라? 그럼 땡땡이인가?"
"다 네 탓이야! 이 망할 도마뱀아! 이번 수업은 카노스 선생이란 말이야!"
"안 가길 잘했네 뭐. 그런 변태 선생 따위."
"시끄러! 바보바보바보 이 바보 라피!"
오직 우리 둘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까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 채.
2018. 01 24 1차 수정완료
엘퀴네스 학원AU로 썼던 글인데 엘은 학대받다가 엘뤼엔에게 입양되었다는 설정.
뒤에 좀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설정을 다 까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