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너는 내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말을 했다. 그 날은 녀석이 갑작스레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래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던 나는 너에게 물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비밀, 이라고 말하는 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때 나는 몰랐다.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대답했는지 그리고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래로 달려갈 각오를 했는지 그리고 너가 하려고 하는 일이 그 녀석을 위한 너의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랬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남겨진 자의 이야기
W. B - 츠쿠리
"선배를 좋아해요."
떨리는 성대. 떨리는 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녀는 내게 수줍은 목소리로 내게 고백했다. 그녀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선배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귀여웠으며 무엇보다 여성스러웠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었을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후배였다. 그러나 나는 고백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삐쭉빼쭉 제멋대로 뻗쳐있는 머리카락과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네가 그리워졌다. 정말 별일이었다. 좀 여성스럽게 다니라고 면박을 주던 네가 이다지도 그립다니.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없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나를 향해 올려다보는 그 간절한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바보같은 너보다 나를 더더욱 좋아하고 또 좋아해주겠지. 그러나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그 이상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몇 년동안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지를 알면서도, 그 고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답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런데 너의 고백을 받아들이면...그 여자애는 혼자가 되어 버려."
그래, 혼자가 되어 버린다. 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그 때와 같은 맑은 하늘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녀석이 가버리고 난 후 밝게 웃지만 축 늘어져버린 그 등을.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지금처럼 맑은 하늘을 보며 울던, 그 바보 같은 너의 뒷모습을. 어쩌면 너와 나는 닮았을지도 모른다. 너도 바보, 나도 바보. 바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것을 보니 나도 바보가 맞는 것 같다. 이성은 내게 그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마음은 그녀를 향해 거절의 말을 내뱉는다. 아아, 정말 소꿉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향해 손수건을 건내고는 뒤돌아섰다.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건 저 멀리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너다. 들쭉날쭉하고 제멋대로인 짧은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반가워보였다. 방금까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씁쓸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마음은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소리쳤다.
"어이-마코토!"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여성스럽지 못한데다가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들린다. 이거 중증인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너에게 다가갔다. 네가 윽박지르는 목소리마저도 이다지도 반갑다.
"고스케! 어디 갔었어, 기다리다가 가려고 했잖아! 일이 있으면 있다고 문자 같은 것 좀 보내란 말이야!"
"미안미안. 잠깐 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참, 그리고 오늘부터 야구는 못할 것 같다. 캐치볼로 바꿔야겠어."
"뭐? 늘 같이 하던 후배들 있잖아?"
"…아마 오늘부터 날 마주치기도 싫어할걸? 고백받았는데, 차 버렸거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귀를 막을 준비를 했다. 너가 얼마나 기가 막혀할지 알기 때문이다. 어찌나 평소에 나를 연애시키기 위해 애를 쓰던지. 일부러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나면 내 옆에서 걷게 해주거나 일이 있다고 둘러대서 나와 그녀, 단 둘만 있게 한다던지 정말 너답다면 너답다고 생각해야 할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노력은 가상하지만 몇 번의 패턴을 겪고 나자 자연스레 피하는 법도 익혔다. 덕분에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고백하려는 시도를 언제나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움직여야만 했다. 고백을 받고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야구를 못하게 된다고 실망하는 너의 얼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이런 나의 노력도 모르겠지. 예상대로 기가 막히다는 너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어어어? 왜 거절한거야? 내가 너한테 고백하게 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야구도 같이 하자고 부르고, 둘 만 있으면 은근슬쩍 자리 피해주고, 내가 혼자서 집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는데 그걸 다 참아줬더니…! 그리고 고스케, 알고 있어? 그 애 중학교 때부터 널 좋아했다고! 무려 중학교 때부터!"
"…강조하지마. 그리고 우린 이제 입시 준비해야 하잖아, 연애는 무슨 연애야. 그리고 지금 너가 내 연애 걱정해야 할 때냐? 입시 준비나 하시지? 너 저번에 모의고사 성적 올랐다고 자만하는 거 아냐? 너가 목표하는 대학에 가려면 넌 아직 한참도 멀었어."
"이익, 이럴 때만 성적이야기 꺼내고! 고스케 넌 바보야!"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야, 이 바보야."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대화인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며 가는 것을 좋아했다. 너가 알면 비웃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너와 둘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제는 야구같은 거 하지 않아도 좋다. 캐치볼이면 충분하다. 너와 단 둘이서 있다면 캐치볼이라도 야구보다 더 재미있으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표정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옆을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툴툴대며 가는 모습은 조금도 어른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3학년에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 너가 얼마나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장래를 털어놓았는지를 기억한다. 너는 큐레이터가 되어서 이모가 일하는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복원하고,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너의 그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얼굴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녀석을 향한 것이었음을. 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떠나가버린 그 녀석이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는 그냥 보기만 해도 알았고 어느 순간부터 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셋 중에서, 어느 순간부터 뒤쳐저서 걷고 있는 것은 나였다. 부정하고 싶었다. 너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녀석을 향한 우정이 있었고 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 3 자는 빠져주는 게 도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너와 녀석의 사이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물론 가슴은 아프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너가 웃는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 너가 녀석에 대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가버렸다. 그리고 너를 놓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아직도 너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떠올리며 막막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분명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그 생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 녀석을 위한 것인지.
나는 말을 꺼냈다.
"있잖아."
"……."
너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치아키 녀석, 잘 지내고 있겠지?"
"……."
"그러고보니 너, 치아키한테 고백은 받았냐?"
대답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앞으로 가고 있던 너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녀석과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부터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애써 치밀어 올라오는 쓴 웃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뭘? 치아키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너가 치아키 좋아하는 거? 둘 중 어느 걸 알고 있냐고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빤히 다 보이는데 못 알아채면 오히려 바보지. 그래서 너 두고 치아키가 유학 가버렸다는 소식 듣고는 정말 놀라버렸지만 말야. 설마 그 녀석, 지금까지 편지 한 통 안 보낸 건 아니겠지? 혹시 주소 알면 편지 쓸 때 같이 써 줘라. 나한테 유학 안 알리고 간거, 정말 배짱 좋은 일이었다고. 다음에 만나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 배트로 후려치겠다고 전해."
"…편지, 오지 않아."
"뭐?"
이번에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그럴리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솟구쳤을 정도로 믿기지 않을 대답이었다. 그러나 쓸쓸함과 그리움을 감추고 있는 너의 얼굴의 일면을 본 순간, 네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벌써 녀석이 사라진지 반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편지 한 통이 오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유학 간 곳을 수소문해서 녀석을 두들기고 싶었다. 녀석은 내게는 감정을 숨기게 하고, 너에게는 새로운 감정을 심었다. 그렇게 멋대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으면 최소한 너에게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내게 너의 쓸쓸한 모습을 보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답지 않게 잔잔한 목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치아키가, 너무 급하게 뛰다가 넘어지지 말라고 했어. 기다려주겠다고."
"…뭐?"
"치아키는 미래에서 기다리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달려가야해. 치아키가 있는 곳으로."
그 말은 무척이나 추상적이었다. 아마 너와 녀석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영영 너와 그 녀석의 관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 알 것 같았다. 너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쓸쓸함과 그리움이 걷히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너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갔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손을 올려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러저리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손을 간질였다.
"으왓! 고스케?"
너의 놀란 목소리가 들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아마 언젠가, 먼 미래에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너와 녀석은 아마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서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런 미래도, 왠지 너희들이라면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고 해도 지금은 조금만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이렇게 단 둘이서.
"그럼, 나도 같이 달려가주지. 그 녀석에게 도달할 때까지, 있는 힘껏 달려줄게. 그러니까,"
물론 너가 달려가는 미래의 끝과 나의 끝은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무 급하게 뛰어서 다치면, 내게 와. 치료해줄테니까."
달려가자, 너에게로.
기다리자, 너를 위해
지켜보자,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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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연성의 해였던가.
나는 왜 이리 글을 열심히 쓴 것인가.
여튼, 학교에서 본 시달소를 보고 썼던 글.
그 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시달소가 소설과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치아키x마코토x고스케 사랑해요.
밑은 당시의 후기.
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아시다시피 이 글은 고스케의 이야기 입니다.
고스케야 말로 정말 시달소에서 제일 아리송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고백을 해도 차버리고! 말하는 멘트만 보면 마코토를 좋아하는 건데 말이죠.
제 입장에서 고스케는 마코토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치아키가 너무 티나게 마코토를 좋아하니까 이 셋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그런거고요. 치아키가 사라진 이 시점에서, 고스케는 절대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면 마코토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잖아요. 집도 혼자 가고ㅠㅠ
이런 고스케의 심정은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데요, 눈치채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워낙 제 멋대로 써서- 달려가는 건 마코토, 기다리는 건 치아키, 그리고 지켜보는 것은 고스케입니다. 이 셋의 대표적인 마음을 표현한거에요. 여기에서도 고스케의 불쌍함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불쌍한 고스케ㅠㅠㅠㅠ
마음 같아서는 남겨진 자의 이야기 1편 -고스케- 를 끝냈으니 남겨진 자의 이야기 2편 -마코토&고스케-, 떠나간 자의 이야기 -치아키-를 쓰고 싶습니다. 이 셋의 미래를 다룬 내용이 될 것 같아요. 마코토는 마코토의 마녀 이모처럼 큐레이터가 되서 박물관에서 치아키를 위해 그림을 지키면서 있을 거고, 고스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마코토의 곁을 지켜주겠죠. 친구이상 연인 미만인 관계로요.
사실 제일 걱정되는 게 치아키인데요, 아니 도대체 하늘이 파랗지 않고, 야구가 없어지고 인구가 그만큼 줄어들고 타임머신이 발명되려면 몇 년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기다려도 이건 못 만나잖아요! 환생하라는 거야 뭐야.
하지만 전 쓸 겁니다. 아마도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쓰고 싶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를 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에 뵈요!
그리고 쓰지 않았다고 한다(후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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