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미호에이] Break of day
W.B - 츠쿠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물길 사이로 자갈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휩쓸려간다. 새하얗게 일어나는 포말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가 이윽고 빛을 머금고 일렁인다.
손을 넣자 파도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럼을 태우듯 살랑거리는 물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세계에서 제법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 공기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별들도, 이제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나 마찬가지인 바다도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환경이 달라진 까닭일까,
“여기 있었나.”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이 다른 까닭일까.
에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 휴양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인 걸. 애당초 ‘섬을 비우라’는 칠무해의 통보에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배짱 두둑한 사람이 있다면 명령과 복종이 우선시 되는 휴양섬에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유령이 아닐까? 그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섬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뭐, 제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유령이라고 해도 딱히 무서울 것 같지는 않지만. 게다가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 중에는 고스트 프린세스가 있는 걸.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에이미는 태평스레 대꾸했다.
“좀 더 자지 왜 나왔어요?”
“너야말로 꽤나 일찍 눈을 떴군.”
“그야 초저녁부터 침대에서 보냈으니까. 눈이 일찍 떠질 만도 하잖아요?”
“흠.”
에이미의 셔츠 깃 사이로 새하얀 목에 남은 붉은 울혈 자국과 잇자국이 드러났다. 매를 닮은 남자의 동공이 집요하리만치 몸 곳곳을 훑는다. 남자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에이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딱히 남자가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지만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시선 앞에는 조금 긴장하게 된다.
하기야 모처럼 둘만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끔은 어두우르가나 섬에서 벗어나 번화가를 돌아다니곤 했으나 살아있는 게 발각될까봐 검은 로브를 쓰고 다니거나 코주부 안경으로 변장하곤 했으니. 그러니 어두우르가나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손꼽히는 휴양섬 중 하나였다. 칠무해의 권한으로 정부 소유의 섬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던가. 원래대로라면 시중드는 사용인이나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가 고용되어 있지만 이번만큼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며 모두 물렸다고 했다. 칠무해 중에서도 손꼽히는 ‘매의 눈’의 명령이니 거부할 자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휴양섬에 도착한 것이 어제 낮의 일이다. 태양 아래 새하얀 모래사장을 걷고, 청해의 빛깔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물고기들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서로를 탐했다.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둘만 남겨진 세계였다.
“조금 급하게 나왔나 봐요?”
머리 위를 톡톡 치며 키득거리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오른다. 새하얀 프릴셔츠에 바지 그리고 늘 쓰고 있는 모자. 잠을 자다가 나온 차림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차림새였으나 에이미는 그의 모자 위에 장식되어 있는 깃털이 조금 흐드러진 것을 발견했다.
“왜요? 내가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요?”
“…그래.”
남자, 미호크가 모래사장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옷이 펄럭거리며 에이미의 위로 덮였다. 가디건은 차디찬 새벽공기를 막아줄 정도로 두꺼웠다. 본인은 급하게 나왔으면서 이런 건 또 언제 가져 온 건지. 무언의 재촉에 결국 비어있는 소매에 팔을 꿰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참, 반지를 주고받았는데 도망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구요.”
“그런가. 하지만 언제나 넌 상상을 뛰어넘으니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흰 수염 해적단으로 돌아가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미호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이었으나 기저에 희미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 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런, 난감하네. 에이미는 볼을 긁적였다. 흰 수염 해적단과 관련된 이야기면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다. 다시 살아났을 때조차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모비딕이었는 걸. 하지만 그런 제 태도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 걸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있죠, 미호크. 나는 욕심쟁이에요.”
에이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을 타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검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수만 개의 보석을 잘게 쪼개어 흩뿌린 것 같은 장관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별은 하늘이라는 또 다른 바다를 유영한다. 투명했던 바다는 밤에는 하늘의 빛을 훔쳐, 하늘의 색을 띈다. 어두우르가나 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색이다.
“손 안에 끌어안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걸 버릴 생각도 없구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아요.”
에이미가 웃었다.
“이기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과 단 둘이 있는 이 곳이 내 세계에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
긴 정적이 흘렀다. 파도는 여전히 하얀 포말을 일으켰고 수면은 별빛을 머금는다. 그러나 저 멀리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경계로 옅어지기 시작하는 검보랏빛은 태양이 떠오르면 별을 온전히 제 몸뚱이로 감싸고 사라질 것이다.
“이제 곧 동이 트겠지.”
적막을 부순 남자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네 머리색으로 하늘이 물들겠군.”
그리 말하며 미호크는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있을까. 손을 기꺼이 붙잡으며 에이미는 활짝 웃었다.
“미호크.”
“?”
“저를 사랑해요?"
청아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 웃음은 이내 햇살 같은 미소가 되어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그의 하늘로 물들인다. 맞잡은 손 너머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소리.
“…너는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군.”
“그런가요?”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새벽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검을 다루는 사람에게 반지는 미세한 철의 감각을 방해하는 장신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반지를 내밀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반지를 내민 그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재단할 수 있을까.
마주보는 얼굴이 눈동자 안에 담긴다. 같은 색을 지닌 금빛이 서로의 눈에 깃들고, 같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그 사람이 보는 세상조차 공유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전해질까. 당신이 있는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노라고. 당신과 함께하는 내게,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유난히 뜨겁다. 에이미는 발을 조금 들어, 그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미호크의 눈을 응시했다. 거울로만 보았던 자신의 얼굴이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 담겨있다.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으나 마침내 입술이 닿은 순간 완전히 사라진다. 커다란 손이 눈을 가렸다가 떨어진다. 닿았던 입술 대신 한 줌의 온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검을 휘두를 때조차 나오지 않던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있죠, 미호크. 오늘 아침식사로는 크레페가 어떨까요?”
“그 말은 나보고 만들라는 소리인가. 배짱 한번 두둑하군.”
“으응? 그래서 싫어요? 어제 그렇게 침대에서 혹사시켜 놓고선.”
“...재료가 있나 봐야겠다. 대신 너도 도와라. 적어도 과일 같은 건 썰 수 있을 테지.”
미호크는 퉁명스레 덧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에이미 또한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앞서가던 발자국이 이윽고 나란히 이어지기 시작한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이 걷히고 검보라빛 하늘이 옅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캄파눌라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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