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햇살이 비추는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오정은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보낼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래, 팔계가 이런 말을 꺼내지만 않았어도 나가서 빠찡꼬를 하고, 거리에 있는 여자를 꼬시고, 그러다가 팔계에게 들켜서 쩔쩔매며 장보는 것을 돕고, 경운원에 있는 그 재수없는 땡중과 말 싸움을 하고, 꼬마 원숭이랑 놀아주다가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평범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분명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그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들은 이상, 오정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가 글렀음을 깨달았다.

 

 

[....방금 뭐라고?]

 

 

하늘에서 제발 동아줄이라도 내려주기 바라는 심정으로 오정이 되물었다. 마치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팔계는 손을 뻗어 잘 무쳐진 나물을 집었다. 그리고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며 오정의 소망을 단번에 산산조각 냈다.

 

 

[못 들었나요? 내일 대청소를 할테니까 오정의 방에 있는 것들 중 버릴 것은 미리 버려주세요. 오늘은 빠찡꼬 좀 하지 말구요. 집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아무래도 햇볕이 좋으니까 이불도 좀 널어야 될 것 같고, 아! 아마 내일 오공이 와서 도와줄거에요. 삼장은 바쁜데다가 귀찮다고 거절하겠지만 오공은 잘 도와주거든요. 그리고 힘이 세서 가구 밑을 청소할 때 맡기기 편하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오늘 하루랑 내일만 좀 고생해주세요. 알았죠, 오정?]

 

 

오정은 대답 대신 먹던 고기완자를 식탁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최유기/삼공오팔] Play boy!

W.B-By. 츠쿠리

 

 

 

 

 

 

 

 

 

 

 

 

 

 

햇살은 눈부시고, 하늘은 새파랬다. 그러나 오정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음침해보이기만 했다. 오정은 뻑뻑 피워대던 담배를 툭툭 털고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 팔계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장을 보러 가겠다며 나가서 현재 집 안에는 오정밖에 없었다. 오정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마 오정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두 시간 정도. 그 사이 어떻게 해서든지 일을 처리할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오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에 조심스레 숨겨놓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야한 잡지, 'Play boy' 비장의 엄선 컬렉션이었다.  

 

그 동안은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내일 대청소 때,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팔계가 오정의 침대 밑을 청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다. 상냥한 미소를 띄며 말하는 팔계를 도무지 거절할 수 없어서 수락하기는 했지만 내일 할 대청소를 생각하니 오정의 마음은 마치 납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물론 오정도 양심이 있었다. 지금 대부분의 집안일을 팔계에게 다 맡겨놓고 있지만 엄연하게 자신의 집인만큼 청소를 도울 의사는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오정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피 같은 비장의 엄선 컬렉션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팔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오정은 원래 요괴의 피가 반이 섞였을 뿐인 평범한 남자였다. 따라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쟁여놓은 야한 컬렉션이 존재했던 것이다. 팔계와 동거하면서 양심상 대부분의 잡지는 버렸지만 원래 천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버리려고 애써도 결국 나중에는 본능이 이성을 이기는 기이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즉, 결국 버릴 수 없다는 것만을 깨닫고 조심스레 숨기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컬렉션을 얻었던 과정을 생각하니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동네 청년들에게 떠도는 소문을 듣고 마을의 책방에 가서 협박을 동원해 뺏어온 'Play boy 특집판' 이며, 2시간에 걸친 마작과 포커 내기로 쟁취한 여러가지 누님들의 컬렉션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오정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팔계는 이를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단번에 불태워버릴 것이 분명했다. 어디 맡길 곳이 없나, 하고 고민해보았지만 이미 오정의 인간 관계에서 친구라는 카테고리는 사라진지 오래였으며, 그렇다고 소중한 컬렉션을 땅에 파묻어 숨기거나, 창고에 숨기기에는 뭔가 찜찜했다. 그렇게 새삼 자신의 협소한 인간관계를 깨달은 오정은 하루 뒤 꼼짝없이 불태워질 운명의 컬렉션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 때였다. 오정의 머리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대해 연이어 탄사를 보낸 오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봉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봉투 안에 컬렉션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넣고 포장까지 마쳤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며 나갈 채비를 하던 오정은 문득 생각난 듯, 작은 종이 쪼가리에 글씨를 휘갈겼다. 그리고 팔계가 잘 볼 수 있도록 식탁위에 올려놓은 후, 문을 열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정이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든 팔계가 들어왔다. 시장에서 사온 물건들을 식탁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팔계는 이윽고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정?]

 

 

집 안은 적막했다. 방에서 뒹굴고 있을거라고 예상한 오정이 없자 팔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정의 방에 갔더니 오정은 없고, 버릴 잡지 책이나 쓰레기가 한쪽에 곱게 놓여져 있었다. 아마 아침에 팔계가 말한대로 정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거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팔계는 식탁에 못보던 메모가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메모를 집어들었다. 휘갈겨 쓴 글씨체의 주인공은 예상했던대로 오정의 것이었다.

 

 

 

 

 

<너 대신해서 꼬마 원숭이 녀석 과외해주고 올테니까 네 물건 중에 버릴 것 있으면 준비해놔.

그리고 점심은 먼저 먹어. 원숭이 돌봐주는 데 땡중이 점심 밥이라도 공양해주겠지?

-오정->

 

 

 

 

 

오정이 과외를 한다? 전혀 상상되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팔계의 의문만 더 증폭시키는 꼴이 됐다. 팔계가 가끔 오공을 가르쳐주러 경운원에 갈 때 오정도 몇 번 따라간 적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오정은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운원에 가서 결국 오공과 티격태격 하는 걸 보면 그냥 어린아이가 두명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팔계는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오정.....]

 

 

아무리 봐도 엉뚱한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물론 순수하게 팔계를 위해 오공에게 가겠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정이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정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팔계는 현재 경운원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말릴 수 있는 팔계가 없는 이상, 보나마나 제대로 된 과외는 물건너갔음이 뻔했다. 최소의 피해는 오정과 오공이 싸우는 것이겠지만 최악의 경우 삼장을 건드려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오정이 사고를 친 것이니 수습하는 것은 그 쪽의 사정이었다. 게다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모처럼 오정이 정리를 하라고 준 시간이니 느긋하게 정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정이 일으킬 모든 사건과 그에대한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한 팔계는 느긋하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운원은 팔계의 예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오정이 경운원에 막 도착했을 무렵, 삼장은 마침 일 때문에 서류처리를 하느라 바빠 오정이 팔계 대신 온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정에게는 삼장 이외의 굳건한 장벽이 존재했다. 바로 오공이었다. 팔계가 평소에 어떻게 세뇌를 시켰는지 도무지 팔계 대신 오정이 온 것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팔계는 못 온다니까?!] 

 

 

뾰루퉁한 얼굴로 노려보는 오공의 눈을 바라보며, 오정은 애써 오공을 타일렀다. 맘 같아서는 콱 한대 쥐어박고 싶은데 품에 곱게 안겨있는 소중한 컬렉션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공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오공은 이런 오정의 반응을 보며 수긍하기는 커녕 더욱더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같으면 말 안듣는다고 한 대 쥐어박았을텐데, 오정이 갑자기 친절하게 구니까 더 이상해. 거기에다가 팔계는 오정처럼 자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사람이 아니야! 팔계가 맨날 오정이 일은 다 자기한테 떠맡기고 여기저기 쏘사다닌다고 그러면서 나한테는 절대 자기 일을 남한테 떠넘기지 말랬어!]

 

 

산넘어 산이었다. 오정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팔계가 오공한테 예절을 가르치면서 오정의 뒷담화를 이래저래 많이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돌아가면 팔계일을 좀 많이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오정은 열심히 오공이 납득할만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오공. 오늘은 팔계가 많이 바빠 보여서 내가 팔계한테 널 가르친다고 자청해서 말한거라니까? 그러니까 좀 납득하란 말이야!]  

 

[납득하고 싶어도 납득할 수 있어야 하지! 오정은 가르치는 것도 솔직히 못하잖아! 그리고 오정이 자청해서 날 가르치러 오겠다고 말한 것도 무진-장 이상해! 오정이 날 만나려고 팔계한테 말하면서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

 

 

생각보다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 오공의 말에 오정은 그만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회의감도 들었다. 이런 작은 아이한테 신뢰감도 얻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만 진한 회의를 느껴버린 것이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오정은 오공에게 슬금슬금 다가가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오공에게 다가가서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귓가에 입을 댔다.  

 

 

[실은 말이야, 진짜, 진-짜! 비밀인데.....나는 팔계가 가르치지 못하는 단 한 가지를 알고 있어. 그런데 그 한 가지를 가르칠 수 있는 내가 마침 옆에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팔계가 가르치는 거 보니까 너는 아무리 해도 팔계한테 그걸 못 배우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온거야.]

 

 

다행히 오공은 오정의 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역시 어린아이에게는 비밀 이야기처럼 말하는 게 최고였다. 오공은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계속해서 흘끔거리며 오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정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오공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오공이 더 이상 관심없는 척 하는 게 힘들었는지 오정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흠흠....뭐, 뭘 가르쳐 주는 건데?]

 

 

오정이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어른이 되는 법.]

 

 

순간, 오공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난 것은 결코 오정의 착각이 아니었다. 오공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빛내며 오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오정의 팔을 덥썩 잡았다. 키는 땅꼬마인 주제에 힘은 더럽게 세네. 그러나 오정은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오공의 관심을 겨우 끌어놨는데 굳이 다 된 밥에 코 빠뜨릴만한 말을 내뱉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었다. 오정은 싱글싱글 웃으며 일급 비밀을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오공의 귀에다가 입을 댔다. 오공의 귀가 쫑긋거리며 오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흠흠, 삼장이나 팔계는 아직 네가 이런 걸 보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겠지만....모름지기 어른이 되려면 여자를 잘 알아야 하지. 오공, 너 솔직히 네 주변에서 여자를 얼마나 많이 봤냐?]

 

[어? 여, 여자? 음....삼장이 마을이나 다른 곳에 일이 있어서 따라갈 때 본 거랑, 경운사에 불공 드리러 오는 여자를 보는 정도?]

 

[쯧쯧, 그러니까 너가 아직 키가 요만한 거야. 내가 그럴 줄 알고 널 위해 자료를 가져왔다는 거 아니겠냐.]

 

 

오정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봉투를 오공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야?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정은 최대한 선심을 쓰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건 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마련한, 매-우 소중한 컬렉션이지! 특별히 여자를 모르는 널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져왔다! 뭐, 무진장 아끼는 거긴 하지만 오공 널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잠시 빌려줄게. 대신, 이거 팔계나 삼장한테 말해서는 안된다? 팔계나 삼장은 아직 네가 어른이 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난 충분히 네가 한 명의 듬직한 사나이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 오공!]

 

[오정......!]

 

 

오공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오정에 대한 불신감이 가득했던 오공이지만 자신을 한 명의 듬직한 사나이로 만들어 주기 위해 아끼는 물건을 가져왔다는 오정의 말은 가득했던 불신감을 씻고도 남았다. 오정의 시커먼 속내를 모른 채, 오공은 팔계의 말만 믿고 오정의 말을 믿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한편, 오정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오정은 이것도 다 오공을 위해서이며,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를 알기는 알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애써 정당화했다. 이건 절대 팔계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모든 게 다 오공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오정은 오공에게 다시 한 번 팔계나 삼장에게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뒤 경운원을 나섰다. 오공은 팔계나 삼장이 보면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막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오정의 당부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으니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팔계의 눈을 피해 소중한 컬렉션이 안전하게 보호되었다고 생각하며 오정은 룰루랄라 신나게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정은 몰랐다. 자신의 이 행동이 얼마나 커다란 폭풍을 몰고 올 것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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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이 집으로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공은 오정이 준 봉투를 뜯었다. 봉투에는 대략 열 권 남짓의 책이 들어 있었는데 모든 표지가 대부분의 옷을 벗거나, 속옷만 입고 있는 여자로 장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책의 내용은 표지보다 더 화끈했다. 표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섹시한 옷을 입거나, 거의 벗은 여자들이 페이지마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오공은 이런 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어라? 왜 모두들 옷을 벗고 있는 걸까? 혹시 더운 걸까? 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사실 오공은 유난히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오행산의 감옥에서 나올 때부터 곁에는 항상 삼장이 있었고, 삼장의 곁에 있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경운산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는 오공은 여자를 만날 일이 전무했으며,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삼장이라고 오공과 다를 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절에서 자랐고, 스승님인 광명이 죽은 후에는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설사 아름다운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여자들이 꼬여도 무관심 자체로 대응했기 때문에 여자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삼장은 오공에게 성교육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삼장은 오공의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뭘 가르쳐야 할지도 몰라서 팔계에게 일임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러나 팔계가 오공에게 성교육을 할 리가 없었다. 오공에게 현재 필요한 건 성교육이 아닌 기초 상식과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정이 말한 '팔계와 삼장은 널 어른으로 성장시키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은 얼추 맞기는 했다. 다만, 오정이 말한 어른의 의미가 성적인 부분에서의 성장이었다면, 오공이 생각한 어른의 의미란 키가 커진다거나, 근육이 붙는 육체적 성장이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오공은 대충 페이지를 넘겼다. 책을 보면서 알게 된 거라고는 여자의 몸과 남자의 몸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 뿐이었다. 그 외에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를 보는 게 어른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오정은 주장했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으음......혹시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져있는 걸까?]

 

 

그러나 오공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봐도 키가 금방 커질 리가 없었다. 그걸 모르는 오공만이 열심히 고민할 뿐이었다. 오공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꼬맹이 취급을 받는 것도 싫었고, 빨리 어른이 되서 삼장을 도와주고 싶었다. 지금 자신은 작고, 힘도 약해서 삼장을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삼장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삼장을 화내게 만드는 자신이 미웠다.

 

아직 어린아이의 사고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가 어떤지 예측조차 하지 못하는 오공이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공은 자신이 사고를 치는 것이 자신이 어른이 아니라서 그런거라고 믿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삼장이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척척 도와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공의 머릿 속에서 키가 크고, 멋지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미래의 자신이 열심히 삼장을 도와주는 그림이 그려졌다. 오공의 멋진 어른의 기준은 키와 근육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래의 자신의 모습에 연신 감탄을 하던 오공은 다시 한 번 오정이 준 책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때였다. 문득, 오공은 삼장도 여자를 잘 모를 거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팔계야 마을에 사니까 여자들과 대화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삼장은 중이었고, 자신만큼이나 경운원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여자와 대화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오공은 고민에 빠졌다. 오정은 분명히 여자를 알아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삼장은 여자를 잘 모르는 데 이미 어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게다가 만약 삼장이 여자를 잘 모른다고 한다면 삼장에게도 이 책을 빌려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오정은 팔계랑 삼장한테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뒤죽박죽이 된 여러가지 생각에 끙끙대며 고민하던 오공은 이내 작은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오정이 준 책들을 주섬주섬 봉투에 소중하게 담았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삼장이 여자를 잘 알리가 없었다. 삼장은 키는 크지만 솔직히 근육은 좀 부실하다. 그러니까 즉, 삼장은 여자를 자신보다 많이 알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 거였고 그 때문에 키는 컸지만 근육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거라고 오공은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삼장은 다른 성인 남성에 비해 탁월한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맨 손으로 도끼자루를 부수는 오공의 관점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게다가 오공의 주변에는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진 팔계나 오정이 존재했기에 어린 오공에게는 삼장의 근육이 부실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삼장도 이걸 보면 튼튼한 어른이 될 수 있을거야. 비밀로 해달라고 한 오정에게는 미안하지만....이게 다 삼장을 위한 일인걸! 오정도 분명 이해해줄거야!]

 

 

연신 당부한 오정의 말을 어기는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오공은 혼잣말을 힘차게 중얼거리며 봉투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지금쯤 삼장은 집무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려워서 무슨 글인지 이해를 못하는 오공은 도와줄 수 없지만, 이걸 보면 삼장도 분명히 튼튼해져서 서류 처리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삼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거란 생각에 오공은 오정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 깊숙이 밀어 넣고 집무실로 향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삼장의 직인이 서류에 날인을 찍었다. 오늘따라 조용한 집무실에 향긋한 차의 향기가 떠돌았다. 모처럼의 조용한 서류처리에 삼장은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항상 보호자가 필요하다며 오공을 이끌고 항상 자신의 앞에서 이런저런 수업을 하던 팔계는 왠일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공에게 자신이 밀린 서류 처리 때문에 바쁘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능률이 배는 좋아져서 서류가 금방금방 처리되는 것은 감사할만한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놀아주지 않는다며 칭얼거리는 오공이 없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삼장이 그 사실에 못내 불쾌해져서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향긋한 차의 향기 대신 독한 담배 연기가 금세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 때였다.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쾅대며 요란하게 오는 이 발소리는 걷는다기 보다는 뛰는 것에 가까웠다. 조용한 경운원에서 이런 발소리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삼장은 얼른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방금까지 서류 처리를 한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삼장!]

 

 

예상대로 오공이 집무실로 뛰어들어왔다. 오공을 힐끔 보았을 뿐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은 삼장은 오공에게 관심 없는 척, 새로운 서류를 집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오공의 품에 있는 커다란 봉투가 삼장의 눈에 들어 왔다. 호기심이 생긴 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뭐냐?]

 

[응? 아! 이거, 오정이 준건데 내가 삼장한테 보여주려고 가져 왔어! 나 잘 했지?]

 

[.....오정이?]

 

 

오공과 마찬가지로 삼장은 오정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다. 삼장이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오공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해맑게 대답했다.

 

 

[오늘 팔계가 바쁘대서 대신 나 가르치러 와줬어! 그리고 나한테 아끼는 거라면서 책을 빌려줬는데 어른이 되는 책이래! 오정이 팔계나 삼장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나, 삼장한테도 보여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나 잘했지? 그치?]

 

 

만약 오공이 강아지였다면 칭찬해달라고 꼬리를 흔들 것만 같았다. 삼장은 오정이 비밀이라고 했음에도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책을 가져온 오공이 기특해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공이 헤헤, 웃으며 기분이 좋다는 듯이 뺨을 삼장에게 부비적거렸다. 어른이 되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어른이 읽을 만한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한 삼장은 오공이 건네준 봉투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삼장? 왜 그러는 거야?]

 

 

오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어왔지만 삼장은 차마 대답해줄 수 없었다. 절에서는 금서인 야한 잡지가 버젓이 삼장의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표지조차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옷을 입은 여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삼장은 타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조용히 오공에게 물었다.

 

 

[오공.....너 이거 읽었냐?]

 

[응? 오정이 읽으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해서 봤는데 재미 없었어. 어른이 되면 삼장을 도울 수 있으니까 꾹 참고 읽기는 했는데 차라리 호빵맨이랑 식빵맨이 나오는 책이 더 재미있어! 그렇지만 오정이 나보고 여자를 너무 모른다고 여자를 알아야 한다고 해서 열심히 보기는 했어. 그런데 삼장, 왜 여자는 남자에 비해 가슴이 커?]

 

[..........]

 

 

순진무구한 오공의 질문에 삼장은 말문이 막혔다. 어른이 되서 자신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그랬다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책은 오공이 자의로 읽은 것이 아니었다. 오정의 꾐에 넘어가서 읽은 것이니 결과적으로 죽일 놈은 오정인 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삼장에게서 조용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물론 그 대상은 빌어먹을 바퀴벌레인 오정이었다. 삼장은 책을 다시 봉투 안에 집어 넣고 삼장의 살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오공에게 입을 열었다.

 

 

[오공.]

 

[으, 으응?]

 

[잘 들어. 저런 책은 절대 보면 안되는 책이야. 저걸 보면 넌 어른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어려지게 되는 거야.]

 

[뭐? 정말?]

 

[그래. 지금은 너가 많이 보지 않아서 괜찮지만 계속 보게되면 너는 지금보다 더 어려져서 결국 아기가 되고 마는 무서운 책이야. 오정이 널 놀리려고 속인거야.]

 

 

삼장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는 오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삼장이 아니라면 꼼짝없이 어려질 뻔했다고 소리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오정이 뭐라고 말해도 넘어가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한편, 조금도 살의가 가라앉지 않은 삼장은 조용히 옆에 있는 전화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팔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팔계가 여보세요, 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오정의 지옥길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   ◈   ◈

 

 

 

 

 

 

 

 

 

 

 

 

 

 

 

 

 

 

 

 

 

[팔계, 나 왔......]

 

 

오공에게 컬렉션을 맡기고 돌아온 오정은 팔계가 부탁한 쓰레기를 버리러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 동안 버리려고 모아놓은 쓰레기를 버리려면 마을 구석에 있는 소각장에 가야 했는데 기분이 좋아진 오정이 팔계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오정은 문득 뒷 마당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호기심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정은 팔계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태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벌써 대청소 하는 거야? 내일부터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러려고 했는데 급하게 태울 것이 생겨서요. 매우매우 급한 쓰레기가 말이죠.]

 

 

생긋, 웃으며 말하는 팔계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오정은 왠지 오한을 느끼고 몸을 떨어야 했다. 왜인지 몰라도 지금 팔계에게 다가가서는 안될 것 같다고 그의 더듬이 레이더 망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 때였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오정의 등 뒤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시나? 빌어먹을 바퀴벌레? 내가 오늘은 기필코 해충을 박멸해주지. 네놈의 썩을 변태 근성을 생각해서라도 넌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일테니 후회는 없군.]

 

 

싸늘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삼장이었다. 무려 은색의 리볼버를 들고 총알을 장전하고 있는 삼장의 등 뒤로 순간 야차가 보였다. 오정이 식은 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왜, 왜들 이러시나아.....팔계도 그렇고 삼장까지, 무슨 일 있어?]

 

[흥, 있지. 아-주 큰 일이 있지. 오늘은 해충 박멸을 하는 중대한 날이거든.]

 

 

말을 마친 삼장이 총을 오정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사했다. 다행히 운동신경이 좋은 오정이 재빨리 피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그 총알은 오정의 머리에 박혔을 것이 분명했다.

 

 

[으악! 무, 무슨 짓이야, 이 빌어먹을 땡중! 팔계, 좀 말려 봐!]

 

[아니요. 저도 삼장의 말에 동의하는 바라서요. 해충은 박멸해야 마땅하죠, 그렇지 않나요 삼장?]

 

[칫,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믿었던 팔계마저 배신하자 오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따질 틈도 없이, 오정은 연속으로 발사되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 때였다. 오정의 시선이 팔계가 들고 있는 책에 고정 되었다. 그것은 오정이 매우 잘 아는 책이었다. 바로 오공에게 맡긴 그의 베스트 컬렉션이었기 때문이다. 

 

 

[헉! 그, 그걸 팔계가 어떻게....! 그건 내가 오공에게 맡겨놨는데!]

 

[아아....이거 말이죠? 전 정말 오정에게 실망 했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런 걸 오공처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 주었다니요. 아무리 인간이 말종이고, 변태고, 빠찡코나 치는 바퀴벌레라도 설마 어린아이에게 이런 책을 보라고 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삼장의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파, 팔계!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응?]

 

[변태랑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 오정.]

 

 

팔계가 싱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놓았다. 그리고 책이 떨어진 장소는 바로 뒷마당에서 피우고 있던 불의 위였다. 종이는 불에 약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오정의 소중한 컬렉션은 무섭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악! 아, 안돼! 내가 저걸 어떻게 모았는데....!]        

 

 

오정이 울부짖었으나, 팔계와 삼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계는 구석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들고 삼장에게 합류했다. 삼장은 총알을 재 장전하고 오정을 겨누었다. 팔계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고마운줄 아세요, 오정. 전 특별히 그 동안의 정을 보아서 기공만은 자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자, 잠깐! 팔계, 멈춰! 멈추라니까?!]

 

 

서서히 다가오는 팔계와 삼장에 오정은 공포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슬금슬금 도망치려고 했으나 빈번히 삼장의 총알에 퇴로가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오정의 비명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퍼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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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작.

 

삼장일행이 서쪽으로 떠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오공인데 이번에는 오정이 메인이 되도록 염두에 두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정이 제일 다루기가 쉽거든요 ㅋㅋㅋㅋ

개그로 쓰고 싶었는데 의도대로 잘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식탐정/오가타x다카노] 선배

W.B by - 츠쿠리

 

 

 

 

 

 

 

다카노 세이야. 유명한 역사 소설가이자 탐정 일을 하고 있는 남자가 오가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항상 옆에 붙어 다니던 비서 교코는 웬일로 보이지 않았다.

 

"다카노 선배!"

 

오가타가 싱긋 웃으며 다카노에게 다가갔다. 우물거리며 한 입 가득 크로켓을 베어 물고 있던 다카노는 웅얼거리는 입을 하며 오가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루 종일 먹는 버릇은 여전하다 싶었다. 하긴 먹지 않으면 식탐정 다카노 세이야일 리가 없지.

 

"웬일로 교코 씨가 없으시네요?"

 

오가타의 말에 다카노가 크로켓을 한 입에 삼키며 대답했다.

 

"교코는 부모님과 함께 3일간 온천여행 갔어. 나도 가고 싶었지만 마감이 있어서 말이야. , 모처럼 온천을 즐기면서 지역 특산물을 마구 먹어 치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선배가 가면 그 지역은 장사가 불가능하니 참아주시죠. 그런데 언제부터 선배가 마감을 그렇게 충실하게 지켰다고 그러십니까?"

 

찌릿. 다카노가 동정은커녕 아픈 곳을 찌르는 오가타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언제나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인지라 오가타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경시청 간부 후보생이라는 그의 명함도 다카노 앞에서는 언제나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나도 양심이 있어! 라기 보다는 편집자인 테라다가 위염에 걸렸다지 뭐야. 이번에도 마감 안 지키면 정말 편집자가 바뀔 것 같아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라다는 내 담당을 5년 넘게 맡았으니까 죽으면 곤란하다고."

 

죽으면 곤란하다라. 과연 선배에게도 자신은 죽으면 곤란할 존재일까? 오가타는 얼마 전에서야 다카노가 소설 작가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카노와 알게 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려주는 것이 얄밉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한 놈이 죄라면 죄니까. 게다가 왜 그걸 여태까지 알려주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 자신도 없었다.

 

물어봤자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요리조리 빠져나갈 선배를 오가타는 지나치게 잘 알았다. 결국 선배와 후배,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꼴밖에 더 되나. 때문에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디냐고 오가타는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대학교 시절부터 다카노와의 관계는 언제나 선배와 후배라는 평행선 위였다. 처음에 봤을 때 그의 인상은 그저 '많이 먹는 선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표정들에 매료되었다. 음식 이외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도 의외의 면에서 따뜻함을 보여준다. 엉뚱하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지만 그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배와 후배라는 평행선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오가타는 다카노의 옆에 있고 싶었다. 경찰청 경감의 자리에 있는 그가 늘 다카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나가려는 제 노력 중 하나였다. 물론 그의 선배는 이런 면에서는 의외로 둔하기에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어이, 오가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먹을 것 좀 사줘."

 

"네에? 방금 크로켓을 세 봉지나 드셨잖아요!"

 

"그거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가. 너 마침 휴일이지? 교코도 없는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선배랑 같이 밥을 먹으면 제 지갑이 털리는데요?"

 

"에이, 왜 이러나. 쩨쩨하게 신경 쓰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러면 쓰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이 덜컥 튀어나와 버렸다. 오가타는 순간적으로 나온 진심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다카노는 태연했다. 그는 씨익 하고 웃었다. 평소의 다카노가 늘 짓던 밝은 미소였다.

 

"무슨 사이긴! 절친한 선배와 후배 사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 먹으러 가자!' 라고 외치는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음식점으로 걸음을 옮기게 된 오가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어떠랴. 지금은 절친한 선배와 후배 사이로 만족을 해야지. 오늘도 그는 선배의 물주가 되어야할 듯싶다.

 

 

 

 

 

 

 

 










2018. 01. 24 1차 수정


2012년에 쓴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테라사와 다이사쿠씨의 만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워낙 요리만화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요리 장르를 만화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테라사와 씨의 만화는 개인적으로도 참 재미있거든요.

미스터 초밥왕은 보신 분이 많겠지만 아마 식탐정은 생소할 겁니다.

 

오가타와 다카노의 조합은 참 좋습니다. 매일 조언을 구하는 후배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요 ㅋㅋㅋㅋ

아무리 대학 선배에다가 도움을 받고 있다지만 그런 것 치고 먹을 것을 매일 조달하는 오가타의 눈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ㅋㅋㅋㅋ조은 커플이다 ㅋㅋㅋㅋ

 

 


 

 

 

 

 

 

 

어느 날 너는 내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말을 했다. 그 날은 녀석이 갑작스레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래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던 나는 너에게 물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비밀, 이라고 말하는 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때 나는 몰랐다.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대답했는지 그리고 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래로 달려갈 각오를 했는지 그리고 너가 하려고 하는 일이 그 녀석을 위한 너의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랬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남겨진 자의 이야기

W. B - 츠쿠리

 

 

 

 

 

 

 

 

 

 

"선배를 좋아해요."

 

떨리는 성대. 떨리는 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녀는 내게 수줍은 목소리로 내게 고백했다. 그녀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선배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귀여웠으며 무엇보다 여성스러웠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었을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후배였다. 그러나 나는 고백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삐쭉빼쭉 제멋대로 뻗쳐있는 머리카락과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네가 그리워졌다. 정말 별일이었다. 좀 여성스럽게 다니라고 면박을 주던 네가 이다지도 그립다니.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없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나를 향해 올려다보는 그 간절한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바보같은 너보다 나를 더더욱 좋아하고 또 좋아해주겠지. 그러나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그 이상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몇 년동안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지를 알면서도, 그 고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답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런데 너의 고백을 받아들이면...그 여자애는 혼자가 되어 버려."

 

 

그래, 혼자가 되어 버린다. 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그 때와 같은 맑은 하늘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녀석이 가버리고 난 후 밝게 웃지만 축 늘어져버린 그 등을.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지금처럼 맑은 하늘을 보며 울던, 그 바보 같은 너의 뒷모습을. 어쩌면 너와 나는 닮았을지도 모른다. 너도 바보, 나도 바보. 바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것을 보니 나도 바보가 맞는 것 같다. 이성은 내게 그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마음은 그녀를 향해 거절의 말을 내뱉는다. 아아, 정말 소꿉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향해 손수건을 건내고는 뒤돌아섰다.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건 저 멀리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너다. 들쭉날쭉하고 제멋대로인 짧은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반가워보였다. 방금까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씁쓸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마음은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소리쳤다.

 

"어이-마코토!"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여성스럽지 못한데다가 마구 소리지르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들린다. 이거 중증인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너에게 다가갔다. 네가 윽박지르는 목소리마저도 이다지도 반갑다.

 

 

"고스케! 어디 갔었어, 기다리다가 가려고 했잖아! 일이 있으면 있다고 문자 같은 것 좀 보내란 말이야!"

 

"미안미안. 잠깐 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참, 그리고 오늘부터 야구는 못할 것 같다. 캐치볼로 바꿔야겠어."

 

"뭐? 늘 같이 하던 후배들 있잖아?"

 

"…아마 오늘부터 날 마주치기도 싫어할걸? 고백받았는데, 차 버렸거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귀를 막을 준비를 했다. 너가 얼마나 기가 막혀할지 알기 때문이다. 어찌나 평소에 나를 연애시키기 위해 애를 쓰던지. 일부러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나면 내 옆에서 걷게 해주거나 일이 있다고 둘러대서 나와 그녀, 단 둘만 있게 한다던지 정말 너답다면 너답다고 생각해야 할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노력은 가상하지만 몇 번의 패턴을 겪고 나자 자연스레 피하는 법도 익혔다. 덕분에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고백하려는 시도를 언제나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움직여야만 했다. 고백을 받고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야구를 못하게 된다고 실망하는 너의 얼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이런 나의 노력도 모르겠지. 예상대로 기가 막히다는 너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어어어? 왜 거절한거야? 내가 너한테 고백하게 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야구도 같이 하자고 부르고, 둘 만 있으면 은근슬쩍 자리 피해주고, 내가 혼자서 집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는데 그걸 다 참아줬더니…! 그리고 고스케, 알고 있어? 그 애 중학교 때부터 널 좋아했다고! 무려 중학교 때부터!"

 

"…강조하지마. 그리고 우린 이제 입시 준비해야 하잖아, 연애는 무슨 연애야. 그리고 지금 너가 내 연애 걱정해야 할 때냐? 입시 준비나 하시지? 너 저번에 모의고사 성적 올랐다고 자만하는 거 아냐? 너가 목표하는 대학에 가려면 넌 아직 한참도 멀었어."

 

"이익, 이럴 때만 성적이야기 꺼내고! 고스케 넌 바보야!"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야, 이 바보야."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대화인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며 가는 것을 좋아했다. 너가 알면 비웃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너와 둘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제는 야구같은 거 하지 않아도 좋다. 캐치볼이면 충분하다. 너와 단 둘이서 있다면 캐치볼이라도 야구보다 더 재미있으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표정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옆을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툴툴대며 가는 모습은 조금도 어른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3학년에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 너가 얼마나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장래를 털어놓았는지를 기억한다. 너는 큐레이터가 되어서 이모가 일하는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복원하고,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너의 그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얼굴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녀석을 향한 것이었음을. 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떠나가버린 그 녀석이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는 그냥 보기만 해도 알았고 어느 순간부터 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셋 중에서, 어느 순간부터 뒤쳐저서 걷고 있는 것은 나였다. 부정하고 싶었다. 너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녀석을 향한 우정이 있었고 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 3 자는 빠져주는 게 도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너와 녀석의 사이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물론 가슴은 아프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너가 웃는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 너가 녀석에 대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가버렸다. 그리고 너를 놓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아직도 너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떠올리며 막막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분명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그 생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 녀석을 위한 것인지. 

 

나는 말을 꺼냈다.

 

 

"있잖아."

 

"……."

 

 

너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치아키 녀석, 잘 지내고 있겠지?"

 

"……."

 

"그러고보니 너, 치아키한테 고백은 받았냐?"

 

 

대답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앞으로 가고 있던 너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녀석과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미 오래 전부터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애써 치밀어 올라오는 쓴 웃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뭘? 치아키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너가 치아키 좋아하는 거? 둘 중 어느 걸 알고 있냐고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빤히 다 보이는데 못 알아채면 오히려 바보지. 그래서 너 두고 치아키가 유학 가버렸다는 소식 듣고는 정말 놀라버렸지만 말야. 설마 그 녀석, 지금까지 편지 한 통 안 보낸 건 아니겠지? 혹시 주소 알면 편지 쓸 때 같이 써 줘라. 나한테 유학 안 알리고 간거, 정말 배짱 좋은 일이었다고. 다음에 만나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 배트로 후려치겠다고 전해."

 

"…편지, 오지 않아."

 

"뭐?"

 

 

이번에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그럴리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솟구쳤을 정도로 믿기지 않을 대답이었다. 그러나 쓸쓸함과 그리움을 감추고 있는 너의 얼굴의 일면을 본 순간, 네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벌써 녀석이 사라진지 반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편지 한 통이 오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유학 간 곳을 수소문해서 녀석을 두들기고 싶었다. 녀석은 내게는 감정을 숨기게 하고, 너에게는 새로운 감정을 심었다. 그렇게 멋대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으면 최소한 너에게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내게 너의 쓸쓸한 모습을 보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답지 않게 잔잔한 목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치아키가, 너무 급하게 뛰다가 넘어지지 말라고 했어. 기다려주겠다고."

 

"…뭐?"

 

"치아키는 미래에서 기다리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달려가야해. 치아키가 있는 곳으로."

 

 

그 말은 무척이나 추상적이었다. 아마 너와 녀석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영영 너와 그 녀석의 관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 알 것 같았다. 너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쓸쓸함과 그리움이 걷히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너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갔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손을 올려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러저리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손을 간질였다.

 

 

"으왓! 고스케?"

 

 

너의 놀란 목소리가 들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아마 언젠가, 먼 미래에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너와 녀석은 아마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서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런 미래도, 왠지 너희들이라면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고 해도 지금은 조금만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이렇게 단 둘이서.

 

 

"그럼, 나도 같이 달려가주지. 그 녀석에게 도달할 때까지, 있는 힘껏 달려줄게. 그러니까,"

 

 

물론 너가 달려가는 미래의 끝과 나의 끝은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너무 급하게 뛰어서 다치면, 내게 와. 치료해줄테니까." 

 

 

 

 

 

 

 

 

 

 

달려가자, 너에게로.

기다리자, 너를 위해

지켜보자,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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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연성의 해였던가.

나는 왜 이리 글을 열심히 쓴 것인가.

 

여튼, 학교에서 본 시달소를 보고 썼던 글.

그 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시달소가 소설과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치아키x마코토x고스케 사랑해요.

 

 

 

밑은 당시의 후기.

 

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아시다시피 이 글은 고스케의 이야기 입니다.

고스케야 말로 정말 시달소에서 제일 아리송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고백을 해도 차버리고! 말하는 멘트만 보면 마코토를 좋아하는 건데 말이죠.

 

제 입장에서 고스케는 마코토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치아키가 너무 티나게 마코토를 좋아하니까 이 셋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그런거고요. 치아키가 사라진 이 시점에서, 고스케는 절대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면 마코토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잖아요. 집도 혼자 가고ㅠㅠ 

 

이런 고스케의 심정은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데요, 눈치채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워낙 제 멋대로 써서- 달려가는 건 마코토, 기다리는 건 치아키, 그리고 지켜보는 것은 고스케입니다. 이 셋의 대표적인 마음을 표현한거에요. 여기에서도 고스케의 불쌍함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불쌍한 고스케ㅠㅠㅠㅠ

 

마음 같아서는 남겨진 자의 이야기 1편 -고스케- 를 끝냈으니 남겨진 자의 이야기 2편 -마코토&고스케-, 떠나간 자의 이야기 -치아키-를 쓰고 싶습니다. 이 셋의 미래를 다룬 내용이 될 것 같아요. 마코토는 마코토의 마녀 이모처럼 큐레이터가 되서 박물관에서 치아키를 위해 그림을 지키면서 있을 거고, 고스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마코토의 곁을 지켜주겠죠. 친구이상 연인 미만인 관계로요.

 

사실 제일 걱정되는 게 치아키인데요, 아니 도대체 하늘이 파랗지 않고, 야구가 없어지고 인구가 그만큼 줄어들고 타임머신이 발명되려면 몇 년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기다려도 이건 못 만나잖아요! 환생하라는 거야 뭐야.

하지만 전 쓸 겁니다. 아마도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쓰고 싶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를 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에 뵈요!

 

 

 

그리고 쓰지 않았다고 한다(후눈

 

 


 

 

 

 

 




[제이데커] 작별의 노래 (1)

W.B - 츠쿠리

부제: 환상

 

 

 

 


 

 

 

"데커드!"

 

어디선가 아이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데커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너울거리는 들판 너머로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손을 크게 흔들며 기운차게 뛰어오는 소년은 용케도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뛰어오면 위험할텐데. 혹시라도 넘어져 상처라도 생길까 걱정된 데커드가 소년을 향해 천천히 오라고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데커드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은 로봇이었다. 감정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로봇. 그것은 결코 바꿀 수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각인된 태생적인 족쇄였다.

물론 로봇 중에서도 데커드는 특별한 존재였다. 데커드는 무려 로봇 경찰인 브레이브 폴리스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직위는 단지 로봇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명함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을 데커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브레이브 폴리스는 로봇으로서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여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 아래 범죄를 심판할 수 있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목적이 아니었다면 브레이브 폴리스도 그저 기계적인 인공지능을 가진 인간의 부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감히 소년을 걱정한다고? 데커드는 멍하니 달려오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래 이건 마치 자신이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데커드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과부하가 걸려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데커드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로봇이라는 정체감 뿐이었다.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대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란 말인가. 데커드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은 정체성을 붙들려는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맹렬한 거부감과 함께 생전 처음 느끼는 정체불명의 혼돈이 그의 머리와 온 몸을 강타했다.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발에- 인간과 달리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 발에 무언가 따스한 것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니 어느새 다가온 소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순식간에 혼란스러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따뜻함의 근원은 바로 이 소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데커드? 내가 불러도 아무 말도 안하고…, 혹시 무슨 걱정 있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야?"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혼내줄게!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소년은 이내 든든한 해결사처럼 으스대며 손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적어도 다섯 배는 큰 몸집을 가진 로봇에게 혼내주겠노라 자신있게 말하는 소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으스대는 소년에게 데커드는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포근함이었다. 데커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데커드의 질문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커드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함이 가득했던 천진난만한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데커드는 자신이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년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모를 죄책감이 그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만큼 소년의 순수함은 더럽혀져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었으며 데커드가 지켜야하는 대상이었다.

 

그래, 지켜야하는 것이다. 데커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아직도 안개에 파묻힌 것처럼 흐릿했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잡힐 듯 말 듯한 기억의 파편 속에서 소년은 아마 자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이유는 모르지만 데커드는 그러한 확신이 들었다.

 

소년과 함께 있는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서 마치 공기의 흐름이 멈춘 적막 속에 단 둘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듯,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춤을 췄고, 그 틈을 파고든 따뜻한 햇살이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가슴이 벅차서 마구 저릴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아, 네가 있는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다.

치밀어오르는 벅찬 감격에 데커드는 나지막히 탄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진귀한 보물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네 얼굴에 비할 수 있을까. 데커드는 번쩍이는 보석이 눈 앞에 있어도 소년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과 결코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데커드를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멀뚱히 쳐다보던 소년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투정을 늘어놓았다. 


"뭐야, 데커드.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어? 그치만 고작 며칠인데 날 잊어버린 척 하는 건 너무하잖아. 표정이 너무 진짜같아서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구! 대체 누가 그렇게 연기하는 걸 가르쳐준거야?"

"뭐?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대충 짐작은 가니까. 하지만 다시는 이런 장난 치지마.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안 속는다구?"


소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던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테커드가 나를 잊을 리가 없으니까!] 

 

 
두근. 밝게 미소짓는 소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데커드는 몸에 가득 차 있던 감격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봤다. 그리고 고통과 동시에 느껴지는 강한 흔들림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데커드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쿠구궁! 억지로 떠진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까의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 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종이가 찢겨지듯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에 너울거리던 들판도, 푸름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푸른 잔디 대신 누렇게 펼쳐진 메마른 땅이 쩍쩍거리며 갈라졌다. 땅이 마구 흔들리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고 하늘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데커드의 직감이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데커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에게 이곳은 위험하다고,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



갑자기 소년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년의 모습에 데커드는 말문이 막혔다.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았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위험을 감지하고 먼저 도망친 거라면 열 감지 센서가 달린 데커드의 눈으로 쉽게 찾았을 터였다. 그러나 소년은 마치 증발한 것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데커드가 정신없이 소년을 찾고 있는 이 와중에도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를 거대한 운석들이 땅에 내리꽂히며 충격을 가했다. 메마른 땅에 간신히 뿌리를 박고 있던 마른 풀에 불꽃이 튀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데커드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혼자서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소년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그를 짓눌러 차마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 네 이름을 힘껏 부르기라도 할텐데. 미처 소년의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데커드는 그저 애탄 한숨만 흘렸다. 어떠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막막함이 데커드를 점점 옥죄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데커드의 귀를 자극했다. 삐빅거리는 시끄러운 기계 소리는 급박하게 흘러가는 공기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데커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데커드는 비로소 자신히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인지하는 순간, 정신이 억지로 일으켜세워지는 것과 동시에 삐빅거리는 알람 소리가 예리하게 귀를 파고 들었다. 세상이 뭉개지면서 까만 점으로 수축했다.


초 인공지능 경찰로봇이자 Brave Police 의 리더, 데커드는 환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   ◈   ◈

 


 

 

 

 

 

 

 

[ Brave Police(브레이브 폴리스)

 

세계의 기술이 진화하면서 점점 흉악해지고, 고차원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칭 로봇 경찰 단체로 현재 총 7명의 로봇들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고성능의 AI가 탑재되어 있어 명령을 내리면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로봇이라는 정체성으로 존재하며 목적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활동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로부터 5년 전, 첫 번째 브레이브 폴리스의 대원이자 현(現) 브레이브 폴리스의 리더인 데커드가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로 7기의 대원이 추가로 만들어져 영입되었다. 8기 체제로 운영되던 브레이브 폴리스는 일년 전, 영국 브레이브 폴리스의 요청으로 한 기체가 파견된 이후 현재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7기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아마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집요한 분석과 취재 끝에 우리 ‘코스모 폴릭탄’은 놀랄만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로봇으로 이루어진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인간 지휘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지휘관은 5년 전, 첫 번째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인 데커드가 '닥터 가우스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발탁되었다고 전해진다. 즉 브레이브 폴리스의 창립과 동시에 활동을 게시한 셈이다. 지휘관은 약 4년 동안 브레이브 폴리스와의 활동을 통해 탁월한 성과를 내놓으며 브레이브 폴리스의 황금기를 함께 했다. 그러나 1년 전부터 지휘관의 자리는 원인 모를 이유로 공석인 상태이며 브레이브 폴리스는 전원 로봇으로 구성된 체제로 전환되었다.

 

탁월한 성과를 내놓던 지휘관이 그만둔 것과 지휘관 자리를 공석인 상태로 놔두는 것에 대하여 초기에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리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고 하나 브레이브 폴리스가 해킹을 당하거나 원인 모를 이유로 조종당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경시청이 대대적인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적극 해명함으로서 논란은 모두 거두어진 상태다.

안타깝게도 경시청의 기자회견과 초대(初代)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에 대한 취임식 영상, 사건 기록 및 보도는 지휘관의 신분 노출로 빌런 집단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한 경시청의 대대적인 기밀화 정책과 1년 전 브레이브 폴리스가 비밀 수사대 체제로 강화되면서 모두 말소된 상태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기억은 기자회견 직후, 기억을 조종하는 빌런인 '메모리아'의 랜선 전파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손상되어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이와 관련하여 브레이브 폴리스를 국가 비밀 기관으로 전속시키기 위해 지휘관의 죽음을 은폐한 후, 경시청이 빌런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P.35참조).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은 지휘관의 체구는 어린아이처럼 매우 작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레이브 폴리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지휘관이 1년 전부터 더 이상 브레이브 폴리스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 안타까움을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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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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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슈이치(Matsumoto shuichi)-]

 

 


 

"-이상이 잡지의 보도일세. 오랜만에 '브레이브 폴리스 특집!' 이라고 대문짝만하게 표지를 실어놨길래 깜짝 놀라 집어왔더니 다행히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로군.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염문들을 모아놓은 삼류잡지일뿐이야."

 

 

총감실 소파에 앉아 커다란 글씨로 '브레이브 폴리스 특집!'이라고 써진 잡지를 대충 넘기던 토도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그리움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삼류잡지가 불러일으킨 예상치 못한 효과였다. 삼류잡지는 어중떠중한 염문을 모아놨을 뿐이지만 5년 전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예리하게 찔러오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 셈이었다. 가만히 앉아 토도의 말을 경청하던 사에지마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나 참, 모든 자료들을 다 말소시켰다고 생각했더니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역시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이 정도면 딱히 소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할 수 있겠어. 참, 이 잡지는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시켜야겠네. 공권력을 동원하는 건 누가 봐도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걸로 비춰지니까 될 수 있으면 아무런 반응을 내치지 않는 게 낫겠지. 차라리 이런 기사가 삼류잡지에 실린 게 다행일지도 몰라. 만약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이 이걸 봤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까 말일세‥‥."
 

"아아, 그럴 수 밖에."

 


토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련한 눈빛으로 잡지의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처럼 가진 느긋한 티타임이건만, 문득 떠오른 추억에 묻혀 차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가득 채운 그리움의 홍수에 토도는 차를 마시다말고 씁쓸하게 웃었다. 목을 먹먹하게 치고 올라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5년 동안의 기억이었다.

토도는 잔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심정인지 사에지마도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사에지마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묻어놓았던 추억들이 굳게 닫힌 문을 비집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의 연속 그리고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과 기적을 함께 했던, 누구보다도 밝고 명랑한 웃음을 지녔던 한 소년의 모습.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한 순간의 추억일 뿐, 현재는 결코 기억해서도, 존재해서도 안 될 기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사에지마는 감히 이 모든 순간을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사에지마는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잔인한 추억을 헤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現) 브레이브 폴리스 대원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지휘관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그것은 현실과 추억을 가로막는 잔인한 경계를 알리는 소리였다.

 

 

 

 

 

 

 

 

 

 

 

 

 ◈   ◈   ◈ 

 

 

 

 

 


 

 

 

 


 

일본 혼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시에 위치한 요코하마 형무소. 수많은 범죄자들이 죄를 짓고 들어오는 곳인만큼 수감자들의 태도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죄를 뉘우치지 않는 태도를 숨기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성실한 태도로 조용히 죗값을 치르는 자도 있었다. 싸움을 벌이던, 조용히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어쨌거나 수감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형무소에 적응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 한 명, 형무소에 결코 어우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빼쩍 마른 몸에 마구 헝클어진 검은 머리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커다란 체형에 흉터를 가진 흉악범들이 득실거리는 형무소에서 남자는 유독 이질적이었다. 형무소의 간수와 수감자들은 그를 죄수번호를 따 602번이라고 명명하곤 했다. 형무소 생활은 고독이 상재하다보니 아무리 사회관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도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름을 부르고, 친분을 쌓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남자만은 602번이 이름이자, 성이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작은 602번이 처음 요코하마 형무소에 도착했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602번은 형무소에 온 첫 날에 바로 독방을 배정받은 케이스였다. 바깥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어떤 행위나 분란을 조장할지 몰라 독방을 배정받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는 없었다. 보통 독방을 배정받을 정도라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살인마거나 조직의 수뇌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죄자들에 대해 빠삭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정보상들조차 그의 정체를 추측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형무소에 있는 모든 수감자들은 첫 날부터 602번을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경계대상으로 주목했다.

아무리 독방을 배정받았을지라도 노동시간이나 식사시간에는 꼬박꼬박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때문에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세력을 깨뜨릴 위험이 있는 대상인지 살피는 것은 수감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기존에 무리를 형성하고 있던 세력들은 602번이 위험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끊임없이 탐색하고, 살폈다.

그러나 602번의 첫 인상은 유약해 보이는 샌님이었고 태도조차 심기를 거슬릴 데가 없을 정도로 얌전하고 소극적이었다. 602번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잔뜩 움츠린 채 눈치를 봤고 수감자들과 어울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조직에 휘말려 누명을 쓰고 형무소까지 들어온 멍청이가 아닐까. 그의 정체를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수감자들은 멋대로 결론을 내린 채 날카로운 경계를 풀었다. 독방을 배정받은 신입이 온 것치고 이례적으로 서열을 정하는 다툼이 없는 느슨한 평화가 찾아왔다.


만약 602번의 얌전한 태도에 배알이 꼴린 다른 수감자가 시비를 걸지만 않았다면 이 평화는 아마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평소 괄괄하기로 소문난 수감자는 602번의 얌전한 태도에 꽤나 골이 난 모양인지 식당에서 다짜고짜 식판을 집어던지며 싸움을 걸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이 602번의 서열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오직 체격으로 싸움의 승패를 판단한다면 압도적으로 602번의 패배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싸움에서는 체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602번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현실이었다. 602번은 한 대라도 맞으면 비실거리며 쓰러질 것 같던 인상과는 달리, 수없이 맞으면서도 끝까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는 미친 개 마냥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몰랐지만 이미 그는 미쳐있던 게 틀림없었다. 유약해 보이는 샌님의 이미지는 한 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놔주지 않는 광견 그 자체였다.


싸움은 자연스레 602번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날 이후로 서열을 다시 세우려는 기존 세력과 602번의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감자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602번의 머리가 실로 기가 막히게 좋았다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602번은 더 이상 상황을 봐주지 않았고 저를 건드린 사람이 나오는 즉시 함정이나 트릭을 설치했다. 노동시간에 재봉틀을 조작해서 손에 구멍을 뚫리게 하거나 피를 줄줄 흘리게 만드는 것은 약과였다. 심한 경우 공업실에서 멀쩡하던 기계가 갑자기 폭파하거나 불이 나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는 자신을 건드린 자가 질질 짜며 용서를 구할 때까지 실로 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괴롭혔다.

 

그 사건 이후로 수감자들은 자연스레 602번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일단 건드리지만 않으면 602번이 얌전하다는 사실을 체득한 수감자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동적으로 602번은 혼자가 되었고, 간수들조차 독방을 쓰는 수감자치고 얌전한 602번의 태도에 만족을 표했기에 그런 그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래서일까. 그 누구도 602번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동시간에 항상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던 602번이 작은 기계 부품과 장비들을 슬쩍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도, 혼자 남은 독방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건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602번. 굳게 닫힌 녹슨 철문 너머로 죄수번호가 표기된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홀로 있는 작은 쪽방은 조용했으나 한편으로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섬뜩했다. 문 틈새로 들어오는 미미한 형광등 불빛이 남자의 굳은 얼굴을 비추었다.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조용히 앉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오른쪽 눈만이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의 왼쪽 눈은 검은자위가 없고 오직 흰자위와 벌겋게 달아오른 핏줄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이 남자의 덤덤한 표정 일면에 드러난 분노와 더불어 더욱 섬뜩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허공만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덤덤한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음산한 웃음이 입꼬리에 자리잡았다. 그 웃음에 담긴 것은 즐거움이 아닌 진득한 광기였다.

 

한참 동안 소리없이 웃던 남자는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온통 짙은 회색빛으로 칠해진 칙칙한 벽 구석에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들어와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사진을 남자는 멀건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긁힌 자국이 역력한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은 특이하게도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었다. 각자 요란한 포즈를 취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각양각색의 로봇들 사이로, 함박 웃으며 힘차게 V자를 그리고 있는 소년만이 사진 속에서 유일한 인간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화목하면서도 재미있는 사진으로 보이겠지만 남자에게는 그저 증오스러운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남자의 시선이 로봇을 넘어, 웃고 있는 소년에 얼굴에 정확히 다다랐다. 남자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운 채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은 이렇게도 괴로운데 저들은 그를 비웃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다. 남자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분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 웃음을 어떻게든 고통에 찬 신음소리로 바꿔놓고 싶었다.

 

남자는 사진 아래에 떨어져 있는 누런 사기 그릇을 주워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릇이 산산 조각 났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조각난 것들 중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슬쩍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보니 베여서 피가 나올 정도로 날카로웠다. 긁힌 살갗을 비집고 떨어지는 붉은 피를 만족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사진을 향해 미친 듯이 사기조각을 휘둘렀다. 사진을 볼 때마다 울컥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이렇게나마 표출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어온 남자의 일과 중 하나였다.


사기 조각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비명소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마구 긁히고 찢어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던 사진은 점점 더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에 찍혀있는 웃음은 결코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를 비웃는 것처럼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종국에는 경쾌하게 웃는 환청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건방지게 나를 비웃는 거냐, 브레이브 폴리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사기 조각이 다시금 사진 속 소년의 얼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소년의 사진은 남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단지 안으로 삭혀서 얌전해 보일 뿐, 그는 엄청난 불꽃을 감춘 채 이를 갈고 있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남자는 오늘도 사진을 보며 자신이 왜 형무소에 갇혀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그 날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은 남자로 하여금 들끓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꼬박 일 년, 세월이 흐를수록 남자의 안에서 불타고 있는 불꽃은 점점 더 크기를 부풀려갔다.


남자는 아직도 그 날, 자신의 복수가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꼴사납게 이렇게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은 완벽하게 복수를 실행한 후 아무도 모르게 일본에서 사라져야 했다. 세상이 자신의 얼굴조차 모르도록 은밀하게,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회자되도록 떠들썩하게 복수를 마무리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 후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브레이브 폴리스를 우롱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엔딩의 끝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놓여있는 처지는 이게 뭔가. 남자는 복수를 끝내지도 못했고 자유마저 빼앗기고 구속당했다. 복수를 실행해야할 대상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은 남자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선사했다.

 

남자는 다시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래, 자신이 이 꼴이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게 모두 다 브레이브 폴리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여도 사진 속에 찍혀있는 웃음들은 비난이 되어 귓가에 아른거렸다. 남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웃지마! 날 비웃지 말란 말이야…!"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해 사진을 향해 지껄여댔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광기 어린 고함소리에 복도를 순찰하고 있던 간수들이 그제서야 허둥지둥 달려와 철창을 곤봉으로 세게 두드렸다. 그러나 그런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고분고분하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평소 602번이 건들지만 않으면 조용히 지내는 수감자라는 사실을 알기에 머뭇거렸던 간수들은 결국 견디다 못해 602번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602번, 이기라시! 입 다물고 얌전히 방에 앉아있지 못해!"

 

"평소에는 얌전했던 놈이…오늘따라 왜 그러는 거냐! 체벌이라도 받고 싶은 거야? 앙?"

 

 

얌전하다는 말은 평소 남자의 속이 얼마나 불타오르고 있는지 모르는 간수들이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단어였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는 얌전할지라도 마음만큼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야수에 가까웠다. 오늘따라 심기가 사나운 남자는 얌전히 몸을 움츠리기는 커녕 되려 간수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본다한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여전히 독방에 갇힌 수감자였고 간수들은 그를 옥죄는 감시자였다.

남자는 고함을 내지르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에 들린 사기조각을 미친듯이 휘둘렀다. 남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분노를 마음속이나마 외쳤다.

 

 

'나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다! 지금 네놈들이 나를 그렇게 비웃지만 곧 그 웃음을 얼굴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주지! 날 이 꼴로 만든 녀석들과 날 비웃은 네 놈들을…, 모조리 다 박살내버리겠어!'

 


"큭…크하하하하하하!"

 

 

상상만 해도 짜릿한 기분에 남자는 유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마구 광소를 터뜨렸다. 남자의 시선이 갈기갈기 찢겨진 사진에서 서서히 먼지가 잔뜩 끼어 있는 방구석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찢어져 있는 흰색 봉투와 세밀하게 그려진 교도소 내부의 지도, 간수들의 순찰 시간이 적힌 시간표 그리고 붉은 빛을 깜박거리는 작은 기계가 있었다. 작은 부품들을 간신히 이어 만든 기계는 조악했지만 불길하게 뿜어져나오는 붉은 빛만큼은 피처럼 선명했다. 틱, 틱,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시계소리가 째깍이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   ◈   ◈ 

 

 



 


 

"……드!"

 

"……."

 

"어이, 데커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데커드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대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대답하지 않는 데커드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은 눈치였다. 데커드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대원들을 흩어 보았다. 데커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데커룸은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진정된 내부의 모습에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니 맥클레인이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아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하려던 모양이었다. 데커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생각의 여운을 애써 털어내며 보고서를 받아들였다.

 


"아, 미안하군. 임무 보고서인가?"

 

"그래. 어제 도쿄에서 발생한 강도단 관련 보고서다. 사건 수습은 거의 마무리 지어진 단계로 더 이상 우리가 상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마 남은 건 일반 경찰들이 알아서 할테지."

 

"그렇군.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지. 수고했어. 피곤하면 이만 쉬어도 좋아."

 

"그래. 그런데 웬일이지? 네가, 그 냉철하기로 유명한 데커드가 다른 생각을 다 하고?"


"……."

 

 

겉으로 보기에 맥클레인의 질문은 궁금함에 기인한 걱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데커드는 그 질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예의를 차리려고 의례적으로 던지는 질문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별 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는 일을 하는 팀메이트일 뿐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다.


브레이브 폴리스라는 단체는 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건에 관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한 개인 플레이였다. 개인 플레이라고 해봤자 인간처럼 취미 활동이나 어떠한 사적인 활동이 없으니 단순히 보고서를 정리하거나 사건 관련 기록을 찾아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애초에 그들은 감정도 없이 단순히 논리적인 사고에 기인하여 인간처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일 뿐, 나머지는 컴퓨터나 다른 기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대감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감정이었다.

 

때문에 데커드는 대답 대신 맥클레인이 건네준 보고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제를 완료했다는 표시로 보고서 끝에 도장을 찍어 다시 맥클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보고서에 이상은 없으니 이대로 총장님에게 제출해도 괜찮을 것 같군."

 

"알겠어."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맥클레인에게서는 질문에 답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일말의 불쾌감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덤덤한 표정,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 그것이 동료라는 틀에 갇힌 이곳, 브레이브 폴리스의 관계였다. 정말 나답지 않군. 데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이지 않을 것들이 계속해서 메아리처럼 맴돌며 머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맥클레인이 물러가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자 데커드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정비 도중에 환상을 보고 난 후부터 종종 이렇게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당연한 것인데도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일까. 기술 총 책임자인 토도에게 물어보니 정비 도중 환상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간혹 있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정신회로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기억 데이터의 일부분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토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데커드는 토도의 대답에서 전보다 더한 의문만 안고 돌아왔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그 소년은 대체 누구일까. 데커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난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쉴새없이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품으로 가득 채워진 몸에서 나사라도 하나 빠진 것일까. 그렇다면 나사가 빠진 그 작은 자리가 이렇게 공허한 것일까. 데커드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 데이터를 재정비했다. 그 어디에도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사건들로 뒤덮힌 기억들 속에서 어쩐지 맑은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슬플 정도로 먹먹해지는 느낌에 데커드는 저도 모르게 주문을 작게 되뇌었다. 그것은 혼란에 잠긴 자신에게 유일하게 냉정을 찾아줄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나는, 로봇이다.

   

그 말을 되뇌이기가 무섭게 묵직한 감각이 몸을 짓눌렀다. 데커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환상의 통로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현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래, 자신은 로봇이었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 아닌, 차갑고 딱딱한 부품으로 이뤄져 인간의 명령을 따를 뿐인 로봇. 인간에게 프로그래밍된 감정 없는 로봇 주제에 마치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해버리다니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로봇이라는 말 한마디가 환상 속에서 웃어주던 소년과 벽을 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커드는 가슴이 죄여오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이것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   ◈   ◈ 

  


 


 


 


"있지, 파워죠. 잘은 모르겠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뭐가? 그리고 너 또 서류정리하기 싫어서 그러는거지? 한가하게 입을 놀릴 시간이 있으면 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나 정리하지 그래, 드릴보이?"

   

말 한마디 꺼내기가 무섭게 파워죠의 날카로운 일침이 날아오자 드릴보이는 일순간 침묵했다. 파워죠의 말대로 드릴보이의 책상에는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된 브레이브 폴리스지만 드릴보이는 유독 서류를 제대로 결재하지 않고 끝까지 미루다가 나중에야 허겁지겁 정리하곤 했다. 이와 관련해 브레이브 폴리스의 설비 총책임자인 토도가 몇 번씩이나 고장난 부분이 없는지 검사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늘 정상이었다. 그 이후로 토도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릴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릴보이의 옆자리에 배정된 파워죠로서는 그런 토도의 반응이 영 못마땅했다. 그는 드릴보이의 정비 결과가 정상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는데 드릴보이는 서류정리뿐만 아니라 가끔 오늘처럼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드릴보이의 증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워죠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그를 수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에이~!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고. 파워죠는 정말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겠어?"

 

 

순간의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고 깨졌다. 기꺼이 눈 앞에 있는 서류를 외면한 드릴보이는 파워죠의 일침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볍게 넘기고 또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파워죠는 귀찮거나 응답할 가치가 없더라도 드릴보이의 말을 받아주는 것이 그나마 빨리 대화를 끝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체득한 지 오래였다. 때문에 파워죠는 드릴보이의 질문에 나름 성실하게 답했다.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네 기분이 이상한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물론 내 기분도 이상하지만 지금 말하는 건 그게 아냐! 내 말은 브레이브 폴리스가 정말 이상하다는 거야!"


"브레이브 폴리스가? 내 눈에는 지극히 정상인데? 부서진 녀석도 없고, 불을 뿜는 녀석도 없고. 다들 제자리에 앉아 있는 이 상황이 대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야?"



파워죠의 대답에 드릴보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한심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표정에 순간 울컥해버린 파워죠는 당장이라도 내리꽂고 싶은 주먹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드릴보이와 대화하다보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한 감각들이 울컥울컥 솟구치곤 했다. 그런 파워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릴보이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 잘 생각해 봐. 우리 브레이브 폴리스는 무려 로봇 경찰이라구! 그런데 왜 나는 가슴에 축구공이 박혀있고, 파워죠는 온통 호랑이 무늬이며 다른 대원들은 각자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야."

 

"…무슨 뜻이야?"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파워죠가 되물었다. 이번만큼은 건성으로 되묻는 것이 아닌 진지한 물음이었다. 평소 드릴보이가 뜬금없이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히 넘어가기에 너무 진지한 주제였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우리는 로봇 경찰이잖아? 그렇다면 데커드처럼 경찰차를 본뜬 모습을 하는 게 훨씬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효과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왜 우리는 다른 차를 모델로 하고 있고 각자 다른 외양을 가지고 있는 걸까? "


"그래야지 다양한 기능들을 쓸 수 있었을테니까 그런 거 아냐? 우리가 모두 경찰차였다면 너처럼 드릴이라던가, 쉐도우마루처럼 다양한 변신기능을 탑재할 수 없었을 거 아냐."


 

게다가 모두 외양이 다르니 구별하기도 쉽고. 덧붙인 파워죠의 말까지 들은 드릴보이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다지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파워죠는 나름 머리를 굴려 나온 대답에 드릴보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맥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파워죠는 드릴보이가 그렇게까지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건에 관한 의문을 떠올리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드릴보이가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하지만 구별할 목적이었다면 색을 다르게 해서 구별하는 방법도 있어. 다양한 기능이라는 점은 납득이 가지만 저마다 다른 기능을 탑재해도 경찰을 나타내는 색을 동일하게 통일하거나, 디자인을 통일하는 다른 수단을 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단순히 로봇 경찰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걸? 내 생각에는 말야, 이건 구별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마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지 않아?"

 

"단순히 감정이 없는 로봇을 위해서 개성을 살려서 만들었다고? 마치 우리에게 감정이라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파워죠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추측을 늘어놓던 드릴보이는 파워죠의 웃음을 보며 말없이 침묵했다. 이윽고 드릴보이의 표정에 어딘가 공허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 미소는 감정이 없는 로봇이 드러내는 표정치고는 너무나도 인간다운, 슬픔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그러네…."

 


드릴보이의 힘없는 대답 이후로 파워죠와 드릴보이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만이 둘 사이에서 들리는 전부였다. 그러나 평온해보이는 파워죠와는 달리, 드릴보이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멍하니 데커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드릴보이의 시선이 문득, 데커드의 책상 바로 위에 놓여있는 작은 책상과 의자에 다다랐다. 드릴보이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가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이 앉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사에지마 총감이 종종 앉던 것을 제외하면 늘 비어있는 지휘관의 책상과 의자였다. 지휘관이 없는 브레이브 폴리스가 당연한데도, 어쩐지 오늘따라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지휘관이 없는 일상이 그렇게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걸까. 드릴보이는 애써 허전한 느낌을 털어내며 잔뜩 쌓여있는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처럼의 상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서류가 메꾸기 시작했다.

허전함의 원인이 더 이상 이 장소에, 이 나라에, 이 세계에 없는, 사라져버린 어떤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 채 드릴보이는 말없이 손을 놀렸다. 그렇게 오늘도 야속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   ◈   ◈ 

 


 


 

 

 

 

 

 


  [20xx년 겨울,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짜잔! 이거봐, 멋지지?"

 


소년이 잔뜩 힘이 들어간 포즈를 잡으며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양손을 허리에 척! 하고 얹은 채 다리를 V자로 벌린 소년의 모습은 왠지 눈부시도록 해맑았다. 아마 소년이 입고 있는 검은색의 교복, 가쿠란을 자랑하기 위한 포즈인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가쿠란은 소년이 입기에는 너무 컸다. 어떻게 보면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해!' 라는 포스를 내뿜는 소년을 보며 데커드는 잠시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소년을 위해 침묵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데커드의 이런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데커드 대신 진실을 말할 위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바로 파워죠였다.

  
 

"저기, 보스? 그 가쿠란은 보스한테 너무 큰데? 어…,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야."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다고 말하면서 파워죠는 잘도 자신의 의견을 가차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데커드는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묘한 안심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덤프슨과 맥클레인을 비롯한 모두가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어딜보나 변명으로 느껴지는 목소리로 서툴게 대답했다.

 

 

"나, 나도 알아! 그렇지만 누나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키가 클테니까 미리 큰 교복을 사놓는 게 낫다고 했어!"

 

"…키가 클 가능성은 확실히 있는 거지?"

 

 

무심코 덤프슨이 발표를 하듯이 손을 번쩍든 채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우와 직격인데!'라는 표정이 모두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쉿! 그건 민감한 부분이라 말하지 말랬잖아, 바보야!'라는 건맥슨의 타박이 이어졌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모든 소리를 소년이 듣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으이이이!' 하고 뜻 모를 비명을 내지르며 분한 듯이 씩씩거리던 소년은 애써 화를 삭히며 외쳤다.

 

 

"당연히 크지! 나, 난 성장기란 말야!"

 

"그렇지만 보스, 2년동안 10cm도 안 컸는데? 솔직히 보스 친구들 중에서 보스가 제일 작잖아. 아! 아닌가? 보스의 그 꼬마 아가씨 친구랑은 비슷했던 것 같기도…."

 

"으앙, 데커드으~!"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탄 제보에 이어 여자아이와 비교까지 당하자 소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데커드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이런이런, 그렇지않아도 키는 민감한 주제였는데. 데커드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진지하게 모두에게 충고했다.

 

 

"저기, 사실이긴 하지만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건 곤란하다고 생각해. 입장 바꿔서 생각을 해봐. 만약 너희들이 보스라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어? 계속 그러면 스트레스로 키가 더 안 클 수도 있단 말야. 그러니까 당분간 자제를 좀 해줘. 너무 솔직한 것도 좋은 건 아냐. 때로는 경찰로서 선의의 거짓말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익! 데커드!"

  
 

믿었던 데커드마저 이렇게 나오자 소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며 울상으로 변했다. 동시에 푸하하, 하고 경쾌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심지어 섀도우마루와 듀크마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어울려주기라도 하듯, 햇살이 부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고 포근한 온기가 모두를 감싸안았다.

소년이 존재하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부실은 언제나 봄 햇살이 반기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지금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는 매서운 겨울이 되었을지라도.

 


 

 


 


 


 

 

 ◈   ◈   ◈ 

 


 


 


 


 


 

"환상이라고?"

 


기계실로 내려와 토도의 보고를 듣던 중, 뜬근없는 단어에 사에지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토도는 사에지마가 들은 말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무슨 내용인지 듣고 싶었지만 데커드가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아서 자세히 묻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지워진 기억 데이터의 내용인 것은 확실해. 데커드가 이건 자신에게는 없는 기억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몰래 들었거든. 그렇다면 어떤 '환상'인지는 뻔하지 않나?"

 


사에지마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라는 거군."



사에지마는 헛웃음을 흘리며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잊게 만들려고 노력했는데도 어째서 그 아이에 대한 각인은 이리도 선명한 것인가. 그것은 지독하다면 지독한 인연의 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심장에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에 사에지마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천장만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토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는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사에지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나는 절대로 그들에게 기억을 되돌려줄 수 없다네."

 


과거의 파편이 사에지마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슬픈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작은 소년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더랬다. '부탁이에요, 사에지마씨.'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전한, 소년의 마지막 유언이자 약속. 그리고 사에지마는 그 잔인한 약속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나는, 그 아이와 약속해버렸으니까…."

마지막까지 브레이브 폴리스를 걱정하던 소년은 말했다. 온 몸이 상처와 피로 뒤덮혔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은 마지막에 간신히 잡은 의식의 끝을 오로지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해 바쳤다. 새하얀 병원 침대에 누워 손목에 여러 개의 링겔까지 꽃고 있었으면서 사에지마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세게 쥐며 몇 차례나 당부했었다.

 


[사에지마씨. 만약…,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제가 죽으면요, 브레이브 폴리스가 어떻게 변해버릴지는 아무도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절 보내고 꿋꿋하게 사건을 해결하길 바라지만…, 그건 그들에게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 될거에요. 저라도 브레이브 폴리스 중 누구 하나라도 다쳤다면 쿨럭, 무척이나 슬퍼서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을테니까요…. 사실 지금도 데커드가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을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걸요. 저도 그런데 모두가 얼마나 아플지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아요.

그거 아세요, 사에지마씨? 저는, 브레이브 폴리스를 로봇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분명 비웃을 일이겠죠…. '아무리 인공지능을 가지고 감정을 가졌더라도 브레이브 폴리스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해! 정신차려!' 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데커드를 만난 이후부터, 제가 꿈꿔왔던 기적이 현실로 이루어진 후부터 내내 생각했어요. 브레이브 폴리스는…, 내가 사랑하는 그들은…, 로봇이 아닌 인간이라고요.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답다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비록 브레이브 폴리스의 몸이 인간의 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더라도, 온 몸이 단단한 철로 되어있더라도, 저는 알 수 있어요…. 그들의 마음에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사에지마씨, 약속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만약 그들이 저를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면 메모리 칩에서 제 기억을 지워도 좋아요…! 아니면 저 말고 다른 훌륭한 지휘관을 그들에게 붙여줘도 돼요…! 저를 잊을 정도로, 훌륭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듬직한, 지휘관을요. 이기적인 부탁이란 건 알고 있지만 저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라도 브레이브 폴리스가 살아가길 바라고 있어요.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그들을 쓸모 없으면 버릴 수 있는 로봇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브레이브 폴리스를 인간으로서 살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돌이켜보면, 그것은 너무나 어렵고, 잔인한 약속이었다. 무심코 해버린 약속의 결과가 이렇게 쓰라리고 아플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떄는 그저 잔뜩 흥분한 소년을 진정시키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나이가 아무리 먹었다고 한들 예측할 수는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구나. 밀려오는 향수에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사에지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소년이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고맙다고 할까 아니면 원망섞인 말을 내뱉을까.

사에지마는 가끔 생각한다. 과연 지금 자신이 한 선택이 정말 최선의 방책이었는지 그리고 소년의 기억을 그들에게서 반드시 지워야만 했는지. 소년의 사망 후, 브레이브 폴리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망가져버렸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품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심하게 상처입은 마음은 아무리 노력해봐도 고쳐지지 않았다.


브레이브 폴리스의 성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브레이브 폴리스의 자랑거리인 합체조차 실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때로는 의견 차가 심하게 갈린 나머지 팀원들간의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다. 소년이 살아있을 적에는 늘 소년과 리더인 데커드가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거나 화해의 분위기를 조장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데커드는 아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기계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내비치는 감정이 있다면 끝없는 슬픔과 자책감이었다.

 

새로운 지휘관을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결국 경찰 내부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소년과의 약속대로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립을 위해 사에지마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의 지휘관 후보들을 도입했다. 우수한 경찰관에서부터 소년의 친구들까지, 연령대와 개성은 다양했다. 그러나 이 모든 후보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브레이브 폴리스가 경찰 상부에 불만을 가지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우리들의 보스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새로운 사람을 임명하는 거죠! 당신들은 우릴 지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들의 보스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벌써 잊은 겁니까! 끝내 곪아버린 상처에서 울음소리가 먹먹하게 터져나왔다. 그 방법은 그저 서로에게 상처만 더했을 뿐이었다.

 

죽어버린 시간을 보내는 부질없는 나날들이 이어지던 와중에, 기어이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끊없이 이어지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미해결 사건 보도에 결국 신문에서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기사까지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사회에 공론화되었다. 일본의 영웅이라고 지칭할 때는 언제고 성능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브레이브 폴리스를 단순한 고철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능력 없는 기계에게 세금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폐기 처분을 시키자는 의견들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때문에 사에지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 사항은 오직 두 개였다. 브레이브 폴리스를 폐기시키던지, 아니면 이제는 끊임없는 트러블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지우던지.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번민을 거듭했다. 소년이 죽고 망가져버린 브레이프 폴리스를 알면서도, 소년의 유언대로 차마 할 수가 없어 필사적으로 다른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년과 했던 약속은 브레이브 폴리스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사에지마의 눈 앞에는 오직 하나의 선택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결국 사에지마는 정비라는 이유를 핑계로, 아무 의심 없이 몸을 맡긴 브레이브 폴리스에게서 소년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소년이 존재했다는 모든 증거를 브레이브 폴리스의 주위에서 말소시켰다. 브레이브 폴리스를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소년의 가족들을 경시청과 떨어진 곳으로 이사시켰고 소년의 친구들에게는 브레이브 폴리스를 만나지 말아달라고, 만나더라도 소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브레이브 폴리스와 친한 아야코나 세이아 일사에게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이라도 한건지 소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암살의 표적이 되기 쉽단 것을 알고 소년의 존재를 숨기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었기에 그나마 사회적인 흔적들을 지우는 것은 수월했다. 소년이 사망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 사건' 이후로 소년이 브레이브 폴리스의 지휘관이라는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 또한 전 세계 매체에 특정 기억을 지우는 세뇌 전파를 내보냄으로써 소년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이제 소년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브레이브 폴리스에 인간 지휘관은 없다' 혹은 '브레이브 폴리스에 인간 지휘관이 있었지만 원인불명의 이유로 1년전에 사임했다' 정도로만 기억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빌런 '메모리아'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기억을 지운 결과, 브레이브 폴리스의 능력은 브레이브 폴리스를 처음 설계할 당시 예상했던 수치로 되돌아왔다. 문제는 브레이브 폴리스의 시작이 소년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 소년의 기억을 지움과 동시에 브레이브 폴리스의 모든 기억데이터가 말소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브레이브 폴리스는 소년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세이야 일사도, 아야코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처음 태어난 아기처럼 브레이브 폴리스는 어떤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남은 것은 '기억'이 아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지식' 뿐이었다. 마치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데이터처럼, 기계적인 자료만이 그들의 데이터에 기록되었다.

결국 감정으로 인해 강해진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으로 인해 무너졌던 것 뿐인가. 아즈마 부총감은 그런 브레이브 폴리스를 보고 이렇게 평했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서 기억을 없애자 마치 거짓말처럼 들쑥날쑥했던 능력치가 일정한 수치를 보였고, 미해결 사건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떠들썩하던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러나 브레이브 폴리스에 깊숙히 관여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브레이브 폴리스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과거, 브레이브 폴리스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던 감정은 모두 소년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기억을 지운 지금,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애써 논리적으로 돌아가려는 기계처럼, 어떤 희노애락도 표현하지 않은 채 단순한 로봇처럼 움직였다. 또한 아즈마 부총감의 말처럼 감정으로 인해 강해진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을 가졌던 계기인 소년의 기억이 사라지자 그 당시 보여주었던 능력조차 사라졌다. 일정한 수치를 보이기는 했으나 거기에 그칠 뿐, 소년과 함께 있을 당시의 높은 능력수치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기억을 지운 사에지마에게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소년은 분명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길 바랬다. 그러나 현재의 그들은, 결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로봇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에지마로서는 그저 어쩔 수 없었다고 끊임없이 되뇌일 뿐이었다. 소년이 존재하던 시절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며 사에지마는 끝없이 침잠하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자네 탓이 아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브레이브 폴리스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 그들을 책임졌던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토도가 자책으로 뒤덮힌 사에지마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후회하고 자책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중했던 4년 동안의 추억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는 죄책감은 끝없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토도는 말없이 사에지마의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서 있었다. 때로는 말없는 침묵이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해주던 침묵 끝에, 사에지마가 비로소 진정된 모습을 보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토도는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고 본론을 꺼냈다.

 


"실은 내가 자네에게 잠시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한 건 데커드가 보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야.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지만…, 지금 상태로 들으면 분명히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해서 망설이고 있었네. 그러니 자네가 직접 선택하게. 듣고 싶은가? 아니, 들어도 괜찮겠나?"

 


감정을 추스른 사에지마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말게. 이래뵈도 경시청의 총감이고 아직은 팔팔하기 그지 없어."

 

"…좋아, 그렇다면 말하겠네. 실은 이번에 데커드에게 경찰로서의 자질을 테스트하기 위해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 이 검사는 현재로부터 5년 전, 데커드가 처음으로 감정을 가졌을 때에도 받아보게 한 검사였지. 이 다음은 말로 설명해도 소용없을테니 이걸 보는 게 좋겠군."

 


토도는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콘을 꺼내 기계실의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켰다. 몇 번 리모콘을 조작하자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텔레비전에 무언가가 나왔다. 화면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토도와 데커드였다. 화면이 또렷하지 않은 것을 보니 방에 설치되어 있던 감시 카메라의 영상인 듯 했다. 화면 밑에는 작게 일자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에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토도가 물었다.

 

[데커드, 너는 지금 흉악한 살인범을 쫓고 있다. 살인범은 험한 산 속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산 너머에는 마을이 하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살인범을 잡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인범을 쫓는 도중, 너는 심하게 다쳐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만났다. 다친 사람을 즉시 병원으로 이송할 경우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만 만약 너가 여기서 다친 사람을 두고 간다면 곧 사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친 사람을 살린다면 살인범을 놓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너는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흐릿한 화면속에서 토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이 질문은 경찰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면접을 볼 때 최종적으로 던지는 질문 중 하나였다. 한 명의 희생이 있더라도 다수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만약 둘 다 살릴 방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과 이유에 따라 경찰이 될 자질 혹은 인성이 판단되며 최종적인 결과까지 달라지기도 했다.


사에지마는 떨리는 심정으로 데커드의 답을 기다렸다. 답하기에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토도가 던진 질문에 데커드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갈등의 기색도 없이 단번에 대답했다.

 

 

[저는 살인범을 쫓겠습니다.]

 




"....뭐라고!"


"진정하게. 아직 이유가 남았잖나."

 

영상을 보고 있던 사에지마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토도가 애써 사에지마를 달랬다. 이유가 남아있다는 말에 그제서야 사에지마는 초조함을 감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지되었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영상 속의 데커드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답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변의 내용은 사에지마를 진정시키기는 커녕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는 범죄를 예방하고,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입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명령이 제게 떨어지고, 그것이 인식되면 그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살인범을 쫓으라는 명령이 최우선시로 입력되었을 뿐, 그 이외의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저 살인범을 쫓을 뿐입니다. 혹시 그 이전에 다친 인명이 보이면 구조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에는 구하겠습니다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지금 제게 주어진 질문에서는 살인범을 쫓으라는 명령만 내려져 있지 않습니까.] 



  

사에지마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커드가 한 말은 한 점의 흠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로봇이라면 마땅히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여기게끔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를 아는 사에지마 그리고 토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지극히 기계적인 대답이 무척이나 쓰라리게 다가왔다. 만약 소년이 있던 때라면, 감정이 존재했던 브레이브 폴리스였다면 결코 이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았으리라. 참담한 기분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사에지마를 보며 토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충격이 컸나 보군. 하긴 나 또한 그랬으니 어쩔 수 없긴 하네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에지마가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저것이, 정말 현재의 브레이브 폴리스란 말인가? 그들이 1년 사이에 이렇게나…, 이렇게나 망가져 있었단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마음 자체가 없게 되어 버렸지. 사실 나도 이 검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브레이브 폴리스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지 못했네. 비록 그들이 기억을 잃고 마음을 전처럼 내보내지 않지만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 예전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네. 우리는 그저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그들은 단지 인간처럼 흉내내고 있을 뿐이었어. 절대로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네. 브레이브 폴리스 중 처음 감정을 알고, 마음을 가졌던 데커드가 이 정도의 상태라면…, 다른 대원들의 모습들은 생각할 것도 없지."

 

"……."

 

"내가 아까 말했었지. 이 검사는 5년 전에도 데커드에게 한 적이 있다고 말일세. 그 때 데커드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있나?"

 

 

토도는 기억을 5년 전으로 되돌렸다. 막 데커드가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브레이브 폴리스가 창설되었을 무렵의 과거. 토도는 소년과 데커드가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충동적으로 지금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데커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친 사람을 먼저 구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분명, 제가 받은 명령은 살인자를 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있다면 응당 먼저 해야할 일은 다친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기계이고 제 심장은 고철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진 경찰, 아니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구해야할 것은 인명의 구조일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데커드는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소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데커드에게 엄지 손가락을 올려보이고 있었다. 온전히 상대를 믿는 순수한 눈빛에 힘입어, 데커드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게는 동료가 있습니다. 누구보다 소중하고 또 제 마음을 잘 알아주는 동료. 제가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면 분명 그들은 이해를 해줄겁니다. 또 저 대신에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 폴리스는 결코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야말로 십점 만점의 십점의 대답이었다. 토도는 대답을 마친 데커드가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데커룸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은 비어있지만 머지 않을 미래에 이 데커룸은 신뢰로 뭉쳐진 동료들로 채워질 것이다. 분명 많은 일이 있을테고, 때로는 갈등도 있겠지만 결국 그 많은 일을 거쳐 소중한 동료로 자리잡으리라. 데커드의 굳은 의지가 담긴 눈동자가 토도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비록 차가운 유리로 만들어져 있을지언정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마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 말야. 하지만 지금의 브레이브 폴리스에게는 그것이 없네. 나는 브레이브 폴리스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옛날처럼 되돌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감히 그렇게 생각했지…."


"……."

침묵하는 사에지마를 곧게 응시하며 토도가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몸을 준 것은 나였지만…, 브레이브 폴리스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아이의 공이었네. 그 아이가 존재했기에 데커드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다른 대원들도 데커드의 마음에 기초하여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거야. 그 아이는 자신의 소망을 현실로 구현시켰네.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그 아이는 절대적인 존재, 말하자면 '신'이었던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없는 이상, 이대로 가다가는 브레이브 폴리스는 무너질 거네!"

 

"토도!"

 


브레이브 폴리스의 와해를 예상하는 그의 발언에 사에지마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토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에지마, 자네는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건 엄연한 사실이야! 마음이 없는 경찰에게 이 나라를 맡긴다고? 인간의 목숨의 소중함을 모르는 경찰에게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나! 그들이 마음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는 있을 수가 없어! 나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처음 만들 때는 마음이 있는 로봇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하지만 겪어보니 알겠어. 그들은 마음이 있어야만 해!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브레이브 폴리스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브레이브 폴리스가 이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정말 인간으로서 살길 바라는 그 아이의 마음에 부합되는 거라고 생각하냔 말일세!"

 

"……!"

 

 

토도는 사에지마가 생각하고 있는 핵심을 찔러왔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분명 소년의 소망이었을 터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브레이브 폴리스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마치 매서운 칼날이 되어 사에지마의 과오를 심판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기계실을 가득 채웠다. 토도도, 사에지마도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두려웠다. 침묵을 깨고난 다음에 이어질 결과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삐삐! 삐삐! 다급한 통신요청을 알리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트렸다. 그 소리의 근원은 사에지마의 주머니에 있는 무전기에서 들리고 있었다. 긴급상황이 아니면 결코 울리지 않을 무전기임을 알기에 사에지마는 황급히 통신을 연결했다.

 

 

[총감님! 들리십니까, 총감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긴박감으로 대충 사태의 중요성을 눈치챈 사에지마가 급히 답했다.


 

"나다, 사에지마다! 무슨 일인가?"

 

[긴급 사태입니다! 일 년전 타워 점거 소동을 벌였던 이기라시 긴타가 요쿄하마 형무소에서 탈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빨리 회의실로 와 주십시오! 자세한 상황은 오시면 바로 브리핑에 들어가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래 알겠네! 즉시 가도록 하지!"


 

사에지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뛰쳐나갔다. 그 뒤를 토도가 빠른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이기라시 긴타라니! 가끔 매체에서 회자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앞으로 30년은 직접적으로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도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 그가 탈옥한 거지? 어떻게 그리고 왜 탈옥한 건가. 사에지마는 솟구치는 수백 가지의 의문을 품은 채 황급히 발을 놀렸다.

사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사에지마는 어떤 미지의 소리를 들었다. 소년이 죽은 이후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시계는 줄곧 멈춰 있었다. 그러나 현재를 기점으로 멈춰있던 육중한 추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명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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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1차 수정 완료

늘 수정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이제야 1차 수정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수정하는 내내 오타에, 비문에, 설정오류까지...아무리 멋대로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요.

차라리 글을 새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몇 번이고 읽어보면서 고친 것 같네요.

이 미숙했던 과거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힙니다.

작별의 노래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글입니다. 하지만 스토리는 다 구상해두었고 완결까지 꼭 쓰고 싶습니다.

원래는 짧게 상, 중, 하로 구성했으나 폭발적인 분량으로 수정본은 나누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쓸 예정이에요. 물론 뒤엎은 설정 때문에 수정부터 완료한 후에 후편을 쓸 수 있겠지만요(,_,)

아래로는 과거에 썼던 후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츠쿠리라고 합니다.

블로그를 리뉴얼 하고 나서는 처음 올리는 제이데커 글입니다.

이 글은 몇 년 전부터 구상했습니다만 제이데커에 대한 애정도와 글 쓰는 실력은 별개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아마 짐작들 하셨겠지만 이 글은 제이데커 본편 완결 후의 미래, 유우타가 죽음을 가정하고 쓴 소설입니다.

제가 유우타에 대한 애정도가 워낙 충만해서 소재를 고르다보니 무려 죽음(..)이 나왔네요.

정작 주인공인 유우타는 후반에 나올 예정입니다((그리고 무기한 연재중지))

 

이 글을 구상했을 때, 저는 유우타라는 존재가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우타가 있었기에 데커드에게는 감정이 생길 수 있었고 데커드에게 감정이 생겼으므로 브레이브 폴리스, 나아가 모든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었지요. 즉, 유우타는 모든 감정을 가진 로봇의 기반이자 창조주, 신과 같은 대상입니다.

만약 유우타가 단순히 감정이 없는 기계를 창조했다면 별 다른 나비효과가 생기지 않았겠지만 감정이 있는 로봇을 창조한 이상, 로봇들은 부모를 잃은 인간처럼 슬퍼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수많은 존재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기억을 희석시킴으로서 슬픔 또한 흘려보내지만 로봇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죽은 존재가 창조주나 다름없는 유우타라면 슬픔이란 감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브레이브 폴리스에게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그런 가정 하에 이 글을 썼습니다.

후반에 좀 더 자세하게 나오겠지만 이미 브레이브 폴리스는 진화된 초A.I를 가졌기 때문에 '감정시스템'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메모리에서 유우타와 함께한 최초의 기억(데커드와의 첫만남을 비롯한 모든 기억)을 지움으로서 '감정을 가졌다는 기억' 자체를 지웠기 때문에 브레이브 폴리스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없는 로봇이라면 애초에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게 힘들겠지요. 제이데커 초기의 빌드팀처럼 단순히 명령인식+수행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후반에 글과 후기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점점 더 스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ㅋ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유기/삼장오공] 조각글

W.B - 츠쿠리

 

 

 

 

 

 

 

 

 

 

 

01.잠 못 이루는 밤

 

 

"…빌어먹을."

 

삼장은 오늘로 몇 번째로 입에 담는지도 모를 욕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런 삼장과는 다르게 오공은 옆 침대에서 태평하게 꿈나라로 빠져든 상태였다. 그 사실이 삼장은 꽤나 분했다.

 

오늘로 경운원를 떠나 서역으로 향한지 어엿 한 달. 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삼장의 기분은 최저를 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경운원의 소중함을 몰랐는데 지금은 달랐다. 삼장은 경운원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경운원에서 삼장은 최고승이었고 때문에 얼마든지 각방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오공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삼장이 축객령을 내리면, 아무도 삼장의 집무실이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고 나서는 오공은 새로운 먹거리에 정신이 팔려있고, 계속되는 싸움에 지쳐서 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삼장은 도대체 왜 요괴가 습격해오면 그토록 잘만 일어나는 오공이 삼장이 깨우면 일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드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오늘도 모처럼 둘이서 좀 있자고 2인실을 빌린 건 좋았다. 그러나 역시 씻고 오는 동안에 오공은 침까지 흘리면서 꿈나라로 가버린 상태였다. 물론 오공의 자고 있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지만 역시 둘만 있을 때는 깨어있어줬으면 싶었다. 그렇게, 오늘도 부질없는 소망을 중얼거리며 삼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02. 소독

 

 

"…오공."

 

"응? 왜?"

 

태연자약하게 뒤를 돌아보는 오공의 모습에 삼장은 울컥, 하고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빌어먹을 까마귀인 오곡에게 맞서고, 만신창이가 된 채 간신히 도착한 마을에서 몸을 추스렀다. 오공이 씻고 상처를 치료하는 사이, 삼장은 팔계에게 다가가 그가 없었던 동안 일어난 일을 듣고 왔다. 삼장이 헤이젤, 가트와 머물렀던 인간의 마을과 대립된 요괴의 마을. 오아시스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요괴와 인간 사이의 싸움. 그리고 그 동안 오공에게서 일어난 마음 속의 성장과 오공에게 그런 성장을 겪게 만들어 준 요괴 소녀.

 

물론 오공이 성장한다는 것은 삼장에게 있어서 기쁜 일임에 틀림없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채로 남아 있으면 곤란한 것은 오히려 삼장이니까. 그러나 삼장은 자신이 없을 때 오공이 성장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가 곁에 있을 때, 오공이 성장하기를 바랬다. 그가 언제나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서 성장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까마귀."

 

 

삼장은 다시 한 번 오곡을 욕했다. 그 빌어먹을 까마귀만 없었더라도 삼장은 오공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오공이 겪는 성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성장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공이 성장을 겪은 것은 결정적으로 삼장과 떨어졌던 것이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성장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삼장은 감히 누군가가 오공에게 키스를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서야 삼장은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깨달았다. 입에서 자조적인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그 놈의 빌어먹을 키스 말이지.

 

사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화가 난 것은 오공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가 오공에게 키스를 한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외면하고 싶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은 그저 아이의 성장을 보지 못한 부모의 심정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정당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삼장은 속으로 잠시 키득거렸다. 그리고 인정했다. 자신은 이 바보 원숭이를 좋아한다. 먹보에, 천방지축에, 날뛰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오공을 좋아한다. 이렇게 심장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걸 보니 인정하지 않을래야 없었다.

 

 

"삼장...왜 그래? 어디 아파? 아까부터 이상해! 얼굴 찡그렸다가, 욕했다가....배고파?"

 

 

이름을 불러놓고는 가만히 있는 삼장이 이상했던지 오공이 말을 걸어왔다. 그제서야 삼장은 상념에서 벗어나 오공을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로 삼장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왔다. 그는 저렇게 조그마한 녀석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태평하다. 그래, 반한게 죄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삼장은 한숨을 쉬며 오공을 보았다. 그리고 이름을 불렀다.

 

 

"오공."

 

"응? 왜 그러…읍!"

 

 

오공의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성큼성큼 오공의 앞으로 다가간 삼장이 오공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맞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삼장은 오공의 입술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오공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오공은 살짝 얼이 빠져 있었다. 그 모습에 삼장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소독, 그리고 잘 먹었다."

 

 

멍한 오공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소독이자 선전포고였다.

 

 

 

 

 

 

 

 

 

  

 

 

 

 

 

 

 

03.각성

 

 

 

전율이 흘렀다. 침묵으로 가득찬 연기 속에서 드러난 모습은 오공이었다. 그러나 오공이면서, 오공과는 달랐다. 평소에 짓는 장난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감정이 절제된 표정, 따뜻함이 아닌 냉막함으로 뒤덮힌 금안, 그리고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과 요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뾰족한 귀는 오공과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 제천대성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분명히 오공은 요력제어장치를 쓰고 있는데…왜 제천대성의 모습이…!"

 

 

오정이 넋을 놓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정의 말에 대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장도, 팔계도 놀란 얼굴로 오공을 응시하느라 정신없는 얼굴이었다. 놀라움과 당황을 내표하고 있는 일행과는 상반되게, 오공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새하얀 연기로부터 느긋하게 걸어나왔다. 오만함이 묻어나는 그의 행동은 오공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정점에 서 있는 절대자의 모습이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지?"

 

 

일행의 앞으로 다가온 오공, 아니 제천대성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경악으로 뒤덮인 반응에 제천대성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런 반응밖에는 없는 건가? 재미없게!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말이지. 왜 그러는 거야, 모두들? 다들 '그 녀석'의 모습일 때는 잘도 말을 걸었잖아? 왜 다들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

 

"…당신은, 오공이 맞습니까?"

 

 

오랜 침묵을 깨고 팔계가 물었다. 그제서야 제천대성은 생각났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그 행동이,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아!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가? 그렇군, 아직 자기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제멋대로 떠들었네? 미안!"

 

 

고개를 끄덕거리던 제천대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천대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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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2012년에 썼던 최유기 삼장오공 조각글.

삼공 영원하라!

 

 

 

 

 

 

[노블레스/프랑라이] 회상

W.B - 츠쿠리

 

 

 

 

 

 

아프다. 온 몸의 신경들이 저릿거리면서 통증을 호소한다. 라이제르는 붉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블러드 필드를 한 번 사용한 것만 해도 몸이 견디지 못하는데 봉인까지 풀었으니 당분간은 이 통증을 감안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인을 푼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노블레스와 로드는 한 쌍을 이루는 존재. 로드가 자신의 구실을 하지 못하면 노블레스의 힘 또한 완벽해지지 못한다. 그래,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서서히 의식이 사라져간다. 조금이라도 성지에 들어가 쉬는게 어떻겠냐는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의 말이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다. 물론 성지에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순간의 안식이 아닌,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될 지도 몰랐다. 쇠잔해진 몸이 영원의 안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약간의 안식을 취하려고 해도 시간의 압박이 그를 죄여왔다. 그래서 그는 결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영원한 잠을 자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에 끝까지 성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무엇보다 그가 영문 모를 820년이란 시간 동안 긴 안식을 가졌을 때, 그를 찾아 전 지역을 힘들게 헤맸을 프랑켄슈타인에게 다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결코 성지에서 잠들 수 없는 처지였다. 하긴 지금도 걱정을 끼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씁쓸하게 읊조린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프랑켄슈타인이 다시 걱정을 하기 전까지 의식이 돌아와야할텐데. 라이제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의식을 놓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 프랑켄슈타인의 걱정스러운 푸른 눈동자가 보인 것 같았다.

 

 

 

 

 

 

 

 

 

 

 

 

◈ ◈ ◈

 

 

 

 

 

 

 

쿠웅!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땅이 움푹 패이고 질식할만큼 매캐한 연기가 폐를 압박해왔다. 프랑켄슈타인은 콜록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미지의 것을 연구하는 자로서 노블레스의 영토인 루케도니아에 들어가 호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루케도니아는 그의 부족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그는 정상에 군립하는 존재였으나 이곳에서는 고작 두 명만으로도 자신을 충분히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건가."

 

 

프랑켄슈타인 못지 않게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금발의 남자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금발머리 남자의 뒤를 이어 은발을 가진 중년의 남자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도주 범위를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다. 케르티아가의 가주와 란데그르가의 가주라고 했던가. 두 남자 또한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상대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지라 수적으로는 열세임이 분명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은 혀를 차며 다크 스피어를 강하게 쥐었다. 상처입은 몸이 욱신거렸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에서 감도는 비장한 기색을 읽었는지 두 남자 또한 소울 웨폰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아직도 우리를 상대할 생각인가. 그만 포기하고 순순히 잡혀주는 게 네 몸에도 이로울텐데? 로드의 생포하라는 명령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너를 좀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성한 루케도니아에 침입하여 중앙 기사단을 욕보이고 아름다운 대지를 심하게 손상시킨 죄는 죽어 마땅하나 로드의 앞에 가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쎄……."

 

 

그냥 '항복을 해라' 라고 간단히 말하면 될텐데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겉멋만 들었군. 프랑켄슈타인은 속으로 비웃으며 대답을 느릿하게 끌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체내에 산소가 공급이되자 프랑켄슈타인은 입을 열었다.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린 채였다.

 

 

"미안하게도 말이지, 우리 과학자란 생명체는 속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존재거든. 아, 너희처럼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말을 길게 끄는 취미는 없으니 간단하게 말하지. 거절한다."

 

 

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우리는 네 반응에 대해 합당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달려들었다. 다시 한 번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헉헉…!"

 

프랑켄슈타인은 곁눈질로 뒤를 살피며 끊임없이 달렸다. 끈질기게 따라오던 두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몸을 숨기는데 급급해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숲으로 들어왔지만 어쩐지 이 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두 남자의 기색이 사라졌던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상처 입고 도망치던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두 남자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흔치 않을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추격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프랑켄슈타인은 달리는 것을 멈추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새소리나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문득 프랑켄슈타인은 예전에 심심풀이로 읽었던 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무서운 괴물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저주받은 숲에 한 소녀가 찾아가 괴물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준다는, 뭐 그런 시시한 내용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피식 웃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린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아무리 현재 처한 상황과 소설 속의 배경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럴리가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품격을 중시여기는 노블레스들이 괴물 따위를 그들의 땅에 방치해둘리가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걸음을 옮겼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이 숲이 수상쩍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괴물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프랑켄슈타인에게는 휴식이 절실했다. 그러나 추격자들이 없다는 안심 때문일까. 걷는 속도는 아까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게다가 슬슬 한계가 닥쳐오는 것인지 시야가 흐릿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프랑켄슈타인은 몽롱한 시야를 애써 바로잡기 위해 고개를 여러 번 흔들었지만 소용 없었다. 이제는 발마저 꼬여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가 걸어가는 길이 붉은 핏자국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힘의 부작용이 이제서야 오는 건가. 프랑켄슈타인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버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숲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두 남자가 이 숲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짐작은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적어도 쫓기는 신세보다는 나을 테지. 조금이라도 견뎌서 어떻게든 내일 아침까지는 몸을 지탱해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자. 프랑켄슈타인은 마음을 다지며 애써 발을 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동안의 결심이었을 뿐이다. 결국 한계가 그를 덮쳐왔다. 프랑켄슈타인은 상처 부위를 움켜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스라이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풋풋한 풀내음이 코를 찔러왔다. 여기까지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지금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직감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벽돌이라도 얹어놓은 것 같은 무거운 눈꺼풀이 그에게 눈을 감으라며 유혹했다. 그 유혹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켄슈타인은 곁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왠지 그의 의식의 끝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프랑켄슈타인은 깊은 수마에 몸을 맡겼다.

 

 

 

 

 

 

 

 

 

향긋한 라벤더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프랑켄슈타인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감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따가운 불빛이 그의 시야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머리를 울리는 두통에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의식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기억을 생각해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와주지 않았다. 프랑켄슈타인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상처부위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우아한 미술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을 채우고 있는 모든 물건들이 인간 세계에 내놓으면 평생을 부귀를 누려도 남을 만큼 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화려한 물건들을 보고 프랑켄슈타인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은 '차갑다'는 것이었다.이 화려한 물건들에서는 그 어떠한 애정이나 온기, 심지어 사용한 흔적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귀하게 모아놓은 장신구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채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건가."

 

 

프랑켄슈타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단순히 한 남자가 서 있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를 압도하는 것 같은, 흡사 신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가 그 곳에 있었다.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프랑켄슈타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은빛의 십자가가 남자의 귓가에서 흔들리며 샹들리에의 영롱한 불빛을 반사시켰다. 남자는 불과 한 뼘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두고 멈춰섰다. 남자의 홍옥처럼 붉은 눈이 프랑켄슈타인을 흩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순간적으로 고고한 야수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오만했으며 그 오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기품 있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프랑켄슈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동안'을 겪는 내내 프랑켄슈타인은 전신을 지배하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상황이 그에게 닥쳐올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이곳에서 도망 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는 것과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가 만난 노블레스들 중에서도 그 높이를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이 그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 열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마침내 남자가 입이 열렸다.

 

 

"…혹시 붕대를 감을 줄 아는가?"

 

 

그토록 깨지길 바라던 침묵이 깨지던 순간,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멍하니 되물었다.

 

 

"…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 때 남자의 얼굴은 마치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아 보였다.  

 

 

 

 

 

 

 

 

 

 

남자는 말이 짧았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용케도 그 짧은 말을 토대로 남자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재구성 해낼 수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자는 아마 '나는 붕대를 감을 줄 몰라, 미안.'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프랑켄슈타인은 다친 자신의 몸에 약만 발라져있을 뿐, 지혈을 위한 붕대가 감겨져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붕대 대신 담요로 보이는 천이 자신의 몸에 둘둘 감겨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 먼지투성이의 천을 담요로 알아본 것이 용했다. 아무리 담요를 수백 장 감겨놓으면 뭐하나. 지혈이 될 리가 만무한데. 프랑켄슈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체력이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른 인간들이었으면 지혈이 되지 않은 순간 과다출혈로 죽었다.

 

아니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다치면 붕대도 안감나? 이런 의문점은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켄슈타인은 깨달았다. 귀족들이 이상한게 아니라 이 남자한테 뭘 기대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도 그럴 것이 프랑켄슈타인이 누워있는 침대 주변에는 이미 감으려고 시도하다가 너덜너덜해진 붕대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붕대를 감아주려다가 실패를 거듭했으면 부상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붕대를 감을 줄 아냐고 물어보았겠는가. 게다가 차를 끓이려다가 실패한 모양인지 곳곳에 물기와 엎질러진 찻잎들이 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귀족 중에서도 정말 손 한 번 까딱 안 해본 귀하신 몸이구나. 그리고 그 추측은 안타깝게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는 최악의 간병인에게 주워지게 된 셈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가 건네준 붕대를 받아 말 없이 팔과 복부에 감았다. 다행히 이미 약이 발라져 있어서인지 피는 멈춘 상태였다.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은 한동안 무리겠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기적에 가까웠다. 사실 숲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밤에 숲에 머무른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숲의 새벽은 평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그곳을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머물렀다면 아마 프랑켄슈타인은 지금쯤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못했을지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남자는 프랑켄슈타인의 옆에 앉아 그가 붕대를 감는 걸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남자에게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의 눈은 건조했으며 얼굴에는 일체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왠지 모르게 남자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무표정했고, 무감각했고, 무감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풍겨져나오는 옅은 빛깔의 감정을 프랑켄슈타인은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애초에 감정이란 것이 없다면 왜 그토록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쓰고, 차를 끓여다 주려고 애쓰고, 약을 찾아주려고 애썼겠는가. 물론 노력이라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최소한의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처음 대면하는,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성스러운 땅의 '침입자'에 대해서 말이다.

 

침입자라, 씁쓸하게 웃던 프랑켄슈타인은 문득, 아직도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처음 만난 사이인데 자기소개를 미처 하지 못했다. 남자 또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상황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생각만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통제를 벗어난 입 때문에 프랑켄슈타인도 당황했지만 남자 또한 놀란 모양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보일 테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어쩐지 그에게서 놀랐다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름을 물은 것이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이었던가? 남자의 눈에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자 프랑켄슈타인은 저도 모르게 귀족들에게는 이름을 묻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름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남자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다."

 

"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은 것은…, 처음…이다."

 

"……."

 

 

프랑켄슈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프랑켄슈타인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내게 이름을 물어오지 않았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이란 어떻게보면 태어날 때부터 듣고 자라는 이름이니까.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내 이름을 모르는 자에게 미리 말해주곤 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이름을 누군가가 알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당돌하기 짝이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말에 남자는 아까보다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아마 평생동안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남자는 귀족 중에서도 높은, 어쩌면 그들을 지배하는 로드와 거의 비슷한 지위를 가진 것 같았다. 어제 만난 가주와는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랐을 뿐더러, 품격을 중요시하는 귀족이 이름과 정체를 모두 알고 있으며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라면 결코 보통 귀족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존재이건 프랑켄슈타인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노블레스가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었다. 그에게 남자는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귀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에게서 또 다른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놀라움, 망설임 그리고, 기대. 남자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무겁게 닫혀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프랑켄슈타인은 어쩐지 남자가 조금 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카디스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다."

 

"좋은 이름이네요, 라이제르. 처음 인사드립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끝에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남자의 손은 차가웠으나 따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에게 이토록 관심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인간들에게는 동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으면서 왜 이 남자, 라이제르에게는 이토록 여러 감정이 드는 걸까.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 느끼는 이 감정, 사람들은 이 감정을 호감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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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작성했던 프랑라이 글. 옮겨적으면서 수정하는데 비문에 오타가 너무 많아서 지쳐 죽는 줄;;

원래는 노블레스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라이의 만남이 나오기 전에 제멋대로 상상해서 적은 연성이었는데

이후 진짜 만남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뒷편이 생략되었습니다.

 

프랑라이 좋아하긴 하는데 라이제르는 너무 다루기가 어려워요 ㅠㅠ

 

 

 

 

 

 

 

[루피총수/해군루피] 설정글

W.B - 츠쿠리

 

 

 

 

 

01.

 

 

몽키 D 루피.

현재 해군의 대령이자 '영웅'으로 잘 알려진 거프 중장의 친손자.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으며 아버지는 현재 혁명군의 우두머리인 몽키 D 드래곤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밀짚모자 팀과 몇몇 친한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지령을 전달받고 명령을 수행하거나, 특정 거점에 거주하며 바다를 지키는 다른 해군들과는 달리, 몽키 D 루피는 소수 정예팀이자 그의 휘하 아래 독자적으로 소속되어있는 '밀짚모자'를 이끌며 전 바다를 대상으로 해적들을 소탕한다. 사실 몽키 D 루피는 어릴 때 '사황' 중 한 명인 샹크스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관계로 줄곧 해적이 되고 싶어했지만(그의 눈가 밑에 있는 흉터는 어릴 적 샹크스를 따라 바다로 가겠다며 조르던 흔적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뒤로 고꾸라지다시피한 할아버지 거프의 거센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해군이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해적에 대해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적을 소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에 안들면 즉, 그의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면 해군이던 해적이던 소속 여부에 상관없이 쳐부순다는 것이 정확하다.  

 

 

 

02.

 

 

현재 몽키 D 루피의 직위는 대령이지만 그의 이름은 대장인 아오키지 못지 않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뛰어난 싸움 실력 때문이며 둘째는 그의 놀랄 만한 인맥 때문이다. 그의 인맥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몽키 D 루피의 정의는 아까 말했다시피 해군이던 해적이던 그의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면 무조건 박살을 내는 것이다. 몽키 D 루피의 인맥은 이러한 그의 정의와 여러모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우선 그의 독자적 지휘 하에 있는 '밀짚모자'를 살펴보도록 하자. 다른 해군들의 경우 같은 직급이 아니면 깍듯하게 대하는 계급체제인 것과는 달리, '밀짚모자'는 동등한 동료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밀짚모자'는 계급에 상관없이 단순히 배에서 담당하고 있는 포지션에 따라 호칭을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데 몽키 D 루피의 경우 대령보다는 '선장' 또는 이름으로 불리기 좋아한다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몽키 D 루피는 그의 '동료'들을 모두 직접 선발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는데 놀랍게도 모두 해군 시험을 거치지 않고 몽키 D 루피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물론 이에 대해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몽키 D 루피에게는 일종의 면책권이 부여되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하단 참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몽키 D 루피의 동료들은 대부분 몽키 D 루피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며 몽키 D 루피는 그들을 동료로 맞아들이기 위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스트 블루에서 해적사냥꾼이었던 조로를 첫번째 동료이자 전투원으로 선택했고 놀랍게도 그를 구하기 위해 같은 해군인 모건을 쓰러뜨렸다. 또한 다른 동료이자 각각 저격수, 항해사, 요리사, 선의, 고고학자, 조선공, 음악가인 우솝, 나미, 상디, 쵸파, 로빈, 프랑키, 브룩를 위해 악명 높았던 클래하들, 어인 해적단의 아론, 돈 클리크, 와포루, 크로커다일, CP9, 겟코 모리아 등 여러 해적들과 해군을 쓰러뜨렸다.

 

워낙 악명이 높았던 해적들은 당연하다고 쳐도, 최근에 일어난 에니에스 로비 점령과 CP9를 무너뜨린 사건은 해적뿐만이 아니라 해군까지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거프 중장의 손자이자 혁혁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몽키 D 루피라 해도 정부 소속인 스팬담 장관과 CP9를 무너뜨린 일 그리고 수배자에 위험인물인 니코 로빈을 동료로 오랫동안 숨겨온 사실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이 위험인물 판정을 받은 프랑키까지 동료로 맞아들이자 해군 내에서 그러한 여론은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몽키 D 루피 대령은 워낙 자유롭게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인지라 해군의 소환 명령장은 전달되기는 커녕 묵살되기 일쑤였다. 거기다 에니에스 로비 사건 직후 CP9의 악행과 스팬담 장관의 악행을 직접 신문에 제보한데다가-사실 항해사 나미의 작전 하에 까발려진 것이었다-계속 이럴 거면 해군을 관두고 해적으로 나가버리겠다는 그의 선언에 이어 루피의 의형제 사이인 포트거스 D 에이스와 그의 지인으로 알려진 해적의 초신성, 유스타드 키드, 트라팔가 로우 등이 이 참에 해군 따위는 관두고 해적이 되자는 격렬한 러브콜을 보내자, 해군 정부는 일단 니코 로빈과 프랑키의 신변을 루피 대령에게 양도한 상태다.

 

아마 최근 그가 드래곤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몽키 D 루피가 해적이 되었을 때 해군에 미치게 될 파장을 우려한 듯 싶다. 또한 몽키 D 루피의 명성과 공적,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며 '영웅' 거프의 손자라는 사실 또한 일종의 면책권으로서 작용한 듯하다. 사실 그가 해군임에도 일정한 거점 없이 바다를 자유롭게 왕복하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특혜나 다름없다. 일각에서는 몽키 D 루피가 일종의 자정작용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계급과 관련없이 그가 해군과 칠무해를 쓰러뜨려도 해군에서 별 다른 질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몽키 D 루피가 응징을 가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일반인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부패한 해군이라는 점이다. 정의를 중요시하는 해군인만큼 이와 관련해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르자 차마 몽키 D 루피를 처벌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튼 우여곡절 끝에 로빈과 프랑키를 정식 동료로서 받아들인 몽키 D 루피는 최근 칠무해 중 하나인 겟코 모리아를 쓰러뜨리고 그의 화려한 악행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더불어 음악가인 해골 브룩을 새로운 동료로서 받아들였다.

 

 

 

 

03.

 

 

몽키 D 루피는 특정 거점도,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바다를 돌아다니며 해적들을 소탕하기로 유명하다. 예를 들자면 약 세 달 동안 온 바다를 아무런 연락없이 떠돌아다녀 사람의 애간장을 다 태워놓고는 느닷없이 돌아와 잡은 해적들을 툭 던져놓기 일쑤이거나 아니면 잡은 해적들을 근처에 있는 해군기지에 던져놓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존신고만 알리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식재료는 대부분 현지에서 직접 조달해 요리하고, 생필품이나 필요 물품들은 미리 대량 구매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육지보다는 바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그렇게 온 바다를 헤메고 다녀서일까. 몽키 D 루피의 인맥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상당히 의외의 혹은 엄청난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 많다. 위의 글에서는 그의 동료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동료 외 몽키 D 루피의 인맥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몽키 D 루피는 외동아들로 알려져있지만 흰수염 해적단의 제 2번대 대장인 포트거스 D 에이스와는 친형제나 다름 없는 의형제 사이이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며 인연을 맺은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에이스를 만나러 흰수염 해적단에 들락날락거린 덕분에 흰수염 해적단 일원들과도 가릴 것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또한 사황 중 한 명인 붉은 머리 샹크스와는 위에서 말했듯 어릴 적 특별한 인연으로 얽혀 있어 에이스 못지 않은 친분을 자랑한다. 어린 시절의 인연뿐만 아니라, 몽키 D 루피의 동료인 우솝의 부친이 현재 샹크스의 해적단에 속해 있는데 이 또한 각별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사람들은 종종 외딴 섬에서 밀짚모자 일당과 샹크스의 해적단이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부어라 마셔라를 연창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해적들과 두루 연관이 있어서인지 몽키 D 루피는 이들의 영향을 두루 받아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장했다. 만약 할아버지인 거프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몽키 D 루피는 벌써 해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인맥에 어린시절의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몽키 D 루피의 인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에 탁월한데, 초반에 밀짚모자 일당을 해적으로 오인하고 검거하려고 했던 스모커 대령과도 티격태격하며 돈독한 정을 자랑하는 사이이며 거프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대면해온 센고쿠 원수와 아오키지 대장과도 종종 티타임을 가지는 것을 보아 친분이 꽤 두터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장 놀라운 인맥은 사납고 제멋대로이기로 유명한 칠무해와의 사이다. 도도하기로 소문난 해적 여제, 행콕은 루피 대령의 열렬한 추종자로 알려져 있으며, 어인 해적단을 이끌었던 징베와는 술자리도 함께 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또한 바로크 워크스의 사장이었던 크로커다일은 몽키 D 루피에게 한 번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몽키 D 루피 또한 주먹을 나눈 이후 미운 정이라도 생긴 건지 종종 크로커다일의 얼굴을 마주보며 티타임을 가진다고 한다.

 

이 정도라도 어디에서 꿀리지 않을 인맥이건만, 최근 여기에 해적들의 초신성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드 키드도 한 몫을 더했다.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드 키드는 우연히 몽키 D 루피와 샤봉디 제도에서 만나 한 차례 소개를 한 뒤, 곧바로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이를 알게 된 거프 중장이 격노했지만 몽키 D 루피는 체포는 커녕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연령대가 비교적 비슷해서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들어 몽키 D 루피에게 해적으로 전향하라며 꼬시느라 정신이 없다고 전해져 해군본부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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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루피 너무 좋아서 써버린 설정글.

원피스 패러렐 중 가장 좋아하는 설정인데 밀짚모자 일당+자유주의 루피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서 억지로 설정을 우겨넣은(...)

실제로 해군이 저렇게 관대할 리가 없겠죠 하하.

 

루피가 하얀 정장 입고 해적왕 되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못하게 한다며 에이스에게 하소연 하는 걸 보고 싶어요.

밀짚모자 일당이 직장상사 돌보랴, 주위 날파리로부터 루피 지키랴 바쁜 모습도 좀 보고 싶고 ㅋㅋㅋㅋㅋㅋ

 

누가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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