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생일합작] 봄의 캄파눌라

W.B - 쿠리






5.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싱그러웠던 봄의 끝물이 찾아왔다.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맑고 푸르렀고 여름에 가까운 훈풍이 살랑거리며 초목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수많은 생명이 잉태되고 박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명의 냄새가 넘실거리는 계절은 곳곳에 씨앗을 뿌렸고 아이들은 봄에 취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까르르 웃었다. 바다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피 냄새와 비명소리마저 잠시 주춤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고래를 닮은 배는 도리어 침묵에 빠져 침잠했다. 5월의 마지막에 가까운 날. 그것은 한 소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시작한 날이다.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을 꽃피우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으나 끝내 그가 태어난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덧없이 져버렸다.

그런 청년을 기리기 위해 흰 수염 해적단은 그의 기일 외에 생일 또한 챙겼다. 어두운 밤배에 불을 밝히고 음식과 술을 나르고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기만이라 해도 좋았다. 더 이상 축하받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건만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바다는 그들의 터전이며 삶이었으니 어쩌면 바다 밑에 잠들어 있을 형제에게 인사라도 전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2. 에이미가 죽은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으나 그의 죽음을 마음에 묻어버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슬픔을 잊기에는 그와 함께 걸어간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고, 그는 함께 걸어간 세월보다 더 깊고 강렬한 상흔을 남긴 채 떠나갔다.


그러고 보니 왜 그 동안 에이미의 생일을 챙기지 않은 거야?”


모비딕의 연회는 늘 밝고 유쾌했지만 530일에 열리는 연회만큼은 예외였다.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다가올 무렵 시작된 연회는 해가 지고 아스라이 떠오른 밤별이 검푸른 하늘을 밝혔음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갑판에 둘러앉아 말없이 술을 홀짝이던 형제들 사이로 에이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은 타당했다. 모비딕의 막내인지라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함께한 세월이 짧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시간상으로는 이미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중 이 년 정도는 에이미의 탈주와 정상결전에 힘입어 미처 챙겨줄 정신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전의 기간마저도 에이미의 생일은 단 한 번도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에이미가 평소에 형제들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적막한,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로 기억되었을 5월의 어느 날.


그야 처음에는 에이미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지요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르코가 느릿느릿 답했다. 마르코는 흰 수염이 죽은 후 모비딕을 이끄는 실질적인 맏형으로서 안정기를 구축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손에 럼주를 들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는 먼 바다를 배회하는 것 같기도,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미는 어릴 때 1년을 넘길 거라는 장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니께.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어요이. 그래서 첫 해에는 일부러 생일도 묻지 않았지요이.”


마르코는 손에 든 럼주를 홀짝였다. 그가 목을 축이는 만큼 목소리에도 조금씩 물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그 쬐끄만 아이가 생기를 폴폴 흘리며 돌아다니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이? 정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그렇게 마음 먹었는데두 어느 순간부터 속절없이 정을 주고 있었던겨.”


, 요컨대 에이미가 우리를 사랑해준 만큼 우리도 그 애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야.”


이제는 럼주를 병째로 들이키고 있는 마르코를 대신해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온 삿치가 형제들 사이로 넉살좋게 주저앉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자못 쾌활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차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면 차라리 더 일찍 사랑해줬다면 좋았을 걸. 1년이라도 더 그 애를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요새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해.”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두서없는 넋두리에 에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삿치는 대답 대신 묵묵히 술을 털어 넣었다. 맨 정신으로 말하기에는 그 때의 기억이 지나치게 쓰라렸던 탓이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뇌리를 잠식해 목소리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었다.


에이미 녀석이, 모비딕에 살게 된 지 1년이 조금 넘었나? 이미 정도 잔뜩 들어버렸고, 1년을 넘겼으니 모두들 어린 송장 하나 치울 걱정을 덜었다며 에이미의 생일파티를 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한테 생일을 안 챙겨준 건 너무 했다고 말이야. 하긴 그 어린 게 얼마나 서운했겠어? 그래서 생일이 언제냐고 물으러 갔는데, 그 어린애가, 이렇게 말하지 뭐야.”

 


[제 생일이요? , 제 생일 같은 건 챙겨주지 않으셔도 돼요! 나 말고도 어차피 챙겨야 할 사람 많잖아요.]

[나 참, 어린 녀석이 별 걱정을 다 하고. 아무리 그래도 네 생일 정도는 충분히 챙겨줄 수 있다고. 이럴 때는 사양 말고 냉큼 생일이랑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는 거야, 욘석아!]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어린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마치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뭐냐고 묻는 것 마냥 태평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 같은 거 챙기느라 굳이 삿치 대장님이 수고스러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난 여기 없었어야 했으니까, 이런 걸로 폐를 끼칠 수는 없는 걸요.]

아아,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던 것 같다. 에이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히자 당황해하면서도 이내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를 곱게 휘며 죽을 만큼 행복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걸 아버지께서 자식으로 받아들여주시고 형제로 인정해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생일인 것처럼 죽을 만큼 행복하니까, 내 생일은 몰라도 돼요.]

[,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잊지 마, 넌 우리의 형제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던지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음 속에 자그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다는 험난했고 어린아이가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눈앞의 아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가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그 때 멱살을 쥐어서라도 생일을 알아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적어도 어린 동생을 생일 한번 챙겨주지 못한 채 떠나보낸 무정한 형은 되지 않았을 테니.

 

, 그런 이유로 에이미는 끝내 자신의 생일을 말해주지 않았어. 시간이 좀 지나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나 고집이 센지.”

푸흡, 한 번 정한 건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성격은 어릴 때부터였군.”

그래. 매년 꼬박꼬박 물어봤는데도 끝내 입을 다물었지요이. 심지어 아버지가 물어봤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이. 맹랑한 녀석 같으니.”

푸하, 들이키던 럼주가 끝을 다했는지 마르코가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던 새 병을 집어 들었다. 에이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그래요이. 아무리 흰 수염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아들로 맞았으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신거지요이. 종종 불러서 과자라도 쥐어주실 정도로 귀여워했으니 그런 이야기를 허투루 넘기실 리가 없지요이.”

하지만 그 멍청이는 아버지한테도 말 안했어.”

이조우!”


대장진들의 술판에서 잠시 멀어져 16번대 대원들을 살피고 온 이조우가 다시금 가세했다. 작작 좀 마시라며 대원들에게 잔소리를 잔뜩 하고 왔으면서 정작 그의 손에도 어김없이 술잔이 들려있었다.


이조우도 그 때 옆에 있었어?”

그래. 아버지가 진료를 받을 시간이어서 들렀다가 우연찮게 듣게 됐지.”


이조우가 새하얀 이마를 찌푸리며 불퉁하게 답했다.


그 녀석, 아버지가 물었는데도 끝내 대답하지 않더군. 이미 구해주고 아들로 삼아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여기서 더 빚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그걸 그냥 보고만 계셨단 말이야?”

당연히 아니지! 아버지는 아이는 아이답게 구는 거라고 혼내셨어. 다만 그 멍청이가 끝내 웃는 얼굴로 사양했을 뿐이야. 생일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 원, 아버지가 패기까지 실었는데도 꼼짝도 안하더군!”


이야기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조우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결국 시근거리며 화를 토해내다 못한 이조우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평소에 술을 자재했으나 오늘만큼은 울화통이 터져 마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체 가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가족 사이에 빚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나 하고, 그 때 두들겨 패서라도 그 사고방식을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

그랬다면, 그 멍청이가 은혜를 갚겠다고 멋대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어쩌면 지금도 살아있어서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내 목소리는 점차 힘이 빠져, 후회와 슬픔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건 모비딕 사람들이 한 번쯤 떠올려본 생각이기도 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부질없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거나 후회를 짊어지고 난 후 헛된 기대를 품고 상상해보곤 하는 질척한 미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늘 그렇듯 후회를 번복하고 이따금 부질없는 상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보곤 하는 것이다.


하여튼 천하의 머저리 같으니!”

이조우, 취했어요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말이 너무 심하다. 어서 들어가 자.”

취한 거 아냐. 열 받아서 그래, 열 받아서! 아직 더 있을 수 있다고. 적어도 날이 바뀌기 까지는 말이야.”


이조우가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며 퉁명스레 답했다. 어느새 달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흘렀던가.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은 바뀌어 5월의 마지막 날로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며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다만 아직 그 때가 아닐 뿐이다.


마르코 대장! 저 멀리서 산하 해적단의 깃발이 보입니다! 화이티 베이의 쇄빙선입니다!”

,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요이. 모두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해라요이!”


연회가 열리는 와중에도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견문색 패기로 익숙한 기운이 잡힌다 싶었더니 화이티 베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화이티 베이는 에이미와 인연이 남달랐던 산하 해적단이라 그런지 작년에도 에이미의 기일과 생일 모두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 중에서도 레몬이라고 했던가? 에이미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았던 여인은 올해도 어김없이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찾아와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몬은 배에 올라타자마자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술 항아리부터 내놓았다.


너무 늦게 와서 염치가 없지만슬슬 술이 떨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요.”

오오, 술이다!”

크으!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레몬이라고 했던가? 어서 여기 앉아! 술을 들고 와줬는데 늦은 게 무슨 흠이 되겠어?”

! 겨울의 과실주라니 내가 이 맛을 못 잊어서 여태까지 안 들어가고 있었나보다!”


와하하하! 능청스러운 너스레에 떠들썩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 원, 못 말린다니까.”


죠즈가 피식 웃더니 화이티 베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르도, 하루타도 그리고 다른 대장진들도 조금씩 술판에서 빠져나와 화이티 베이 일당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대원들과 어울려 과실주를 마셨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들 틈에 어울리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모비딕의 활기는 분명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것 중 하나였으나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


그리고 마르코는 기민하게 이질감의 원인을 눈치 챘다. 입과 눈의 표정이 달랐다. 늘 같은 방향으로 휘어져 있던 두 주름이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은 올라가 있으나 눈은 잔뜩 처졌다. 마르코는 그들의 눈에서 여전한 슬픔을 읽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어버린 어린 형제의 안배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이리라.


마르코는 문득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에이미는 끝까지 당신들을 걱정했어요.]

작년 530, 날이 바뀌기까지 채 몇 분을 남겨 둔 시각이었다. 과실주를 잔뜩 들고 온 레몬 덕분에 어둑어둑하던 모비딕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인지 형제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술을 마셨고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레몬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즈음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연회가 파해가는 시점에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언젠가, 그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한다면,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배에 방문해달라고. 그래서, 당신들이 더 이상 울지 않게 해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는 술에 취한 까닭일까, 아니면.

[저는 잘 해냈나요? 당신들이 웃을 수 있게 한 걸까요? 그의 부탁을, 조금이나마 들어줄 수 있었나요?]

갑판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것은 혼잣말일까. 아니, 어쩌면 에이미가 조금이나 전하고 싶었던 마음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모두 버려달라고 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어요. 정말 끝까지 바보 같은 사람.]

[…….]



그래, 그는 정말로 바보 같은 동생이었다. 죽어서도 형제들을 걱정하고, 자신 때문에 슬픔에 젖는 것조차 싫어 차라리 잊어주길 원한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정작 잊으면 잊는 대로 잔뜩 서운해 하면서도 끝내 내색하지 않을 녀석. 하지만 그랬기에 그를 좋아했다. 그 태양 같은 상냥함에 정신없이 이끌렸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이토록 사랑하게 됐다. 길고 긴 상실감에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고통마저 품고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미안하게도 에이미, 그 무엇도 널 대신할 수는 없었어요이.”


마르코는 쓰게 웃고는 형제들로부터 등을 돌려 갑판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불이 밝혀진 선내의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더니 이윽고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게 됐다.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이 익숙하다. 문득 담배가 고파져 주머니와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피지도 않던 담배가 있을 리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만 가끔 한 개비씩 빌리곤 했으니. 그러나 뒷골이 당기는 것이 유독 한 대를 입에 물고 싶은 날이었다. 고픈 것이 담배인지 아니면 눈에 아른거리는 동생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따라 에이미가 보고 싶었다.


마르코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이 드리워진 검푸른 바다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고 삶이자, 그들의 형제를 보낸 준 바다. 또한 그들의 형제를 다시 삼켜버린 바다. 마르코는 한참동안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태양을 삼켜버린 바다는 짙고 어두워서 눈을 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고요함이 있었다.

마르코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에이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음을, 끝내 부정하고 싶어 외면해왔음을.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순간들을 잘 이겨내 주었듯이, 죽어버린 그의 형제는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그 동안 잘 있었냐며 밝은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기에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였으니.

허나 이제는 슬슬 모든 것을 내려놔야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죽은 자를 두고 이리 미련을 보이는 것은 에이미 녀석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그 만큼의 죽음을 봐왔다. 죽음은 어느새 익숙한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된 만큼 죽음을 가슴에 묻는 일도 쉬워졌다. 그래,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이제 슬슬 내려놔야지요이.”


내려놔야지. 5월이면 에이미가 유독 케이크를 자주 먹던 것도, 정작 몇 입 베어 물다가 멋쩍게 웃으며 남은 케이크를 건네던 것도, 자기 생일은 챙기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일은 유독 챙기던 모습도, 전부 내려놔야지.


전부, 내려놔야하는데.

 

[생일 축하해요, 마르코!]

 

………!”


마르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웃는 얼굴을, 애써 모은 용돈으로 사온 선물을 고사리 같던 손으로 건네며 수줍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르코는 숨 죽여 오열했다.

 


[저는 530일에 태어났었어요.]

[기왕 기억할거면그런 날이 좋잖아요.]

 


종종 생각하곤 한다. 끝내 생일을 이야기하지 않던 에이미가 죽기 직전에 털어놓듯이 자신의 생일을 말했던 일을. 자신에게 전하려고 의도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들었다. 에이미는 결코 축하받지 못할 생일을 말하면서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서웠을까? 쓸쓸했을까? 아니면외로웠을까?

투둑.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불빛이 닿지 않는 갑판은 눈물 자국 또한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날이 넘어가고, 5월의 마지막 날이 찾아올 것이다. 형제들은 또 다시 슬픔을 가슴에 묻고 웃으며 새로운 나날을 맞이할 것이며 그렇게 모든 것은 어둠에 묻힌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에이미는 어떤 아픔이 있어도 티내지 않고 밝게 웃는 녀석이었지만 실은 혼자인 것에 지독히도 외로움을 탔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생일이니까, 바다에 홀로 잠들어 있을 동생을 위해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라? 마르코, 왜 울고 있어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이기도 했다. 2년 넘게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환청인가. 너무 울어서 잠시 파도소리에 착각이라도 했나보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닿는 감촉은, 흉터로 가득한 손은 분명 기억에 있었다.


에이미?”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햇살 같은 미소가 있었다. 부스스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휘어진 눈매가 날카로운 금안을 감추고 둥글게 웃었다. 마르코는 눈을 깜박였다. 붉게 충혈 되었을 눈에 담긴 것은 바다에서 온 소년이다. 소년은 이윽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바다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삶인 바다에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에이미,”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라도 좋으니 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마르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요이.”


그 말을 끝으로, 날이 바뀐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다. 전하지 못한 말은 틀림없이 전해졌다.


?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거에요?”


에이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이윽고 귀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얼굴, , 그리고 몸 전체가 수줍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래도 그런 거, 엄청 기쁘네.”


그 웃음은 분명 봄의 캄파눌라와 닮아있었다.


연보랏빛 캄파눌라는 5월과 6월 사이에 만개하는 꽃이다. 겨울에는 시들지언정 항상 매해가 되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웃음을 건네는 이. 어느새 모비딕 한 귀퉁이를 차지한 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춘 상냥한 형제를 닮았다.


마르코, 여기서 뭐에이미?”

에이스 대장도 참!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거기서 에이미가 왜 나오는, 에이미?!”

, 안녕하세요 줄리! 그동안 잘 지냈어요? 에이스 씨는 여전히 잘 생기셨네!”

!”

, 줄리 정신 차려!”

줄리가 기절했다아아!”


곧 봄은 끝나고 태양이 찌를 듯이 비추는 눈부신 여름의 초입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차례로 남은 두 계절을 기점으로 해가 바뀔 것이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마음 한 구석에 아픈 상처가 된 기억을 묻고 웃고 떠들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또 다시 피어날 봄의 캄파눌라를 기다리며.

 

계절이 순환하듯 상처 또한 언젠가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법이니.

 

 

 

 

 

 










합작후기 :


안녕하세요. 쿠리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미 생일 합작에 다른 분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요. <우리는 삼총사!> 에 입덕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일 합작에 참여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사실 저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흑흑 에이미 사랑해! 생일 축하해!

합작 이야기를 해보자면 생일 합작은 생각보다 주제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소재를 쥐어 짜내다 보니 답이 없는 피폐물 3종 세트가 나왔는데 생일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하게 되어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 지금 보고 계시는 글입니다. 천만다행이죠.

모티브는 우리는 삼총사! 원작에서 얻었습니다.

 

121삼총사

그러고 보니 그래. 본인 생일은 별로 챙기지 않았잖아.”

아하. 에이스의 말이 맞았다. 이 모비딕의 위에 승선한 이후로는 그저 하루하루가 생일처럼 기뻤으니 말이야. 달리 생일을 챙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반쯤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가끔은, 삿치에게 조각 케이크를 부탁하며 생일 기분을 내보기도 했지만서도.

 

125에필로그

혹시라도,

내가 더 이상 같이 걸어주지 못했을 때, 내 형제들이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하면.

또 맛있는 겨울의 포도주를 들고 우리 배에 방문해주세요. 더 이상 그들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여러분께 드린 사랑은 남기되, 저와의 기억은 모두 바다 한켠에 버려졌으면 합니다.

 

126에필로그

침묵하고 있던 사내는 마른 눈으로 무덤의 한켠에 놓인 술병과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잔을 채운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데, 신기한 일이지. 보통 누군가의 애도를 위해 이런 술을 준비하진 않을텐데.

 

캄파눌라(bellflower)의 꽃말 : 따뜻한 사랑, 상냥한 사랑, 변하지 않는다.

 

글이 전개되고 있는 시점은 에이미가 죽고 2년 후의 530일입니다. 저는 에이미가 다시 원피스 세계로 돌아온 것이 530, 즉 에이미의 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호크가 에이미의 무덤을 방문하는 날짜가 530일이라는 점, 잔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어요. 다행히 모비딕이 에이미를 기리기 위해 무덤과 그리 떨어져있지 않은 해역에 머무르고 있어 에이미는 무사히 생일 직전에 당도하여 축하받을 수 있었다는 후일담입니다.

개인적으로 흰 수염 해적단과 에이미의 일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마르코와 에이미의 맏형과 막내라는 포지션을 좋아해요. 에이미를 주운 게 마르코라는 것도, 제일 에이미를 동생처럼 여기는 게 마르코라는 점도요. 그래서인지 유독 후반부에 마르코 독백이 많이 추가됐습니다. 쓰면서 마르코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그치만 에이미가 선물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저 대신 마르코를 많이 힐링시켜 줄 거라고 믿습니다ㅠㅠ 물론 정신 차린 흰 수염 해적단이 진짜 에이미가 맞는지 심문하는 과정이 남았지만...3년 후의 생일은 보다 확실하게 챙겨줄 수 있겠죠?ㅎㅎ

어떻게든 생일이라는 주제에 맞게 녹여보려고 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미호크도 등장시키고 싶었지만 에이미는 사랑보다 우정이라서요^^...나중에 에이미가 찾아가서 만나는 걸로ㅎㅎㅎ!

다시 한번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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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마의 회귀에 헤라 아그리파와 쥬라큘 미호크 둘 다 관여되어 있었다면

-상상과 날조








[라리마] 내기

W.B - 츠쿠리








아비수스Abysuss. 혀끝에 닿는 순간 독성이 시신경을 지배해 환각을 보게 만든다던 악마의 술. 술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독은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이름 높아 해적들마저 꺼리는 액체가 되었다. 그러나 쥬라큘 미호크는 아랑곳 않고 빈 잔에 아비수스를 따랐다. 독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액체가 유리잔 가득 채워지자 망설임 없이 입으로 털어 넣었다. 이미 그의 발치에는 족히 열개는 넘을 빈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이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더 많은 술을 원했다. 목구멍까지 차올라 흘러 넘쳐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라리마.

이제는 가슴에 사무쳐버린 이름을 미호크는 힘겹게 끄집어냈다. 입 밖으로 흩어진 이름은 애달팠으나 그 뿐이었다. 껌뻑거리는 시야에는 어떤 환각도 나타나질 않았다. 아직 부족한가. 그는 테이블 옆에 놓인 새 아비수스 병을 집어 들었다. 입에 털어 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과도한 상상이 빚어낸 환각일지라도 미호크는 이미 두 번이나 죽어버린 아들을 마주했다. 썩 좋은 만남이 되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이미 시꺼멓게 죽어버린 그리움이 다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뜻밖의 불청객이었다.

 

꼴이 참 볼만하구나.”

 

환각인지 모를 여인이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이 들어 주름졌음에도 변함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눈에는 어김없이 증오가 서려있었다. 헤라 아그리파. 미호크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래, 나를 잊지 않았구나.”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환각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기다리는 이는 네가 아니다.”

오자마자 쫓아내는 건가. 손님 접대가 영 불쾌한 걸? 지금 쫓아내면 후회하게 될 텐데. 다시는 아들을 못 볼 수도 있어.”

무슨 뜻이냐.”

 

아그리파의 눈이 휘어졌다.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지금 마시고 있는 그 술은 해적마저도 제조업에서 손을 놔버린 것이지. 그렇다면 그 귀한 술을 샹크스는 어디서 구했을 것 같으냐.”

당신이 바로 유통업자군.”

바로 그거야.”

 

아그리파는 정답을 맞힌 상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우아하게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미호크는 가식적인 얼굴을 찢어발길 기세로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아들을 잃었으니 비웃어주러 온 건가? 복수를 위해서?”

, 복수라니. 무슨 말이니.”

 

아그리파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그녀는 과장되게 깔깔 웃으며 방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축제가 열린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무희의 춤을 추기라도 하듯 더 없이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노래하듯 가락이 흘러나왔다.

 

상상해본 적 있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발루아 라리마가 얼마나 찬란했을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발루아 라리마의 일생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라리마는 활짝 웃고 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답게 그늘 한 점 없는 새하얀 얼굴이었다. 비록 쥬라큘 미호크와 발루아 마르그리트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였으나 라리마를 향한 애정만큼은 진실이었다. 그들은 감정을 기만하지 않았으며 라리마를 더없이 사랑했다.

 

여섯 살, 쥬라큘 미호크는 라리마의 생일날 방문해 아이에게 사랑을 속삭였으며,

일곱 살, 공부하기 싫다며 칭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덟 살, 쥬라큘 미호크는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아이의 곁을 지켰으며,

아홉 살, 처음으로 검을 든 아이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리마가 열 살이 되던 해, 미호크는 어미의 재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라리마를 데리고 어두우르가나섬으로 왔다. 그곳에서 아이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살게 된다는 사실을 더없이 기뻐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부자는 우려와는 달리 잘 지냈다. 아이가 가끔 부모를 닮은 성정으로 말을 비꼬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어두우르가나섬에서 보낸 오년동안 부자(父子)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루아 라리마는 성인이 되었다. 부모가 극진히 보살핀 덕분에 병세는 그리 악화되지 않아 무사히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장한 발루아 라리마는 사랑받는 왕태자였고 사랑받는 오라비였으며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사랑받고 자란 발루아 라리마의 인생은 이토록 찬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지켜본 미호크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저리 밝게 웃을 수 있는, 저리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아이를 저는 어떻게 대했나. 어떻게 밀어내고 어떻게 박대하고 어떻게 서슴없이 칼날 같은 말을 던졌던가.

 

어때? 보고나니 후회되니? 그 아이를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내게 이러는 저의가 뭐냐, 아그리파.”

 

미호크가 그르렁거렸다. 맹수가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기 직전에 나오는 흉포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검호라 불리는 자의 살기를 마주하고도 아그리파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기뻐. 쥬라큘 미호크. 네가 네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 아들이 네놈 때문에 죽었는데! 하지만 이제 아냐.”

 

그녀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네가 네 아들을 사랑해서 더없이 기뻐, 미호크. 그래야 내 복수가 완성될 테니까.”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모양이야. 아까 복수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래, 하지만 곧 시작할 거야.”

! 네가 무슨 수로?”

 

그러나 미호크가 면전에서 비웃었음에도 아그리파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더없이 우아하게 속삭였다.

 

너는 나를 비웃었지만 곧 내 복수의 시작에 협력하게 될 거야.”

내가?”

그래. 왜냐하면 그래야 다시 네 아들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미호크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었다. 튼튼한 몸은 아비수스의 독성조차 희석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수없이 많은 액체를 들이켰음에도 제 아들의 모습은 겨우 두어 번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라리마를, 다시, 볼 수 있다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희망이란 이름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기회를 줄게, 쥬라큘 미호크. 이건 내 복수를 위해 함부로 시간을 돌리는 것에 대한 대가야.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려무나. 이 기회마저도, 너와 마르그리트가 준 것은 아니니.”

지금, 시간을 돌린다고?”

그래. 작고 예쁜 꼬마 아가씨가 제 목숨을 내놓았지. 참으로 우습지 않더냐, 제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반쪽짜리 피가 섞인 동생한테 구원받다니 말이야.”

 

미호크는 아그리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만큼은 심장을 태우는 분노도, 증오도 모두 잊었다. 라리마, 라리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시간을 돌려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열아홉에 죽어버린 라리마가 아니라, 찬란한 미래를 가질 아이를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미호크가 다급하게 물었다.

 

내 기억을 가진 채로 시간을 돌릴 수 있나?”

 

아그리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증오가 절절 끓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착각하지 마. 이건 널 위한 게 아냐. 엄연히 내 복수를 위해서지! 다만 아까 말했듯이 기회는 주지. 이건 핏덩이 같은 그 애의 여동생이 목숨을 내놓은 것에 대한 대가다. 네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아이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돌려준 상태로 시간을 되돌리겠어.”

그럼 라리마는 아픈 기억을 모두 끌어안은 채 다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란 인간은, 마르그리트라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잃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중함을 모를 정도로! 그러니 내 기억을 되살려!”

! 착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살점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네 놈의 부탁을 내가 들어줄 성 싶으냐? 이건 네 행복을 위해서가 아냐. 내 복수를 위해서지! 바로 네 앞에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네 앞에서 네 놈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줄 테다.”

 

아그리파는 더없이 고혹적으로 웃었다.

 

, 과연 이번에는 네 아이의 심장을 온전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

 

그 순간,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갔다. 째깍째깍. 시침과 분침이 정신없이 되감아지고 정확히 십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열 살의 발루아 라리마가 다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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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 푸른 꿩

W.B - 츠쿠리




"잘 있었어요, 샤키? 오랜만이에요.”

어머, 에이미!”

 

공손하게 바의 문을 닫은 에이미가 코주부 안경을 벗고 웃는 낯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신반의하던 눈빛으로 방금 들어온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샤키는 낯익은 얼굴이 드러나자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격한 포옹은 덤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거 아니었어? 분명 신문에는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했는데!”

. 그게 사정이 생겨서. 으음, 죽을 뻔 했고 죽은 것도 맞지만 어떻게 용케 살아있네요.”

뭐야,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잖아?”

하하, 그런가요? 그치만 저 살아 있는 건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 아무도 모르거든요.”

 

샤키니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라구요. 눈을 찡긋거리며 그리 말하자 샤키는 살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바가지를 씌우지만 아는 사람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의리 있고 상냥한 샤키다. 애초에 무법지대인 13번 글로브에서 혼자 장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입이 가벼웠다면 진즉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터. 티치를 죽이고 흰 수염 해적단에서 탈주했을 때조차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니 그녀는 꽤 믿을만한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주문은 오렌지 주스?”

. 기억하고 계셨군요. 거기에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식사도 추가로 부탁해요!”

후후, 몇 안 되는 단골손님의 메뉴를 잊으면 곤란하지. 그나저나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니 그거 보이의 단골 메뉴잖아. 이따가 보이도 와?”

, . 아뇨, 제가 먹을 거예요. 보이가 얼마나 맛있어하던지 괜히 궁금해져서요. 최근에 건강이 괜찮아져서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게 됐거든요.”

 

갑자기 튀어나온 친구의 이름에 동요한 것도 잠시, 에이미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다행히 샤키는 짐작 가는 바가 있던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내심 어떤 변명을 해야 하나 조마조마했던 에이미는 그제야 등을 의자에 기대며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씨씨의 근황은 묻지 않았네.’

 

에이미는 쓰게 웃었다. 아마 일부러 씨씨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것이리라. 당시만 해도 밀짚모자 해적단의 노커, 씨씨의 죽음은 해군이 가장 대대적으로 떠들어대던 선전거리였으니 말이다. 시체를 찾을 수 없었던 에이미와는 달리 씨씨는 시신이 남았으니 해군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샹크스가 시신을 수습한 후 관 뚜껑의 문짝을 단단히 걸어 잠그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니 밀짚모자 해적단과 친분이 있는 샤키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 에이미에게 말을 아끼고 있는 건 아마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인 셈이었다.

 

샤키는 어릴 때부터 우리를 봐왔으니 웬만하면 모든 걸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역시 밀짚모자 해적단과의 교류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게다가 루피는 레일리의 제자고.’

 

그 동안 조용히 살았으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에이미를 포함해 삼총사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꽤나 날린 전적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으니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최선책이었다. 에이미는 착잡한 표정으로 샤키가 건네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탈주했을 적에 형제들을 속일 때도 느꼈지만 역시 친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꽤나 양심에 찔리는 일이다.

 

인생을 너무 정직하게 살아서 그런가.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아파.”

 

에이미가 칭얼거리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꽤나 뻔뻔한 한탄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보이가 있었다면 약탈을 밥 먹듯이 하는 새끼가 거짓말도 잘해!’ 라며 머리를 쥐어박았을 것이다. 씨씨는 그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겠지. 그러나 늘 삼총사가 앉아있던 테이블에는 에이미만이 홀로 자리하고 있다. 윽박지르는 소리도, 가벼운 웃음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시간을 더듬다보니 조금 쓸쓸해졌다. 에이미는 말없이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평화로운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에이미는 괜스레 품에 넣어두었던 전보벌레를 꺼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전보벌레는 눈을 감고 고요히 잠을 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호크는 잘 도착했을라나.”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연락이나 해주면 좋으련만. 기왕이면 잘생긴 로우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좋고! , 그건 도청의 위험이 있어서 곤란하려나? 하긴 애초에 미호크가 먼저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가. 이전에도 내가 항상 먼저 연락하고! 나 참, 찾아오기는 뻔질나게 찾아왔으면서 연락은 왜 아날로그인가 몰라! 에이미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렇다. 미호크는 오늘 마리조아에서 열리는 칠무해 소집에 참석했다. 덕분에 에이미도 미호크의 배에 동행해 샤본디 제도까지 나올 수 있었다. 미호크가 소집에 응하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부터 일찌감치 매달려 데려가 달라며 떼를 썼던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심산이냐. 아직 갈 거라고 확답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확답하면 되겠네요. ! 귀찮으시면 제가 대신 연락해드릴까요? 나 참, 미호크도 칠무해면 칠무해답게 회의 정도는 참석하라구요! 매일 섬에 틀어박혀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답답한 건 네 녀석이겠지. 괜히 이런저런 핑계 댈 것 없다.’

, 그치만 기분전환도 하고 싶고, 쇼핑할 것도 잔뜩 있는 걸? 그리고 오랜만에 샤본디 제도에 가서 지인도 보고 싶으니까 나도 데려가줘요, ?’

정체를 들키고 싶어 안달이 났나보군. 그동안 숨어 지낸 걸 다 무용지물로 만들 셈이냐.’

 

그러나 미호크는 칭얼거리는 에이미를 몹시 탐탁찮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명백한 불신의 눈빛이었으나 에이미는 꿋꿋하게 졸랐다.

 

그 동안 잘 숨어있었으니 잠깐 쇼핑하는 것 정도야 괜찮잖아. 어차피 다들 제가 죽은 줄 알거고 변장도 할 테니까 문제없어요!’

…….’

 

손에 들려있는 코주부 안경을 보고 미호크의 눈매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러나 에이미는 움츠려들기는커녕 무해하게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애초에 미호크와 함께 살면서 얻게 된 건 두꺼운 신경줄밖에 없으니 말이지. 게다가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샤본디 제도에 발을 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에이미의 서툰 항해술로는 샤본디 제도는커녕 그 전에 조난당하는 게 더 빠를 테니. 여튼 그렇게 며칠을 조른 끝에 미호크의 허락이 떨어졌고 그의 배에 동행하여 샤본디 제도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기름진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음식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때울 무렵이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지 몰라도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네. 에이미는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보통 낮 시간에는 꽤 한가한 편인데 손님이 오다니 별일이다.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사람이려나?

 

샤키의 바에 오는 손님은 보통 두 종류였다. 샤본디 제도가 처음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오는 경우와 에이미처럼 단골손님이 되어 더 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경우. 바가지만 아니라면 샤키의 바는 꽤 괜찮은 곳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호구가 되는 셈이니 보통 초행인 손님이 걸리곤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금액에 분노한 손님이 돈을 못 내겠다고 우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샤키,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레일리가 행차하여 무력행사가 들어가니 요금을 징수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해적왕의 전 부선장이 직접 가하는 응징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잖아! 에이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그래서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어떤 경우이려나?’

 

마침 할 일도 없는데다가 흥미가 더해진 에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로 막 닿으려던 찰나였다.

 

?

??

????????

 

에이미는 곧바로 고개를 원위치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테이블에 잠시 벗어두었던 코주부 안경을 잽싸게 썼다. 어림잡아 5초쯤 되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장이 펄떡거리며 미친 듯이 펌프질 했다. 온 몸의 피가 혈관을 타고 팽팽 돌았다. 온 몸이 긴장으로 저릿했다.

 

미친! 아오키지가 왜 여기에?!?!?!’

 

그렇다. 샤키의 바에 들어선 손님은 다름 아닌 해군대장 아오키지였다! 해군의 상징인 새하얀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단연 눈에 띄었다. 3미터에 가까운 큰 키와 여전한 파마머리 그리고 이마에 착용하고 있는 수면안대와 흐리멍덩한 눈동자. 착각하래야 착각할 수도 없는 사내가 희미한 기척을 흘리며 가게 안에 서 있었다.

 

에이미는 속으로 한껏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대장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지금쯤 마리조아나 다른 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마음 같아서는 해군에 신고라도 하고 싶었다. 해군아저씨, 여기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서 와서 잡아가세요! 물론 해군아저씨가 해군대장을 목격하고 잡아갈지는 미지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절실했다.

 

'아냐, 그래도 날 알아볼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안경도 썼으니 못 알아보겠지!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것도 한참 전의 일인 걸.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본 샤키한테는 미안하지만 빨리 돈을 지불하고 나가자. 최소한 옆자리에만 앉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그러나 그 순간 불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라라, 여기 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 걸?”

 

드르륵. 바로 옆에서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끼기긱. 에이미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견문색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하며 착석하는 생생한 느낌이 전해졌다.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오키지다! 해군대장 아오키지가 옆에 앉았다!

 

역시 신은 날 버렸어!’

 

그러나 절규도 잠시, 에이미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찰나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걸. 분명 검성은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

 

들켰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혼잣말로 넘기기에는 그 의도와 가리키는 바가 명백했다. 그러나 에이미는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아하하, 저한테 하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흰 수염 해적단의 검성이라면 정상결전 때 죽었다고 들었어요. 한동안 꽤 떠들썩한 이야깃거리였죠.”

그랬던가? 그런데 왜 지금 내 옆에 검성,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 아무렴 어때. 하여튼 네가 있는 거지?”

나 참, 아무리 농담이라도 지나치시네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제 이름은!”

에이미, 여기 음식 나왔어.”

…….”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검성> 에이미.”

 

에이미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베이컨과 잘 양념된 스테이크.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감자튀김과 싱싱한 샐러드가 반갑다며 인사를 건넸다. 안타깝게도 그다지 안녕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샐러드를 콕콕 찔렀다.

 

, 그래요. 용건이 뭐에요? 체포?”

아라라, 용건은 딱히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그거 맛있어 보이는군. 한 입 맛봐도 될까?”

다리를 작살냈던 사람한테 뻔뻔하네요.”

 

그러나 한숨을 내쉬면서도 에이미는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 한 점을 건네주었다. 아오키지는 사양하지 않고 덥석 베어 물었다.

 

, 이거 맛있군. 언니, 나도 똑같은 걸로 하나 부탁하지. 그리고, 어디보자위스키도 하나.”

어머. 기꺼이요, 해군 대장 나으리.”

 

담담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샤키가 생긋 웃으며 사라졌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녀에게서 새로운 호구가 등장했을 때 보이던 눈빛을 읽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해군대장인데 작작 벗겨먹어요. 샤키 씨. 에이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방을 응시했다. 그다지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으음,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 뭐야, , 귀찮네. 그래, 체포해도 될까?”

이런. 안타깝게도 저는 선량한 민간인이어서요. 해적은 관뒀답니다!”

, 뭐 그렇긴 하지만 수배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죽었다고 공표된 지가 몇 년인데. 수배서 운운할거면 효력부터 부활시켜요. 폐기처리 된 수배서로 체포하는 건 규정 위반 아닌가요? 그렇게 꼼꼼하게 사시는 양반도 아니면서.”

아라라, 나에 대해서 꽤 잘 아는 말투인데?”

 

아오키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에이미는 남아있는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자른 단면 사이로 적당히 익은 속살이 보였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죠. 아시다시피 해적생활을 한 지가 꽤 돼서요.”

그렇군. 으음, 생각해보니 보이 소장한테도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어.”

보이 소장이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어보네요. 물론 그 사람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아시다시피 배신당한 순정이 좀 쓰라려서요. 에이미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오키지는 그런 에이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 아무렴 어때. 문득 생각나서 해본 소리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려는 건 이게 아니었어. 오히려 뭐랄까, , 그렇지. 뭐냐, 덕분에 아카이누가 좀 유해졌으니 공격해준 걸 고마워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흐음? 아무리 이념이 다르다고 해도 당신 동료를 공격했는데요? 게다가 저는 제 개인적인 원한을 갚은 것뿐이니 딱히 감사인사를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라, 까칠하네.”

그럼 동생을 체포한데다가 제 다리뼈를 부서뜨렸는데 말이 곱게 나가겠어요? 아직도 비가 오면 다리가 욱신거리는데. 그나마 해군대장 중에서는 당신이 제일 마음에 들지만 역시 직접 마주하니 조금.”

 

에이미는 눈을 찡그렸다.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를 기억한다. 우득, 하고 무릎 뼈가 부서지던 그 생생한 소리가. 정상결전은 아픔과 고통이 점철된 기억이었다. 아버지, 흰수염이 죽었으며 씨씨가 눈앞에서 스러졌다. 정상결전에서 입었던 심각한 부상은 내내 따라다니며 악몽처럼 괴롭혔다. 만약 통각이 있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오키지라는 캐릭터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지금 대면하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오키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센고쿠의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는데 말이지. 나라고 흰수염 해적단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그래도 인사는 해두지. 만약 아카이누가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꽤나 다퉜을 테니까. 그와 나의 정의관은 너무나 다르거든.”

…….”

 

에이미는 속으로 긍정했다. 원작과는 다르게 이곳은 아직 센고쿠가 원수를 맡고 있었다. 에이미가 저지른 여러 가지 변화로 인해 정상결전의 흐름과 규모가 축소된 까닭이다. 정상결전의 전후를 비교했을 때 해적과 해군의 세력 면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티치를 죽였기에 새로운 사황의 등극도 없었으며 에이스를 빠르게 구출해내고 피해를 최소화한 덕분에 흰 수염 해적단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명성을 되찾았다. 삼대장 중 한명인 아카이누가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인데다가 전쟁 후에도 판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해군에서는 아직 원수를 세대교체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직 해군의 삼대장은 아카이누, 아오키지, 키자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다. 루피 일행이 다시 모험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슬슬 해군 내에서도 세대교체를 논하고 있다고 들었다. 센고쿠와 가프를 비롯해 기존의 중진들이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밑에서 원수자리를 두고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다. 키자루는 별 관심이 없다고 들었으니 이번에도 아오키지와 아카이누가 다투겠지. 원작과는 달리 아카이누가 팔을 잃었으니 아오키지에게도 꽤 승산이 있으리라. 에이미 입장에서도 감정은 내려두고서라도 아오키지가 원수를 맡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편이 에이스를 비롯한 형제들의 안위를 조금이라도 더 보장해줄 수 있을 테니까.

 

아라라, 표정이 무섭네. , , 너무 그러지마. 가뜩이나 미움 받고 있는 처지인데 말이야.”

미움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모르는 건가? 매의 눈 말이야, 매의 눈.”

……?”

 

에이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미호크의 이야기가 왜 나온담? 그런 에이미의 의문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아오키지가 말을 이었다.

 

어라? 진짜 몰랐나 보네. , 뭐냐, , 정상결전 이후로 해군은 매의 눈에게서 꽤나 미움 받고 있거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특히나 내가.”

미호크가 누굴 미워하고 그럴 사람은 아닌데요? 오히려 뒤끝은 없는 성격인데.”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왜 그런 성격 있잖나. 화를 잘 내지는 않지만 한번 화나면 말릴 수가 없는 사람. 매의 눈은 그런 유형이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아오키지의 목소리에서 짙은 한숨이 느껴졌다. 어느새 말투도 푸념하듯이 바뀌었다. 잔을 살짝 흔들자 얼음이 유리잔과 부딪히면서 잘그락거렸다. 아오키지는 집요한 시선으로 액체를 응시하다가 목구멍으로 가볍게 넘겼다.

 

정상결전 이후부터 매의 눈은 그 어떤 소집 명령에도 응하지 않았어. 물론 칠무해야 워낙에 제멋대로인 성정이라 소집에 응하는 게 오히려 드물긴 하지만그래도 매의 눈은 비교적 흥미가 있는 일에는 참석하는 편이었단 말이지. 그걸 죄다 거절한 덕분에 일거리가 넘쳐났다고. 수면 시간도 줄고.”

 

에이미는 뒷말은 못 들은 척 넘겼다. 게다가 아직 아오키지의 말은 신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장 오늘만 해도 미호크는 칠무해 소집에 떡하니 참석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미호크는 오늘 열리는 칠무해 소집에는 참석했는걸요.”

아하, , 그렇겠지. 검성, 혹시 네가 의식을 차린 건 꽤 최근의 일 아닌가? , 미리 말하지만 딱히 취조하거나 악용하려는 건 아니야. 본인이 민간인을 지향하는 이상 해군에도 알리지 않을 거고.”

 

아오키지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그의 얼굴에서 거짓을 읽을 수 없었던 에이미는 순순히 답했다.

 

그렇죠. 그 전까지만 해도 다들 죽은 줄 알았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칠무해 소집에 참석한 거겠지. 네가 살아 돌아왔으니까 말이야.”

?”

아라라, 생각보다 눈치가 느린 걸? 매의 눈이랑 검을 맞대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지? 네 죽음에 상심한 매의 눈이 정부와 해군의 부름에 일절 거절했다는 이야기인데.”

……?!?!?!”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에이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뿐이랴. 눈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경악이 어려 있었다. 아니 미호크는 전혀 그런 말 안 하던데? 설마 그래서 오늘 회의도 참석 안하려고 한 건가? 내가 정상결전에서 거의 죽을 뻔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참석 하라고 해서 참석 한 거고? 세상에나! 미호크 이 츤데레 양반 같으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거 뭐냐, , 좀 기분 나쁜 얼굴인데.”

, 참나~! 그런 이야기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구~!!”

아니 엄청 기뻐하고 있잖냐.”

 

헤벌쭉해진 얼굴을 본 아오키지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저 행복하게 웃었다. 아오키지에 대한 악감정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기도? , ! 딱히 그런 걸 알려줘서 이러는 건 아냐!

 

, 어쨌든 네가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매의 눈에 대해서 신경을 안 써도 되겠지. 마주치면 살기를 흩뿌리질 않나 이쪽은 엄청 귀찮았다고. 위쪽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인데 말이야. 오늘만 해도 마리조아에 있어야 하는데 그, 뭐냐, 매의 눈이 참석한대서 쫓겨났고.”

그리고 저를 발견해서 쫓아왔다?”

, 그러니까, 그렇게 되나? 뭐 아무렴 어때.”

 

그렇게 말하는 아오키지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에이미는 미래에 해군원수가 될 지도 모르는 남자를 흩어보았다. 귀찮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정의를 집행하는데 있어서 철두철미한 남자. 그러나 그는 분명 양심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에이스를 잡아간 것도, 저를 비롯한 형제들을 공격한 것도 껄끄럽기 그지없지만 그건 그가 해군대장인 이상 감안해야할 문제였다.

 

여기 음식 나왔어.”

, 맛있겠는데? 고마워, 나이스 바디의 언니.”

어머, 별 말씀을. 참고로 가격은 100만 베리야.”

 

가격을 들은 아오키지의 손이 멈칫했다.

 

아라라, 언니 너무하네. 너무 비싸게 부르는 거 아냐? 평범한 월급쟁이한테 돈을 그렇게 뜯어내다니.”

후후, 애초에 우리 가게 상호명이 바가지 BAR인걸? 못 내겠으면 말해. 나도 해군대장이 무전취식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재밌는 구경은 대환영이야.”

 

그렇게 말하는 샤키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농담이 아니란 걸 눈치 챈 아오키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잘못 걸렸네. 검성은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었죠. 근데 전 단골이라 할인 받거든요.”

할인 받으면 얼만데?”

“2000베리요.”

진짜 너무하네. 혹시 내 몫까지 계산해줄 생각은?”

제가 계산하고 나머지 998000베리를 주신다면 기꺼이요.”

흰수염이 참 자식교육을 잘 시켰어.”

, 목이 타네. 샤키 여기 와인도 팔아요?”

어머, 이제 술도 먹어? 당연히 팔지.”

그럼 와인 좀 갖다 주세요. , 계산은 여기 해군 아저씨가 할 거예요. 저한테 빚이 좀 있거든요.”

, 흰수염이 자식교육을 정말 잘 시켰어.”

 

그러나 에이미는 아오키지의 푸념을 못들은 척 넘기며 샤키가 건네준 와인을 기꺼이 받아들었다. 샤키는 건네준 것은 가게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와인이었다. 아오키지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면서 에이미는 기꺼이 와인을 따랐다. 투명한 잔에 붉은 액체가 콸콸 부어졌다.

 

 

 



◈  ◈  ◈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미호크는 형형한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칠무해 회의는 여전히 쓰레기들의 집합소였고 시시껄렁한 안건으로 시간을 질질 끈 탓에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잡배들 같으니.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의 친우를 챙겨 다시 어두우르가나섬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건 또 못 보던 광경이군.”

 

그러나 정작 눈앞에 놓인 건 꽤 낯선 장면이었다. 미호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와인병과 위스키병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가 막힌 것은 해맑은 미소를 드리운 채 무해한 웃음을 실실거리고 있는 전 흰 수염 해적단원이자 검성 에이미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술을 들이키는 남자는 현 해군대장이자 차기 원수로 지목되고 있는 아오키지다. 그의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정상결전에서 아오키지가 에이미의 무릎 뼈를 박살내지 않았던가.

 

대체 흰수염은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조합에 미호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물론 나중에 에이미는 농사 짓겠다고 나가더니 혼자서 아오키지를 만났다고 마르코한테 혼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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