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삼총/미호에이] Break of day

W.B - 츠쿠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물길 사이로 자갈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휩쓸려간다. 새하얗게 일어나는 포말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가 이윽고 빛을 머금고 일렁인다.

 

손을 넣자 파도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럼을 태우듯 살랑거리는 물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세계에서 제법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 공기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별들도, 이제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나 마찬가지인 바다도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환경이 달라진 까닭일까,

 

여기 있었나.”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이 다른 까닭일까.

 

에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 휴양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인 걸. 애당초 섬을 비우라는 칠무해의 통보에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배짱 두둑한 사람이 있다면 명령과 복종이 우선시 되는 휴양섬에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유령이 아닐까? 그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섬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 제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유령이라고 해도 딱히 무서울 것 같지는 않지만. 게다가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 중에는 고스트 프린세스가 있는 걸.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에이미는 태평스레 대꾸했다.

 

좀 더 자지 왜 나왔어요?”

 

너야말로 꽤나 일찍 눈을 떴군.”

 

그야 초저녁부터 침대에서 보냈으니까. 눈이 일찍 떠질 만도 하잖아요?”

 

.”

 

에이미의 셔츠 깃 사이로 새하얀 목에 남은 붉은 울혈 자국과 잇자국이 드러났다. 매를 닮은 남자의 동공이 집요하리만치 몸 곳곳을 훑는다. 남자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에이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딱히 남자가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지만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시선 앞에는 조금 긴장하게 된다.

 

하기야 모처럼 둘만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끔은 어두우르가나 섬에서 벗어나 번화가를 돌아다니곤 했으나 살아있는 게 발각될까봐 검은 로브를 쓰고 다니거나 코주부 안경으로 변장하곤 했으니. 그러니 어두우르가나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손꼽히는 휴양섬 중 하나였다. 칠무해의 권한으로 정부 소유의 섬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던가. 원래대로라면 시중드는 사용인이나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가 고용되어 있지만 이번만큼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며 모두 물렸다고 했다. 칠무해 중에서도 손꼽히는 매의 눈의 명령이니 거부할 자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휴양섬에 도착한 것이 어제 낮의 일이다. 태양 아래 새하얀 모래사장을 걷고, 청해의 빛깔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물고기들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서로를 탐했다.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둘만 남겨진 세계였다.

 

조금 급하게 나왔나 봐요?”

 

머리 위를 톡톡 치며 키득거리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오른다. 새하얀 프릴셔츠에 바지 그리고 늘 쓰고 있는 모자. 잠을 자다가 나온 차림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차림새였으나 에이미는 그의 모자 위에 장식되어 있는 깃털이 조금 흐드러진 것을 발견했다.

 

왜요? 내가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요?”

 

“…그래.”

 

남자, 미호크가 모래사장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옷이 펄럭거리며 에이미의 위로 덮였다. 가디건은 차디찬 새벽공기를 막아줄 정도로 두꺼웠다. 본인은 급하게 나왔으면서 이런 건 또 언제 가져 온 건지. 무언의 재촉에 결국 비어있는 소매에 팔을 꿰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참, 반지를 주고받았는데 도망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구요.”

 

그런가. 하지만 언제나 넌 상상을 뛰어넘으니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흰 수염 해적단으로 돌아가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미호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이었으나 기저에 희미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 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런, 난감하네. 에이미는 볼을 긁적였다. 흰 수염 해적단과 관련된 이야기면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다. 다시 살아났을 때조차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모비딕이었는 걸. 하지만 그런 제 태도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 걸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있죠, 미호크. 나는 욕심쟁이에요.”

 

에이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을 타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검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수만 개의 보석을 잘게 쪼개어 흩뿌린 것 같은 장관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별은 하늘이라는 또 다른 바다를 유영한다. 투명했던 바다는 밤에는 하늘의 빛을 훔쳐, 하늘의 색을 띈다. 어두우르가나 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색이다.

 

손 안에 끌어안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걸 버릴 생각도 없구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아요.”

 

에이미가 웃었다.

 

이기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과 단 둘이 있는 이 곳이 내 세계에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

 

긴 정적이 흘렀다. 파도는 여전히 하얀 포말을 일으켰고 수면은 별빛을 머금는다. 그러나 저 멀리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경계로 옅어지기 시작하는 검보랏빛은 태양이 떠오르면 별을 온전히 제 몸뚱이로 감싸고 사라질 것이다.

 

이제 곧 동이 트겠지.”

 

적막을 부순 남자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네 머리색으로 하늘이 물들겠군.”

 

그리 말하며 미호크는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있을까. 손을 기꺼이 붙잡으며 에이미는 활짝 웃었다.

 

미호크.”

 

“?”

 

“저를 사랑해요?" 

 

청아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 웃음은 이내 햇살 같은 미소가 되어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그의 하늘로 물들인다. 맞잡은 손 너머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소리.


“…너는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군.”

 

그런가요?”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새벽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검을 다루는 사람에게 반지는 미세한 철의 감각을 방해하는 장신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반지를 내밀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반지를 내민 그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재단할 수 있을까.

 

마주보는 얼굴이 눈동자 안에 담긴다. 같은 색을 지닌 금빛이 서로의 눈에 깃들고, 같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그 사람이 보는 세상조차 공유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전해질까. 당신이 있는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노라고. 당신과 함께하는 내게,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유난히 뜨겁다. 에이미는 발을 조금 들어, 그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미호크의 눈을 응시했다. 거울로만 보았던 자신의 얼굴이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 담겨있다.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으나 마침내 입술이 닿은 순간 완전히 사라진다. 커다란 손이 눈을 가렸다가 떨어진다. 닿았던 입술 대신 한 줌의 온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검을 휘두를 때조차 나오지 않던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있죠, 미호크. 오늘 아침식사로는 크레페가 어떨까요?”

 

그 말은 나보고 만들라는 소리인가. 배짱 한번 두둑하군.”

 

으응? 그래서 싫어요? 어제 그렇게 침대에서 혹사시켜 놓고선.”

 

“...재료가 있나 봐야겠다. 대신 너도 도와라. 적어도 과일 같은 건 썰 수 있을 테지.”

 

미호크는 퉁명스레 덧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에이미 또한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앞서가던 발자국이 이윽고 나란히 이어지기 시작한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이 걷히고 검보라빛 하늘이 옅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캄파눌라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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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미호에이] 편지

W.B - 츠쿠리







그날도 미호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비딕에 접근해 에이미를 불러냈다. 에이미는 여전히 대련하기 전에 실없는 말을 종알거렸고 미호크는 능숙하게 넘기거나 간단하게 대꾸해주곤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따라 에이미가 건넨 것이 와인이 아니라 편지라는 점일까. 손바닥만 한 크기의 편지는 봉투가 붉은 색이었다.

 

으아아! 지금 열지 마세요!”

 

봉투를 열어보려던 찰나 에이미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애당초 지금 열어보라고 할 게 아니면 왜 준 거지.”

 

미호크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보기 위해 멈춰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편지를 채 꺼내기도 전에 손은 재차 항로를 가로막혔다. 까만 점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새하얀 손이 겁도 없이 미호크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 열지마세요! 이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제가 열어도 된다고 할 때 열어보셔야 한다구요!”

 

눈을 꼭 감고 말하는 모습이 자못 필사적이었다. 대체 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이기에? 미호크는 흠, 하고 낮은 숨을 흘리고는 편지를 꺼내려던 손을 거두었다. 내용물에 대한 궁금함보다 나중에 그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커졌다.

 

더 이상 미호크가 열어보려는 생각이 없는 듯하자 눈치를 보던 에이미가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물러섰다. 미호크의 손을 붙잡고 있었음을 이때서야 인지한 모양이다. 시체마냥 일말의 온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온도에 기분이 가라앉을 만도 하건만,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미호크는 말없이 그의 등에 있던 흑도를 빼들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 눈빛은 흡사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던 매와 같았다.

 

아니 갑자기 달려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으악!”

 

과연, 예상대로 허전함은 금세 채워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에이미는 미호크를 만날 때마다 빈번히 편지를 건넸다. 크기는 여전히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나 색이 달랐다. 처음 만날 때는 붉은 색이더니 두 번째에 건넨 것은 주황색이었다. 세 번째에 건넨 것은 노란색, 네 번째에 건넨 것은 초록색, 다섯 번째에 건넨 것은 파란색 그리고 여섯 번째에 건넨 것은 남색, 일곱 번째에 건넨 것은 그를 닮은 보라색이었다. 무지개의 색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일곱 번째, 보라색 봉투를 받은 뒤에는 또 어떤 것이 주어질지 알 수 없었다.

 

미호크는 에이미에게 편지를 받을 때마다 물었다.

 

아직인가?’

 

그는 답했다.

 

, 아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봉투를 받을 때조차 미호크는 물었다.

 

아직인가?’

 

그는 답했다.

 

, 아직. 하지만 아마도 곧.’

 

그렇게 말하는 그는 웃었던가? 부드럽게 빛나던 금색 눈동자를 곱게 휘며, 그는 고요히 웃었던 것 같다. 석양이 지는 노을은 유독 찬란했고,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태양을 등 뒤로 맞이하던 청년은 상냥한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를 휘감고 있던 분위기는 지극히 온화했고 평온했다. 그래서 미호크는 다음 만남과 다음의 편지를 기약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미호크는 오랫동안 편지를 받지 못했다.

 

검성에이미의 흰 수염 해적단 탈주 그리고 정상결전.

 

아주 오랫동안 침묵의 밤이 이어졌다. 숨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버거운 하루하루였다. 피로 물든 바다만큼 슬픔에 물든 인간은 신음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들에 정신을 온전히 가누기에도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어느새 미호크의 뇌리에서 편지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다만 유독 잔인하리만치 상냥했던 그 태양의 빛깔이 오랫동안 마음 한 자락에 남았다.

 

 



편지가 떠오른 것은 편지를 주었던 사람이 죽은 해, 그의 생일이었다. 미호크는 연보랏빛 캄파눌라 꽃이 만개하던 초원을 밟아 붉디붉은 술 한 잔을 죽은 자에게 바치고 왔다. 착잡한 마음에 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의 잔에는 붉디붉은 술이 넘실거렸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에이미가 처음 건넨 붉은 편지가 생각난 것은.

 

미호크는 술잔을 두고 그의 서재로 향했다. 책상 서랍 안으로 손을 뻗자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일곱 개의 봉투가 나란히 딸려왔다.

 

열어보라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지만, 네 녀석 또한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 정도는 봐주겠지.”

 

허공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미호크는 봉투를 차례대로 열어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읽었다. 각 봉투에 들어있는 것은 내용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짧은, 고작 한 글자짜리 편지조각.

 

붉은색 봉투에는 []

주황색 봉투에는 []

노란색 봉투에는 []

초록색 봉투에는 []

파란색 봉투에는 []

남색 봉투에는   []

보라색 봉투에는 []

 

좋아해요, 미호크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그리 말하며 멋쩍게 웃던 얼굴이,

 

내가 열어보라고 할 때 열어보셔야 해요.’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동자가,

 

그리 말하며, 그는 웃었던가.

 

미호크는 편지를 움켜쥐었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호크는 이내, 보라색 봉투의 가장 안쪽에 또 다른 편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그마한 하얀 종잇조각에는 눈에 익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또 다른 글자가 써져있었다.

 

[미안]

 

그것은 무엇에 대한 사과인가. 미호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글자가 써진 하얀 종잇조각을 뒤집어, 또 다른 하얀 공간을 까만색 잉크로 채워 넣었다.

 

[나도 좋아한다, 에이미]

 

양면이 까맣게 물든 종이를 흰 봉투에 넣어 봉했다. 미호크는 다른 일곱 개의 봉투를 그러모아 흰 봉투와 함께 다시 책상 서랍 안으로 채워 넣었다.

 

미호크는 그 이후로 좀처럼 서재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서재로 향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 년 후였다. 편지를 주었던 사람이 죽은 지 어느덧 이 년, 또 다시 그의 생일이 돌아왔다. 그날도 미호크는 어김없이 연보랏빛 캄파눌라 꽃이 만개하던 초원을 밟아 붉디붉은 술 한 잔을 죽은 자에게 바치고 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미호크는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 불명의 새하얀 봉투였으나 낯이 익었다. 봉투를 열었더니 익숙한 글씨가 그를 반겼다.

 

[이제 읽어도 돼요]

 

편지에 담겨있는 것은 상냥한 빛깔로 물든 태양의 색.

 

그토록 기다리던 다음 만남과 다음의 편지가 돌아왔다. 미호크는 편지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보내지 못한 답장이 전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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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삼총] 영혼체인지 외전의 막간

W.B - 츠쿠리







01

 

다들 모였지요이?”

 

모비딕 구석에 있는 널찍한 창고에 흰 수염 해적단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각 번대의 대장들은 물론이고 쟁쟁한 무력을 갖춘 일반 선원들까지 굳은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토록 엄청난 인사들이 은밀하게 모여 있는 까닭은. 그들이라면 모비딕의 작전 회의실을 정당하게 빌릴 수 있음에도 왜 굳이 이런 퀴퀴한 냄새가 나는 구석진 창고에서 회의를 하는 것일까.

 

에이미는 방에 있지요이?”

 

그래. 다른 선원들에게 부탁해 되도록 방에 있게끔 감시해달라고 했으니 틀림없어.”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해. 만약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에이미가 더 삐뚤어질지 몰라.”

 

!”

 

외마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 껌을 질겅질겅 씹는 에이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몸을 떨던 사람들은 사회를 맡은 1번대 대장 마르코가 몸을 일으키자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마르코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에이미 사춘기 대비 및 대책 회의를 시작하겠다요이!”

 

그렇다. 겉보기에는 해군 본부라도 습격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였으나 실상은 그저 어릴 때부터 둥기둥기 키워온 에이미의 뒤늦은 사춘기 대책 회의반이었다.

 



 

02

 

흐윽, 우리 에이미가 욕을! 무려 새끼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건 양반이지 이 사람아! 난 아까 시발이라는 말도 들었어!”

 

,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두문자를...”

 

와글와글. 잇따라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증언은 오히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참담한 실정이었다.

 

심지어 에이미 녀석, 아버지에게 다짜고짜 흰 수염이라고 불렀다고! 아버지만 보면 좋아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던 녀석이 말도 놓고 말이야! 아버지가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상심해 하시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만!”

 

, 아버지가 에이미를 좀 예뻐하셨어야지. 하긴 에이미는 어릴 때 무쟈게 천사 같았으니 말이여.”

 

어릴 때만 천사였는 줄 알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걔는 여전히 천사였어, 천사!”

 

바다에서 건져놓았던 무뚝뚝한 인상의 꼬맹이는 알고 보니 형제들의 얼굴만 봐도 좋아서 실없이 웃어버리는 햇살 같은 아이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허리의 반도 오지 않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있어 에이미는 여전히 모비딕을 활발하게 누비던 어린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어느새 사춘기라니! 다 컸구나 싶어 감개무량한 한편 대체 에이미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비딕 사람들은 열 살짜리 아이에게 고무오리를 사줄 정도로 육아에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잠자코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르코가 결국 치솟는 혈압을 감당하지 못해 머리를 감싸 쥐더니 마구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이! 평소에 말 곱게 쓰라고 했어, 안했어? 애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구분 않고 다하더니 이게 뭐여요이!”

 

, 마르코 대장!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이?! 애 앞에서 해적답지 않다는 둥 온갖 참견은 다 하더니 이게 뭐냔 말이여! 그러니까 애가 상처받고 삐뚤어졌겠지!”

 

마르코의 말에 참회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흐윽, 맞아! 한두 번 욕을 한 솜씨가 아니던데 그 어린 게 얼마나 흰 수염 해적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으면 욕을 연습 했겠어?”

 

오늘 보니까 아주 찰지던데? 훌쩍, 에이미 녀석 훌륭한 해적이 되어 버렸다구!”

 

이대로 에이미가 안 돌아오면 어쩌지?”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사춘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어줄 거라구, 에이미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희망사항이었다. 사춘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그 결과 또한 미지수이지 않은가. 그들만 해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각자의 과거가 있었던지라 차마 확언을 할 수 없었다.

 

, 그래도 에이미, 상냥한 건 여전하니까! 아까도 밥 먹고 나서는 이렇게 맛있는데 많이 못 먹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줬어.”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띄우기 위해 삿치가 필사적으로 대변했다. 사춘기가 와도 천성이 상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투박하고 거칠어진 말투에 가려져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착하고 고운 에이미의 심성이 엿보였다.

 

형제들이 앞 다투어 동의했다.

 

맞아! 에이스 챙기는 것도 여전하고. 아까 뜨거운 국물을 쏟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잖아. 그건 에이미의 상냥함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사춘기 따위로 에이미를 평가하면 안 돼! 에이미는 여전히 착하고 천사 같은 우리 막내인걸!”

 

에이미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보이가 알았더라면 욕을 한 사발 붓고도 남을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현재 형제들의 필사적인 만류 하에 선실에 갇혀 비타민 과다 섭취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물론 귀한 과일을 자기만 먹을 수는 없다며 선실 앞을 지키는 선원들에게 건네주어 사춘기가 왔을 뿐 역시 상냥한 에이미!’ 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이건 나중의 일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에이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이.”

 

대하긴 뭘 대해. 머리에 총알 한 방 박아 넣으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겠지.”

 

여태껏 탐탁찮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에 탄창을 장전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에이미가 어디 아픈가 싶어 진찰하려다가 난 멀쩡하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쇼.’ 라는 말을 들은 탓에 현재 그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마르코 못지 않게 에이미를 오래 봐왔던 이조우로서는 웃는 낯으로 의사 선생님, 하고 부르던 꼬맹이의 태도가 돌변하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만큼은 누구보다 급한 이조우다. 당장이라도 에이미의 얼굴을 두 쪽 낼 것 같은 기세에 형제들이 화들짝 놀라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조우, 참아!”

 

애를 매로 다스리면 쓰나! 그리고 이조우가 매일 총만 쏴 갈기니까 에이미가 그렇게 삐뚤어진 걸 수도 있어!”

 

그래! 애는 사랑으로 품어줘야지!”

 

우리의 사랑이라면 에이미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논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타령에 이조우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어디 해적 주제에 사랑 타령이나 하고! 이게 무슨 사랑 노래로 모든 게 해결되는 모 애니메이션인 줄 알아? 장르가 달라, 장르가! 이조우가 제 4의 벽을 뛰어넘을 뻔한 찰나였다.

 

마르코 대장! 큰일 났어!”

 

누군가 창고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왔다. 에이미의 선실 앞을 지키고 있던 선원 중 한 명이었다. 마르코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선원은 가쁜 숨을 내쉬며 폭탄을 투하했다.

 

에이미 녀석이 글쎄 3일 뒤에 친구를 만나러 모비딕을 잠시 떠나겠대!”

 

쿠궁! 묵직한 효과음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마르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에이미 녀석! 설마 가출을 꿈꾸는 건가요잇?!”

 

청소년기의 반항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나쁜 친구와 어울려 돌아다니는 게 아니던가! 술담배를 하며 거리를 들쑤시고 다닐 에이미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빠지는 기분이다. 마르코는 몰려오는 두통에 뒷목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선언했다.

 

당분간 에이미는 외출 금지다요이!”

 

쉬쉬하고 있지만 마르코는 모비딕 내의 제일가는 에이미 팔불출이었다. 덕분에 보이는 때 아닌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니미 시벌, 그러니까 이 몸을 다시 에이미한테 돌려주려면 일단 애들을 만나야할 거 아냐! 보이는 장장 이틀 동안이나 가출이 아니며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닌 그저 친구들 간의 건전한 모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했다. 욕설만 아니었다면 과정이 한결 수월했을 것을, 상황이 너무 엿 같은 나머지 대화 중간 중간에 욕을 자제할 수 없었던 보이는 결국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행동계획서까지 갖다 바쳐야 했다.

 

 



03

 

한편 마린포드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온화해졌나 싶었던 벚꽃공주는 아니나 다를까 다시 그 불같은 성미를 드러내어 지켜보던 사람들로 하여금 심적 평화를 갖게 했다. 그럼 그렇지! 그 성질이 아니면 우리 보이 대령님이 아니지! 너무 적응된 나머지 해군들은 미소보다 욕설을 더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보이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에이미는 아카이누의 부관이라는 상황 덕분에 원치 않게 강제로 대면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에이미는 걸핏하면 스트레스를 해적소탕에 풀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서류처리는 봐도 모르겠고 나중에 보이가 한 번에 몰아서 하겠지! 원래 몸이 아닌지라 적응하기가 좀 까다롭긴 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먼치킨의 반열이 아니던가. 흰 수염 해적단에 있을 때도 밥 먹듯이 덤벼오는 해적을 상대했던 에이미는 오히려 손속에 더 자비가 없었다.

 

보이 대령님, 어쩐지 더 터프해지신 것 같아.”

 

크흑, 멋있어! 역시 보이 대령님이야!”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에이미는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기 바빴다.

 

뒈져!!! 아카이누!!!!’

 

마음의 소리와 발차기가 나란히 나갔다. 분노를 200% 실은 발차기에 해적 여럿이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알 게 뭐람! 에이미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해적들을 하나하나 즈려밟았다.

 

이건 뭐 화병 나서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네! 보이의 몸만 아니었으면 기회를 노려 쓱싹해버릴 텐데! 왜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질 못하니, 엉엉! 그리고 아카이누 이 자식은 왜 자꾸 눈앞에 얼쩡거리고 난리야, 죽이고 싶게!

 

울화통에 속만 타들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주변의 그 누구도 몰랐다. 아카이누 덕분에 본의 아니게 보이의 몸에 완벽하게 녹아들어버린 에이미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과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순조로운 삼일을 보냈다.

 

 



04

 

그리고 마지막으로, 씨씨.

 

그녀는 그 누구와도 바뀐 일이 없기에 다가올 모임 날짜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저녁 늦게 걸려와 서로의 이야기를 하소연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점이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씨씨는 하소연을 듣는 것이 제법 즐거웠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삼일 후, 에이미와 보이가 원래대로 돌아왔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에이미와 씨씨가 바뀐다는 것을. 사춘기가 접어들기를 기대했던 모비딕 사람들이 침착하고 차분한 또 다른 에이미를 대면하게 되어 뒷목잡고 쓰러지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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