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엘피예로] After story
W.B - 츠쿠리
01
오즈와 또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입구는 드넓은 오즈의 영토에서도 서쪽의 가장자리, 일명 '메마른 황무지'에 자리하고 있는 낡은 시계탑이었다. 엘파바의 말에 따르면 쉬즈 도서관 책장 뒤에 떨어져있던 고서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대체 왜 책장 뒤에 있는 책을 읽어야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쉬즈의 모든 책을 다 읽어 심심한 나머지 책장 뒤에 떨어진 책이 없는지를 살폈다는 엘파바의 말을 듣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피예로는 학창 시절에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글린다처럼 공부와 담을 쌓는 것에 착실하다면 또 모를까.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초록색 피부를 가진 여인과 낡은 옷을 꿰어 입은 허수아비는 메마른 황무지의 시계탑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한 명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한 명은 오즈를 구원한 지혜로운 허수아비로 널리 알려졌기에 둘은 늘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여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그나마 피예로가 식량과 지도를 구하기 위해 종종 마을 어귀로 내려갔으나 이마저도 나중에 추적의 빌미가 될까봐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엘파바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피예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파바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바로 자리에 주저 앉아 숨을 골랐다.
피예로는 허수아비이기에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일주일을 굶은 채 숲을 걸어도 배고픔도, 피곤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엘파바는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러워하고 쉬지 않고 걸으면 지치는 인간이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먹지 못하면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한다. 피부만 초록색일 뿐,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사람들은 이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피예로는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해하는 엘파바를 보고 밀려오는 속상함에 괜히 자신의 몸을 푹푹 쑤셨다.
"네 몸이 홀쭉해지고 있잖아! 뭐하는 거야, 피예로!"
엘파바가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지푸라기를 긁어모았다. 피예로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엘파바가 말려주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새 짚을 구하기 전까지 몸이 반쪽인 상태로 느릿느릿 걸을 뻔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이제 오즈의 중심부로부터 멀어졌고, 요새는 추수철도 아니라 네 지푸라기를 구하기가 힘드니까."
"응. 명심할게.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해, 엘파바."
"왜 사과를 해? 오히려 나야말로 미안해. 널 허수아비로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엘파바가 말꼬리를 흐렸다. 피예로가 허수아비로 변한 이후로 엘파바는 종종 자책감을 드러내곤 했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도 소용 없었다. 아마 마법으로 인해 피예로가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엘파바는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그럼에도 전설의 마법서 그리머리의 주문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선의로 한 행위인데도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노라고,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그리머리!'
피예로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만약 책도 욕을 먹고 장수하는 효과가 있다면, 그리머리는 백년 만년 장수할 운명임에 틀림 없었다. 피예로는 엘파바가 글린다와 헤어지고 그와 재회하기 전,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허수아비로 변해 정체를 숨겼어야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언가 엘파바의 가치관을 뒤흔들었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그리머리 탓이 아닌가. 전설의 마법서인지 몰라도 좀 더 알기 쉽게 주문을 풀어 설명했더라면 아무 것도 모르고 주문을 외울 일도, 주문의 결과로 엘파바가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피예로는 언젠가 그리머리를 보게 되면 기필코 불태워버리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머리를 불태우는 것 보다 눈 앞의 연인을 달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허수아비로 변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죽었을 거야. 그것보다는 네 옆에 천년이고 만년이고 붙어있을 수 있는 허수아비가 더 좋은 걸. 아니면 너는 내가 허수아비로 변해서 싫어졌어?"
머리를 살짝 숙이고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은 흡사 여주인공에게 버림받고 슬피 우는 비운의 왕자님 같았다. 물론 허수아비 왕자님은 초록색 피부를 가진 브로콜리 공주님에게만 효과가 좋기는 했지만.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피예로가 살아있는 쪽이 당연히 더 좋지! 네가 어떤 모습을 해도, 난 널 사랑할 거야!"
"그럼 해결 된거네?"
"응?"
"나도 네가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널 사랑할거야. 너도 내가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날 좋아해 줄 거잖아? 그럼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는 거니까 됐어.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모든 게 다 괜찮을거야. 그렇게 말하는 피예로의 얼굴이 몹시 평온해서 엘파바는 저도 모르게 찡그린 표정을 풀고 쿡쿡, 웃었다. 그 말은 모든 걱정과 불안을 씻어버리는 마법의 주문임에 틀림없었다. 피예로와 엘파바는 그렇게 한참동안 마주보고 웃으며 피곤함과 불안함을 날려보냈다. 잠깐의 달콤한 휴식시간이 끝나고, 피예로는 엘파바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숲 속을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경쾌했고 단단하게 맞잡은 두 손은 숲 속의 서늘한 공기를 느끼지 못하게 할 만큼 따스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리머리를 비롯한 그 어떤 고민도 걱정되지 않았다.
"역시 피예로 넌 아름다워. 무엇으로 변해도 아름다울거야. 그리고 그 때마다 난 다시 새롭게 사랑에 빠질 게 분명해."
"하하, 엘파바 너 농담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농담 하는 거 아냐! 다른 눈으로 보는 거라구."
구름 뒤로 몸을 감추었던 달빛이 드러나면서 숲 속에 뒤덮힌 어둠을 몰아냈다. 어슴푸레 빛나는 달빛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숲속을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은은히 비추었다. 숲 속을 걸어가는 두 쌍의 긴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언제까지나, 계속.
02.
피예로는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열심히 잠자리를 만드는 엘파바를 지켜보았다. 엘파바의 손짓 하나에 폭풍같은 바람이 불더니 두꺼운 나뭇가지가 쑥쑥 잘려나가고 순식간에 뚝딱뚝딱 그럴 듯한 집 형채가 갖춰졌다. 바닥은 마른 나뭇잎으로 덮어 안락하고 푹신푹신했으며 얽기설기 만들어진 허술한 나무지붕은 그녀가 두르고 있던 까만 망토를 덮어 이슬이 새지 않도록 막았다. 피예로는 착잡한 눈으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허이짜! 기합을 넣고 허공에 한 번 휘두르기가 무섭게 짚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피예로는 울상을 지으며 황급히 제 몸에서 떨어진 짚을 긁어모았다.
짚으로 만들어진 새 몸은 허약했다. 물건을 옮기고 드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걸을 때마다 두 다리를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정도야 부러뜨릴 수 있겠지만 집을 이룰 정도의 두꺼운 나무는 제 손이 대신 잘려나가리라.
그에 비해 엘파바는 혼자 오즈를 떠돌아다니며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더 없이 강인해져서-물론 그 전에도 강인했지만-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메마른 황무지로 가면서 피예로는 엘파바의 지식과 경험의 힘을 실감했다. 지금처럼 잠자리를 마련할 때는 물론이고, 배가 고플 때나 어딘가를 다쳤을 때 눈 앞에 수북히 쌓이는 야생 열매나 식용 버섯, 이름도 모르는 온갖 약초를 보고 있노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녀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론 만능+실전 만능+마법 만능이라니! 이런 사기적인 캐릭터가 내 연인이라니!'
으어어어! 속으로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피예로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솔직히 말하면 엘파바가 너무 든든해서 피예로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에 글린다가 자신의 등짝을 보며 이 남자라면 어디든 같이 갈 수 있겠다고 말했던 것과 똑같은 심경을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 뭐, 저렇게 든든해진 엘파바에 비해 자신은 허수아비가 되서 집은 커녕 무거운 것 하나 옮기지 못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피예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피예로는 허수아비로 변한 것이 싫지 않았따. 오히려 만약 인간으로서 죽었다면, 그래서 엘파바 혼자 오즈에 남겨졌다면… 그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게 되느니 허수아비로 변해서 엘파바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허수아비로 변한다고 해서 엘파바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주 가끔 허수아비로 변한 것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엘파바를 도와주지 못할 때, 엘파바를 지켜주지 못할 때, 엘파바가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할 때 피예로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라는 틀에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비탄스러웠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래오래 살아서 엘파바의 옆에 있어주는 것 뿐이야.'
피예로는 지금의 자신이 엘파바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자신있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은 칼에 찔려도 죽지 않고, 먹지 못해도 죽지 않는다. 뭐, 불에 타면 죽겠지만 그건 조심하면 되는 문제다. 엘파바가 힘들 때, 밭을 지키는 허수아비처럼 든든하게 옆에서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다. 그 역할만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 옆에 있어주는 역할은 오롯한 제 몫이었다.
'역시 죽는 것 보다는 오래오래 살아서 엘파바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더 좋으니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엘파바에게 피예로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민은 고이 접어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툭, 데구르르.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지만 피예로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03.
며칠 간의 고된 여정 끝에, 피예로와 엘파바는 메마른 황무지에 도착했다. 대체 어떤 곳이면 황무지에 메마르다는 각박한 단어까지 붙을 수 있는 것일까. 메마른 황무지로 향하는 동안, 피예로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메마른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피예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장소에 이름을 붙인 사람에게는 상을 줘야 한다! 그 정도로 메마른 황무지만큼 어울리는 작명이 없었다. 풀 한 포기 없이 쩍쩍 갈라진, 민둥한 황토빛 머리를 드러낸 땅이 눈 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분명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푸르른 녹읍으로 뒤덮인 숲속을 걸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고민은 안 해도 괜찮았겠어."
"그러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빨리 시계탑을 찾는 게 좋을 거 같아."
피예로와 엘파바는 휴식 대신 곧바로 메마른 황무지에 있다는 시계탑을 찾아나섰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때마다 종종 동물들의 도움을 받아왔기에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바랐지만 이상하게 메마른 황무지에서는 그 어떤 동물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생명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피예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탐색을 개시한 지 두 시간 정도가 흘렀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엘파바와 자신뿐인 것 같았다. 무언가 섬뜩한 고요함이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엘파바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역시 책에서 읽은 게 사실이었나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메마른 황무지에 대해서 읽었을 때 밑에 조그맣게 나와있던 비화가 있었어. 메마른 황무지는 저주에 걸린 땅이라 오즈에서 시간이 멈춘 유일한 곳이라고. 그 때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음…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지?"
어색하게 웃는 엘파바를 보며 피예로는-허수아비지만-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시간이 멈춰서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는 땅이지만 그게 전부야.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할거야."
뒤늦게 엘파바가 변명하듯 덧붙였지만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피예로가 침착하게, 그러나 사뭇 비장해진 어투로 답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빨리 시계탑을 찾아서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졌어."
"……."
엘파바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했기에 시계탑 탐색은 다시 빠르게 재개될 수 있었다. 황무지는 넓고 황량했지만 엘파바의 마법과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는 피예로의 끈질긴 수색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엘파바와 피예로는 메마른 황무지 중에서도 가장 변두리 부분에 세워진 낡은 시계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메마른 황무지가 오즈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시계탑은 오즈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시계탑의 뒤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안개가 파도처럼 철썩이고 있어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검은 안개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정말 바다처럼 발이 쑥 빠져버릴지도 몰랐다.
"정말 낡았네."
엘파바가 시계탑 외면의 벽돌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벽돌은 이미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색이 바라고 금이 간 채 갈라져 있었다. 군데군데 이끼도 잔뜩 끼어 멀리서 얼핏 보면 초록색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피예로는 조심스레 시계탑으로 들어가는 낡은 나무문을 열었다. 잠겨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월하게 문이 열렸다. 매캐한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낀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해 보였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머뭇거리다가 내부로 완전히 발을 내딛었다. 바닥에 발을 딛을 때마다 낡아서 무게를 버티지 못한 마룻바닥이 끼익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역시 메마른 황무지에서 여기만 유일하게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것 같아."
"그 말은 우리가 제대로 왔다는 소리지?"
"아마도? 문제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어디 있냐는 건데…."
엘파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시계탑 안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낡은 나무 탁자와 의자, 재만 가득한 벽난로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만약 유일하게 시간이 흐른다는 점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냥 낡은 시계탑으로 보고 지나칠 만큼 특별할 게 없었다.
"여기 사다리가 있어. 한 번 올라가볼게."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발견한 피예로가 자청해서 올라가보았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달달거리며 간신히 굴러가는 커다란 시계와 오래된 새 둥지, 그리고 퀴퀴한 냄새를 뿜는 먼지가 수확의 전부였다.
"분명히 책에서 읽은 대로라면 여기가 맞는데…."
"네가 책에서 읽은 게 맞다면 이곳이 틀림 없을거야. 아마 우리가 아직 못 찾았거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실망하지마, 엘파바."
엘파바가 잔뜩 풀이 죽자 피예로는 엘파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기를 북돋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루 종일 돌아다녀 지쳐보이는 엘파바를 보니 오늘 탐색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는 것이 옳은 듯 싶었다. 피예로는 조심스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다시 통로를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엘파바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피예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만들기 위한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불은 내가 피울게. 이쪽으로 오면 불씨가 튈 수 있으니까 잠깐만 저쪽에 가 있어."
엘파바의 말에 피예로는 얼른 몸을 피했다. 예전에 한 번 말을 안듣고 가까이 갔다가 불씨가 튀어 고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예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잠시 쿡쿡 웃은 엘파바가 불을 피우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바닥이 요란한 진동소리와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뭐, 뭐지?"
모르는 글자가 뺴곡히 바닥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이 모든 글자로 뒤덮혔을 때, 글자가 초록빛으로 빛나면서 갑자기 바닥이 밑으로 훅 꺼져들었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깜깜한 허공으로 떨어져내렸다. 피예로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바닥에 부딪힐 충격에 대비해 엘파바를 꼭 끌어안았다. 몸에 둘러지는 온기에 정신을 차린 엘파바가 얼른 불을 피우기 위해 끌어올렸던 마력을 휘둘렀다.
무형의 빛이 허공에 수놓아짐과 동시에 떨어지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다행히도, 바닥에 안착할 즈음에는 두 발로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괜찮아, 엘파바?"
꼭 끌어안아서 괜찮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피예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파바를 이리저리 살폈다. 엘파바는 한숨을 내쉬며 피예로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난 덕분에 괜찮아. 그보다 나를 감싸면 어떡해! 만약 내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랬어!"
"난 허수아비니까 괜찮아. 짚이 떨어지더라도 네가 다시 넣어주면 되고 망가지면 네가 고쳐주면 되잖아."
"…싫어. 다시는 그러지 마. 나야말로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나중에 또 그러면 네 짚을 불에 몽땅 태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평생 앉아있도록 만들어 버릴거야."
귀여운 협박에 피예로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방패야말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었다. 그 역할마저 포기한다면 그는 더 이상 엘파바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엘파바는 대답을 회피하는 피예로를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나 끝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얼굴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엘파바가 혼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버리자 피예로는 어색한 얼굴로 허우적거리면서 뒤따랐다.
새로 찾아낸 장소는 지하답게 어두컴컴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엘파바를 따라잡기 위해 피예로는 허수아비인 몸으로 안간힘을 썼다. 뒤를 힐끗 곁눈질한 엘파바는 한숨을 쉬며 가방에 굴러다니던 촛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피예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엘파바의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지하는 생각보다 넓었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공기의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말없이 주위를 경계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위험한 것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체불명의 공간을 편하게 걷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그렇게 미약한 촛불에 의지해 걸어가던 중, 엘파바는 시간이 흐를수록 발 앞에 놓여진 공간이 점점 좁아지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눈치챘다. 길 이외의 것은 새까만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불을 아무리 비춰보아도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단 하나의 길 뿐. 엘파바와 피예로는 떨어지지 않게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좁게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넓어진 길 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공터처럼 널찍하게 펼쳐진 장소였다. 엘파바는 망설임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 갑자기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아무 것도 없던 공간의 끝에 거대한 원형 모양의 문이 스르르 나타났다. 문의 둘레에 새까만 숫자가 차례로 새겨지고, 거대한 시침과 분침이 째깍거리면서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은 하나의 거대한 시계를 보는 것 같았다.
엘파바는 조심스레 다가가 문 앞에 섰다. 정체불명의 중압감과 마력의 흐름이 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파바는 이것이 자신들이 찾는 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여기가…,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인가봐."
"마력으로 문이 열리는 거라면 왜 아무도 이 곳을 찾지 못했는지 납득이 가. 사람들은 분명 쓸모없는 시계탑이라고 생각하고 건드리지 않았던 게 분명해."
"……."
엘파바는 한동안 말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도 표정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피예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런 엘파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부는 알 수 없어도 아주 조금은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그도, 그녀도 많은 사건들을 거쳤으니까.
"…갑자기 조금 무서워."
"…왜?"
"이 문을 열면, 정말로 오즈를 떠나는 거잖아. 내가 사랑했던 땅, 사람들 그리고 모든 것을 두고 나는 영영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아니지. 넌 나와 함께잖아."
"…정말 나랑 같이 가도 괜찮겠어? 나랑 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몰라. 어쩌면 거기서도 내 피부를 보고 나쁜 마녀라고 몰아세울 수도 있어. 만약 네가 여기에 남는다면 넌 지혜로운 허수아비로 평화롭게 살 수도…!"
"엘파바."
피예로가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말을 마구 내뱉는 엘파바의 버릇은 이미 익숙하다. 다만 늘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애정을 포기하고 자신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사실, 영원히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애정을 바라지 않고 홀가분하게 내려놓으려는 그런 방식은 더 이상 인정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떠난다는 말이 쉽게 나와? 그러다 정말 내가 떠나면 어쩌려고? 너, 내가 떠난다고 하면 울 거잖아. 정말 날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수 있어? 나 없이 너 혼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버릴 수 있겠냐고."
"피예로…."
"넌 언제나 그래. 애정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에 익숙하다는 듯이 체념해버려. 하지만 난 알아. 넌 사랑받고 싶어하잖아. 왜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데, 너가 먼저 날 포기하려고 해? 내가 이렇게 너에게 언제나 손을 뻗고 있는데!"
"……."
"제발 날 버리지 마, 엘파바. 그 때처럼 내 손을 잡고 놓지 말아줘. 너가 처음으로 날 욕심내주었을 때,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처음으로 남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수비대 캡틴이란 지위도 버리고, 왕자라는 직함도 벗어던지고, 에메랄드 시티를 벗어났다. 그리고 엘파바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어떤 밤도, 그 날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진 않았다.
피예로는 엘파바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손을 잡고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엘파바만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엘파바는 한동안 말없이 피예로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얼굴이 울면서 웃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어떻게 널 버릴 수 있겠어."
엘파바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왠지 조금만 더 있으면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나올 것만 같아 피예로는 얼른 엘파바를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엘파바 또한 피예로의 등에 손을 둘러 힘껏 안았다. 힘껏 자신을 안아주는 손에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피예로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절절한 포옹의 시간을 가진 엘파바와 피예로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거대한 원형 문 앞에 섰다. 엘파바는 문에 조심스레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환한 빛이 문의 둘레를 따라 새겨지고,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같은 자리에 멈춰섰다. 끼이익-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들어오라는 듯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자, 그럼 이제 갈까?"
"…응."
엘파바는 문을 향해 나아가기 전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사악한 서쪽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오즈민의 노랫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작별인사가 말을 걸어왔다. 그리머리를 꼭 잡고 울고 있는 사랑스런 친구에게 엘파바는 작별의 키스를 몰래 건넸다.
안녕, 나의 사랑하는 오즈여.
엘파바와 피예로는 새로운 행복을 위해 발을 내딛었다.
~Epilogue~
04.
엘파바와 피예로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또 다른 세계와 오즈를 연결하는 중간 길목에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중간 길목이라는 표현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았다. 문을 열면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오즈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광활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인간이 없고 동물들만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말은 못하지만 인간과 똑같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오즈와 또 다른 세계의 동물들과는 달리, 중간계의 주민들은 양쪽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중간계에 태어나면 이곳의 관리자 역할을 맡아 평생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없는 것이 규칙이라고 했다.
동물들의 말에 따르면-신기하게도 엘파바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기가막히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양쪽 세계의 교류는 꽤 활발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새 서로의 존재를 잊거나 환상으로 취급하면서 중간계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지고, 이곳의 동물들만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의미가 퇴색된 관리자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몇 만 년만에 이곳을 방문한 손님인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동물들은 엘파바와 피예로에게 몹시 호의적이었다. 인간이라는 점에서 잠시 경계를 하긴 했지만 곧 두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호의적으로 돌변했다. 중간계의 동물들은 관리자로서 양쪽 세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그 소식 중에 동물들을 구출하는 오즈의 초록 마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동물들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허수아비가 자신들을 잡아먹지 않는다면-피예로는 코웃음을 쳤다-이곳의 주민으로 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엘파바는 정체불명의 또 다른 세계보다는 평화롭고 안전한 중간계가 더 마음에 들었다. 오즈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것도 큰 이점이었다.
피예로 또한 엘파바의 결정에 적극 찬성했다. 도로시가 엘파바의 모습을 보고 오즈민들처럼 악한 마녀로 치부한 것을 생각한다면, 또 다른 세계의 인간들이 엘파바에게 호의적일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피예로는 더 이상 엘파바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주는 동물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엘파바와 피예로는 성공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주민으로 받아들여졌다.
05.
중간계의 영토는 오즈의 에메랄드 시티와 크기가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영토를 구성하고 있는 지형은 잘 정돈된 에메랄드 시티와 다르게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숲과 들판, 사막, 계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형들이 중간계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물론 그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중간계의 관리자로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지만 엘파바와 피예로는 한동안 중간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눈 앞에 보이는 이 광경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이야. 엘파바는 한동안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새로운 거주지로서 한적한 들판을 택했다. 바로 옆에 숲이 있어서 땔감을 얻거나 나무 열매를 따오기에도 용이했고 들판 한구석에 꽃이나 밭을 일구기도 편했다. 작은 시냇물도 졸졸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거주하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피예로와 달리 엘파바는 무언가를 먹는 것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였기 때문에 선택은 전적으로 엘파바 위주로 이루어졌다.
06.
터전을 마련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주거시설을 갖춰야지! 기운차게 말을 꺼낸 엘파바는 동물들에게 부탁해서 집을 짓기 위한 재료를 모았다. 나무 집을 지었다면 일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되었겠지만 엘파바는 불이 붙더라도 절대 타지 않는 집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재료가 중간계에 떡하니 떨어져있을 리는 없었다. 결국 엘파바는 점토와 갖은 재료를 긁어모아 벽돌을 하나하나 구워냈다. 훗날, 피예로는 어둑한 밤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의 집념이 조금 두려웠노라고 말하곤 했다.
어쨌거나 엘파바는 갖은 노력과 오랜 시간을 걸쳐 아름다운 벽돌집 한 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오즈의 아름다운 집들에 비하면 투박하고 어설펐지만 엘파바와 피예로에게는 세상 그 어떤 집보다 멋졌다. 무려 '우리'를 위해 처음 만들어진 집이었으니 당연했다. 피예로는 집 주위에 나무로 된 작은 울타리를 세우고, 아름다운 꽃들로 이루어진 작은 정원을 꾸몄다. 가끔 집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동물들이 신기하다며 갑작스레 찾아와 이런저런 참견을 했지만 곧 자신들의 집이 편하다며 돌아갔기 떄문에-집은 역시 동굴이 최고지! 커다란 갈색 곰이 우렁차게 말했다- 엘파바와 피예로는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별 다른 방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07.
엘파바는 집을 짓자마자 어디선가 밀을 구해와 집 앞에 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적이 배고플 때 먹기 위한 식량이었을지 아니면 그녀의 허수아비를 위한 지푸라기었을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08.
엘파바는 집의 뒷뜰에 자그마한 무덤을 하나 만들었다. 무덤에 꽂혀있는 자그마한 팻말에는 '내 동생, 네사로즈' 라고 적혀있었다. 가끔 엘파바는 기분이 울적해지면 말없이 아기를 달래듯 무덤을 토닥이곤 했다. 그녀는 먼치킨의 영주나 동쪽의 마녀보다는 그저 그녀의 동생으로 네사로즈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녀가 서쪽의 나쁜 마녀임을 잊고 싶어하듯이.
09.
동물들은 엘파바가 신기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종종 찾아와 고민을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주로 계곡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기 싫은데 옮겨줄 수 있냐는 물음부터 배탈이 났는데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와 같은 고민이 주를 이루었다. 사실 후자는 마법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고민이 무엇이던 간에 엘파바는 기꺼이 동물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여인은 곧 중간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10.
피예로는 심심하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밀밭에 우두커니 서서 새를 쫓았다. 그 모습이 정말 허수아비 같아서, 아니 허수아비가 맞긴 한데….
엘파바는 가끔 혼란스러웠다.
11.
"내가 만든 음식을 너가 먹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어, 글쎄…. 난 좀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 엘파바."
새까맣게 탄 스튜를 보며 피예로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숲 속에서는 그냥 단순히 구워먹거나 생으로 먹는 게 주를 이뤄서 몰랐는데 엘파바의 요리 수준은 꽤나 심각했다. 일단 정성이 들어가는 순간 요리가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변한다니. 피예로는 자신이 허수아비인 것이 이토록 다행스러웠던 날이 없었다.
12.
"피예로. 넌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글쎄…."
피예로는 정원 한 구석에 핀 은방울꽃을 꺾어 조심스레 엘파바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인의 미소가 방울이 흐드러지듯 아롱아롱 입가에 맺혔다. 피예로는 조심스레 엘파바에게 키스했다.
그에게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임에 틀림 없었다.
(*은방울꽃의 꽃말 : 행복,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12.
어느 화창한 봄 날, 소박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깨끗한 흰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천을 둘렀다. 손에는 분홍색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초록과 핑크는 정말 잘 어울려! 신부는 아주 오래 전에 그녀의 단 하나뿐인 친구가 말해준 것을 떠올렸다. 만약 친구가 이 곳에 있었다면 똑같이 말해줬으리라. 신부는 옅게 미소지으며 짙은 장미향을 들이마셨다.
[옛날 옛날에 행복을 모르는 초록 마녀가 살았습니다. 초록 마녀는 늘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몰랐습니다.]
신부는 흩어져 내리는 꽃잎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저 멀리에 붉은 리본을 매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허수아비 신랑이 내미는 손을, 신부는 기꺼이 잡았다. 여느 결혼식과 달리 사회도, 연설도, 축사도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단 둘뿐인 것이 더욱 여실히 느껴져서 기뻤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할 것이라는 영원의 맹세가, 소리 없이 오갔다.
[어느 날 숲 속에 열매를 따러 간 초록마녀는 허수아비 왕자에게 첫 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허수아비 왕자 또한 초록 마녀가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신랑이 이 날을 위해 열심히 깎았다는 투박한 나무반지가 서로의 손에 끼워졌다. 비록 성대한 약혼파티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던 다이아몬드 반지는 아니었지만 신부는 지금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수아비 신랑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허수아비 왕자와 초록 마녀는 연인이 되었고 곧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허수아비 왕자와 초록 마녀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부부가 되었습니다.]
입술에 닿은 온기에, 신부-초록 마녀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한 행복 속에 있었다. 이게 바로 행복하다는 거구나. 신부는 목이 메었다. 너무 행복해서, 심장이 터져 죽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신부는 울면서 웃었다. 처음으로 행복이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허수아비 신랑은 그런 신부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허수아비 왕자와 초록마녀는 결혼 후에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초록마녀는 어느날 이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랑해 엘파바. 네가 바로 나의 행복이야. 날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허수아비 왕자와 초록마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The End?
================================================================================================== 안녕하세요. 츠쿠리입니다. 오랜만에 위키드 연성을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좀 짤막한 조각글 형식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처음 해보는 거라 미흡한 부분도 많이 보여서 아쉽네요 ㅠㅠ 워낙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그런지 버벅이는 부분도 많구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글을 빠르고 정확하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번 글은 모든 극이 끝난 뒤, 엘파바와 피예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엘파바와 피예로가 어디로 떠났을까 늘 궁금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즈를 떠나면 갈 수 있는 곳이 도로시가 있는 세계=현실세계 밖에 없더라구요. 히지만 엘파바를 도로시가 있는 세계로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 중간에 있는 세계라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저는 위키드에서 글린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푸는 편이었어요. 혼자 남겨진 채 무거운 책임감과 외로움을 혼자 견딜 글린다가 안타까워서 그 이후에 글린다가 어떻게 지낼까에 대한 이야기가 제 상상의 주를 이뤘죠. 그런데 며칠 전에 차정을 봤을 때 처음으로 위키드에서 해피엔딩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엘파바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글린다가 혼자서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엘파바와 피예로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지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제 소설에서는 한계가 있어서 풀지 못했지만 엘파바와 피예로는 나중에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잘 살 것 같아요. 물론 허수아비에게 생식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읍읍) 아마 엘파바를 닮은 딸이랑 피예로를 닮은 아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 것 같다는 이유 모를 상상은 늘 남겨두고 있습니다. 헤헤, 이야기가 길었네요. 이만 글을 줄일까 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한 위키드 되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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