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기/저팔계] 보모의 나날
W.B - 츠쿠리
01
추운 겨울날이었다. 모처럼 삼장과 오공이 오정의 집으로 찾아왔다. 삼장은 일하는 도중에 들린 거라 금방 가봐야한다고 말했지만 팔계는 모처럼 온 것이니 몸이라도 녹이고 가라는 뜻에서 향이 잘 우려진 차를 가져와 삼장과 오공에게 건넸다. 오정과 지내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가끔은 이렇게 시끌벅적한 것도 좋았다. 물론 시끌벅적한 것은 삼장과 팔계가 아니라 오정과 오공이었다. 틈만 나면 툭닥거리는 저 두 사람을 보는 것은 꽤나 즐거웠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삼장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 같지 않았지만.
"마음대로 남의 방을 어지럽히지 말란 말야. 이 바보 원숭아!"
"뭐야, 일일이 따지지 마, 이 쫌생이 물귀신아!"
오공의 말에 발끈했는지 오정의 얼굴이 실룩거리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몸은 성인인데 왜 지능은 오공과 비슷한 걸까나. 팔계가 나지막히 한숨을 쉬는 사이, 오공의 머리카락을 잽싸게 잡은 오정은 삼장에게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삼장! 너 대체 꼬맹이 교육을 어떻게 시킨거냐?"
'난 꼬맹이 아냐!"
오정이 화를 내든 말든, 오공이 바락거리며 대들든 말든, 삼장은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대답한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난 가르친 거 없어, 원래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은 난 원숭이 교육 따윈 안 시켜, 라는 교육 정신과는 억만년 쯤 떨어져있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 자비 정신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저 남자가 삼장이라니. 불교의 미래는 어둡구만, 하고 생각하던 오정은 문득 조용한 팔계를 보고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조용히 관전을 자처하고 있던 팔계의 두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마치 기계가 끼기긱거리며 돌아가는 것처럼 몸을 돌려 삼장을 바라본 팔계의 눈 앞으로 아침에 읽었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은 훗날 아이의 폭력성에 영향을 미쳐...'라는 신문기사가 스쳐지나갔다.
딸깍. 팔계의 보모 스위치가 켜졌다. 팔계는 자발적으로 오공의 교육담당-을 빙자한 보모-으로 낙찰되었다.
02
오공은 참 가르치는 맛이 있는 학생이었다. 아무것도 몰라 가르칠 때 난관을 겪을 줄 알았던 팔계의 예상과는 달리 국어시간은 나름 수월하게 흘러갔다. 오공은 간단한 글은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글자부터 가르치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험한 바위산에 갇혀있던 오공의 과거를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인 팔계로서는 오공에게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글 읽는 법, 누가 가르쳐주었나요?"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연 팔계의 말에 오공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오공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있었다.
"……기억이 안 나."
조용히 입을 여는 오공의 침울한 목소리에 팔계는 당황했다. 이렇게 기운없이 축 쳐진 오공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팔계를 가만히 쳐다보던 오공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팔계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지만,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을거야."
그래, 마치 팔계처럼. 조용히 덧붙이는 말에 스며있는 온기에 팔계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제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제 손으로 몇 명의 요괴를 죽였나. 그 속에는 분명 오공만한 아이도 있었다. 저가 벌인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제 손에 묻힌 피만은 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안에는 무서운 괴물이 웅크리고 있을 터다.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잔인하게 눈을 빛내고 있겠지.
그래, 결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 자조적인 팔계의 대답에 오공은 팔계의 손을 더욱 더 꼬옥 잡으며 미소지었다.
"아니. 팔계는 따뜻해."
미소가 눈부셔서 팔계는 차마 오공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붙잡은 손은 따뜻했고, 그랬기에 제 마음에 온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03
오공은 아까도 말했지만 참 가르치는 맛이 있는 학생이었다. 일단 흥미가 있는 것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성취도 꽤 빠른 편이었다. 국어시간에 좋아하는 동화책으로 심화 읽기를 가르치니 금방 익혔다. 물론 비유법이나 은유법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어려운 문장은 작문하지 못한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팔계는 이정도가 어디냐고 생각하고는 그냥 넘겨버렸다. 애초에 오공이 비유법과 은유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시를 창작한다면, 그거야 말로 호러일지 몰랐다.
하지만 흥미가 있는 것을 쉽게 배운다는 말은 흥미가 없으면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다. 팔계는 그것을 금방 깨달았다. 오공에게 있어 흥미가 없는 대상은 산수였으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팔계는 베테랑 보모답게 오공이 좋아하는 먹을 것으로 산수로 배우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팔계는 먹을 걸 이용하는 것을 관뒀다. 오공이 먹을 것을 통해 산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와! 귤이다, 귤!"
결과적으로 간식시간이 되어버린 산수시간을 보며 팔계는 이제껏 자신이 가르쳤던 학교 선생으로서의 경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학교 선생님이었을 때 아이들이 저가 얼마나 잘 가르친다고 선망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던가. 팔계는 왜 삼장과 오정이 오공더러 원숭이라고 부르는 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공의 단순함은 원숭이와 비슷했다.
이렇게 이해를 못하는데도 화가 안나게 하는 것이 오공이 가진 재주라면 재주라고 생각하며 팔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오공과의 수업은 꽤나 즐거웠고, 유쾌했다. 오정이 속 썩이는 날이면 기분전환도 덩달아 되었기에 팔계는 오공과의 수업시간을 좋아했다.
04
"이런, 생각보다 더 늦겠네."
팔계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평소 잘 가는 야채가게 아주머니께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가게를 잠시 맡기시는 바람에 그만 늦어버렸다. 오늘은 삼장과 오공이 집에 와서 함께 스키야키를 해먹기로 한 날이었다. 오공은 한 번 스키야키를 맛본 뒤로 그 맛에 푹 빠져있었는데 평소 수업태도가 좋은 오공을 칭찬하는 의미로 집으로 초대했다. 마침 삼장도 시간이 난다고 하기에 함께 오라고 했었는데 정작 재료를 사러 간 팔계가 오지 않으니 꽤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상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양손에 가득 들린 재료를 보며 팔계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팔계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팔계의 바로 옆에 총알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서 총을 쏠 만한 사람은, 팔계가 알기로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팔계가 고개를 들자 엉망이 된 집 안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벽 곳곳에 박힌 총알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총을 쏘는 삼장과 그걸 신묘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몸동작으로 날렵하게 피하는 오정과 오공. 팔계가 칙칙한 집을 바꾼다고 장식한 액자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였고 테이블과 의자는 나동그라져있었으며 꽃병 또한 깨져 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리 안 와? 이 망할 자식들아!"
"거기로 가면 죽잖아!"
"말 잘 했다, 원숭아! 악, 삼장 너 총 좀 그만 쏴!"
팔계는 멀거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팔계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싸우면 싸울 수록,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갔다. 화남, 이상하지요? 왜 성인인데 어린아이로 보이는 사람이 둘이나 있을까요? 아, 방금 삼장이 맞춘 컵. 저거 제가 꽤나 아꼈던 머그컵인데 산산조각이 나버렸네요. 팔계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따라 화남이 더욱 보고 싶었다.
분명히 돌봐야 할 사람은 오공뿐인데 어째서 다 큰 성인이 돌봐야 할 아이로 보이는 걸까. 그런일은 없겠지만-그리고 결코 있어서도 안되지만- 만약 저 세 사람과 항상 함께 있면 모든 일의 뒷처리는 자신이 맡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 설마하니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만은. 팔계는 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년 후, 팔계의 예감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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