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생일합작] 봄의 캄파눌라
W.B - 쿠리
5월.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싱그러웠던 봄의 끝물이 찾아왔다.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맑고 푸르렀고 여름에 가까운 훈풍이 살랑거리며 초목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수많은 생명이 잉태되고 박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명의 냄새가 넘실거리는 계절은 곳곳에 씨앗을 뿌렸고 아이들은 봄에 취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까르르 웃었다. 바다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피 냄새와 비명소리마저 잠시 주춤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고래를 닮은 배는 도리어 침묵에 빠져 침잠했다. 5월의 마지막에 가까운 날. 그것은 한 소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시작한 날이다.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을 꽃피우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으나 끝내 그가 태어난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덧없이 져버렸다.
그런 청년을 기리기 위해 흰 수염 해적단은 그의 기일 외에 생일 또한 챙겼다. 어두운 밤배에 불을 밝히고 음식과 술을 나르고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기만이라 해도 좋았다. 더 이상 축하받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건만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바다는 그들의 터전이며 삶이었으니 어쩌면 바다 밑에 잠들어 있을 형제에게 인사라도 전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2년. 에이미가 죽은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으나 그의 죽음을 마음에 묻어버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슬픔을 잊기에는 그와 함께 걸어간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고, 그는 함께 걸어간 세월보다 더 깊고 강렬한 상흔을 남긴 채 떠나갔다.
“그러고 보니 왜 그 동안 에이미의 생일을 챙기지 않은 거야?”
모비딕의 연회는 늘 밝고 유쾌했지만 5월 30일에 열리는 연회만큼은 예외였다.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다가올 무렵 시작된 연회는 해가 지고 아스라이 떠오른 밤별이 검푸른 하늘을 밝혔음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갑판에 둘러앉아 말없이 술을 홀짝이던 형제들 사이로 에이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은 타당했다. 모비딕의 막내인지라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함께한 세월이 짧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시간상으로는 이미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중 이 년 정도는 에이미의 탈주와 정상결전에 힘입어 미처 챙겨줄 정신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전의 기간마저도 에이미의 생일은 단 한 번도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에이미가 평소에 형제들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적막한,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로 기억되었을 5월의 어느 날.
“…그야 처음에는 에이미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지요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르코가 느릿느릿 답했다. 마르코는 흰 수염이 죽은 후 모비딕을 이끄는 실질적인 맏형으로서 안정기를 구축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손에 럼주를 들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는 먼 바다를 배회하는 것 같기도,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미는 어릴 때 1년을 넘길 거라는 장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니께….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어요이. 그래서 첫 해에는 일부러 생일도 묻지 않았지요이.”
마르코는 손에 든 럼주를 홀짝였다. 그가 목을 축이는 만큼 목소리에도 조금씩 물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그 쬐끄만 아이가 생기를 폴폴 흘리며 돌아다니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이? 정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그렇게 마음 먹었는데두 어느 순간부터 속절없이 정을 주고 있었던겨….”
“뭐, 요컨대 에이미가 우리를 사랑해준 만큼 우리도 그 애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야.”
이제는 럼주를 병째로 들이키고 있는 마르코를 대신해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온 삿치가 형제들 사이로 넉살좋게 주저앉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자못 쾌활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차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면 차라리 더 일찍 사랑해줬다면 좋았을 걸. 1년이라도 더 그 애를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요새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해.”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두서없는 넋두리에 에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삿치는 대답 대신 묵묵히 술을 털어 넣었다. 맨 정신으로 말하기에는 그 때의 기억이 지나치게 쓰라렸던 탓이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뇌리를 잠식해 목소리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었다.
“에이미 녀석이, 모비딕에 살게 된 지 1년이 조금 넘었나? 이미 정도 잔뜩 들어버렸고, 1년을 넘겼으니 모두들 어린 송장 하나 치울 걱정을 덜었다며 에이미의 생일파티를 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한테 생일을 안 챙겨준 건 너무 했다고 말이야…. 하긴 그 어린 게 얼마나 서운했겠어? 그래서 생일이 언제냐고 물으러 갔는데, 그 어린애가, 이렇게 말하지 뭐야….”
[제 생일이요? 어, 제 생일 같은 건 챙겨주지 않으셔도 돼요! 나 말고도 어차피 챙겨야 할 사람 많잖아요.]
[나 참, 어린 녀석이 별 걱정을 다 하고. 아무리 그래도 네 생일 정도는 충분히 챙겨줄 수 있다고. 이럴 때는 사양 말고 냉큼 생일이랑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는 거야, 욘석아!]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어린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마치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뭐냐고 묻는 것 마냥 태평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 같은 거 챙기느라 굳이 삿치 대장님이 수고스러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난 여기 없었어야 했으니까, 이런 걸로 폐를 끼칠 수는 없는 걸요.]
아아,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던 것 같다. 에이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히자 당황해하면서도 이내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를 곱게 휘며 죽을 만큼 행복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걸 아버지께서 자식으로 받아들여주시고 형제로 인정해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생일인 것처럼 죽을 만큼 행복하니까, 내 생일은 몰라도 돼요.]
[…뭐,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잊지 마, 넌 우리의 형제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던지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음 속에 자그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다는 험난했고 어린아이가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눈앞의 아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가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그 때 멱살을 쥐어서라도 생일을 알아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적어도 어린 동생을 생일 한번 챙겨주지 못한 채 떠나보낸 무정한 형은 되지 않았을 테니.
“뭐, 그런 이유로 에이미는 끝내 자신의 생일을 말해주지 않았어. 시간이 좀 지나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고집이 센지….”
“푸흡, 한 번 정한 건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성격은 어릴 때부터였군.”
“그래. 매년 꼬박꼬박 물어봤는데도 끝내 입을 다물었지요이. 심지어 아버지가 물어봤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이. 맹랑한 녀석 같으니.”
푸하, 들이키던 럼주가 끝을 다했는지 마르코가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던 새 병을 집어 들었다. 에이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그래요이. 아무리 흰 수염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아들로 맞았으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신거지요이. 종종 불러서 과자라도 쥐어주실 정도로 귀여워했으니 그런 이야기를 허투루 넘기실 리가 없지요이.”
“하지만 그 멍청이는 아버지한테도 말 안했어.”
“이조우!”
대장진들의 술판에서 잠시 멀어져 16번대 대원들을 살피고 온 이조우가 다시금 가세했다. 작작 좀 마시라며 대원들에게 잔소리를 잔뜩 하고 왔으면서 정작 그의 손에도 어김없이 술잔이 들려있었다.
“이조우도 그 때 옆에 있었어?”
“그래. 아버지가 진료를 받을 시간이어서 들렀다가 우연찮게 듣게 됐지.”
이조우가 새하얀 이마를 찌푸리며 불퉁하게 답했다.
“그 녀석, 아버지가 물었는데도 끝내 대답하지 않더군. 이미 구해주고 아들로 삼아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여기서 더 빚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그걸 그냥 보고만 계셨단 말이야?”
“당연히 아니지! 아버지는 아이는 아이답게 구는 거라고 혼내셨어. 다만 그 멍청이가 끝내 웃는 얼굴로 사양했을 뿐이야. 생일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 원, 아버지가 패기까지 실었는데도 꼼짝도 안하더군!”
이야기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조우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결국 시근거리며 화를 토해내다 못한 이조우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평소에 술을 자재했으나 오늘만큼은 울화통이 터져 마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체 가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가족 사이에 빚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나 하고, 그 때 두들겨 패서라도 그 사고방식을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
“그랬다면…, 그 멍청이가 은혜를 갚겠다고 멋대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어쩌면 지금도 살아있어서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내 목소리는 점차 힘이 빠져, 후회와 슬픔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건 모비딕 사람들이 한 번쯤 떠올려본 생각이기도 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부질없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거나 후회를 짊어지고 난 후 헛된 기대를 품고 상상해보곤 하는 질척한 미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늘 그렇듯 후회를 번복하고 이따금 부질없는 상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보곤 하는 것이다.
“하여튼 천하의 머저리 같으니!”
“이조우, 취했어요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말이 너무 심하다. 어서 들어가 자.”
“취한 거 아냐. 열 받아서 그래, 열 받아서! 아직 더 있을 수 있다고. 적어도 날이 바뀌기 까지는 말이야.”
이조우가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며 퉁명스레 답했다. 어느새 달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흘렀던가.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은 바뀌어 5월의 마지막 날로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며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다만 아직 그 때가 아닐 뿐이다.
“마르코 대장! 저 멀리서 산하 해적단의 깃발이 보입니다! 화이티 베이의 쇄빙선입니다!”
“오,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요이. 모두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해라요이!”
연회가 열리는 와중에도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견문색 패기로 익숙한 기운이 잡힌다 싶었더니 화이티 베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화이티 베이는 에이미와 인연이 남달랐던 산하 해적단이라 그런지 작년에도 에이미의 기일과 생일 모두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 중에서도 레몬이라고 했던가? 에이미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았던 여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찾아와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몬은 배에 올라타자마자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술 항아리부터 내놓았다.
“너무 늦게 와서 염치가 없지만… 슬슬 술이 떨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요.”
“오오, 술이다!”
“크으!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레몬이라고 했던가? 어서 여기 앉아! 술을 들고 와줬는데 늦은 게 무슨 흠이 되겠어?”
“캬! 겨울의 과실주라니 내가 이 맛을 못 잊어서 여태까지 안 들어가고 있었나보다!”
와하하하! 능청스러운 너스레에 떠들썩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 원, 못 말린다니까.”
죠즈가 피식 웃더니 화이티 베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르도, 하루타도 그리고 다른 대장진들도 조금씩 술판에서 빠져나와 화이티 베이 일당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대원들과 어울려 과실주를 마셨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들 틈에 어울리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모비딕의 활기는 분명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것 중 하나였으나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아.’
그리고 마르코는 기민하게 이질감의 원인을 눈치 챘다. 입과 눈의 표정이 달랐다. 늘 같은 방향으로 휘어져 있던 두 주름이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은 올라가 있으나 눈은 잔뜩 처졌다. 마르코는 그들의 눈에서 여전한 슬픔을 읽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어버린 어린 형제의 안배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이리라.
마르코는 문득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에이미는 끝까지 당신들을 걱정했어요.]
작년 5월 30일, 날이 바뀌기까지 채 몇 분을 남겨 둔 시각이었다. 과실주를 잔뜩 들고 온 레몬 덕분에 어둑어둑하던 모비딕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인지 형제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술을 마셨고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레몬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즈음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연회가 파해가는 시점에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언젠가, 그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한다면…,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배에 방문해달라고. 그래서, 당신들이 더 이상 울지 않게 해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는 술에 취한 까닭일까, 아니면….
[저는 잘 해냈나요? 당신들이 웃을 수 있게 한 걸까요? 그의 부탁을…, 조금이나마 들어줄 수 있었나요…?]
갑판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것은 혼잣말일까. 아니, 어쩌면 에이미가 조금이나 전하고 싶었던 마음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모두 버려달라고 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어요…. 정말 끝까지 바보 같은 사람….]
[…….]
그래, 그는 정말로 바보 같은 동생이었다. 죽어서도 형제들을 걱정하고, 자신 때문에 슬픔에 젖는 것조차 싫어 차라리 잊어주길 원한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정작 잊으면 잊는 대로 잔뜩 서운해 하면서도 끝내 내색하지 않을 녀석. 하지만 그랬기에 그를 좋아했다. 그 태양 같은 상냥함에 정신없이 이끌렸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이토록 사랑하게 됐다. 길고 긴 상실감에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고통마저 품고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미안하게도 에이미, 그 무엇도 널 대신할 수는 없었어요이.”
마르코는 쓰게 웃고는 형제들로부터 등을 돌려 갑판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불이 밝혀진 선내의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더니 이윽고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게 됐다.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이 익숙하다. 문득 담배가 고파져 주머니와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피지도 않던 담배가 있을 리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만 가끔 한 개비씩 빌리곤 했으니. 그러나 뒷골이 당기는 것이 유독 한 대를 입에 물고 싶은 날이었다. 고픈 것이 담배인지 아니면 눈에 아른거리는 동생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따라 에이미가 보고 싶었다.
마르코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이 드리워진 검푸른 바다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고 삶이자, 그들의 형제를 보낸 준 바다. 또한 그들의 형제를 다시 삼켜버린 바다. 마르코는 한참동안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태양을 삼켜버린 바다는 짙고 어두워서 눈을 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고요함이 있었다.
마르코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에이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음을, 끝내 부정하고 싶어 외면해왔음을.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순간들을 잘 이겨내 주었듯이, 죽어버린 그의 형제는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그 동안 잘 있었냐며 밝은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기에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였으니.
허나 이제는 슬슬 모든 것을 내려놔야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죽은 자를 두고 이리 미련을 보이는 것은 에이미 녀석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그 만큼의 죽음을 봐왔다. 죽음은 어느새 익숙한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된 만큼 죽음을 가슴에 묻는 일도 쉬워졌다. 그래,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이제 슬슬 내려놔야지요이….”
내려놔야지. 5월이면 에이미가 유독 케이크를 자주 먹던 것도, 정작 몇 입 베어 물다가 멋쩍게 웃으며 남은 케이크를 건네던 것도, 자기 생일은 챙기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일은 유독 챙기던 모습도, 전부 내려놔야지.
전부, 내려놔야하는데.
[생일 축하해요, 마르코!]
“………!”
마르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웃는 얼굴을, 애써 모은 용돈으로 사온 선물을 고사리 같던 손으로 건네며 수줍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르코는 숨 죽여 오열했다.
[저는 5월 30일에 태어났었어요.]
[기왕 기억할거면… 그런 날이 좋잖아요.]
종종 생각하곤 한다. 끝내 생일을 이야기하지 않던 에이미가 죽기 직전에 털어놓듯이 자신의 생일을 말했던 일을. 자신에게 전하려고 의도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들었다. 에이미는 결코 축하받지 못할 생일을 말하면서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서웠을까? 쓸쓸했을까? 아니면…외로웠을까?
투둑.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불빛이 닿지 않는 갑판은 눈물 자국 또한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날이 넘어가고, 5월의 마지막 날이 찾아올 것이다. 형제들은 또 다시 슬픔을 가슴에 묻고 웃으며 새로운 나날을 맞이할 것이며 그렇게 모든 것은 어둠에 묻힌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에이미는 어떤 아픔이 있어도 티내지 않고 밝게 웃는 녀석이었지만 실은 혼자인 것에 지독히도 외로움을 탔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생일이니까, 바다에 홀로 잠들어 있을 동생을 위해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라? 마르코, 왜 울고 있어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이기도 했다. 근 2년 넘게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환청인가. 너무 울어서 잠시 파도소리에 착각이라도 했나보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닿는 감촉은, 흉터로 가득한 손은 분명 기억에 있었다.
“에이미…?”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햇살 같은 미소가 있었다. 부스스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휘어진 눈매가 날카로운 금안을 감추고 둥글게 웃었다. 마르코는 눈을 깜박였다. 붉게 충혈 되었을 눈에 담긴 것은 바다에서 온 소년이다. 소년은 이윽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바다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삶인 바다에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에이미,”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라도 좋으니 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마르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요이.”
그 말을 끝으로, 날이 바뀐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다. 전하지 못한 말은 틀림없이 전해졌다.
“에?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거에요?”
에이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이윽고 귀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얼굴, 목, 그리고 몸 전체가 수줍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래도 그런 거, 엄청 기쁘네….”
그 웃음은 분명 봄의 캄파눌라와 닮아있었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다.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 어느새 모비딕 한 귀퉁이를 차지한 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춘 상냥한 형제를 닮았다.
“마르코, 여기서 뭐…에이미?”
“에이스 대장도 참!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거기서 에이미가 왜 나오는…에, 에이미?!”
“앗, 안녕하세요 줄리!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에이스 씨는 여전히 잘 생기셨네!”
“컥…!”
“헉, 줄리 정신 차려!”
“줄리가 기절했다아아!”
곧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또 다시 피어날 봄의 캄파눌라를 기다리며.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합작후기 :
안녕하세요. 쿠리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미 생일 합작에 다른 분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요. <우리는 삼총사!> 에 입덕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일 합작에 참여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사실 저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흑흑 에이미 사랑해! 생일 축하해!
합작 이야기를 해보자면 생일 합작은 생각보다 주제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소재를 쥐어 짜내다 보니 답이 없는 피폐물 3종 세트가 나왔는데 생일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하게 되어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 지금 보고 계시는 글입니다. 천만다행이죠.
모티브는 우리는 삼총사! 원작에서 얻었습니다.
121화 ‘삼총사’ 中
“그러고 보니 그래. 본인 생일은 별로 챙기지 않았잖아.”
아하. 에이스의 말이 맞았다. 이 모비딕의 위에 승선한 이후로는 그저 하루하루가 생일처럼 기뻤으니 말이야. 달리 생일을 챙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반쯤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가끔은, 삿치에게 조각 케이크를 부탁하며 생일 기분을 내보기도 했지만서도.
125화 ‘에필로그’ 中
혹시라도,
내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했을 때, 내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하면.
또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우리 배에 방문해주세요. 더 이상 그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여러분께 드린 사랑은 남기되, 저와의 기억은 모두 바다 한켠에 버려졌으면 합니다.
126화 ‘에필로그’ 中
침묵하고 있던 사내는 마른 눈으로 무덤의 한켠에 놓인 술병과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잔을 채운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데, 신기한 일이지. 보통 누군가의 애도를 위해 이런 술을 준비하진 않을텐데.
캄파눌라(bellflower)의 꽃말 : 따뜻한 사랑, 상냥한 사랑, 변하지 않는다.
글이 전개되고 있는 시점은 에이미가 죽고 2년 후의 5월 30일입니다. 저는 에이미가 다시 원피스 세계로 돌아온 것이 5월 30일, 즉 에이미의 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호크가 에이미의 무덤을 방문하는 날짜가 5월 30일이라는 점, 잔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어요. 다행히 모비딕이 에이미를 기리기 위해 무덤과 그리 떨어져있지 않은 해역에 머무르고 있어 에이미는 무사히 생일 직전에 당도하여 축하받을 수 있었다는 후일담입니다.
개인적으로 흰 수염 해적단과 에이미의 일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마르코와 에이미의 맏형과 막내라는 포지션을 좋아해요. 에이미를 주운 게 마르코라는 것도, 제일 에이미를 동생처럼 여기는 게 마르코라는 점도요. 그래서인지 유독 후반부에 마르코 독백이 많이 추가됐습니다. 쓰면서 마르코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그치만 에이미가 선물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저 대신 마르코를 많이 힐링시켜 줄 거라고 믿습니다ㅠㅠ 물론 정신 차린 흰 수염 해적단이 진짜 에이미가 맞는지 심문하는 과정이 남았지만...3년 후의 생일은 보다 확실하게 챙겨줄 수 있겠죠?ㅎㅎ
어떻게든 생일이라는 주제에 맞게 녹여보려고 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미호크도 등장시키고 싶었지만 에이미는 사랑보다 우정이라서요^^...나중에 에이미가 찾아가서 만나는 걸로ㅎㅎㅎ!
다시 한번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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